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세지마 류조(瀬島 龍三せじま 류조일본어)는 1911년 12월 9일 도야마현에서 태어나 2007년 9월 4일 사망한 일본의 군인이자 기업가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제국 육군 대본영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며 주요 작전 입안에 깊이 관여했으며, 종전 후 11년간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겪었다. 귀국 후에는 이토추 상사에 입사하여 회장까지 승진하며 일본 경제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세지마는 '쇼와의 참모'로 불리며 전후 일본의 행정 개혁과 공기업 민영화에 기여하는 등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역대 총리들의 고문으로서 국가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한국의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 독재 정권 인사들에게도 자문하며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전쟁 책임과 역사 수정주의적 역사관, 그리고 우익 활동으로 인해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의 확산과 패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전쟁이 미국의 강경 정책으로 인한 불가피한 방어전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의 식민지화는 당연한 조치"라고 옹호하고, 가미카제 공격을 "자발적"이라고 평가하는 등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드러냈다. 이러한 그의 우익적 사상과 활동은 일본 사회는 물론 주변국,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을 야기했다. 그의 삶은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이 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세지마 류조는 도야마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걸었다.
2.1. 출생과 가족 배경
세지마 류조는 1911년 12월 9일, 도야마현 니시토나미군 마쓰자와촌 와시지마(현재의 오야베시 와시지마)의 농가에서 마쓰자와촌 촌장이자 일본 제국 육군 후비역 보병 소위였던 세지마 류타로(瀬島龍太郎세지마 류타로일본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지마 류타로는 러일 전쟁 당시 노기 마레스케 장군 휘하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다.
세지마는 1935년, 2·26 사건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의 대역으로 살해된 마쓰오 덴조 보병 대좌의 장녀이자 오카다 게이스케의 조카인 기요코(清子, 1916년 ~ 2007년)와 결혼했다. 그의 아내 기요코는 2007년 6월 21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지마에게는 시게요와 요시코라는 두 딸이 있으며, 시게요의 남편 오가타 다케시(緒方威)는 이토추 상사의 중역을 거쳐 반도체 제조 및 전자 시스템 기업인 이노텍의 회장을 지냈다. 그의 동생 세지마 도시오는 도쿄 피아노 공업을 설립하고 2대 사장을 역임했다.
2.2. 교육
세지마는 도나미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쿄 육군 유년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육군 예과 사관학교를 거쳐 193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제44기를 315명 중 2등으로 졸업하며 은사 시계를 하사받았다. 같은 해 10월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도야마의 보병 제35연대에 배속되었다.
1938년 12월 8일에는 일본 육군대학교 제51기를 51명 중 1등으로 졸업하며 은사 군도를 하사받았다. 당시 어전 강연 주제는 "일본 무장의 통수에 대하여"였다. 이듬해인 1939년 1월 15일 관동군 예하 제4사단 참모로 만주에 부임했으며, 같은 해 5월 15일에는 도이하라 겐지 육군 중장이 사령관으로 있던 제5군 참모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참모본부 막료부(작전과)에 보직되어 곧 참모로 승진하여 개전 전에는 대소련 작전을 담당했다. 이듬해인 1940년에는 관동군 특종 연습의 작전 입안에 참여했다.
3. 군 경력
세지마 류조는 대일본제국 육군 장교로서 태평양 전쟁의 주요 작전 입안 및 수행에 깊이 관여했으며, 종전 후에는 시베리아 억류를 겪었다.
3.1. 태평양 전쟁 시기 활동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개전을 의미하는 암호 "히노데와 야마가타(ヒノデハヤマガタ)"를 세지마 참모가 고안했다. 개전 후에는 남동 태평양 방면 작전을 담당했으며, 1945년 7월 관동군 참모로 전보될 때까지 참모본부 작전과에서 근무하며 전선에 내려지는 많은 작전 명령을 기안했다. 그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참모본부 작전과에서 육군 중추에 머물렀으며, 장인 마쓰오 덴조의 처남이자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움직이던 오카다 게이스케 (전 총리, 해군 대장)와 연락을 유지했다.
1944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세고시 료조(瀬越良三)"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외교 전서사로서 모스크바에 출장하기도 했다. 1945년 1월 15일 시마무라 노리야스(島村矩康) 대좌가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세지마가 선택되어 같은 해 2월 연합함대 참모를 겸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동기 중 선발되어 육군 중좌로 진급했다. 기쿠스이 작전 (같은 해 4월 ~ 6월) 당시, 남규슈에 출장하여 월말까지 연합함대 참모로서 동료인 치하야 마사타카와 함께 본토 결전 준비를 위해 일본 각지를 조사했다. 특히 고치현 연안을 미군 상륙 예상 지점으로 설정하고 제55군의 작전 지도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세지마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내각서기관장이었던 사코미즈 히사쓰네와 친척 관계임을 치하야에게 털어놓고, 사코미즈를 통해 스즈키 간타로 총리에게 전황의 실상을 호소했다고 한다.
1945년 7월 1일, 관동군 참모로 보직되어 만주로 부임했다. 전임자는 황족인 다케다 쓰네히사 육군 중좌였다. 같은 해 8월 15일 일본의 항복 후인 8월 19일, 자린도르지에서 소련군과 휴전 협상을 벌였다. 일본 측 참가자는 관동군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 중장, 작전 주임 세지마 중좌,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미야가와 후나오였으며, 소련 측 참가자는 극동 소련 적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제1극동방면군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동군 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테렌티 슈티코프 대장이었다.
이때 세지마는 군사 사절로서 현지를 방문했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같은 해 9월 5일, 관동군 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과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 중장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 협상 당시 일본인 노동력 제공에 대한 밀약이 교환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세지마는 이를 부정했다.
3.2. 시베리아 억류
세지마는 소련의 하바롭스크 제45특별지구(장교 수용소)로 보내져 11년간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노동 의무가 없는 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동을 강요받았으며, 건축 작업에 종사했다. 세지마는 다카하시 여단에 배속되었으나, 특별한 기술도 없고 여러 차례 폐렴을 앓아 몸이 쇠약해져 외부 노동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반장 다카하시 시게타카의 배려로 미장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훗날 이때의 일을 해학적으로 "사관(佐官)이 미장(左官)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억류 중에는 육군 장교였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는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연합국 측의 명령으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17일, 구사바 다쓰미 중장과 마쓰무라 지쇼 소장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행기로 도쿄로 호송되어 소추측 증인으로 출정했다. 소련 측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증언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세지마는 소련 측이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언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가족과의 면회를 제안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절했다고 했지만, 결국 소련 측의 배려로 가족과 면회했다. 출정 전 세지마는 구사바 다쓰미, 마쓰무라 지쇼, 가라후토청 장관 오쓰와 함께 소련 장교들과 진술 내용에 대해 사전 협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세지마는 심문 조서에서 1944년 이후의 수세 계획과 달리 1941년, 1942년 계획에서는 일본 육군이 대소련전 준비를 실행하고 공격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소련 측은 이를 1943년 단계까지 일본이 소련에 대한 침략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피고 변호인 측에서는 작전 계획이 유사시의 서류상의 용병 작전 계획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었으나, 세지마는 이를 부정했다. 재판 후 시베리아로 돌아가 1950년대 후반까지 억류 생활을 강요받았다.
세지마는 억류 생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오랫동안 밝히지 않았으며, 제2차 임시행정조사회 위원으로 취임한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호사카 마사야스는 관동군이 소련에 의한 시베리아 억류를 승낙했는지 등 세지마가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해 몇 번을 물어도 거의 대답하지 않아 역사적 사실에 대해 불성실했다고 지적했다. 1947년 말부터 1950년 4월까지 그가 어느 포로 수용소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있던 제7006포로수용소에 다네무라 사코, 아사에다 시게하루, 시이 쇼지 등과 함께 수용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전후 경력 및 사업 활동
세지마는 시베리아 억류에서 귀환한 후 기업인으로서 이토추 상사를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 상사로 성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4.1. 이토추 상사에서의 경력
1956년 시베리아 억류에서 귀환한 세지마는 미국의 일본 경찰 등에 의해 마이즈루 항에서 일주일간 구금 심문을 받았다. 설립 직후의 자위대에 들어오라는 하라 시로의 거듭된 권유를 받았지만, 세지마의 장녀가 반대하여 단념했다. 또한 도나미 중학교 동급생이자 전 우정상이었던 가타오카 세이이치로부터 정계 입문 제안도 있었다.
세지마는 시베리아 복원병들의 취업 알선에 힘썼고, 1958년 이토추 상사에 입사했다. 입사 전 세지마는 입사 면접을 거부하고 대신 편지를 보냈다. 면접을 거부한 이유는 "그렇게까지 몰락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러나 계약 내용은 촉탁 사원, 급여는 계장 대우, 계약은 매년 갱신이라는 조건이었지만, 아내 기요코는 이를 기뻐하며 채용 통지서를 신단에 모셨다.
입사 당시 이토추 상사의 사장은 고스가 우이치로였는데, 어느 날 고스가에게 불려간 세지마는 "이 회사에는 장사하는 사람이 썩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니 세지마 씨는 장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일본도 세계도 크게 변해갈 텐데, 당신은 상사로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런 관점에서 조언과 보좌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전직 군인으로 비즈니스 용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세지마는 "이거 금리를 외우지 않아도 되겠네"라는 농담을 남겼다.
1960년 이토추 상사 항공기 부장이 되었고, 입사 3년째인 1961년에는 업무 본부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이듬해인 1962년에는 이사 업무 본부장, 반년 후에는 상무가 되었다. 그 후에도 이토추 상사가 관여하는 다양한 안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1968년 전무, 1972년 부사장, 1977년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1978년에는 회장에 취임했다.
1981년 상담역, 1987년 특별 고문에 취임했다. 이 기간 동안 방위청 방위연구소의 전사총서 "대본영 육군부 대동아 전쟁 개전 경위" 집필에 협력했으며, 1972년 11월에는 하버드 대학교 존 F.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1930년대부터 대동아 전쟁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의 회고"라는 강연을 했다.
세지마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1년 제3차 사토 내각 시대의 통상산업대신이었을 때 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다마 요시오는 겐다 미노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실권 없는 이토추 회장이었던 1978년, 나가노 시게오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의 요청으로 일본상공회의소 특별 고문, 도쿄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발탁되었다. 세지마는 그 전까지 재계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재계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나가노의 참모로서 태평양 경제 협력 위원회나 ASEAN의 민간 경제 회의 등에 참석했다.
4.2. 사업 및 대외 관계
세지마는 이토추 상사의 석유 산업 진출을 주도했으며, 1971년에는 제너럴 모터스와 이스즈 자동차 간의 제휴를 성사시켰다. 197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시장 진출에 관여한 세 명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이토추를 중국과 사업을 시작한 최초의 일본 기업 중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이토추와 아타카 상사의 합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정치 및 공직 활동
세지마 류조는 기업 활동 외에도 일본의 정치 및 공공 분야에서 막후 실력자로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5.1. 총리 고문 및 정책 자문
1980년대 세지마는 임시행정조사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고문으로 재직했다. 이 역할에서 그는 도코 도시오 회장을 도와 일본전신전화와 일본국유철도의 민영화에 기여했다. 그는 이후 오부치 게이조, 미야자와 기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등 역대 총리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일본전신전화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1998년에는 재무성 개혁을 검토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아시아 대학 이사장과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세지마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1980년 세지마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동료 군인으로서" 자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지마는 1983년 나카소네 총리와 전두환 대통령 간의 역사적인 만남을 주선하는 데 중간자 역할을 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만국 박람회나 올림픽 유치를, 노태우에게는 재벌과 고위 관료가 지원하는 보수 대연합을 통한 내각제 개헌을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훈일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이 외에도 아시아 대학 이사장, 재단법인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 회장, 재단법인 태평양 전쟁 전몰자 위령 협회 명예회장 등의 공직을 역임했다. 2000년 이토추 상사 특별 고문직에서 퇴임했다.
2007년 봄, 입원 중이던 세지마는 동대경제간담회 상임 간사 노지 후타미에게 "아베 신조 총리의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는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국민이 따르지 못한다. 여기서 동대로서 마지막 봉사로, 뼈대 있는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모두의 지식과 경험을 모아 국민에게 알기 쉽고 국제적으로도 일본의 자세를 어필할 수 있는 주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같은 해 5월 30일, 세지마는 동대경제간담회 회장으로서 아베 총리에게 제출한 제안서에서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의 큰 주제로 근미래를 내다본 지구 온난화 대책, 청정에너지 증가, 풍부하고 좋은 물 보호를 제안했다. 청정에너지 제안서에서는 10년 안에 풍력과 태양광으로 전력의 30%를 달성하기 위해 풍력과 태양광 통합 발전 기구를 만들고, 관련 산업 각사와 전력 회사의 협력을 추진할 것, 태양광 케이블의 대대적인 이용(중층 이용, 지하 발전도 가능), 태양광 관련 기기 상품 개발 장려 등을 제안했다. 숲과 수자원에 관한 제안서에서는 특히 정년을 맞은 건강한 고령층에 대한 계몽 사업, 보수와 공기 정화의 원천이 되는 사토야마의 증가 육성, 호수·댐·만 등 새로운 장치·기술을 활용한 정수 사업을 연명으로 제출했다.
5.2. 공기업 민영화 및 개혁 기여
세지마는 1980년대 임시행정조사회 위원으로서 도코 도시오 회장과 함께 일본전신전화와 일본국유철도의 민영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임조의 관방장관'으로 불리며 나카소네 내각 (1982년 ~ 1987년)의 브레인으로서 정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6. 사상 및 이념
세지마 류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의 군인 및 기업가 경력 전반에 걸쳐 일본의 역사관과 전쟁 책임론, 그리고 우익 활동에 대한 그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준다.
6.1. 역사관 및 전쟁 책임론
세지마는 1996년 회고록에서 대동아 전쟁을 회고하며 "정치적, 경제적인 정보를 포함한 국력의 종합적인 판단을 무시했다. 이러한 정보가 부족했고, 민족의 성격상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심정적, 희망적인 판단으로 흘러갔다"고 썼다.
말년에 후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인생과 일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서 태평양 전쟁에 대해 개별적인 국면에서는 판단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전화의 확대, 일본 국민 및 주변국에 대한 피해 확대, 패전에 대한 책임의 일부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계획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석유를 끊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는" 식의 방어 전쟁이었으며, 그 상황(ABCD 포위망, 헐 노트)에서는 진주만 공격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일본을 그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미국의 강경 정책이었다며 개전이 불가피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작전을 세울 때의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비관적으로 준비하고 낙관적으로 대처하라'고 교육받았는데, 이는 지금도 여러 곳에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아무래도 낙관적으로 준비하고, 일이 터지면 비관적으로 되기 쉬우니까"라고 말했다.
시베리아 억류에 대해 세지마는 "일본 군인과 민간인의 귀국을 규정한 포츠담 선언 (9조) 위반이며,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대일 참전한 것과 함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였다"고 말했다. 또한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에 대해서도 "단연코 실시해서는 안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시베리아 억류에 대해 6가지 항목을 들어 다른 연합국의 전후 일본에 대한 대우와 전혀 달랐음을 설명했다. 일소 평화 조약(일러 평화 조약) 체결 시 시베리아 억류에 대한 소련(러시아)의 사죄가 필요하며, 그것이 평화 조약의 원점이 된다고 주장했다.
1997년 세지마가 주도한 위원회는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유죄 평결에 반대한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의 기념비를 세웠다.
6.2. 우익 활동 및 사회적 영향
세지마는 기업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전면에 나서지 않고 각종 우익 활동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의 식민지화는 당연한 조치"라고 평가했으며, 가미카제 자살 공격을 "자발적"이었다고 옹호했다. 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만주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가장 존경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도 막후에서 그의 자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두환에게는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만국 박람회나 올림픽 유치를, 노태우에게는 재벌과 고위 관료가 지원하는 보수 대연합을 통한 내각제 개헌을 조언하였다. 이러한 그의 우익적 성향과 활동은 일본 사회와 주변국, 특히 한국에 비판적인 영향을 미쳤다.
7. 개인적인 삶
세지마 류조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공적인 경력만큼이나 흥미로운 가족 관계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세지마의 아내 기요코(1916년 ~ 2007년)는 마쓰오 덴조 육군 보병 대좌의 장녀이자 오카다 게이스케 전 총리의 조카이다. 마쓰오 덴조는 2·26 사건 당시 처남인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의 대역으로 반란 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혼 당시 세지마는 만주에 주둔 중이었고, 기요코는 아버지 살해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도쿄로 올라왔다. 오카다 게이스케의 사위인 사코미즈 히사쓰네와는 아내들이 사촌 관계이다.
세지마에게는 시게요와 요시코라는 두 딸이 있다. 시게요의 남편인 오가타 다케시 (1935년생)는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이토추 상사에 입사하여 동사 중역을 거쳐 반도체 제조 및 전자 시스템 기업인 이노텍의 회장을 역임했다. 오가타는 아이·시·에프(ICF)의 이사도 지냈다. 시게요와 오가타 사이에는 세 명의 딸이 있다.
세지마의 동생인 세지마 도시오는 마쓰오 덴조의 장남이자 기요코의 오빠인 마쓰오 신이치 (아내 기요는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여동생)와 함께 도쿄 피아노 공업(이스테인)을 설립하고 2대 사장을 역임했다.
8. 사망
세지마 류조는 2007년 9월 4일, 노환으로 도쿄도 조후시의 자택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후 종삼위가 추서되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쓰키지 혼간지에서 이토추 상사와 아시아 학원 주최로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세지마는 사망 전 2007년 봄, 입원 중이던 그는 동대경제간담회 상임 간사 노지 후타미에게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힘써라"는 말을 남겼다.
9. 평가 및 논란
세지마 류조의 생애와 활동은 일본 내외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와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9.1. 긍정적 평가
세지마는 '쇼와의 참모'로 불리며 그의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높이 평가받았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상(陸相)의 의동생이자 군사과 중좌였던 다케시타 마사히코에 따르면, 세지마의 기안문은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여 무수정으로 반장, 과장, 부장, 참모총장의 결재를 받았다고 한다. 다케시타는 "세지마 군은 작전과의 젊은 과원이었지만, 우리는 뒤에서 세지마 참모총장이라고 자조적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지마는 "나는 기안하기 전에 상사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사정을 넣지 않고 기안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프리패스가 된 것뿐이다"라고 답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러한 세지마가 같은 작전과 출신이지만 독단 전행을 거듭한 쓰지 마사노부와는 대조적이라고 평가했다.
기업 경영자로서의 업적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시베리아 억류에서 귀환한 후 이토추 상사에 입사하여 고속 승진을 거듭, 4년 만에 이사로 승진하고 1978년에는 회장직에 올랐다. 그는 이토추 상사의 석유 산업 진출을 주도하고, 제너럴 모터스와 이스즈 자동차 간의 제휴를 성사시켰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시장에 최초로 진출한 일본 기업 중 하나로 이토추 상사를 이끌었다. 또한 아타카 상사와의 합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 발전에 기여한 점으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고문으로서 임시행정조사회에 참여하여 일본전신전화와 일본국유철도의 민영화 등 공기업 개혁과 행정 개혁에 크게 기여한 점이 꼽힌다. 그는 '임조의 관방장관'으로 불리며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9.2. 비판 및 논란
세지마 류조는 전쟁 책임, 소련 스파이설, 우익 활동 등 그의 행동, 결정, 사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련 논쟁에 끊임없이 휘말렸다.
- 전쟁 책임:** 세지마는 태평양 전쟁의 확산과 패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전쟁이 미국의 강경 정책으로 인한 불가피한 방어전이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역사관은 전쟁의 침략성을 희석하고 일본의 책임을 축소하려는 시도로 비판받는다. 1997년 그가 야스쿠니 신사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유죄 평결에 반대한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의 기념비를 세운 것 또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려는 우익적 시각의 발현으로 해석된다.
- 소련과의 관계 및 스파이설:**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 회장 사이토 로쿠로는 "소련군에 대한 세지마 참모 기안 진정서"에 일본 병사들이 귀환할 때까지 "최대한 귀군의 경영에 협력하도록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소련과의 휴전 협상 시 세지마가 동행하여 일본 측과 소련 측 사이에 포로 억류에 대한 밀약이 맺어졌다는 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세지마는 1996년 저서 《이쿠산가》에서 "밀약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반박했으며, 휴전 협정 당시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관동군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에게는 이러한 밀약을 맺을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2002년 정치학자 다쿠보 다다에가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관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서명한 "일본인 포로 50만 명의 수용, 보호, 노동 이용에 관한 결의" (1945년 8월 23일자)를 확인하며 강제 노동 명령이 소련 중앙 정부의 명령이었음이 밝혀져 밀약설은 부정되었다.
1954년 유리 라스트보로프 사건 당시, 소련 대표부 2등 서기관이었던 유리 라스트보로프가 미국 CIA로 망명하여 증언하면서 세지마를 포함한 11명이 "엄격히 검증된 공산주의자 군인을 교육했다", "이 인물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몽골 울란바토르에 존재했던 제7006포로수용소에서 특수 공작원으로 훈련받았다"고 증언했다. 내각안전보장실장 사사 아쓰유키 또한 세지마가 이토추 상사 평사원 시절부터 라스트보로프 사건에 관여했으며, 이후 나카소네 내각 시대의 도시바 기계 코콤 위반 사건까지 관여했다고 증언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비롯한 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사건 이후 세지마를 "숨은 공산주의자이자 소련 공작원"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제시했다. 소련의 대일 공작 책임자였던 이반 코발렌코는 "시베리아 억류 중이던 세지마 류조가 일본인 억류자들 앞에서 '천황제 타도! 일본공산당 만세!'라고 주먹을 쥐고 절규했다"고 증언하며, "세지마 씨는 소련의 스파이가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그것은 최고 기밀"이라고만 답했다.
- 쇼와 천황과의 관계:** 다나카 세이겐은 이리에 스케마사 시종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지난 대전에서 나의 명령이라며 전선의 최전선에 서서 싸운 장병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 전쟁을 계획하고, 개전을 촉구하고, 전부를 수행하고, 게다가 패전 후에도 계속 일본의 국가 권력의 유력한 입장에 있으면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자이다. 세지마 같은 자가 그렇다"는 쇼와 천황의 발언을 자신의 저서에 기록했다. 반면 세지마는 1979년 쇼와 천황의 손녀와 이토추 상사 사원의 결혼식에서 세지마 부부가 중매를 맡게 되었을 때, 스리랑카 대통령 환영 만찬회에서 쇼와 천황이 세지마 부부에게 "세지마는 전전과 전후로 매우 고생이 많았다. 앞으로도 건강에 유의하여 국가와 사회를 위해 힘써달라. 그리고 이번에 신세를 지게 된 히가시쿠니의 유코는 나의 손녀이다. 어릴 때 어머니(히가시쿠니 시게코)와 사별하여 매우 가엾은 손녀이다. 나는 이런 입장이어서 충분히 돌봐주지 못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려 있었다. 이번에 훌륭하게 결혼하게 되어 나도 요시코도 매우 기뻐하고 있다. 부디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며 손녀의 결혼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했지만, 실제로 이러한 말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 정보 조작 및 과장 논란:** 호사카 마사야스는 세지마가 종종 자신을 거물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를 사용했으며, 예를 들어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이 실제로는 여러 인물을 종합하여 조형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영향으로 세지마만이 모델이라는 이미지가 세간에 정착되었다고 지적했다. 노지 후타미는 세지마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이 참모본부에서의 작전 계획이 개전부터 종전까지 마치 세지마가 모두 계획하고 그것이 패전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지마 인식의 근본적인 오해이며, 터무니없는 '세지마 대참모 신화'의 원인이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작전과에서 한 명의 소좌에 불과했던 세지마는 스스로 계획을 만들고 결정하는 입장이 아니었으며, 기록 담당이라는 반장 보좌 역할의 일을 통해 각 작전 계획에 대해 알 수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 한일 관계에서의 역할:** 1980년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 지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자문 역할을 한 것은 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이자 영향력 행사로 비판받는다.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 광주 민주화 운동 등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었던 시기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방한과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쇼와 천황과의 회견을 막후에서 주선하며 한일 관계 개선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재 정권과의 유착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신뢰성 논란:** 일본 해군사 연구가 도다카 가즈시게는 "해군에서는 세지마 류조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그 녀석은 거짓말쟁이니까'라고 즉각 반응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세지마 류조가 하는 말은 나는 믿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썼다. 이는 세지마의 전후 증언, 특히 일본 육해군 협력 체제에 대한 증언에 대한 해군 측의 불만을 반영한다.
10. 저서
세지마 류조는 자신의 군인 및 기업가 경력, 그리고 역사관을 담은 여러 저서를 남겼다.
10.1. 단독 저서
- 《이쿠산가》(幾山河)
- 산케이 신문 뉴스 서비스, 1995년.
- 산케이 신문 뉴스 서비스, 보급판, 1996년.
- 《조국 재생: 나의 일본에 대한 제안》(祖国再生 : わが日本への提案)
- PHP 연구소, 1997년.
- 《대동아 전쟁의 실상》(大東亜戦争の実相)
- PHP 연구소, PHP 문고, 2000년.
10.2. 공저
- 《대본영 육군부 대동아 전쟁 개전 경위》(大本営陸軍部 大東亜戦争開戦経緯)
- 전 5권, 방위청 방위연구소, 1973년 ~ 1974년.
- 《전략 없는 국가에 내일은 없다: 전후 50년의 일본 검증과 향후의 행방 시사》(戦略なき国家に明日はない : 戦後50年の日本の検証と今後の行方を示唆)
- 가토 히로시 공저, 일본 정경문화사, 1995년.
- 《91세의 인생론: '본분'을 다하는 삶이란?》(91歳の人生論 : 「本分」を極める生き方とは?)
- 히노하라 시게아키 공저, 후소샤, 2003년.
- 《세지마 류조 일본의 증언: 신 헤이세이 일본의 밤샘 스페셜》(瀬島龍三 日本の証言 : 新・平成日本のよふけスペシャル)
- 방송 스태프 편, 후지 TV 출판, 2003년.
11. 관련 작품
세지마 류조의 삶과 활동은 여러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 이키 다다시 중좌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군인에서 포로 수용소, 그리고 전후 기업인으로 이어지는 경력의 흐름만 세지마의 삶에서 빌려왔다고 밝혔다. 이 소설은 영화 및 두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 같은 작가의 소설 《가라앉지 않는 태양》에 등장하는 인물 류자키 잇세이의 모델이기도 하다.
- 《두 개의 조국》에서는 실명으로 등장한다.
- 한국의 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세지마를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한다.
- 사이토 다카오의 만화 《고르고 13》 단행본 제103권에 수록된 "제323화 모스크바의 기억"에는 세지마 류조를 모델로 창작된 전 관동군 부참모장이자 정재계의 피서(fixer)인 "니카이도 요스케"가 등장한다.
- 세지마는 도에이의 오카다 시게루에게 부탁하여 "쇼와 천황" 영화를 제작하려 한 적이 있다. 당시 도에이가 《203고지》, 《대일본제국》, 《바다로 가자》와 같은 전쟁 대작을 연이어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무리 작업의 의미로 가사하라 가즈오가 힘을 쏟은 각본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궁내청의 반대로 인해 좌절되었다. 세지마는 오카다 시게루의 요청으로 《203고지》의 감수를 맡기도 했다.
12. 관련 항목
- 시베리아 억류
- 불모지대
- 제5공화국
- 관동군
- 대본영
- 이토추 상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전두환
- 노태우
- 라다비노드 팔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