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슈테판 하임의 생애는 어린 시절의 반파시즘 활동과 미국 망명, 동독 귀환 후의 체제 비판, 그리고 독일 재통일 이후의 정치 활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하임은 어린 시절부터 반파시즘적 성향을 보였다. 1913년 4월 10일 독일 작센주 케치니츠에서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9월 7일, 그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신문인 Volksstimme폴크스슈팀메독일어에 반군국주의적 시인 《Exportgeschäft엑스포르트게셰프트독일어》를 게재했다가 나치의 압력으로 자신이 다니던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하고 나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후 베를린으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으며, 미디어 연구를 전공했다.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피신했고, 이때부터 슈테판 하임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당시 중앙유럽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민주주의 국가의 이점을 활용하여 프라하에서 발행되는 독일어 신문인 《프라거 타그블라트》와 《보헤미아》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기사 중 일부는 체코어 신문에도 번역되어 실렸다. 이 시기 그는 멜히오르 더글러스, 그레고르 홀름 등 여러 필명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면서 그의 가족은 비극을 맞았는데, 하임의 부친은 나치의 협박으로 인해 자살했으며, 그의 일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몰살당했다.
1.2. 망명 및 미국 활동
1935년 하임은 유대인 학생 단체의 지원금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1936년 하인리히 하이네의 서사시 《Atta Troll아타 트롤독일어》에 대한 석사 학위 논문으로 학위를 마쳤다. 미국 망명 초기, 하임은 나치 정권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치의 세력이 더욱 확고해지는 현실을 깨달았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뉴욕에서 미국 공산당과 가까운 독일어 주간지 《Deutsches Volksecho도이체스 폴크스에코독일어》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문학과 언론을 통해 나치즘을 비판하고 미국인들의 인식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그는 반파시즘 정신에 기반한 미국인과 독일인의 반파시즘 연합 전선 형성을 목표로 삼았으며, 노동자, 여성, 아동, 소수 민족 등 소외 계층의 인권 향상을 위한 시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9년 11월 《Deutsches Volksecho도이체스 폴크스에코독일어》가 폐간된 후, 하임은 영어로 글을 쓰는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1942년 첫 소설 《인질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1943년부터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하임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리치 보이즈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망명자 한스 하베의 지휘 아래 심리전 부대에서 베르마흐트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한 텍스트를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 글들은 전단, 라디오, 확성기를 통해 배포되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십자군 전사》의 배경이 되었고, 당시 작성했던 텍스트들은 《Reden an den Feind레덴 안 덴 파인트독일어》(적에게 보내는 연설)라는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하임은 독일에 남아 에센의 《Ruhrzeitung루어차이퉁독일어》과 뮌헨의 《Die Neue Zeitung디 노이에 차이퉁독일어》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들 신문은 비나치화를 추진하는 미국 점령군에게 매우 중요한 매체였다. 그러나 나치즘과 협력했던 독일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완화하고 소련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을 은밀히 심어달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1945년 말 그는 다시 미국으로 전근 조치되어 전역 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했다. 1948년 말 보스턴에서 소설 《십자군 전사》를 출판했으나, 1948년 12월 24일 독일계 유대인 잡지 《아우프바우》의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코프는 이 소설을 혹평하며 하임의 묘사가 불충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팽배해지면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내 모순을 비판해 온 하임의 소설들과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은 미국 정부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52년 그는 한국 전쟁에 반대하며 자신이 받은 모든 미국 군사 훈장을 반납하고 프라하로 떠났다. 이듬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분단 후 사회주의 국가의 노선을 걷고 있던 동독으로 약 20년 만에 귀환했다.
1.3. 동독에서의 삶과 활동
동독 건립 5년째인 1953년, 약 20년 만에 귀향한 하임은 자신의 기대와 달리 동독 정권에 스탈린주의의 여파가 남아있고 독단적인 문화 정책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동독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지식인들은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압력을 받았다. 하임은 동독에 정착한 후 3년간 일간지 《Berliner Zeitung베를리너 차이퉁독일어》에서 근무하며 주로 동독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고,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했다. 그는 동독의 1세대 반나치즘 작가로서 동독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창작 활동 외에도 동독뿐 아니라 서독이나 미국의 《뉴욕 타임스》와 같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동독 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 힘썼다. 그는 독일인들에게 내면화된 파시즘, 과거 독일의 나치즘 청산 문제, 자본주의 비판, 반핵 평화 운동 등 정치, 사회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주제들을 망라했다. 일례로 1964년 12월 '사회주의권 작가들의 국제 콜로키움'에서 그는 동독의 위선과 숨김 문화, 사적 언어와 공적 언어가 다른 동독 사회의 내부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두려움 없는 토론, 금기 없는 토론, 당연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인정되는 환경만이 그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향 탓에 동독 정부의 미움을 산 그의 소설 대부분은 발간되지 못했으며, 그는 자신의 소설이 동독뿐 아니라 서독에서도 발간되기를 원했다. 탈스탈린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를 다룬 그의 책 《Fünf Tage im Juni퓐프 타게 임 유니독일어》(원제: Der Tag X데어 탁스독일어)의 출판은 1956년 거부되었다. 1965년 에리히 호네커가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중앙위원회 제11차 총회에서 하임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같은 해 하임은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고, 1969년 허가 없이 《Lassalle라살독일어》을 서독에 출판한 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외여행이 가능했으며 (예: 1978년 2개월간의 미국 방문), 그의 책들은 동독에서도 계속 출판되었지만, 발행 부수는 줄었다. 1971년 5월 호네커 신정권 출범 후 '금기 없음'이라는 연설로 문화 정책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하임은 1971년부터 다시 서독 출판사와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1976년 11월, 하임은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에 대한 항의 청원서에 서명한 동독 작가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시점부터 하임은 자신의 작품을 서방에서만 출판할 수 있었고, 독일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서독에서의 무허가 출판으로 다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Collin콜린독일어》의 출판으로 동독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었다. 1980년대에 슈테판 하임은 동독의 시민권 운동을 지지했으며, 1989년 가을 동베를린 시위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그는 1982년부터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독일 재통일을 주장했지만, 1989년 11월 말에는 동독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성명인 《Für unser Land퓌어 운저어 란트독일어》(우리의 조국을 위하여)의 공동 제안자이자 서명자가 되었다. 하임은 평화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11월 4일 알렉산더플라츠 시위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시위에서 "마치 누군가 창문을 열어젖힌 것 같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체된 시대, 음울하고 침체된 공기의 시대, 형식적인 말만 오가고 관료의 횡포와 관청의 맹목적이고 감각 없는 시대는 끝났다. 어떤 이가 말했듯이, 그 말이 옳았다.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실어증을 극복했고, 이제는 똑바로 걷는 법을 배울 때다."라고 연설했다. 독일 재통일 후, 하임은 1989년 11월 다시 동독 작가 연맹에 가입했으며, 1990년에는 법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1.4. 통일 이후의 정치 활동
독일 재통일 이후, 하임은 동서독 통합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독일 연방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겪는 차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재통일된 독일에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92년 그는 '정의를 위한 위원회'(Komitee für Gerechtigkeit코미테 퓌어 게레히티히카이트독일어)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다.
1994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하임은 무소속으로 당시 민사당의 자유 명단에 입후보하여 베를린 미테-프렌츨라우어베르크 지역구에서 독일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4년 11월, 그는 연방의회의 최고령 의원으로서 새로운 의회의 개원 연설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연합 소속 의원들은 동독의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였던 하임이 슈타지의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연설이 끝난 뒤 박수를 치지 않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의 연설은 연방 정부의 공식 홍보물에 실리지 않았다. 의회에서 무시당하며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국회의원들의 교제비를 늘리는 헌법 개정에 항의하며 당선 1년 만인 1995년 10월 의원직을 사퇴했다. 1997년에는 1998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사민당과 동맹 90/녹색당의 연합을 요구하는 'Erfurt Declaration에르푸르트 선언독일어'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2. 사상 및 이념
슈테판 하임의 사상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나치즘의 폭력과 가족의 비극을 직접 경험하며 반파시즘적 신념을 확고히 했다. 미국 망명 시절에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일깨우고 노동자, 여성, 아동, 소수 민족 등 소외 계층의 인권 향상을 위한 시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웠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로서, 매카시즘의 탄압을 피해 동독으로 귀환한 후에도 스탈린주의적 독단과 검열에 맞서며 반스탈린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하임은 동독 사회의 위선과 숨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두려움 없는 토론, 금기 없는 토론'이 진정한 사회주의의 길임을 역설했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바탕을 이루며, 전쟁의 무의미함과 평화주의에 대한 메시지가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독일 재통일 이후에도 동독인들에 대한 차별에 비판적이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모색하며 사회적 평등과 인간화된 사회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3. 작품 활동
슈테판 하임은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작품을 집필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역사적 소재를 활용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깊이 있는 주제 의식으로 평가받는다.
3.1. 주요 저서 목록
슈테판 하임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나치스 인 U.S.A.》(Nazis in U.S.A.), 1938년, 뉴욕 (영어)
- 《인질들》(Hostages), 1942년, 뉴욕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er Fall Glasenapp데어 팔 글라제나프독일어》, 1958년, 라이프치히
- 《미소 짓는 평화》(Of Smiling Peace), 1944년, 보스턴 (영어)
- 《십자군 전사》(The Crusaders), 1948년, 보스턴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er bittere Lorbeer데어 비터레 로어베어독일어》 또는 《Kreuzfahrer von heute크로이츠파러 폰 호이테독일어》, 1950년, 라이프치히
- 《이성의 눈》(The Eyes of Reason), 1951년, 보스턴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ie Augen der Vernunft디 아우겐 데어 페어눈프트독일어》, 1955년, 라이프치히
- 《골즈버러》(Goldsborough), 1953년, 라이프치히 (영어, 작가 본인 독일어 번역본 동시 출판)
- 《식인종들 외 단편들》(The Cannibals and Other Stories), 1958년, 베를린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ie Kannibalen und andere Erzählungen디 칸니발렌 운트 안데레 에어첼룽엔독일어》, 1953년, 라이프치히
- 《우주 시대》(The Cosmic Age), 1959년, 뉴델리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as kosmische Zeitalter다스 코스미셰 차이탈터독일어》, 1959년, 베를린
- 《그림자와 빛》(Shadows and Lights), 1963년, 런던 (영어)
- 독일어 번역본: 《Schatten und Licht샤텐 운트 리히트독일어》, 1960년, 라이프치히
- 《렌츠 페이퍼스》(The Lenz Papers), 1964년, 런던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ie Papiere des Andreas Lenz디 파피레 데스 안드레아스 렌츠독일어》, 1963년, 라이프치히
- 1848년 독일 혁명을 다룬다.
- 《건축가들》(The Architects), 1963년~1965년 집필, 미출판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ie Architekten디 아르히텍텐독일어》, 2000년, 뮌헨
- 영어판은 2005년 노스웨스턴 출판사에서 출간.
- 《불확실한 친구》(Uncertain Friend), 1969년, 런던 (영어)
- 독일어 번역본: 《Lassalle라살독일어》, 1969년, 뮌헨
- 《다윗 왕에 관한 보고》(The King David Report), 1973년, 뉴욕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er König David Bericht데어 쾨니히 다피트 베리히트독일어》, 1972년, 뮌헨
- 《여왕 대 디포》(The Queen against Defoe), 1975년, 런던 (영어)
- 독일어 번역본: 《Die Schmähschrift oder Königin gegen Defoe디 슈매슈리프트 오더 쾨니긴 게겐 데포독일어》, 1970년, 취리히
- 《6월의 닷새 간》(Five Days in June), 1977년, 런던 (영어)
- 1953년 동독 봉기를 다룬다.
- 《Collin콜린독일어》(Collin), 1980년, 런던 (영어)
- 독일어 원본: 《Collin콜린독일어》, 1979년, 뮌헨
- 《Der kleine König, der ein Kind kriegen mußte und andere neue Märchen für kluge Kinder데어 클라이네 쾨니히, 데어 아인 킨트 크리겐 무스테 운트 안데레 노이에 매르헨 퓌어 클루게 킨더독일어》(아기를 가져야 했던 작은 왕과 영리한 아이들을 위한 다른 새로운 동화들), 1979년 (독일어)
- 《Ahasver아하스페어독일어》(Ahasver), 1981년 (독일어)
- 영어 번역본: 《방랑하는 유대인》(The Wandering Jew), 1984년
- 《Atta Troll. Versuch einer Analyse아타 트롤. 페어주흐 아이너 아날리제독일어》(아타 트롤. 분석 시도), 1983년 (독일어)
- 《Schwarzenberg슈바르첸베르크독일어》(Schwarzenberg), 1984년 (독일어)
- 슈바르첸베르크 자유 공화국에 대한 소설.
- 《Reden an den Feind레덴 안 덴 파인트독일어》(적에게 보내는 연설), 1986년 (독일어)
- 《Nachruf나흐루프독일어》(부고), 1988년 (독일어)
- 자서전
- 《Meine Cousine, die Hexe und weitere Märchen für kluge Kinder마이네 쿠지네, 디 헥세 운트 바이테레 매르헨 퓌어 클루게 킨더독일어》(나의 사촌, 마녀, 그리고 영리한 아이들을 위한 다른 동화들), 1989년 (독일어)
- 《Auf Sand gebaut아우프 잔트 게바우트독일어》(모래 위에 지어진), 1990년 (독일어)
- 단편 소설집.
- 《Stalin verlässt den Raum스탈린 페어래스트 덴 라움독일어》(스탈린이 방을 떠나다), 1990년 (독일어)
- 정치 평론집.
- 《Einmischung아인미슁독일어》(개입), 1990년 (독일어)
- 《Filz필츠독일어》(펠트), 1992년 (독일어)
- 《Radek라덱독일어》(Radek), 1995년 (독일어)
- 카를 라데크에 대한 소설.
- 《Der Winter unsers Missvergnügens데어 빈터 운저스 미스페어그뉘겐스독일어》(우리의 불만의 겨울), 1996년 (독일어)
- 《Immer sind die Weiber weg und andere Weisheiten임머 진트 디 바이버 벡 운트 안데레 바이츠하이텐독일어》(항상 여자들이 사라지고 다른 지혜들), 1997년 (독일어)
- 《Pargfrider파르크프리더독일어》(Pargfrider), 1998년 (독일어)
- 《Immer sind die Männer schuld임머 진트 디 매너 슐트독일어》(항상 남자들 탓), 2002년 (독일어)
- 《Offene Worte in eigener Sache오페네 보르테 인 아이게너 자헤독일어》(자신에 대한 솔직한 말), 2003년 (독일어)
3.2. 작품의 주제 및 특징
하임의 작품은 자유, 저항, 사회 정의라는 큰 틀 아래 전쟁 비판, 소외 계층과의 연대 의식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그의 첫 소설 《인질들》은 가족의 박해 경험을 바탕으로 체코에서의 반나치 지하 운동을 묘사하며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을 담은 《십자군 전사》는 저널리스트적 사실주의로 한 시대사를 간파한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임은 동독 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이나 성경 이야기를 패러디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예를 들어 《Lassalle라살독일어》, 《다윗 왕에 관한 보고》, 《유랑하는 유대인》 등에서 현실을 역사적, 성경적 소재 속에 이식함으로써 사실 조명에 타당성과 현실성을 부여했다.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목격하고 쓴 《6월의 닷새 간》은 동독에서 출판이 거부되었으나 서독에서 출판되며 사건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Collin콜린독일어》은 체제 비판의 목소리가 명확한 실화 소설로, 과거의 정치적 과오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독일 재통일 이후에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동료들을 다룬 《Radek라덱독일어》에서 "혁명의 잘못된 탄생"에 대해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80대의 나이에도 《Der Winter unsers Missvergnügens데어 빈터 운저스 미스페어그뉘겐스독일어》, 자전적 소설인 《Pargfrider파르크프리더독일어》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들은 전쟁의 맹목성, 소외 계층의 공동체 의식, 그리고 작가로서 지녀야 할 표현의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강조한다.
4. 수상 및 명예
슈테판 하임은 그의 문학적 성취와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여러 상과 명예를 얻었다.
- 1953년: 하인리히 만 상
- 1959년: 동독 국가상 (2등급)
- 1990년: 베른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199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1993년: 예루살렘상 (사회 속 개인의 자유를 위한 문학 부문)
- 2000년: 핵무기 철폐를 위한 국제 의사회 (IPPNW) 평화 훈장
- 2001년: 케치니츠 명예 시민권
5. 평가 및 영향
슈테판 하임은 그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독일 사회, 특히 동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반체제 인사로서 끊임없이 정의와 자유를 추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5.1. 긍정적 평가
하임은 반파시즘 작가로서 나치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일깨우고 소외 계층의 인권 향상을 위해 힘쓴 점이 높이 평가된다. 동독 정권의 검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체제 모순을 비판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동독 사회의 위선과 숨김 문화를 지적하며 '두려움 없는 토론'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소재를 통해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에도 동독인들에 대한 차별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사회적 평등을 위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주장하는 등, 평생을 반체제 인사이자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투사로 살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핵무기 철폐를 위한 국제 의사회가 그에게 평화 훈장을 수여한 것은 그의 지속적인 평화 운동에 대한 노고를 인정한 결과이다.
5.2. 비판 및 논쟁
하임의 정치적 입장과 특정 작품 및 발언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국 망명 시절 출판된 《십자군 전사》에 대해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코프는 하임의 묘사가 불충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하며, 하임이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 비중립적인 관점을 제시한다고 지적했다.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연합 소속 의원들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그의 개원 연설에 박수를 치지 않는 등 반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동독 체제와의 관계에서 검열을 거부하고 서독에서 작품을 출판하여 벌금형을 선고받거나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는 등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다.
6. 대중 문화 속 모습
슈테판 하임의 작품 중 일부는 영화,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 영화**:
- 《인질들》 (Hostages / Der Fall Glasenapp데어 팔 글라제나프독일어): 1943년 미국에서 프랭크 터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 《Die Frau des Architekten디 프라우 데스 아르히텍텐독일어》(건축가의 아내): 2003년 ARD에서 디트하르트 클란테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 텔레비전 드라마**:
- 《Lenz oder die Freiheit렌츠 오더 디 프라이하이트독일어》(렌츠 또는 자유): 1986년~1987년 SWF 바덴바덴에서 4부작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 《Collin콜린독일어》(콜린): 1981년 ARD에서 2부작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 라디오 드라마**:
- 《다윗 왕에 관한 보고》: 2000년 미텔도이처 룬트풍크에서 오디오 CD로 제작되었다.
- 《십자군 전사》 (The Crusaders: Der bittere Lorbeer데어 비터레 로어베어독일어 / Kreuzfahrer von heute크로이츠파러 폰 호이테독일어): 2004년 랜덤 하우스 오디오에서 4장의 오디오 CD로 제작되었다.
- 그의 자서전 《Nachruf나흐루프독일어》와 소설 《Die Architekten디 아르히텍텐독일어》, 《Ahasver아하스페어독일어》 등 다수의 작품이 작가 본인의 낭독 또는 다른 성우의 낭독으로 오디오 CD로 출판되었다.
7. 사망
슈테판 하임은 2001년 12월 16일, 이스라엘에서 열린 하인리히 하이네 회의에 참석한 후 사해 연안의 아인 보케크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향년 88세였다. 그의 시신은 베를린 바이센제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