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어린 시절과 교육
스탠리 라우스는 1895년 4월 25일 이스트 서퍽의 로우 스토프트 근처 머트포드에서 식료품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베클스에 있는 존 리먼 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베클스에서 교사 훈련을 받았다. 라우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육군 왕립 야전 포병대 제272여단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하며 프랑스,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등지에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엑서터의 세인트 루크 칼리지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왓퍼드 남자 그래머 스쿨의 체육 교사가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 학교의 주요 스포츠를 축구에서 럭비로 변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 선수 경력
라우스는 아마추어 수준에서 커클리와 로우 스토프트 타운 FC 등의 클럽에서 골키퍼로 축구를 했다. 그러나 손목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1.3. 심판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라우스는 노리치 시티 FC의 경기를 관람하며 심판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는 세인트 루크 칼리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심판 자격증을 취득했고, 1927년 풋볼 리그 심판으로 데뷔했다. 같은 해 3월 13일 안트베르펜의 보쉴스타디온에서 열린 벨기에와 네덜란드 간의 친선 경기에서 첫 국제 경기 심판을 맡았다. 그는 총 34번의 국제 경기에서 심판을 보았다.
라우스의 심판 경력 중 가장 중요한 경기는 1934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1934년 FA컵 결승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맨체스터 시티 FC가 포츠머스 FC를 2대1로 꺾었다. FA컵 결승전 다음 날, 벨기에로 이동하여 국제 경기를 주관한 후 라우스는 심판직에서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 및 심판 경력을 마무리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라우스는 심판직 은퇴 후 축구 행정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혔으며, 잉글랜드 축구 협회와 국제 축구 연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2.1. 축구 행정
라우스는 축구 행정가로서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총무와 국제 축구 연맹의 회장을 역임하며 축구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1.1. 잉글랜드 축구 협회 (FA) 총무
라우스는 1934년부터 1962년까지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총무로 재직하며 잉글랜드 축구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행정가로서의 역량은 이 시기에 크게 발휘되었다.
2.1.2. FIFA 회장 재임

라우스는 1958년 UEFA 집행위원회에 합류했고, 1960년 3월에는 부회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1년, 전임 회장인 아서 드루리의 사망 이후 FIFA 회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1966년 FIFA 월드컵이 자국 잉글랜드에서 개최되었고, 잉글랜드가 우승을 차지하자 라우스는 직접 우승컵을 수여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그의 입장은 큰 비판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54년 FIFA에 가입했지만, 1958년 CAF에서 제명되었고, 1961년에는 반차별 규정을 이행하지 않아 FIFA에서 자격이 정지되었다. 1963년, 라우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여 축구 상황을 "조사"한 후, 재가입하지 않으면 축구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결론 내리며 재가입을 추진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협회는 1966년 FIFA 월드컵에는 백인 팀을, 1970년 FIFA 월드컵에는 흑인 팀을 출전시키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 직후 열린 다음 FIFA 총회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표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다시 자격이 정지되었고, 결국 1976년 FIFA에서 최종 제명되었다. 라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재가입을 계속 주장했으며, 심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1970년 제명)가 경쟁할 수 있도록 남아프리카 축구 연맹을 설립할 준비까지 했다. 그러나 1966년 FIFA 총회에서 CAF 회원국들이 FIFA에서 대거 탈퇴하겠다고 밝히자 그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1973년 칠레 쿠데타 이후, 라우스는 소련 팀이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훌리오 마르티네스 프라다노스 경기장에서 칠레와 월드컵 예선 경기를 치르도록 주장했다. 당시 이 경기장은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구금되어 있는 곳이었다. 소련은 경기를 거부했고, 칠레는 자동으로 1974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칠레는 본선에서 서독, 동독, 오스트레일리아와 한 조에 속해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라우스는 1974년 FIFA 회장 재선에 도전했지만, 주앙 아벨란제의 적극적인 선거 운동과 유럽의 FIFA 지배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불만, 그리고 라우스의 친남아프리카 입장으로 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의 반대 속에서 패배했다. 1974년 6월 11일 회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FIFA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2.2. 축구 규칙 개정 및 제도화
라우스는 축구 심판 및 행정가로서 축구 경기 규칙을 개정하고 새로운 심판 운영 방식을 도입하는 등 축구 발전에 중요한 제도적 업적을 남겼다.
2.2.1. 축구 경기 규칙 개정
라우스는 1938년 축구 경기 규칙을 다시 작성하여 규칙을 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는 축구 경기의 공정성과 대중적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2.2.2. 대각선 심판법 도입
그는 심판들이 경기장 내에서 효율적으로 위치를 선정하고 경기를 운영할 수 있도록 대각선 심판법(diagonal system of control)을 표준 관행으로 처음 도입했다. 1930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주심이었던 벨기에 심판 존 랑게누스에 따르면, 그는 자국 심판들이 경기장에서 유사한 과학적 위치 선정을 시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3. 개인사
스탠리 라우스의 사적인 삶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결혼 생활과 받은 명예는 기록되어 있다.
3.1. 결혼 및 가족
스탠리 라우스는 1924년 아드리엔 가콘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그는 국제 축구 연맹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이보 슈리커와 친분을 유지했다. 또한 라우스는 런던의 엑소니언 롯지 3415에 소속된 프리메이슨이었다.
3.2. 서훈 및 명예
라우스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서훈과 명예를 받았다.
- 1943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
- 1949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
- 1974년 FIFA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FIFA 명예 회장으로 추대
4. 사망
스탠리 라우스는 1986년 7월 18일 런던 패딩턴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1. 사망 당시 상황
그의 사망 원인은 백혈병이었다. 같은 해 9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거행되었다. 그는 부인인 레이디 라우스와 함께 브롬스그로브와 버밍엄 근처 리키 힐스에 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및 유산
스탠리 라우스는 축구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특정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5.1. 긍정적 평가
라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1938년 축구 경기 규칙을 재정비하여 규칙을 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이다. 이는 축구 경기의 공정성을 높이고 전 세계적인 보급에 기여했다. 또한 대각선 심판법을 도입하여 심판의 경기 운영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러한 제도적 개선은 현대 축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2. 비판 및 논란
라우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지지하고, 인종차별적 축구 협회를 FIFA에 재가입시키려 했던 시도로 인해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1974년 FIFA 회장 선거에서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73년 칠레 군부 쿠데타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던 경기장에서 소련과 칠레의 월드컵 예선 경기를 강행하려 했던 결정은 인권 문제에 대한 그의 무감각함을 보여주며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5.3. 기념 및 업적
라우스의 이름을 딴 단명한 라우스 컵이 1980년대에 4년간 개최되기도 했다. 또한 왓퍼드 FC의 홈 구장인 비커리지 로드의 서쪽 스탠드는 한때 '라우스 스탠드'로 불렸으나, 2014년 그레이엄 테일러 스탠드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는 1974년 『축구 경기 규칙의 역사』(A History of the Laws of Association Football영어)를 저술했으며, 1978년에는 자서전인 『축구의 세계: 스포츠에서의 일생』(Football Worlds: A Lifetime in Sport영어)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