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샤쿠 소엔(釈 宗演샤쿠 소엔일본어, 1860년 1월 10일 ~ 1919년 10월 29일)은 일본의 임제종 선사로, 서구에 선불교를 가르친 최초의 선구자이다. 그는 가마쿠라의 겐초지와 엔가쿠지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스승인 이마키타 고센으로부터 법계를 전수받았다.
샤쿠 소엔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 의회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서구 사회에 선불교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폴 카루스와 만나 서양에 선불교를 소개할 인물을 요청받았고, 이에 따라 그의 제자인 스즈키 다이세쓰를 미국으로 보냈다. 이후 두 차례의 미국 방문을 통해 직접 선불교를 지도하고 강연하며 서구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한 러일 전쟁 중 일본군 군종으로 활동하며 전쟁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많은 서양인들에게 선불교를 이해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동서양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군종 활동과 전쟁관은 후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및 배경
샤쿠 소엔은 일본 후쿠이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여러 고승들 밑에서 엄격한 수행과 교육을 거치며 임제종의 선사로서 성장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샤쿠 소엔은 1860년 1월 10일(음력 안세이 6년 12월 18일) 후쿠이현 오이군 다카하마촌(현재의 다카하마정)의 농가에서 이치노세 고에몬(一瀬吾右衛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쓰네지로(常次郎쓰네지로일본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강렬하고 호방하여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1870년, 10세(세는 나이 12세)가 되던 해, 이치노세 가문의 친척이자 교토 묘신지 덴주인(天授院)의 에쓰케이 슈켄(越渓守謙에쓰케이 슈켄일본어)이 고향에 돌아왔다가 교토로 돌아갈 때, 그의 형의 권유로 쓰네지로는 승려가 되기 위해 에쓰케이에게 맡겨졌다. 에쓰케이는 쓰네지로를 쾌히 받아들이며 "호걸이 될 생각이라면 허락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쓰네지로는 에쓰케이 밑에서 득도했으며, 당시 에쓰케이는 덴주인에 승려 수련원을 개설한 시기였다. 묘신지 경내에 학림인 '한냐린(般若林)'이 설립되어 그곳에서 한문 서적과 선불교 서적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2.2. 교육 및 초기 수행
1873년, 샤쿠 소엔은 겐닌지 탑두인 료소쿠인(両足院)의 지바 슌가이(千葉俊崖지바 슌가이일본어) 스승 밑에서 학문과 수행에 정진했다. 이곳에서 그는 훗날 겐닌지파 관장이 되는 다케다 모쿠라이(竹田黙雷)와 인연을 맺고 평생의 지우가 되었다. 그러나 1875년 슌가이 스승이 입적하면서 겐닌지 산내의 학림 생활을 마쳤다.
1876년, 스승 에쓰케이의 명령으로 에히메현 야와타하마의 다이호지(大法寺)로 가서 에쓰케이의 법사 제자인 니시야마 가잔(西山禾山니시야마 가잔일본어) 밑에서 수행했으나, 짧은 기간 만에 좌절하고 에쓰케이의 허락을 받아 시가현 미이데라의 나카가와 다이호(中川大宝나카가와 다이호일본어) 율사에게 가서 구사론을 연구했다. 미이데라에서 학문을 닦는 동안, 당시 한조 신조(阪上真浄, 훗날 임제종대학 초대 학장)가 주지로 있던 에이운지(永雲寺, 다이토쿠지파)에 약 1년간 머물렀다. 이러한 인연으로 샤쿠 소엔은 훗날 임제종대학(현재의 하나조노대학)의 제2대 학장이 되었다.
1877년, 다시 에쓰케이의 명을 받아 비젠국 오카야마시의 명찰인 소겐지의 기잔 젠라이(儀山善来기잔 젠라이일본어) 밑에서 선 수행을 하게 되었다. 기잔 젠라이는 샤쿠 소엔의 득도 스승인 에쓰케이 슈켄과 엔가쿠지에서 스승이 된 이마키타 고센의 스승이기도 했다. 샤쿠 소엔이 기잔 젠라이를 사사할 당시, 기잔은 이미 76세의 노경이었지만, 그는 기잔으로부터 제창과 참선 지도를 받았다.
3. 선사로서의 경력
샤쿠 소엔은 일본 임제종의 중요한 선사로서 여러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며 종파 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1. 스승과 법계 전수
1878년 가을, 샤쿠 소엔은 가마쿠라 엔가쿠지의 이마키타 고센(今北洪川)에게 참선하며 수행을 이어갔다. 5년 후인 1883년, 고센은 샤쿠 소엔에게 "젊은 엔 선사, 참학에 힘쓴 지 오래되었으니, 이미 내 실내의 중요한 일을 다 마쳤다. 이에 게송을 던져 오랜 고생의 정을 펼치니, 노승이 축하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 운을 빌려 증명의 뜻을 보인다"는 내용의 인가증명 게송을 보냈다. 이때 샤쿠 소엔의 나이는 만 23세였다.
3.2. 사찰 주지 및 지도자 역할
1884년, 샤쿠 소엔은 가마쿠라 엔가쿠지 내에 있는 호조 도키무네를 모시는 탑두 사원인 붓니치안(仏日庵)의 주지가 되었다. 같은 해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나가타에 있는 호린지(寶林寺)에서 『선해일람(禅海一瀾)』을 제창했다.
1885년, 그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현재의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입학했다. 스승 고센은 게이오 입학을 반대했지만, 도리오 도쿠안(鳥尾得庵) 등의 도움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인연을 맺고 오랜 친분을 이어갔다.
1887년, 게이오기주쿠 별과에서 공부한 후, 스리랑카로 가서 불교의 원전을 배우고자 했다. 당시 스리랑카로 가는 여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마키타 고센은 이 또한 맹렬히 반대했지만, 야마오카 뎃슈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도움으로 스리랑카행을 감행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에게 "그대가 도에 뜻을 두었으니, 마땅히 스리랑카로 건너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권했고, 야마오카 뎃슈는 "화상(和尚)의 눈이 너무 날카로우니, 좀 더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1887년 3월 31일, 샤쿠 소엔은 콜롬보에 도착하여 팔리어를 배우고 승원에서 수행했으며, 같은 해 5월 7일 사미승으로 출가하여 판냐케투(Pannaketu)라는 법명을 받고 스리랑카 승복을 입었다. 그는 1889년 10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스리랑카 체류 중이던 1889년에는 『서남지불교(西南之佛敎)』를 간행하여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를 동북불교와 서남불교, 나아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제시했다. 그는 스리랑카, 샴(태국), 버마(미얀마), 캄보디아를 소승불교로, 지나(중국), 조선(한국), 몽골, 만주, 타타르, 티베트 등을 대승불교로 보았다.
1889년 귀국 후, 나가타 호린지 도장에서 처음으로 선사로서 수행자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1892년 1월 16일, 스승 이마키타 고센이 입적하자, 샤쿠 소엔은 탑두 붓니치안 주지직을 사임하고 엔가쿠지에 머물렀다. 그리고 엔가쿠지파의 공선에 의해 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엔가쿠지파 관장 겸 엔가쿠지파 전문도장 사가(師家)에 취임했다.
1902년, 시카고 세계 종교 의회에서 통역을 맡았던 노무라 요조(野村洋三)의 소개로 샌프란시스코의 사업가 알렉산더 러셀의 아내 아이다 러셀과 그 친구들이 엔가쿠지를 방문하여 산내 쇼덴안(正伝庵)에 머물면서 샤쿠 소엔에게 참선했다. 외국인이 일본에 와서 참선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귀국할 때까지 일행은 열정적으로 참선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03년에는 겐초지파 전체의 요청으로 관장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1905년, 엔가쿠지파 관장직과 겐초지파 관장직을 모두 사임하고 가마쿠라 엔가쿠지파의 도케이사(東慶寺) 주지가 되었다. 이때 엔가쿠지파 관장에는 샤쿠 소엔의 엔가쿠지 수행 시절 사형(師兄)인 미야지 소카이(宮路宗海, 쇼코쿠지 오기노 도쿠온의 법사)가 취임했다.
1911년, 약 1개월간 조선을 순회했으며, 이듬해에는 만주를 순회했다. 1913년에는 대만을 순회했다. 1914년, 임제종대학(훗날 하나조노대학)의 제2대 학장에 취임하여 1917년까지 학장직을 수행했다.
1916년, 엔가쿠지파 관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법사 제자인 후루카와 교도(古川尭道)를 승당 사가에 임명하고 자신은 관장직만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벽암록』 강설을 마쳐 벽암회를 폐회했다。 12월 9일에는 제자인 나쓰메 소세키의 장례식 도사를 맡았으며, 계명(戒名)도 샤쿠 소엔이 지어주었다. 1917년에는 약 3개월간 중화민국을 순회했다.
4. 서구에 젠 소개
샤쿠 소엔은 서구 사회에 선불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 역사적인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의 활동은 서양에서 선불교가 확산되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4.1. 1893년 시카고 세계 종교 의회 참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의 일환으로 개최된 세계 종교 의회에 임제종 대표로서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을 받아 자금을 조달하고, 8월에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10여 일간의 선박 여행 끝에 밴쿠버 (워싱턴주)에 도착했다. 회의는 9월 11일부터 17일간 진행되었다.
샤쿠 소엔은 두 차례에 걸쳐 연설했으며, 첫 번째 연설은 "불교의 요지 및 인과법"이라는 제목으로 부처의 가르침의 기본이 인과의 법이라고 설파했다. 이 연설은 당시 젊고 무명이었던 그의 제자 스즈키 다이세쓰가 일본에서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샤쿠 소엔의 연설을 들은 저명한 불교학자이자 미국의 철학자 폴 카루스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인연으로 샤쿠 소엔이 일본으로 귀국한 후 카루스는 "영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샤쿠 소엔은 수행하고 있던 거사(居士)인 스즈키 다이세쓰를 미국으로 보냈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훗날 카루스 밑에서 번역 등의 일을 도우며 서양에서 선불교의 주요 학자이자 번역가가 되었다.
4.2. 첫 번째 미국 방문 및 활동
샤쿠 소엔은 1905년, 이전에 일본을 방문하여 그에게 참선했던 아이다 러셀의 권유로 통역인 스즈키 다이세쓰와 시자(侍者) 센자키 뇨겐(千崎如幻)을 대동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러셀 저택에 약 9개월간 머물며 선을 지도했다. 아이다 러셀은 샤쿠 소엔으로부터 공안을 연구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4.3. 두 번째 미국 방문 및 국제 활동
1906년, 샤쿠 소엔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새해를 맞이한 후, 대리공사 히오키 마스(日置益)와 함께 워싱턴 D.C.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견했다. 스즈키 다이세쓰의 통역을 통해 세계 평화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발길을 돌려 런던에서는 오쿠라구미(大倉組)의 가도노 주구로(門野重九郎)를 만났고, 이외에도 유럽 각 도시, 스리랑카, 인도 등 아시아를 역방하고 홍콩에도 들러 이듬해인 1906년 8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5. 주요 활동 및 사상
샤쿠 소엔은 선사로서의 활동 외에도 다양한 저술과 강연을 통해 그의 사상을 널리 알렸으며, 당대의 지식인 및 문화계 인물들과 교류하며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5.1. 군종 활동과 전쟁관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샤쿠 소엔은 겐초지파 관장의 자격으로 제1사단 사령부에 소속되어 만주에서 종군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흔들림 없는 평정심으로 죽음에 맞서는 법을 가르치며,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마음의 악마(心魔신마일본어)'라고 부른 내면의 적까지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1904년,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그에게 전쟁을 비난하는 데 동참할 것을 요청했으나, 샤쿠 소엔은 이를 거부하며 "때로는 무고한 국가, 민족 또는 개인의 가치와 조화를 지키기 위해 살인과 전쟁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 후 그는 일본의 승리를 사무라이 문화의 덕분으로 돌렸다.
5.2. 저술 및 강연
샤쿠 소엔은 수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 자신의 선 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주요 저서 중 영어로 번역된 것들로는 『Sermons of a Buddhist Abbot: A Classic of American Buddhism』(2004년)과 『Zen for Americans』(1989년) 등이 있다. 일본어 저서로는 1889년의 『서남지불교(西南之佛敎)』, 1890년의 『석륜도지(錫崘島志)』, 1893년의 『만국종교대회일람(萬國宗敎大會一覧)』, 1894년의 『창룡굴년보(蒼龍窟年譜)』, 1896년의 『제창십우도(提唱十牛圖)』, 1897년의 『불조삼경강의(佛祖三経講義)』와 『보경삼매강의(寶鏡三昧講義)』, 1900년의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 1901년의 『선해일람강의(禪海一瀾講義)』, 1903년의 『사료간강화(四料簡講話)』, 1904년의 『항마일사(降魔日史)』, 1906년의 『Sermons of a buddhist abbot』, 1907년의 『신심명강화(信心銘講話)』와 『한갈등(閑葛藤)』, 『구미운수기(欧米雲水記)』, 1908년의 『평석정좌의권유(評釋静坐のすすめ)』, 1909년의 『전제록(筌蹄録)』과 『일자불설(一字不説)』, 1910년의 『용맹정진(勇猛精進)』, 1912년의 『불교가정강화(佛教家庭講話)』와 『좌선화찬강화(坐禪和讃講話)』, 1913년의 『수양의지절(修養の枝折)』, 1914년의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密多経)』, 1915년의 『염화미소(拈華微笑)』, 『유마경제창(維摩經提唱)』 제1~3집, 『벽암록강화(碧巌録講話)』 상권, 1916년의 『세상의 밖(世の外)』, 『금강경사족(金剛經蛇足)』, 『종연선화(宗演禪話)』, 『벽암록강화(碧巌録講話)』 하권, 1917년의 『임기응변(臨機應變)』과 『개중의낙지(箇中の樂地)』, 1918년의 『선해일람강화(禪海一瀾講話)』, 『관음경강화(觀音經講話)』, 『연운초수 능가도인수기(燕雲楚水 楞伽道人手記)』, 『교정임제록(校訂臨済録)』, 1919년의 『무문관강의(無門關講義)』,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叩けよ開かれん)』, 『화안애어(和顔愛語)』, 『쾌인쾌마(快人快馬)』 등이 있다.
1906년 11월에는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노다 다이카이(野田大塊), 하야카와 셋도(早川雪堂) 등에 의해 '벽암회'가 결성되어 매월 샤쿠 소엔의 『벽암록』 제창에 많은 명사들이 귀 기울였다.
5.3. 주요 제자와 교류 인물
샤쿠 소엔은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과 교류했다.
인물 | 생몰년 | 직업/특징 |
---|---|---|
스즈키 다이세쓰 | 1870년 ~ 1966년 | 불교학자, 철학자. 서구에 선불교를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
센자키 뇨겐 | 샤쿠 소엔의 시자(侍者)로 미국 방문에 동행. | |
나쓰메 소세키 | 1867년 ~ 1916년 | 소설가, 영문학자. 샤쿠 소엔의 제자로, 그의 장례식을 샤쿠 소엔이 주관하고 계명을 지어줌. |
도쿠가와 요시히사 | 1884년 ~ 1922년 | 정치가. |
마에다 도시나리 | 1885년 ~ 1942년 | 육군 대장. |
마쓰다이라 나오아키 | 1885년 ~ 1942년 | 농업 경영자, 정치가. |
하마구치 오사치 | 1870년 ~ 1931년 | 제27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
노다 우타로 | 1853년 ~ 1927년 | 사업가, 중의원 의원, 체신대신, 상공대신. |
이자카 슈지 | 1851년 ~ 1917년 | 교육자, 말더듬 교정의 일인자. |
그의 법사(法嗣)로는 후루카와 교도(古川尭道, 제6·8대 엔가쿠지파 관장), 세이고 호가쿠(棲梧寶嶽, 제9대 엔가쿠지파 관장), 오타 가이겐(太田晦厳, 제7대 엔가쿠지파 관장, 제8대 다이토쿠지파 관장), 마미야 에이슈(間宮英宗, 제2대 호코지파 관장), 샤쿠 다이비(釈大眉, 제4대 고쿠타이지파 관장), 샤쿠 소카쓰(釈宗活, 제자로 고토 즈이간이 있음), 마루야마 에칸(円山慧勘), 오가메 소타쓰(大亀宋達) 등이 있다.
6. 말년과 죽음
샤쿠 소엔은 말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의 죽음은 불교계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6.1. 말년의 활동
1916년, 샤쿠 소엔은 엔가쿠지파 관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는 법사 제자인 후루카와 교도(古川尭道)를 승당 사가에 임명하고, 자신은 관장직만을 수행했다. 같은 해 10월, 『벽암록』 강설을 마쳐 벽암회를 폐회했다. 12월 9일에는 제자인 나쓰메 소세키의 장례식 도사를 맡았으며, 계명(戒名)도 샤쿠 소엔이 지어주었다. 1917년에는 약 3개월간 중화민국을 순회했다.
6.2. 죽음
샤쿠 소엔은 1919년 10월 29일(다이쇼 8년 11월 1일) 가마쿠라에서 폐렴으로 입적했다. 향년 61세였다.
7. 유산과 평가
샤쿠 소엔은 서구에 선불교를 소개한 선구자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산을 남겼지만, 그의 특정 활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7.1. 서구 젠 불교의 선구자
샤쿠 소엔은 일본인 승려로서 처음으로 '젠(Zen)'이라는 이름으로 선불교를 서구에 전파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893년 시카고 세계 종교 의회에서의 연설과 폴 카루스와의 만남, 그리고 제자 스즈키 다이세쓰를 미국으로 보낸 결정은 서구에서 선불교가 학문적으로, 그리고 수행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미국 방문을 통해 직접 선을 지도하고 강연하며 서구 불교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노력 덕분에 선불교는 서양에서 중요한 불교 전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7.2. 문화적 기여
샤쿠 소엔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동서양 문화 교류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선 사상을 서양의 언어와 사유 체계에 맞게 소개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서양인들이 동양 사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가르침은 서양의 철학, 심리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미국에서 불교가 대중화되는 데 기반을 다졌다.
7.3. 비판 및 논란
샤쿠 소엔의 활동 중 일부는 후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러일 전쟁 중 일본군 군종으로서의 활동과 그의 전쟁관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레프 톨스토이의 반전 요청을 거부하며 "때로는 무고한 국가, 민족 또는 개인의 가치와 조화를 지키기 위해 살인과 전쟁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불교의 비폭력 정신과 상충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브라이언 빅토리아의 저서 『전쟁 속의 젠(Zen at War)』 등에서는 샤쿠 소엔을 포함한 당시 일본 불교계의 일부 지도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협력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업적을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