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배경
아우구스테 빌헬미나 루이제는 1797년 7월 25일 헤센의 오펜바흐암마인에 위치한 럼펜하임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공자와 나사우우징엔의 카롤리네 공녀의 셋째 딸이었다. 그녀의 할머니인 영국의 메리 공주는 조지 2세의 딸이었으므로, 아우구스테는 아버지 쪽으로 조지 2세의 증손녀가 된다. 아우구스테의 친할아버지인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의 방백(Landgrave) 칭호는 공작(Duke)과 동등한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그녀는 종종 공손녀(Grand Princess)로 불리기도 했다.
1803년, 아우구스테의 아버지의 형이자 삼촌인 헤센카셀 방백의 칭호가 헤센 선제후로 격상되면서, 헤센 왕조의 카셀 가문 전체의 지위가 한 단계 상승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아우구스테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왕실 가문의 일원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2. 결혼
1818년 5월 7일 카셀에서 첫 결혼식이 거행된 후, 6월 1일 버킹엄 궁전에서 다시 결혼식이 치러졌다. 아우구스테는 20세의 나이로 그녀보다 24세 연상인 44세의 사촌 오빠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아우구스테는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3.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으로서의 삶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이 된 아우구스테는 1818년부터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여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왕관이 분리될 때까지 하노버에서 거주했다. 이 시기 그녀의 남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는 그의 형인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를 대신하여 하노버의 부왕(Vicereine)으로 복무했다. 하노버는 1813년 프랑스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영국과의 동군연합이 복구된 상태였다.
하노버에서의 생활 중, 1827년 아우구스테는 브레메르푀르데 남쪽의 습지 개간 및 식민지화 과정에서 1827년 5월 3일에 새로 설립될 마을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해 6월 19일, 하노버 스타데(Stade)의 고위 관리 사무실은 주민들에게 그녀가 마을 이름으로 '아우구스텐도르프'(Augustendorf)를 승인했음을 알렸다. 이 마을은 1974년부터 그나렌부르크의 구성 지역이 되었다.
1837년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이 해체된 후, 케임브리지 공작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처음에 큐의 케임브리지 코티지에서 거주했으며, 이후에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공적 활동에 참여하며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4. 자녀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와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아우구스테 사이에는 1남 2녀의 세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 1819년 3월 26일 | 1904년 3월 17일 | 1847년 새라 루이자 페어브라더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왕실결혼법에 위배되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자녀를 두었다. 1850년 7월 8일 아버지의 공작위를 계승했다. |
케임브리지의 아우구스타 공녀 | 1822년 7월 19일 | 1916년 12월 4일 | 1843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결혼 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세습 대공비가 되었고, 1860년 9월 6일에는 대공비 칭호를 얻었다. |
케임브리지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 | 1833년 11월 27일 | 1897년 10월 27일 | 1866년 테크 공작 프랜시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그녀의 딸 중 한 명인 테크의 메리는 훗날 영국의 조지 5세의 왕비가 되었다. |
5. 사망과 장례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아우구스테는 1889년 4월 6일, 91세의 나이로 큐 그린에 있는 자신들의 거주지 케임브리지 코티지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남편보다 39년을 더 살았다. 그녀의 사망 소식에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슬프지만, 그녀를 위한 슬픔은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 세대의 마지막이었고, 이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기록하며 애도를 표했다.
아우구스테는 처음에는 큐의 성 앤 교회에 묻혔다. 그러나 1930년 1월 10일, 그녀의 유해는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으로 이장되어 안치되었다.
6. 칭호와 호칭
아우구스테 공녀는 생애 동안 다음과 같은 공식 칭호와 호칭을 사용했다.
- 1797년 7월 25일 - 1818년 5월 7일: 전하 헤센 공녀 아우구스테 빌헬미나 루이제
- 1818년 5월 7일 - 1889년 4월 6일: 전하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 1818년 6월 1일 - 1889년 4월 6일: 전하 티퍼레리 백작부인 (이는 케임브리지 공작의 부수적인 칭호에 따른 것이었다.)
7. 가계
헤센카셀 공녀 아우구스테의 조상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아버지는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공자이고, 어머니는 나사우우징엔의 카롤리네 공녀이다.
친조부모는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와 영국의 메리 공주이다. 외조부모는 나사우우징엔 공 카를 빌헬름과 라이닝엔다그스부르크의 카롤리네 펠리치타스 백작부인이다.
특히, 아우구스테의 친할머니인 영국의 메리 공주는 조지 2세의 딸이었으므로, 그녀는 영국의 왕실과도 깊은 혈통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 2세의 배우자는 안스바흐의 카롤리네였다. 이처럼 아우구스테는 독일의 여러 귀족 가문과 영국의 왕실 혈통을 모두 잇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