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실레시아의 성녀 헤드비지스(Sancta Hedviges Silesiana산크타 헤드비게스 실레시아나라틴어), 또는 안덱스의 헤드비지스(Heilige Hedwig von Andechs하일리게 헤드비히 폰 안덱스독일어)는 1174년에 태어나 1243년 10월 15일에 사망한 인물로, 바이에른의 유서 깊은 안덱스 가문 출신이다. 그녀는 1201년부터 실레시아의 공작 부인이자 1231년부터 대폴란드의 공작 부인이었으며, 1232년부터 1238년까지는 폴란드의 대공비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헤드비지스는 남편 헨리크 1세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정치적 분쟁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했다. 특히 남편 사후에는 트레브니차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겨 종교적 헌신과 자선 활동에 매진했으며, 빈민, 과부, 고아, 나병 환자들을 구제하고 여러 병원을 설립하는 데 전 재산을 기부하여 무일푼이 될 정도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1241년 몽골의 침입으로 외아들 헨리크 2세를 잃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심을 잃지 않고 전사지 인근에 수도원을 세우는 등 깊은 믿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건하고 자비로운 삶을 인정받아 1267년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가톨릭교회의 성녀로 시성되었다. 그녀는 실레시아와 안덱스, 브로츠와프 대교구, 괴를리츠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은 10월 16일이다. 헤드비지스는 후대에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과 같은 기념물과 헤드비지스 유리와 같은 문화적 유산을 남기며 깊은 영적, 문화적 영향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헤드비지스는 중세 유럽의 주요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안덱스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2.1. 출생과 가족
헤드비지스는 1174년 바이에른 공국의 안덱스 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안덱스의 베르톨드 4세 백작의 딸로, 베르톨드 4세는 카르니올라 변경백이자 이스트리아 변경백을 겸했다. 어머니는 로크리츠의 아그네스로 베틴 가문 출신이었다. 헤드비지스에게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다. 언니 메라니아의 아그네스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결혼했으나 1200년에 혼인이 무효화되었다. 또 다른 언니 메라니아의 게르트루드는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와 결혼했으며 1213년에 살해당했다. 게르트루드의 딸인 헝가리의 에르제베트 또한 훗날 성녀로 시성되었는데, 헤드비지스는 에르제베트의 이모에 해당한다. 여동생 마틸다(메히틸트)는 프랑코니아의 키칭엔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형제로는 밤베르크 주교이자 안덱스-메라니아 백작이었던 에크베르트, 칼로차 대주교이자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였던 베르톨드, 그리고 카르니올라의 초대 영주였던 이스트리아 변경백 헨리가 있었다.
2.2. 교육
헤드비지스는 어린 시절 프랑코니아의 키칭엔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수녀원은 그녀의 여동생 마틸다가 수녀원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헤드비지스는 깊은 종교적 가르침과 함께 당시 귀족 여성에게 필요한 교양을 습득하며 경건한 신앙심을 키웠다.
3. 공작 부인 시절
헤드비지스는 실레시아와 대폴란드의 공작 부인으로서 남편 헨리크 1세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1. 헨리크 1세와의 결혼
헤드비지스는 12세가 되던 해에 실레시아 피아스트 가문의 공작이자 브로츠와프 공작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인 헨리크 1세와 혼인했다. 당시의 결혼은 가문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는 수단이었으며, 이 결혼을 통해 헤드비지스는 실레시아 공작 부인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3.2.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

헨리크 1세는 120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자마자 피아스트 왕조의 친척들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는 삼촌인 오폴레 공작 미에슈코 4세와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의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닉 등과 갈등을 겪었다. 1206년 헨리크와 브와디스와프 3세는 실레시아의 루부츠 지역과 칼리시 지역을 맞바꾸는 데 합의했으나, 브와디스와프 오도닉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1227년 헨리크가 피아스트 가문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가사와로 갔을 때, 브와디스와프 오도닉의 사주를 받은 포메라니아 공작 스비에톨펠크 2세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폴란드 대공 레셰크 1세는 살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듬해 레셰크 1세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헨리크와 동맹을 맺고 그를 크라쿠프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헨리크는 대폴란드 내 조카와의 분쟁에 다시 휘말리게 되었다. 1229년 헨리크는 경쟁자인 마소비아의 콘라트 1세 공작에게 사로잡혀 프워츠크 성에 억류되었다. 이때 헤드비지스가 직접 프워츠크 성으로 찾아가 콘라트에게 남편의 석방을 간곡히 청원했고, 그 덕분에 헨리크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헤드비지스의 적극적인 내조와 정치적 중재는 남편 헨리크의 권력 강화를 더욱 앞당겼다. 1231년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자 헨리크는 그의 뒤를 이어 대폴란드의 공작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크라쿠프의 대공으로 등극했다. 이로써 헨리크는 1138년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라 실레시아와 세니오라테의 통치권을 모두 얻은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의 실레시아 피아스트 왕조 후손 중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4. 미망인 시기 및 자선 활동
남편 사후 헤드비지스는 수도원에 거처를 옮겨 종교적 헌신과 광범위한 자선 활동을 펼치며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었다.
4.1. 미망인으로서의 삶
1238년 남편 헨리크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유해는 헤드비지스의 요청에 따라 1202년에 헨리크가 설립했던 시토회 수녀원인 트레브니차 수도원(Kloster Trebnitz클로스터 트레브니츠독일어)에 매장되었다. 헤드비지스는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려 하십니까? 우리의 삶은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깊은 신앙심을 드러냈다. 미망인이 된 헤드비지스는 자신의 딸 게르트루드가 원장으로 있던 이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녀는 3회원으로서 수도복을 받아 입었으나, 공식적인 수도 서원은 하지 않았다.
헤드비지스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온 수많은 독일인 종교인들과 독일 이주민들을 실레시아 지역으로 초대했다. 이들은 오스트지들룽(Ostsiedlung오스트지들룽독일어)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와 마을, 촌락을 건설했으며, 실레시아의 척박한 땅을 경작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4.2. 자선 활동 및 후원

헤드비지스와 헨리크는 매우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특히 헤드비지스는 신앙심이 깊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노보그로드보브잔스키(Naumburg나움부르크독일어)에 아우구스티노회 성당을 기부하고 올레시니차 마와(Klein Oels클라인 외엘스독일어)에 성전 기사단 지휘소를 후원하는 등 종교 기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헤드비지스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들을 도왔으며, 병자와 나병 환자들을 위한 여러 병원을 설립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여 결국 무일푼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아무도 위로받지 못한 채 떠나게 두지 않았으며, 한 번은 가난한 여성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 10주를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녔는데, 브로츠와프 주교가 신발을 신으라고 권유하자 그녀는 신발을 손에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부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튜턴 기사단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4.3. 몽골 침입의 영향
헤드비지스와 헨리크는 여러 딸을 두었지만, 살아남은 아들은 단 한 명,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실레시아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이 된 헨리크 2세뿐이었다. 그러나 헤드비지스는 1241년 몽골의 폴란드 침공 당시 레그니차 전투(Wahlstatt발슈타트독일어)에서 아들 헨리크 2세가 전사하는 비극을 목도해야만 했다.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헛되이 기다리다가 아들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폴란드의 재통합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고, 실레시아마저 헨리크 2세의 아들들 지배하에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헤드비지스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헨리크 2세의 미망인인 보헤미아의 안나는 전투가 벌어진 레그니츠키에폴레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보헤미아의 오파토비체에서 온 수도사들을 정착시켰다.
5. 사망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에 선종했으며, 시신은 남편과 함께 트레브니차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유해 일부는 고향인 안덱스 수도원과 베를린의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6. 시성 및 유산
헤드비지스는 가톨릭 성녀로 시성되어 깊은 영적 영향력을 미쳤으며, 후대에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유산을 남겼다.
6.1. 시성
헤드비지스는 1267년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클레멘스 4세는 시토회의 강력한 후원자였으며, 헤드비지스의 손자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브와디스와프의 청원에 따라 시성 조사가 이루어졌다.
6.2. 수호성인 및 축일
헤드비지스는 실레시아, 안덱스, 브로츠와프 대교구, 괴를리츠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로마 전례력에서 그녀의 축일은 10월 16일로 지정되어 기념된다. 성 바오로 1세 은수자회는 헤드비지스를 위대한 후원자로 여기며 6월 8일에 축일을 지낸다.
6.3. 기념물 및 문화적 영향

1773년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제1차 실레시아 전쟁을 통해 실레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합병한 후, 베를린에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을 건립할 것을 명했다. 이 성당은 실레시아 출신의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해 지어졌으며, 1930년부터 베를린 대교구의 대성당 역할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모든 독일인이 실레시아에서 추방되었지만, 독일 실레시아인들은 헤드비지스에 대한 숭배를 독일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헤드비지스의 이름을 딴 문화적 유산으로는 헤드비지스 유리가 있다. 17세기의 한 전설에 따르면, 헤드비지스가 로마로 순례를 떠나던 길에 오스트리아의 바트 첼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치유의 샘물을 솟아나게 하는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도 그 샘물은 그녀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2020년 3월에는 수세기 동안 행방불명되었던 헤드비지스의 유해가 트레브니차에 있는 그녀의 성지에서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유해는 은으로 된 작은 관 안에 있었으며, 납으로 된 명판에 헤드비지스의 신원을 확인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를 기리는 다른 예술 작품들도 많이 남아있다.

헤드비지스의 삶과 신앙심은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은 메달과 묘비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7. 자녀
헤드비지스와 헨리크 1세는 슬하에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연도 | 사망 연도 | 비고 |
---|---|---|---|
아그네스 | 1190년경 | 1214년 5월 11일 이전 | |
볼레스와프 | 1191년경 | 1206년 또는 1208년 9월 10일 | |
헨리크 2세 | 1196년경 | 1241년 4월 9일 | 레그니차 전투에서 전사 |
콘라트 더 컬리 | 1198년경 | 1213년 9월 4일 | 체르보니 코스치올에서 사망 |
소피에 | 1200년경 | 1214년 3월 22일 또는 23일 이전 | |
게르트루드 | 1200년경 | 1268년 12월 6일 또는 30일 | 트레브니차 수녀원장 |
아들 (블라디스와프?) | 1208년 12월 25일 이전 | 1214년 또는 121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