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안나(Anna Lehnická안나 레흐니츠카체코어, Anna Przemyślidka안나 프셰미실리트카폴란드어, 대략 1203년/1204년 ~ 1265년 6월 26일)는 프셰미슬 왕조의 일원으로, 실레지아의 공작부인이자 1238년부터 1241년까지 폴란드 대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피아스트 왕조의 통치자 경건공 헨리크 2세와 결혼하여 이 직위를 얻었다. 안나는 브로츠와프의 성 클라라 수도원(프라하의 성 클라라 수도원)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녀들에 의해 그들의 설립자이자 후원자로 추앙받았다.
2. 개인적 배경
안나의 출생, 가문, 그리고 그녀의 조상에 대해 설명한다.
2.1. 출생과 가문
안나는 아마도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서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1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헝가리의 콘스탄체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헝가리의 벨러 3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안티오키아의 아녜스였다. 친조부모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와 튀링겐의 유디트였다. 그녀는 프란치스코회 수녀인 보헤미아의 아녜스(1211년 ~ 1282년)의 언니였다.
2.2. 조상
안나의 조상은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부모 | 오타카르 1세 | 보헤미아의 왕 |
헝가리의 콘스탄체 | 헝가리의 벨러 3세의 딸 | |
친조부모 |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 | 보헤미아 공작 |
튀링겐의 유디트 | ||
외조부모 | 헝가리의 벨러 3세 | 헝가리의 왕 |
안티오키아의 아녜스 | ||
증조부(친가) |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 | 보헤미아 공작 |
베르크의 리헤자 | ||
증조부(외가) | 게자 2세 | 헝가리의 왕 |
키예프의 에우프로시네 | ||
증조부(외가) | 샤티용의 레날드 | |
안티오키아의 콘스탄체 | ||
고조부(친가) |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 | 보헤미아 공작 |
폴란드의 시비엔토스와바 | ||
고조부(외가) |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2세 | 안티오키아 공작 |
안티오키아의 앨리스 |
3. 결혼과 자녀
안나의 결혼 과정과 남편 경건공 헨리크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3.1. 결혼
대략 12세가 되던 1216년, 안나는 피아스트 왕조의 실레지아 분가 출신인 피아스트 공작 경건공 헨리크 2세와 결혼했다. 헨리크 2세는 공작 수염공 헨리크 1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였다. 내부 정치 투쟁 중에, 실레지아 피아스트 가문은 1227년 대공작 하얀공 레셰크 1세의 암살 이후 폴란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얻었다. 수염공 헨리크 1세는 1231년에 대폴란드 공국을 상속받았고, 이듬해에는 크라쿠프에서 시니어 공작령과 폴란드 왕위를 획득했다. 1238년 3월 19일 헨리크 1세가 사망하자, 1226년부터 실레지아 영지의 공동 통치자였던 그의 아들 헨리크 2세가 뒤를 이었다.
3.2. 자녀
안나와 헨리크 2세는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 게르트루트 (대략 1218년/1220년 ~ 1247년 4월 23일/30일): 1232년까지 마조프셰의 볼레스와프 1세와 결혼했다.
- 콘스탄체 (대략 1221년 ~ 1257년 2월 21일경): 1239년까지 쿠야비의 카지미에시 1세와 결혼했다.
- 대머리공 볼레스와프 2세 (대략 1220년/1225년 ~ 1278년 12월 25일/31일): 실레지아 공작.
- 루부슈의 미에슈코 (대략 1223년/1227년 ~ 1242년).
- 하얀공 헨리크 3세 (1227년/1230년 ~ 1266년 12월 3일): 1248년 실레지아 영지가 분할된 후 브로츠와프의 실레지아 공작으로 통치했다.
- 글로구프의 콘라트 1세 (1228년/1231년 ~ 대략 1274년 8월 6일): 1251년부터 최초의 실레지아 글로구프 공작으로 통치했다.
- 엘리자베트 (대략 1232년 ~ 1265년 1월 16일): 1244년 대폴란드의 프셰미실 1세와 결혼했다.
- 트셰브니차의 아그네스 (대략 1236년 ~ 1277년 5월 14일 이후): 어머니에 의해 브로츠와프의 성 클라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맡겨졌다.
- 잘츠부르크의 브와디스와프 (1237년 ~ 1270년 4월 27일): 1256년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1257년 밤베르크 주교구 주교, 파사우 주교구 주교로 선출되었으며, 1265년에는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되었다.
- 야드비가 (대략 1238년/1241년 ~ 1318년 4월 3일): 브로츠와프의 성 클라라 수도원 원장.
긴 왕조 투쟁 끝에, 안나의 어린 아들들은 하부 실레지아 영지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1248년 실레지아 영지가 분할된 후, 헨리크 3세는 브로츠와프의 실레지아 공작으로 통치했고, 볼레스와프 2세는 레그니차 공작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1251년부터 콘라트 1세는 최초의 실레지아 글로구프 공작으로 통치했다.
4. 생애와 활동
남편의 죽음 이후 안나의 섭정 역할과 종교적 후원 활동을 상세히 다룬다.
4.1. 남편의 죽음과 섭정
몽골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안나는 왕가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크로스노 요새로 피난했다.
안나는 남편이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군과 싸우다 전사한 지 불과 3년 후인 1241년 4월 9일에 과부가 되었다. 일본어 기록에 따르면, 남편의 시신이 너무 훼손되어 다른 시신들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나는 남편의 왼쪽 발가락이 6개라는 특징을 말해주어 시신을 찾게 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주로 그녀의 아들 대머리공 볼레스와프 2세와 그의 형제들을 위한 섭정으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실레지아 피아스트 가문은 크라쿠프 왕위가 마조프셰의 콘라트 1세에게 넘어가면서 폴란드 영지에서의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안나는 "성 클라라 브로츠와프 수녀원 기록"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후 성급한 성격의 장남 볼레스와프 2세의 폭력에 시달리며 불안정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4.2. 종교적 후원 및 설립
1242년 5월 8일, 안나와 그녀의 아들은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크셰슈프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 수도원은 헨리크 2세가 건설을 시작했으며, 안나가 1242년에 완공했다. 안나는 또한 브로츠와프의 클라라회 수녀들의 너그러운 후원자였으며, 그녀의 자매인 보헤미아의 아녜스와도 상의했다.

1256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브로츠와프와 레부스의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안나가 프란치스코회 수녀 공동체를 수용할 수도원 건설을 제안했으며, 이는 자신과 죽은 남편의 그러한 기관을 짓고자 하는 염원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1257년에 수도원 건설이 시작되었다. 안나는 수도원에 많은 재산을 기부했지만, 그녀의 기부가 수녀들이 서원한 자발적 가난의 서약을 위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1263년,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브로츠와프의 수녀들에게 발행한 교황 칙서에는 안나가 수녀들이 자신이 준 재산을 필요할 때만 사용하기를 원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성 클라라 브로츠와프 수녀원 기록"은 그녀를 브로츠와프의 성 클라라 수도원의 설립자로 명명한다. 14세기 전반에 쓰여진 그녀의 전기(vita)는 그녀를 시어머니인 실레지아의 야드비가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며, 야드비가는 안나의 종교 생활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묘사된다.
5. 죽음과 유산
안나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사후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5.1. 죽음과 매장
브로츠와프의 프란치스코회 수녀들이 쓴 연대기인 "성 클라라 브로츠와프 수녀원 기록"에 따르면, 안나는 1265년에 사망했으며 브로츠와프의 성 클라라 수도원 내에 있는 성 야드비가 예배당의 수녀 합창단석에 남편의 관 옆에 매장되었다.
5.2. 성인으로의 추앙
역사가 가보르 클라니차이(Gábor Klaniczay)에 따르면, 안나는 폴란드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았지만,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