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Arthur Friedenreich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포르투갈어, 1892년 7월 18일 ~ 1969년 9월 6일)는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로, 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호랑이'를 의미하는 El Tigre엘 티그레스페인어 또는 '검은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혼혈 출신으로서 축구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기여했으며, 상파울루 주 리그에서 아홉 차례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통산 득점 수는 1,329골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기록 보존의 미비함과 아마추어 리그 기록 포함 여부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프리덴라이히의 삶은 브라질 축구의 황금기를 열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축구계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에 맞서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선수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본 문서는 그의 생애, 선수 경력, 인종차별 경험, 그리고 브라질 축구사에 남긴 유산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룬다.
2. 생애와 배경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혼혈인으로서 당시 백인이 지배하던 축구계에서 많은 장벽과 인종차별을 겪었다.
2.1. 탄생과 가족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1892년 7월 18일 상파울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라질로 이민 온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프리덴라이히였고,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세탁부이자 해방된 노예의 딸인 마틸드였다. 그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혈통의 첫 프로 축구 선수였다. 프리덴라이히는 후에 요나스와 결혼하여 아버지를 기리는 이름인 오스카라는 아들을 두었다.
2.2. 유년기와 초기 축구
프리덴라이히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그가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10년부터 상파울루의 여러 클럽에서 뛰었으며, 독일 이민자들로 구성된 SC 제르마니아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3. 선수 경력
프리덴덴라이히는 '조고 보니토' 스타일의 선구자이자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맹활약하며 브라질 축구의 초석을 다진 선수이다.
3.1. 플레이 스타일
프리덴라이히는 흔히 브라질 축구의 대명사인 Jogo Bonito아름다운 경기포르투갈어 스타일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짧은 패스와 빠른 터치, 그리고 조합 플레이를 통해 경기를 매우 빠르게 진행하는 것을 포함했다. 또한 그는 많은 장거리 슛과 2~3명의 빠른 스트라이커를 활용하여 상대 수비를 혼란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다. 키가 1.7 m로 작은 편이었으나, 뛰어난 드리블, 속도, 그리고 파워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는 슈팅 시 공의 궤적을 조절하고 몸의 움직임을 활용하여 상대 수비수를 속이는 기술을 개발한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기술적인 역량과 더불어 완벽한 볼 컨트롤은 그를 '맹렬한 호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만들었다. 그의 뛰어난 기량은 브라질 축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선수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3.2. 클럽 경력
프리덴라이히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클럽을 거쳤으며, 특히 CA 파울리스타누와 상파울루 FC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3.2.1. 주요 클럽 활동 및 성과

1909년 SC 제르마니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프리덴라이히는 이후 CA 이피랑가, AA 매켄지 칼리지 등 상파울루의 여러 클럽을 거쳤다. 1912년에는 매켄지 칼리지 소속으로 상파울루 주 리그에서 16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1917년에 CA 파울리스타누에 정착한 그는 이 클럽에서 12년간 활약하며 전성기를 보냈다. 파울리스타누에서 그는 7번의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 우승(1918, 1919, 1921, 1926, 1927, 1929)을 이끌었으며, 1920년 토르네이우 도스 캄페옹스(Torneio dos Campeões) 우승에도 기여했다. 파울리스타누가 해체된 후인 1929년, 그는 상파울루 FC의 전신인 상파울루 다 플로레스타에 합류하여 1931년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상파울루에서 1930년부터 1935년까지 127경기에서 106골을 기록했다. 선수 경력 말년에는 CR 플라멩구에서도 뛰었다. 1933년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와 바이아주의 도이스 지 줄류 소속으로 단 한 경기씩을 뛰기도 했다.
3.2.2. 클럽 통계 및 득점왕 기록
프리덴라이히는 상파울루 주 리그에서 총 9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득점력을 과시했다.
연도 | 클럽 | 득점 |
---|---|---|
1912 | 매켄지 칼리지 | 12 |
1914 | 파울리스타누 | 12 |
1917 | 이피랑가 | 15 |
1918 | 파울리스타누 | 25 |
1919 | 이피랑가 | 26 |
1921 | 파울리스타누 | 33 |
1927 | 파울리스타누 | 13 |
1928 | 파울리스타누 | 29 |
1929 | 파울리스타누 | 16 |
1914년, 1927년, 1928년, 1929년에는 리그 분열로 인해 공동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연도 | 선수 | 클럽 | 득점 |
---|---|---|---|
1914 | 네코 | 코린치앙스 | 12 |
1927 | 아라켄 | 산투스 | 31 |
1928 | 에이토르 | 팔레스트라 이탈리아 | 16 |
1929 | 페이치수 | 산투스 | 12 |
3.3. 국가대표팀 경력

프리덴라이히는 1914년 잉글랜드의 엑서터 시티와의 친선 경기에서 브라질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 경기는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첫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격렬한 태클로 앞니 두 개를 잃는 일화도 있었다. 그는 22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하여 10골을 기록했다.
그는 1916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첫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칠레, 아르헨티나와 비긴 후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 기회를 잡았으나, 프리덴라이히가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1-2로 패배하며 우루과이가 우승했다.
1919년 자국에서 열린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프리덴라이히는 칠레와의 개막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6-0 승리를 이끌었다. 결승전에서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회 역사상 가장 긴 경기인 4차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연장 후반 122분 극적인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 승리는 브라질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의 '축구 왕국' 브라질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4골을 기록하며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또한, 그는 주요 국제 대회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최초의 축구 선수로 기록되었다. 이때 우루과이 팬들로부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는 조직위원회가 유색 인종 선수의 참여를 원치 않아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1922년과 1925년 두 차례 더 대회에 참가했다. 1922년에는 브라질 대표팀이 다시 우승했지만, 프리덴라이히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1925년에는 크리스마스에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브라질은 2-2로 비기면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브라질 대표팀의 유럽 투어에서 그는 '축구의 왕'으로 불리며 유럽 전역에서 환영받았다. 이 투어에서 8경기에서 11골을 넣으며 역사상 최초의 축구 슈퍼스타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1930년 FIFA 월드컵에 브라질 대표팀으로 선발되지 못했는데, 당시 리우데자네이루주와 상파울루주의 축구 리그 간 심각한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리우데자네이루 출신 선수들만 월드컵에 참가했고, 상파울루의 스타 선수들(당시 38세였던 프리덴라이히를 포함하여 필루, 페이치수 등)은 우루과이로 가지 못했다. 월드컵 직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3-2로 승리하며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4. 차별과 인종 문제
브라질은 1888년 노예 제도를 철폐했는데, 이는 프리덴라이히가 태어나기 불과 4년 전이었다.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혼혈인으로서 그는 평생 그리고 선수 경력 내내 인종차별의 압력을 느꼈다. 당시 축구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스포츠였고, 흑인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수영장, 테니스 코트, 파티 등 백인 선수들이 가는 곳에 출입할 수 없는 등 많은 장벽에 부딪혔다. 흑인 선수에 대한 반칙은 종종 묵인되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또한 그는 피부색 때문에 브라질 축구계에서 관계를 맺고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구체적인 사례는 1921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이 거부된 사건이다. 프리덴라이히는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대변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축구를 함으로써 많은 장벽을 허물었다. 그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백인처럼 보이려는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다른 백인 선수들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그는 경기 전에 머리를 곧게 펴서 '백인처럼' 보이려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많은 브라질 흑인 선수들이 얼굴에 밀가루나 쌀가루를 바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혼혈인이면서 스스로를 백인으로 인식했던 그에게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다.
5. 통산 득점 기록 논란
프리덴라이히의 통산 득점 수에 대한 오랜 논란은 축구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다.
5.1. 기록 논란의 배경
프리덴라이히가 정확히 몇 골을 넣었는지는 문서화가 부족하여 알 수 없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기록 보존이 미비했고, 아마추어 리그 경기의 기록 포함 여부도 불분명하여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려웠다. 가장 큰 논란은 그의 아버지와 전 동료 마리오 데 안드라데가 직접 기록한 그의 득점 기록부가 1960년대 중반 그가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시기에 수수께끼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공식적인 득점 기록은 불확실하며,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5.2. 추정되는 득점 수치
프리덴라이히의 통산 득점은 다양한 출처에서 여러 가지로 추정된다.
- 1,329골 (1,239경기): 가장 널리 알려진 수치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등재되어 있으나, 이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펠레의 1,281골을 뛰어넘는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 1909년 ~ 1935년 사이:
- 554골 (561경기): 알렉상드르 다 코스타의 저서 『축구의 호랑이』
- 558골 (562경기): 올랜도 두아르테와 세베리누 필류의 저서 『프리드 대 펠레』
- 354골 (323경기): IFFHS 기록
- 105골 (125경기): 상파울루 FC 기념관 기록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프리덴라이히의 엄청난 득점 능력과 오랜 선수 생활은 축구 역사의 전설로 평가받고 있다.
6. 축구 이후의 삶
프리덴라이히는 선수 은퇴 후 새로운 직업을 가졌으며,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하다 생을 마감했다.
6.1. 은퇴와 말년
1930년대에 브라질 축구는 점차 프로화되는 과정을 거쳤고, 1933년에는 프로 리그가 현실이 되었다.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의 프로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그는 축구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를 거부했으며, 43세의 나이에 CR 플라멩구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1935년에 은퇴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35년 7월 21일 플루미넨시와의 경기(2-2 무승부)였으며, 이 경기에서 득점은 없었다. 은퇴 후 그는 주류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은퇴했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었고, 병을 치료하는 데 대부분의 재산을 소진했다. 그는 상파울루 FC가 제공한 집에서 거주하다가 1969년에 사망했다.
6.2. 사망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1969년 9월 6일 77세의 나이로 상파울루에서 알츠하이머병과의 투병 끝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펠레가 통산 1,000골을 달성하기 약 3개월 전이었다.
7. 유산과 평가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의 발전과 인종차별 문제 해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7.1. 영향 및 긍정적 평가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의 발전, 특히 '조고 보니토' 스타일의 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으로서 축구계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며,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적 편견을 깨고 다른 유색 인종 선수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의 빛나는 경력은 많은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선수들이 축구선수의 꿈을 꾸게 만들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기여했다. 그는 20세기 IFFHS 선정 브라질 선수 5위, 남미 선수 13위에 이름을 올리며 역사적인 위상을 인정받았다.
7.2. 추모 및 기념
브라질 곳곳에서 그를 기리기 위한 추모 및 기념 시설들이 존재한다. 상파울루 동부 빌라 알피나 지역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공원이 있으며, 이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큰 공원 중 하나이다. 또한 상파울루 동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스포츠 단지 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학교가 설립되어 있으며, 이는 주 입구 근처 벨리니 동상 왼쪽에 위치해 있다.
8. 수상 기록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다양한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여러 차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 클럽
-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 1918, 1919, 1921, 1926, 1927, 1929 (이상 파울리스타누), 1931 (이상 상파울루)
- 토르네이우 도스 캄페옹스: 1920 (파울리스타누)
- 상파울루 주 대표팀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지 셀레송이스 이스타두아이스: 1922, 1923
- 국가대표팀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1919, 1922
- 로카컵: 1914
- 개인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최우수 선수: 1919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득점왕: 1919
- IFFHS 선정 20세기 브라질 선수 5위
- IFFHS 선정 20세기 남미 선수 13위
- 상파울루 주 리그 득점왕: 1912, 1914, 1917, 1918, 1919, 1921, 1927, 1928,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