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포셋의 모험에 대한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테네시주 잭슨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주 가든그로브에서 성장했다.
1.1. 어린 시절과 스카우트 활동
포셋은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캘리포니아주의 샌재신토산맥 등 여러 산을 오르며 모험을 즐겼다. 그는 "12살 때 첫 산을 올랐고, 계속해서 더 다양하고 거대한 프로젝트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운동이나 단체 스포츠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활동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그의 아버지 또한 이글 스카우트 출신으로, 포셋이 보이스카우트 활동에 일찍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에 있는 제170 보이스카우트 부대의 적극적인 단원이었다. 13세에 포셋은 보이스카우트의 최고 등급인 이글 스카우트 자격을 획득했다. 그는 보이스카우트 명예 단체인 오더 오브 더 애로우의 비질 아너 회원이었으며,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61년 여름에는 뉴멕시코주의 필몬트 스카우트 목장에서 레인저로 일했다. 포셋은 2006년에 스카우트 활동이 자신의 청소년기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학 시절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포셋은 이미 모험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시그마 알파 엡실론 학생회 동료들은 그에게 앨커트래즈까지 헤엄쳐 가서 2년 전 폐쇄된 교도소 벽에 "캘리포니아 골든 베어스를 이기자"는 현수막을 걸도록 설득했다. 그는 수영에는 성공했지만 경비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스탠퍼드 재학 중 포셋은 학생회 임원이자 여러 클럽의 회장을 역임했다.
1.2. 학력
1966년 포셋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다음 여름을 유럽에서 산을 오르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수영하며 보냈다. 1968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 올린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으며, 이후 오랫동안 이사회 멤버로 활동했다.
2. 사업 경력
포셋의 첫 직장은 IBM이었고, 이후 딜로이트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마셜 필즈에 입사했다. 포셋은 나중에 "사업 경력의 첫 5년 동안은 컴퓨터 시스템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후 금융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후 포셋은 시카고에서 성공적인 상품 중개인이 되었다. 1973년 메릴린치에서 처음 일하며 자신과 회사에 높은 수수료 수익을 안겨주었다. 1976년에는 드렉셀 번햄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이 회사는 그에게 시카고 상품거래소 회원 자격을 부여하고 거래소 현장에서 전화로 회사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0년, 포셋은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는 시카고 옵션 거래소에서부터 예비 현장 거래자들에게 거래소 회원 자격을 임대하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에서 15년간 일한 후, 포셋은 자신의 회사인 마라톤 증권(Marathon Securities)과 라코타 트레이딩(Lakota Trading)을 설립하여 회원권 임대 사업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그는 1980년에 이러한 목적으로 라코타 트레이딩을 설립했다. 1980년대 초, 그는 마라톤 증권을 설립하고 뉴욕 증권 거래소 회원권으로도 이 성공적인 사업 모델을 확장했다. 그는 현장 거래 특권(거래소 회원권)을 임대하여 수백만 달러를 벌었으며, 회원권을 임대한 거래자들은 포셋의 청산 회사에 거래 활동에 비례하여 청산 수수료를 지불했다. 1997년에는 그의 임대 회원권 거래량이 시카고 거래소의 다른 어떤 청산 회사보다 많았다. 라코타 트레이딩은 미국 내 여러 거래소와 런던에서도 동일한 사업 계획을 복제했다. 포셋은 나중에 이러한 수입을 자신의 모험 활동 자금으로 활용했다. 포셋은 "현장 거래자로서 매우 적극적이었고 열심히 일했다. 이러한 특성들이 모험 스포츠에서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포셋은 대학 시절에 했던 "흥미로운 일들" 중 어떤 것도 거래 관련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에 매우 좌절했고 마침내 다시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매년 6주를 스포츠에 할애하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콜로라도주 비버 크릭으로 이주했다. 포셋은 2006년까지 시카고에 사무실을 유지했지만, 대부분의 사업 지분을 매각했다.
3. 개인사
1968년 포셋은 미주리주 리치먼드 하이츠 출신의 페기 비랜드(Peggy Viehland)와 결혼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 포셋 부부는 콜로라도주 비버 크릭과 시카고에 주택을 소유했으며, 캘리포니아주 카멜에 별장을 두었다. 포셋은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과 친구였으며, 브랜슨의 버진 그룹은 포셋의 일부 모험을 후원했다.
4. 주요 활동 및 업적
포셋은 열기구, 범선, 글라이더, 동력 항공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기록과 모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비범한 경험의 폭을 가진 조종사였다.
4.1. 모험 및 기록 개요

그는 열기구로 세계 단독 일주 비행을 최초로 달성하고자 했고, 여섯 번째 시도 끝에 2002년에 성공하여 어떤 종류의 항공기로든 중단 없이 무급유 단독 세계 일주를 완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공동 조종사 테리 딜로어와 함께 글라이더 오픈 기록 21개 중 10개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최초의 2,000 km 왕복 비행, 최초의 1,500 km 삼각 비행, 최장 직선 거리 비행 등이 포함된다. 세스나 사이테이션 X 제트기 조종사로서 그는 미국 횡단, 호주 횡단, 그리고 서쪽 방향의 비초음속 세계 일주 비행 기록을 세웠다. 포셋의 항공 기록 이전에는 어떤 조종사도 두 가지 이상의 항공기 종류에서 세계 기록을 보유한 적이 없었지만, 포셋은 네 가지 종류에서 기록을 보유했다.
2005년, 포셋은 버진 애틀랜틱 글로벌플라이어라는 단일 엔진 제트기로 67시간 만에 세계 최초로 무급유 단독 무착륙 비행을 성공했다. 2006년에는 다시 글로벌플라이어로 76시간 45분 만에 세계를 무착륙 무급유로 일주하며 4.15 만 km의 거리로 역사상 모든 항공기 중 최장 비행 기록을 세웠다.
그는 국제항공연맹(FAI)에 의해 비준된 91개의 항공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그중 36개는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월드 세일링 스피드 기록 협의회에 의해 비준된 23개의 항해 세계 기록도 세웠다. 2006년 8월 29일, 그는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상공에서 글라이더로 1.55 만 m의 세계 고도 기록을 세웠다.
4.2. 열기구 조종사

1995년 2월 21일, 포셋은 대한민국에서 이륙하여 캐나다 서스캐처원주 리더에 착륙함으로써 열기구로 태평양을 단독 횡단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2002년, 그는 어떤 종류의 항공기로든 세계를 단독으로 무착륙 비행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2002년 6월 19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노섬에서 10층 높이의 열기구 스피릿 오브 프리덤을 발사하여 2002년 7월 3일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퀸즐랜드주에 착륙했다. 이 단독 열기구 비행의 비행 시간과 거리는 13일 8시간 33분(착륙까지는 14일 19시간 50분)이었고, 3.32 만 km를 비행했다. 열기구는 착륙 시 그를 지상에서 20분 동안 끌고 갔다. 캡슐만이 착륙에서 살아남았으며,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협회로 옮겨져 전시되었다. 이 임무의 통제 센터는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의 브루킹스 홀에 있었다. 포셋의 비행 중 최고 속도는 인도양 상공에서 299 km/h (186 mph)였다. 이 비행은 열기구 분야에서 여러 기록을 세웠다. 최고 속도(322 km/h (200 mph), 자신의 이전 기록인 267 km/h (166 mph) 경신), 최단 세계 일주(13.5일), 열기구 단독 최장 거리 비행(3299 만 m (2.05 만 mile)), 24시간 열기구 비행 거리(7월 1일 5128645 m (3186.8 mile)) 등이다.
포셋은 이전 다섯 번의 시도를 스스로 자금을 조달했지만, 성공적인 기록 비행은 버드 라이트의 후원을 받았다. 결국 포셋은 모든 열기구 비행에서 실제로 돈을 벌었다. 그는 비행에 성공하면 300.00 만 USD를 지급하는 50.00 만 USD짜리 비상 보험에 가입했다. 후원금과 이 보험금 덕분에 포셋은 초기 비용 외에는 자신의 돈을 전혀 쓰지 않아도 되었다.
4.3. 항해사
포셋은 항해 분야에서 가장 많은 거리 기록을 보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속도 항해가 그의 전문 분야였으며, 1993년부터 2004년까지 그는 기록표를 지배하며 23개의 공식 세계 기록과 9개의 장거리 경주 기록을 세웠다. 그는 월드 세일링 스피드 기록 협의회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속도 항해사"로 인정받았다.
맥시 카타마란 샤이엔(이전 이름 플레이스테이션)에서 포셋과 그의 팀은 두 번이나 권위 있는 24시간 거리 기록을 세웠다. 2001년 10월, 포셋과 그의 승무원은 대서양 횡단 항해 기록을 4일 17시간으로 세워 이전 기록을 43시간 35분 단축했으며, 평균 속도는 거의 7노트 증가했다.
2004년 초, 포셋은 선장으로서 13명의 승무원과 함께 샤이엔으로 58일 9시간 만에 세계 일주 항해 기록을 세웠다. 2007년, 포셋은 자신의 38 m (125 ft) 범선인 플레이스테이션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세계 기록을 보유했는데, 이는 네 번째 시도 만에 달성한 것이었다.
그가 세운 주요 항해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록 유형 | 기록 | 날짜 |
---|---|---|
13개 절대 세계 기록 | ||
아일랜드 일주 | 44시간 42분 20초 | 1993년 9월 |
하와이-일본 | 13일 20시간 9분 | 1995년 7월~8월 |
태평양 동-서 횡단 | 16일 17시간 21분 | 1995년 8월 |
뉴포트-버뮤다 | 1일 14시간 35분 53초 | 2000년 1월 |
마이애미-뉴욕 | 2일 5시간 54분 42초 | 2001년 5월 |
대서양 횡단 | 4일 17시간 28분 6초 (25.78 kn) | 2001년 10월 |
와이트섬 일주 | 2시간 33분 55초 | 2001년 11월 |
패스트넷 코스 | 35시간 17분 14초 | 2002년 3월 |
플리머스-라로셸 | 16시간 41분 40초 | 2002년 4월 |
지중해 횡단 (마르세유-카르타고) | 18시간 46분 48초 | 2002년 5월 |
영국 및 아일랜드 일주 | 4일 16시간 9분 36초 | 2002년 10월 |
대서양 횡단 - 디스커버리 루트 | 9일 13시간 30분 18초 | 2003년 2월 |
세계 일주 | 58일 9시간 32분 45초 | 2004년 2월~4월 |
2개 단독 세계 기록 | ||
태평양 (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 | 20일 9시간 52분 | 1996년 8월 |
뉴포트-버뮤다 | 40시간 51분 54초 | 1999년 6월 |
9개 경주 기록 | ||
롱비치-카보 산 루카스 | 3일 2시간 59분 | 1995년 11월 |
스위프트슈어 | 14시간 35분 29초 | 1997년 5월 |
윈드재머스 (샌프란시스코-산타크루즈) | 4시간 41분 2초 | 1997년 8월 |
샌디에이고-푸에르토 바야르타 | 62시간 20분 11초 | 1998년 2월 |
뉴포트-엔세나다 | 6시간 46분 40초 (18.45 kn) | 1998년 4월 |
시카고-매키낵 | 18시간 50분 32초 | 1998년 7월 |
파인애플 컵 (포트로더데일-몬테고 베이) | 2일 20시간 8분 5초 | 1999년 2월 |
세인트 마틴 일주 (하이네켄) | 2시간 4분 23초 | 2003년 3월 |
단독 경주 기록 | ||
캘리포니아-하와이 (단독 트랜스팩) | 7일 22시간 38분 | 1998년 7월 |
그가 사망할 당시, 포셋이 최초의 단독 잠수정 조종사로서 챌린저 해연에 도달할 수 있도록 딥플라이트 챌린저라는 잠수정이 건조 중이었다.
4.4. 고정익 항공기 조종사

4.4.1. 글로벌플라이어

포셋은 2005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 사이에 세계 최초로 무착륙 무급유 고정익 항공기 비행을 성공했다. 그는 캔자스주 살리나에서 이륙하여 순풍을 타고 동쪽으로 비행했으며, 67시간 1분 10초 만에 급유나 중간 착륙 없이 살리나로 돌아왔다. 그의 평균 속도인 551 km/h (342.2 mph)는 "무착륙 무급유 세계 일주 속도"에 대한 절대 세계 기록이기도 했다. 그가 조종한 항공기인 버진 애틀랜틱 글로벌플라이어는 단일 윌리엄스 FJ44 터보팬 엔진을 장착한 탄소 섬유 강화 플라스틱 기체였다. 이 항공기는 장거리 단독 비행을 위해 버트 루탄과 그의 회사인 스케일드 컴포지츠가 설계하고 제작했다. 이륙 시 연료 중량과 항공기 중량의 비율인 연료 비율은 83%였다.
2006년 2월 11일, 포셋은 플로리다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동쪽으로 세계를 일주한 후 플로리다로 돌아와 다시 대서양을 건너 영국 본머스에 착륙함으로써 "무착륙 최장 거리"에 대한 절대 세계 기록을 세웠다. 공식 거리는 4.15 만 km였고, 비행 시간은 76시간 45분이었다.
다음 달, 포셋은 "무착륙 폐쇄 회로 최장 거리"(동일 공항에서 이착륙)에 대한 절대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세 번째 세계 일주 비행을 했다. 그는 2006년 3월 14일 캔자스주 살리나에서 이륙하여 4.07 만 km를 비행한 후 2006년 3월 17일에 돌아왔다.
국제항공연맹(FAI)이 인정한 고정익 항공기 7개 절대 세계 기록 중 3개를 포셋이 버진 애틀랜틱 글로벌플라이어로 경신했다. 이 세 기록은 모두 이전에 1986년 보이저 비행에서 딕 루탄과 지나 예거가 보유하고 있었다. 포셋은 글로벌플라이어를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영구 소장품으로 기증했다. 이 항공기는 스미스소니언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의 스티븐 F. 우드바-해지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포셋은 직접 이 비행기를 센터로 몰고 가서 박물관 정문까지 택시 운행했다.
4.4.2. 대륙 횡단 항공기 기록
포셋은 같은 날 두 개의 미국 대륙 횡단 고정익 항공기 기록을 세웠다. 2003년 2월 5일, 포셋은 공동 조종사 더그 트래비스와 함께 자신의 세스나 사이테이션 X 제트기를 타고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까지 2시간 56분 20초 만에 비행하여 비초음속 제트기의 대륙 횡단 기록을 1170 km/h (726.83 mph)의 평균 속도로 경신했다.
그는 샌디에이고로 돌아온 후, 동료 모험가 조 리치의 피아지오 아반티 터보프롭 항공기에서 공동 조종사로 동일한 코스를 비행했다. 그들의 비행 시간은 3시간 51분 52초였으며, 평균 속도는 879 km/h (546.44 mph)로, 척 예거와 레날드 대븐포트가 보유했던 이전 터보프롭 대륙 횡단 기록을 경신했다.
포셋은 또한 2000년 9월 17일에 비초음속 고정익 항공기의 동서 대륙 횡단 기록을 세웠다. 그는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까지 3시간 29분 만에 비행했으며, 평균 속도는 953 km/h (591.96 mph)였다.
4.4.3. 첫 대서양 횡단 비행 재현
2005년 7월 2일, 포셋은 공동 조종사 마크 렙홀츠와 함께 1919년 6월 영국 팀 앨콕과 브라운이 비커스 비미 복엽기로 처음으로 무착륙 대서양 횡단을 했던 것을 재현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세인트존스에서 아일랜드 골웨이주 클리프든까지의 비행은 18시간 25분 걸렸으며, 이 중 13시간은 계기 비행 조건에서 이루어졌다. 클리프든에는 공항이 없었기 때문에 포셋과 렙홀츠는 코네마라 골프 링크스의 8번 페어웨이에 착륙했다.
4.4.4. 비행선 조종사
포셋은 2004년 10월 27일 비행선에 대한 절대 세계 속도 기록을 세웠다. 제플린 NT로 달성된 새로운 최고 속도 기록은 평균 62.2 kn였다. 이전 기록은 2001년 버진 비행선이 세운 50.1 kn였다. 2006년, 포셋은 세계에서 제플린을 조종할 수 있는 면허를 가진 17명의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
4.5. 글라이더 조종사
스티브 포셋과 테리 딜로어(뉴질랜드) 팀은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미국 네바다주의 세 주요 지역에서 비행하며 글라이더로 10개의 공식 세계 기록을 세웠다. 별표(*)는 나중에 다른 조종사들이 경신한 기록을 나타낸다.
- 1,000 km 왕복 세계 기록*: 166.46 km/h, 2002년 12월 12일.
- 750 km 삼각 세계 기록*: 171.29 km/h, 2003년 7월 29일.
- 1,250 km 삼각 미국 국가 기록: 143.48 km/h, 2003년 7월 30일. (세계 기록을 0.01 km/h 초과)
- 1,500 km 왕복 세계 기록*: 156.61 km/h, 2003년 11월 14일.
- 왕복 거리 (선언) 세계 기록*: 1804.7 km, 2003년 11월 14일.
- 왕복 거리 (자유) 세계 기록*: 2002.44 km, 2003년 11월 14일.
- 500 km 삼각 세계 기록*: 187.12 km/h, 2003년 11월 15일.
- 1,500 km 삼각 세계 기록: 119.11 km/h, 2003년 12월 13일.
- 삼각 거리 (선언) 세계 기록*: 1502.6 km, 2003년 12월 13일.
- 삼각 거리 (자유) 세계 기록*: 1509.7 km, 2003년 12월 13일.
- 거리 (자유) 세계 기록: 2192.9 km, 2004년 12월 4일.
포셋과 공동 조종사 에이나르 에네볼드센은 2006년 8월 29일 글라이더를 타고 성층권으로 비행했다. 이 비행은 글라이더의 절대 고도 기록을 1.55 만 m로 세웠다. 글라이더 조종석은 비가압 상태였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1.4 만 m (4.50 만 ft) 이상의 고도에서 비행할 수 있도록 완전한 압력복을 착용했다. 포셋과 에네볼드센은 5년 동안 세 나라에서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마침내 이 기록 비행에 성공했다. 이 노력은 페를란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4.6. 기타 스포츠 및 업적
4.6.1. 크로스컨트리 스키
젊은 모험가였던 포셋은 전 세계 크로스컨트리 스키 마라톤 시리즈인 월드롭페트의 초기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키 선수로서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79년 시리즈 첫 대회에 참가한 '시민 선수'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1980년, 그는 10개의 장거리 경주를 모두 완주한 여덟 번째 스키 선수가 되어 월드롭페트 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또한 콜로라도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 기록을 세웠는데, 1998년 2월 콜로라도주 애스펀에서 베일까지 59 h 53분 30초의 기록을, 2001년 2월 애스펀에서 이글까지 12시간 29분의 기록을 세웠다.
4.6.2. 등산
포셋은 평생 등산가였으며 7개 대륙 중 6개 대륙의 최고봉을 등반했다. 1980년대에 그는 세븐 서미츠 세계 기록을 달성하려던 패트릭 모로와 친구가 되었고, 모로는 1985년에 이 기록을 달성했다. 포셋은 남극의 빈슨 산괴, 오세아니아의 카르스턴즈 피라미드, 유럽의 엘브루스산을 포함한 모로의 마지막 세 봉우리에 동행했다. 포셋은 거의 모든 세븐 서미츠 봉우리를 직접 등반했지만, 1992년에는 천식 때문에 에베레스트산 등반을 포기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등반하기 위해 남극으로 돌아갔다.
4.6.3. 기타 성과
포셋은 최고의 지구력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여 완주했다. 여기에는 1874881 m (1165 mile) 아이디타로드 트레일 썰매견 경주가 포함되며, 그는 5년간 훈련한 후 1992년 두 번째 시도에서 47위를 기록했다. 그는 1985년 9월 네 번째 시도에서 22시간 15분 만에 영국 해협을 횡단한 270번째 인물이 되었다. 포셋은 자신이 "대학 수영팀에 들어갈 만큼 수영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장시간 수영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포셋은 하와이에서 아이언맨 트라이애슬론에 참가했으며(1996년 15:53:10으로 완주), 보스턴 마라톤과 로키산맥의 0.4 만 m (1.26 만 ft) 이상의 고도까지 달리는 160934 m (100 mile) 콜로라도 울트라마라톤인 리드빌 트레일 100에도 참가했다.
포셋은 1970년대 중반에 자동차 경주에 참가했으며, 1990년대에 다시 이 스포츠로 돌아왔다. 그는 1993년과 1996년에 르망 24시 도로 경주에 참가했으며, 다카르 랠리에도 참가했다.
4.6.4. 이전 기록 시도

포셋은 최초의 단독 열기구 세계 일주를 위해 7년 동안 여섯 차례 시도했다. 그의 다섯 번째 시도에는 자신의 돈 125.00 만 USD가 들었으며, 여섯 번째이자 성공적인 시도는 상업적 후원을 받았다. 두 번의 시도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부시 기념 스타디움에서 시작되었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는 기록적인 비행을 포함한 여섯 번의 비행 중 네 번의 통제 센터 역할을 했다.
1998년, 열기구 기록에 대한 실패한 시도 중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 해안 산호해로 8 km 추락하는 것으로 끝났고, 이는 포셋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할 뻔했다. 그는 구조되기 위해 72시간을 기다렸으며, 이로 인해 50.00 만 USD의 비용이 발생했다. 첫 번째 시도는 사우스다코타주 블랙힐스에서 시작되어 2896812 m (1800 mile) 떨어진 뉴브런즈윅주 햄프턴 외곽에서 끝났다. 부시 스타디움에서 시작된 두 번째 시도는 30.00 만 USD가 들었고, 인도의 한 나무에 걸려 추락하기 전까지 9600 km를 비행했다. 이 비행은 당시 비행 시간과 거리에서 기록을 세웠으며(포셋이 자신의 이전 기록을 두 배로 늘림), 찰스 린드버그의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를 따서 솔로 스피릿이라 불렸다. 포셋은 6일간의 여정 동안 영하의 온도에서 하루 평균 2시간씩 잠을 잤다.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연료를 싣고 리비아 상공을 12시간 동안 선회하며 당국이 영공 진입을 허용할지 결정하는 동안, 포셋은 비행을 마칠 충분한 연료가 없었다. 그 해, 포셋은 더 잘 자금 지원을 받은 탐험대(버진 갤럭틱 설립자 리처드 브랜슨의 지원을 받은 탐험대 포함)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멀리 비행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고고도에서의 강도 높은 신체 훈련 덕분에 비가압 캡슐로 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로 스피릿 캡슐은 스미스소니언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에 아폴로 11호 사령선 맞은편에 전시되었다.

2006년, 포셋은 이전 육상 속도 기록 보유자 크레이그 브리드러브로부터 포뮬러 셸 LSRV 스피릿 오브 아메리카를 구매했다. 그는 이 차량을 스피릿 오브 아메리카 소닉 애로우로 개명하고 육상 속도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차량 개선에 착수했다. 포셋은 처음에는 1086 km/h (675 mph)도 넘지 못했지만, 결국 최고 속도를 1287 km/h (800 mph)까지, 심지어 1448 km/h (900 mph)까지 높이기를 희망했다. 그의 실종과 사망 이후에도 팀의 노력은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차량은 2010년에 경매에 나왔다.
5. 수상 및 영예
2002년, 포셋은 항공 분야 최고 영예인 국제항공연맹(FAI)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2007년 7월에는 국립 항공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딕 루탄에 의해 시상식에 참석했다.
1997년, 포셋은 열기구 및 비행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2년 2월, 포셋은 뉴욕 요트 클럽에서 미국 항해 협회로부터 아메리카 롤렉스 올해의 요트맨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41년 역사상 이 상을 받은 최고령 수상자였으며, 자신의 비행기를 타고 시상식에 참석한 유일한 수상자였다.
그는 단독 열기구 세계 일주 후 탐험가 클럽으로부터 탐험가 메달을 받았다. 1996년에는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몽골피에 디플롬을 받았다. 그는 1998년과 2002년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종사와 비행사"에게 수여되는 하먼 트로피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항공 클럽의 그랑 메달과 영국 왕립 항공 클럽의 금메달을 2002년에 받았다. 2003년에는 마젤란 훈장과 프랑스 공화국의 항공 훈장을 받았다.
스케일드 컴포지츠 화이트 나이트 투 VMS 스피릿 오브 스티브 포셋은 2007년 말 그의 친구 리처드 브랜슨에 의해 포셋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그의 실종 이후, 페기 포셋과 딕 루탄은 2007년 콜로라도주 덴버의 록키 산맥 위의 날개 항공 우주 박물관에서 열린 스피릿 윙스 갈라에서 포셋을 대신하여 스프레드 윙스 상을 받았다.
2010년, 포셋은 샌디에이고 항공 우주 박물관의 국제 항공 우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포셋은 1992년 명예 이글 스카우트 상을 받았다. 1999년에는 보이스카우트 연맹의 청소년 봉사에 대한 최고 영예인 실버 버팔로 상을 받았다. 그는 보이스카우트 연맹 전국 집행 이사회 위원이었으며, 2007년에는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뒤를 이어 전국 이글 스카우트 협회 회장이 되었다. 포셋은 이전에 세계 스카우트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스카우트 경험이 자신의 성공의 기초가 되었다고 인정했는데, "스카우트로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으며, "스카우트가 된 것은 젊은 나이에 리더가 될 기회가 거의 없을 때 리더십을 가르쳐 주었다. 스카우트의 가치는 내 사업 경력과 새로운 도전을 할 때까지 평생 동안 나와 함께했다"고 말했다.
6. 실종 및 사망
6.1. 실종 및 수색 과정

2007년 9월 3일 월요일 오전 8시 45분, 포셋은 네바다주 스미스 밸리 근처의 플라잉-M 목장 개인 활주로에서 단일 엔진 챔피언 8KCAB 슈퍼 데카트론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했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약 6시간 후 수색이 시작되었다. 추락 시 자동으로 활성화되도록 설계된 비행기의 비상 위치 지시 무선 비콘 (ELT)에서 신호가 없었는데, 이는 추락 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은 구형 유형이었다.
포셋이 수동으로 작동하는 ELT가 장착된 브라이틀링 비상 시계를 착용했을 수도 있다고 처음에는 생각되었으나, 신호는 수신되지 않았다. 9월 13일, 포셋의 아내 페기는 그가 그러한 시계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노동절 비행 시에는 착용하지 않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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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에어 패트롤(CAP) 공보관인 신시아 S. 라이언 소령에 따르면, 포셋은 4~5시간 비행할 수 있는 연료를 싣고 이륙했다. CAP 수색대는 포셋이 짧은 비행을 나갔으며, 럭키 보이 패스와 워커 호수 지역을 포함했을 수 있다고 들었다. 라이언 소령은 그가 계획된 육상 속도 기록을 위한 잠재적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지만, 포셋의 아내는 비행이 유람 비행이었다고 말했다. 포셋은 비행 계획을 제출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할 의무도 없었다.
둘째 날, CAP 항공기들이 수색했지만 잔해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후 수색 지역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 중 약 5179976 만 m2 (2.00 만 mile2)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라이언에 따르면, CAP 수색 첫날에는 강풍으로 인해 정오에 작전이 중단되었다. 넷째 날까지 CAP는 수색 작업에 14대의 항공기를 사용했으며, 그중 한 대는 실종된 항공기의 특정 신호를 자동으로 스캔할 수 있는 공중 실시간 큐잉 하이퍼스펙트럴 강화 정찰 (ARCHER) 시스템을 장착하고 있었다.
9월 10일까지 수색대는 이전에 확인되지 않은 8개의 추락 현장을 보고했으며, 그중 일부는 수십 년 된 것이었다. 이중 계산된 현장과 NTSB에 기록된 이전 잔해를 제외하면,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비행기 잔해는 3개로 줄었다. 당시에는 구조 임무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미확인 추락 현장의 항공기를 식별하는 데 최소한의 즉각적인 노력만 기울였지만, 일부에서는 그중 하나가 1964년 이후 실종된 찰스 클리퍼드 오글의 것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약 20여 대의 항공기가 네바다주 마인든의 주요 수색 기지와 캘리포니아주 비숍의 보조 수색 기지에서 대규모 수색에 참여했다.
9월 7일, 구글은 구글 어스 소프트웨어에 위성 이미지를 제공하는 계약업체와의 연결을 통해 포셋 수색을 도왔다. 포셋의 친구인 영국 기업가 리처드 브랜슨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구글과 협력하여 고해상도 이미지에 포셋의 항공기가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9월 8일, 디지털글로브의 새로운 고해상도 이미지 시리즈가 아마존 메카니컬 터크 베타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되어 사용자들이 수색을 위한 잠재적 관심 지역을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11일까지 최대 5만 명이 이 노력에 참여하여 26 m2 (278 ft2) 크기의 이미지 30만 개 이상을 면밀히 조사했다. 아마존의 피터 코헨은 9월 11일까지 전체 수색 지역이 최소 한 번은 커버되었다고 믿었다.
아마존의 수색 노력은 10월 29일 주에 측정 가능한 성공 없이 중단되었다. 신시아 라이언 소령은 나중에 그것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메카니컬 터크에서 항공기를 보았다고 주장하거나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색의 중요한 시기에, 심지어 몇 달 후에도 이메일을 폭주시켜 업무를 마비시켰다고 말했다. 많은 경우, 겉보기에 목격된 것들은 CAP 항공기가 수색 구역을 비행하는 이미지이거나 단순히 오래된 이미지의 잘못된 인공물로 판명되었다.
심령술사들은 민든의 수색 기지를 포셋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예측으로 가득 채웠다. 캐나다 출신의 한 남성은 라이언에게 매일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 라이언은 모든 메시지, 편지, 전화 통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미 공군 전문가들이 명백한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것을 검토하는 작업에 과부하가 걸렸다고 언급했다. 돌이켜보면, 크라우드소싱 노력은 "프라임 타임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라이언은 말했다.
9월 12일, 생존 전문가들은 포셋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9월 17일, 시빌 에어 패트롤 네바다 지부는 수색 작전과 관련된 모든 비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지만, 주 방위군 수색 비행, 개인 수색 비행 및 지상 수색은 계속되었다.
국가운송안전위원회(NTSB)는 포셋이 조종하던 비행기의 추락 가능성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했다. 예비 보고서는 포셋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항공기는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명시했지만, 나중에 이 추정은 삭제되었다. 리처드 브랜슨도 비슷한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2007년 9월 19일, 당국은 네바다 사막에서 포셋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확인했지만, 가능한 추락 현장으로 비행할 항공 승무원들은 대기 상태로 유지했다。 9월 30일, 그의 실종 당일의 레이더 데이터를 추가 분석한 후, 지상 팀과 두 대의 항공기가 수색을 재개했다고 발표되었다.
2007년 10월 2일, CAP는 수색 작전을 중단했다고 발표했다. 라이언은 나중에 이 수색이 미국 역사상 개인을 위한 가장 크고 복잡한 평시 수색이었다고 언급했다.
2008년 7월, 사이먼 도나토의 팀 어드벤처 사이언스는 일주일 동안 네바다-캘리포니아 국경을 수색했다. 2008년 8월 23일, 포셋이 실종된 지 거의 1년 후, 28명의 친구와 지지자들이 새로운 정보와 컴퓨터 모델링을 바탕으로 도보 수색을 실시했다. 이 수색은 9월 10일에 종료되었다.
6.1.1. 수색 및 구조 비용
2008년 5월 1일, 라스베이거스 리뷰-저널은 네바다 주지사 짐 기번스의 대변인 벤 키크헤퍼의 말을 인용하여 주지사가 스티브 포셋의 가족에게 포셋 수색 비용인 68.70 만 USD를 청구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키크헤퍼는 나중에 타호 데일리 트리뷴에 네바다주가 포셋의 미망인에게 강제적인 지불을 요구할 의도는 없으며, 그러한 지불은 자발적일 것이라고 말하며 초기 보도를 축소했다. 그는 "수색의 범위, 총 비용, 그리고 현재의 예산 어려움을 고려할 때, 그들이 일부 비용을 상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포셋이 실종된 날 출발했던 목장의 주인인 호텔리어 배런 힐턴은 이전에 수색 비용을 돕기 위해 20.00 만 USD를 자원했다.
키크헤퍼는 타호 데일리 트리뷴과의 나중 인터뷰에서 가족에게 청구서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키크헤퍼는 "아마도 서한의 형태가 될 것"이라며, 이 서한에는 주가 취한 조치, 관련 비용, 그리고 주의 현재 예산 어려움에 대한 재정적 개요가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 며칠 전, 주 비상 관리 국장인 프랭크 시라쿠사는 "정부가 단지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비용을 추징하는 전례는 없다. 길을 잃으면 우리가 찾아준다. 그것은 납세자의 돈으로 지불되는 서비스이다"라고 언급했지만, 법적으로 모든 결정은 기번스에게 달려 있다고 인정했다.
2008년 4월 10일 입법부 임시 재정 위원회 청문회에서 시라쿠사는 포셋 수색 과정에서 주가 부담한 비용을 검토하기 위해 독립 감사관을 고용했다고 밝혔지만, "우리는 감사를 하고 있지만 누구를 비판하거나 잘못된 것이 있었다고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모스 아베리 위원장은 시라쿠사에게 왜 자금이 부족한데도 주가 포셋 가족에게 수색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시라쿠사는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 리뷰-저널과의 나중 인터뷰에서 시라쿠사는 위원회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수색 작전 중 주 방위군이 주를 대신하여 발생시킨 재정적 부담에 대해 나중에 이의를 제기할 목적으로 감사관을 고용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가 비용 회수를 시도할 것이라는 보도에 대한 인터뷰에서 아베리는 일부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다고 말했다.
네바다주의 수색 비용은 160.00 만 USD였으며, "미국 내에서 한 사람을 위해 수행된 가장 큰 수색 및 구조 노력"이었다. 짐 기번스는 포셋의 유족에게 48.70 만 USD를 부담하도록 요청했지만, 유족은 포셋의 아내가 이미 개인 수색에 100.00 만 USD를 지출했다고 밝히며 거절했다.
6.2. 잔해 및 유해 수습

2008년 9월 29일, 한 등산객이 캘리포니아 동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포셋의 이륙 지점에서 남쪽으로 약 104607 m (65 mile) 떨어진 곳에서 구겨진 신분증 3개를 발견했다. 이 물품들은 포셋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FAA 발행 카드, 미국 글라이딩 협회 회원 카드, 그리고 1005 USD 현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1일 늦은 시각, 공중 수색 팀은 개인 물품이 발견된 곳에서 약 750 yd 떨어진 0.3 만 m (1.01 만 ft) 고도에서 지상 잔해를 발견했다. 그날 저녁 늦게 팀은 포셋 비행기의 꼬리 번호를 확인했다.
추락 현장은 북서-남동 방향의 능선(화산 능선)의 서쪽에 위치하며, 능선 정상에서 약 91 m (300 ft) 아래에 있다. 이 지역의 봉우리 고도는 0.4 만 m (1.30 만 ft)를 초과했다. 가파른 지형은 평균 12 m (40 ft)에서 18 m (60 ft) 높이의 폰데로사 소나무가 드문드문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바위와 암석 노두가 풀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추락 현장은 캘리포니아주 마데라군의 앤설 애덤스 야생지 내에 있다. 현장 근처의 다른 지명으로는 미나렛 광산(610 m (2000 ft) 서쪽), 에밀리 호수(1127 m (0.7 mile) 북동쪽), 미나렛 호수(2897 m (1.8 mile) 서남서쪽), 미나렛 봉우리(4828 m (3 mile) 서쪽), 데블스 포스트파일 국립 기념물(7242 m (4.5 mile) 남동쪽),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인구 밀집 지역인 매머드 레이크스(14484 m (9 mile) 동남동쪽)가 있다. 이 현장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동쪽으로 16093 m (10 mile) 떨어져 있다.
다음 이틀 동안, 지상 수색대원들은 0.1 m (2 in) 크기의 뼈 조각 4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뼈들은 인간의 것이 아니거나 DNA 검사를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10월 29일, 수색 팀은 포셋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큰 인골을 회수했다. 이 뼈들은 추락 현장에서 동쪽으로 805 m (0.5 mile)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동물에게 물린 자국이 있는 테니스화도 회수되었다.
11월 3일, 캘리포니아 경찰 검시관은 캘리포니아 법무부 법의학 연구소의 두 뼈에 대한 DNA 감식 결과 포셋의 DNA와 일치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마데라군 보안관 존 앤더슨은 포셋이 그러한 추락에서 즉사했을 것이며, 동물이 잔해를 끌고 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6.3. NTSB 조사 결과
2009년 3월 5일, NTSB는 보고서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비행기는 약 0.3 만 m (1.00 만 ft) 고도, 능선 정상에서 91 m (300 ft) 아래에 추락했다. 이 지역의 봉우리 고도는 0.4 만 m (1.30 만 ft)를 초과했다. 그러나 추락 당시 해당 지역의 밀도 고도는 약 0.4 만 m (1.27 만 ft)로 추정되었다.
이 항공기는 거의 30년 된 탠덤 2인승이었고, 포셋은 이 기종으로 약 40시간을 비행했다. 비행기 운용 매뉴얼에 따르면 0.4 만 m (1.30 만 ft) 고도에서 상승률은 분당 91 m (300 ft) (약 1.5 m/s)였다.
NTSB 보고서는 "살리나의 기상학자가 WRF-ARW(고급 연구 기상 연구 및 예보) 수치 모델을 사용하여 사고 지역의 조건을 수치 시뮬레이션했다. 오전 9시 30분(추락 대략 시간)에 모델은 해당 지역에서 약 분당 91 m (300 ft)의 하강 기류를 보였다"고 밝혔다. 장비 고장의 증거는 없었다.
보고서는 골격 파편에 대한 사후 검사가 마데라군 보안관 부서의 감독 하에 수행되었다고 명시했다. 사망 원인은 다발성 외상으로 판명되었다. ELT는 추락으로 인해 파손되었다.
2009년 7월 9일, NTSB는 추락의 추정 원인을 "조종사가 항공기의 상승 능력을 초과하는 하강 기류를 의도치 않게 만났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사고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하강 기류, 높은 밀도 고도, 그리고 산악 지형과의 조우가 있었다."
7. 영향 및 평가
스티브 포셋은 모험과 기록 경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전 세계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수많은 세계 기록은 항공, 항해, 탐험 분야의 한계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열기구와 고정익 항공기로 단독 무착륙 세계 일주를 성공한 것은 인간의 인내와 기술적 진보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모험은 단순한 개인적인 도전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와 기술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페를란 프로젝트를 통해 글라이더로 성층권 비행을 시도한 것은 고고도 비행 기술 발전에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기록 경신 노력은 새로운 항공기 설계와 소재 개발에도 영감을 주었다.
포셋의 비극적인 실종과 사망은 대규모 수색 및 구조 작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으며, 특히 외딴 지역에서의 항공 안전 및 비상 신호 장치의 개선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다. 그의 삶은 인간이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고 한계를 극복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대변하며, 그의 업적은 후세의 모험가와 과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줄 것이다.
8. 관련 항목
- 항공 분야 최초 비행 목록
- 해결된 실종자 사건 목록
- 세계 일주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