1. 개요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페도티(Andrés Rodríguez Pedotti스페인어, 1923년 6월 19일 ~ 1997년 4월 21일)는 파라과이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89년 2월 3일부터 1993년 8월 15일까지 파라과이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1989년 2월 2일부터 3일에 걸쳐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주도하며 파라과이 민주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파라과이는 억압적인 조치들을 폐지하고 민주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며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 정권과의 오랜 협력 관계와 재임 이전의 부 축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2. 생애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페도티의 생애는 파라과이의 정치적 격동기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와의 관계를 통해 그의 권력 기반과 후에 파라과이의 민주화 이행에 미친 영향이 형성되었다.
2.1. 출생 및 초기 배경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페도티는 1923년 6월 19일 보르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배경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일찍이 군인의 길을 걸으며 파라과이의 군사 엘리트 계층에 속하게 되었다.
2.2. 군 경력 및 권력 기반
로드리게스는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으로 35년간 활동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로드리게스의 딸이 스트로에스네르의 장남과 결혼할 정도로 긴밀했다. 스트로에스네르 통치 아래에서 로드리게스는 파라과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월 500 USD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 최대 양조장, 환전소 체인, 수출입 회사, 구리선 회사, 그리고 여러 목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막대한 부는 그의 군 경력과 스트로에스네르 정권 내에서의 높은 지위를 바탕으로 축적된 것으로, 이는 그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1989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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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쿠데타는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30여 년에 걸친 독재를 종식시키고 파라과이의 민주화 이행을 시작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로드리게스와 스트로에스네르 사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로드리게스는 오랫동안 집권해온 콜로라도당 내의 '전통주의자'들과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트로에스네르의 통치를 지지해왔지만, 보다 인간적인 통치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스트로에스네르가 여러 장군들을 해임하고 자신에게 전적으로 충성한다고 여겨지는 인물들로 대체하면서 상황은 극에 달했다. 같은 달 후반에는 로드리게스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조치로, 스트로에스네르가 전국의 모든 환전소를 폐쇄했다. 2월 2일, 스트로에스네르는 그의 옛 동맹을 소환하여 국방부 장관직을 수락하거나 은퇴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강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드리게스는 재회(그리고 쿠데타 계획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를 피하기 위해 다리 부상을 위장하고 가짜 깁스를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로드리게스는 2월 2일 밤 쿠데타를 일으키며 자신의 답변을 했다. 반군 병력과 탱크들은 아순시온에 있는 대통령 경호대 본부를 포위했고, 스트로에스네르는 이곳에 피신해 있었다. 이 쿠데타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냉전 시대에 스트로에스네르를 더 이상 동맹으로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지에 힘입어 쿠데타는 빠르게 성공했으며, 적대 행위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스트로에스네르는 사임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의 체포 과정에서 양측에서 약 500명의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며칠 후 풀려나 망명길에 올랐고, 결국 브라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몇 주 후, 전 내무부 장관 에드가르 인스프란은 로드리게스가 1988년 12월 말부터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인스프란은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의 가장 억압적인 시기에 내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로드리게스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이제는 보다 인간적인 통치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4. 대통령 재임
쿠데타 이후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페도티는 파라과이의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과거의 독재적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 파라과이에는 부통령직이 없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사임하거나 영구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될 경우, 의회와 국무회의는 24시간 이내에 임시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다. 이에 따라 의회와 국무회의는 쿠데타 직후 회의를 열어 로드리게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4.1. 민주화 이행 및 개혁
취임 후 로드리게스는 스트로에스네르의 가장 억압적인 조치들 대부분을 취소했다. 이는 그가 스트로에스네르와 이전까지 매우 가까웠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사형을 폐지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 일부 주요 스트로에스네르 정부 구성원들을 투옥하려 시도했다. 그는 스트로에스네르 통치 기간 내내 사실상 유지되어 왔던 계엄령을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계엄령은 명목상 1987년에 폐지되었지만, 그 내용은 가혹한 안보법과 언론 자유에 대한 엄격한 제한(야당 지도자들의 체포, 1988년 선거에서 콜로라도당만이 방해받지 않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던 상황 등)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여러 망명자들을 환영했다.
이어진 한 주 동안 군대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충성파들로부터 숙청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6개 육군 사단의 지휘관들이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승진되었다. 임시 대통령으로서 로드리게스는 1967년 헌법의 조항에 따라 2월 9일 하원을 해산했다. 이 조항은 대통령이 입법부가 헌법적 삼권분립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고 판단할 경우 의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5월에 새 선거를 실시한다는 법령을 발표하고, 모든 비공산당의 경쟁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이것을 과격파들을 숙청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 이는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특히 스트로에스네르 통치 기간 동안 야당이 거의 용인되지 않았던 국가에서 놀라운 변화였다. 실제로 쿠데타 당시 파라과이는 전체 역사상 단 2년 동안만 다당제를 경험했다. 대통령 선거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잔여 임기를 위한 것이었으며, 의회 선거와 같은 날 치러졌다. 헌법은 대통령이 임기 2년 이내에 사임할 경우 90일 이내에 새 선거를 치르도록 요구했으며, 당선자는 잔여 임기를 수행하도록 했다. 로드리게스는 콜로라도당 후보로 출마하여 7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파라과이에서 가장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가까운 것이었다.
스트로에스네르가 축출된 직후, 로드리게스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들로부터 파라과이가 중화민국 (대만)과의 오랜 외교 관계를 끝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로드리게스는 대만 대사 왕성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대만의 개발 원조와 시장 접근을 확보하는 것이 파라과이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4.2. 헌법 개정 및 통치 마감
1992년 6월 20일, 파라과이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다. 이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단일 5년으로 제한하고 재선 가능성을 없앴다. 재선 금지 조항은 로드리게스가 완전한 임기를 위해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급 적용되었다. 로드리게스는 이 조항을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 부족의 증거로 간주하며 취임식을 보이콧했다. 쿠데타에 대한 우려는 그가 6월 22일 새 헌법에 서명하여 법제화하면서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는 1993년 8월 15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으로 퇴임한 파라과이 대통령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와스모시 또한 로드리게스와 마찬가지로 콜로라도당 소속이었다.
5. 사망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페도티는 1997년 뉴욕에서 오랜 암 투병 끝에 4월 21일 사망했다.
6. 평가 및 유산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페도티의 생애와 활동은 파라과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유산은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6.1. 긍정적 평가
로드리게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30여 년간 이어진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잔혹한 독재를 종식시켰다는 점이다. 그가 주도한 1989년 쿠데타는 파라과이의 민주화 이행을 위한 결정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취임 후 사형 폐지, 정치범 석방, 언론 자유 확대, 그리고 망명자 귀국 허용 등 억압적인 조치들을 신속히 폐지하며 인권 상황을 개선했다. 또한, 그는 모든 비공산당의 선거 참여를 허용하고, 당시까지 파라과이에서 가장 자유롭고 공정한 것으로 평가받는 선거를 통해 정권 이양을 하며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새로운 헌법 제정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명문화하고, 자신이 재선 금지 조항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한 것은 파라과이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선례로 평가된다.
6.2. 비판 및 논란
로드리게스의 생애는 상당한 비판과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그는 스트로에스네르의 극우 군사독재 정권에서 오랜 기간 동안 핵심 부역자였으며, 독재 치하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월 500 USD의 공식 급여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대 양조장, 환전소, 수출입 회사, 구리선 회사, 목장 등을 소유하며 부를 쌓은 것은 그의 부패 의혹을 증폭시켰다. 일부에서는 그가 스트로에스네르와 마찬가지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파라과이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비록 그의 집권기에 여러 민주적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권력 기반이 과거 독재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점과 그의 통치 방식에 권위주의적 요소가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