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생애는 그의 의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깊은 철학과 다양한 경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교육, 그리고 초기 경력에 이르는 과정은 훗날 그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유년기
히노하라 시게아키는 1911년 10월 4일, 일본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下宇野令村시모우노레이촌일본어 (현재의 야마구치시 湯田温泉유다온센일본어)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 日野原善輔히노하라 젠스케일본어는 당시 유니온 신학교에 유학 중이었다. 히노하라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7세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9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으며, 메이지 연호의 '明' 자를 따서 형제들 모두의 이름에 '明' 자가 들어갔다.
1913년에 아버지가 귀국하여 오이타 감리교회의 목사로 부임하면서 가족은 오이타시로 이사했다. 1915년에는 아버지가 오이타 감리교회에서 고베 중앙 감리교회 (현 일본 기독교단 고베 에이코 교회)로 옮기면서 고베로 다시 이사했다. 1918년에는 고베시 諏訪山尋常小学校스와야마 심상소학교일본어 (현 고베 시립 고베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초등학교 4학년 때 급성 신장염으로 인해 휴학해야 했다. 이 요양 기간 동안 그는 미국인 선교사의 아내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旧制第一神戸中学校구제 제1 고베 중학교일본어 (현 효고현립 고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입학식 당일에 퇴학하고 간세이 가쿠인 중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적면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변론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2. 교육
1929년, 히노하라는 제3 고등학교 이과로 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변론부와 문예부에 가입하여 시집과 수필집을 만들었다. 1932년에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으며, 학비는 교회 관계자들의 기부로 충당했다. 1933년 대학 재학 중 결핵에 걸려 휴학했고, 아버지의 広島女学院히로시마 여학원일본어 원장관과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虹ヶ浜니지가하마일본어에서 약 1년간 투병 생활을 보냈다. 이 투병 경험으로 인해 그는 의학부 내과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잠시 의학을 그만두고 음악의 길을 가려 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단념했다.
1934년, 히노하라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2학년으로 복학했다. 병을 앓은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업무 부담이 적은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1937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제3내과 부수(무급)로 취임하여 1939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마시타 슌이치 교수의 제3내과 (순환기내과)에 입국했으며, 징병 검사에서는 병종 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2년간 부수로 연수했지만, 배울 것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1943년 "심음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으로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심장이 수축할 때 저음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의 연구 결과는 1941년 미국의 저명한 의학 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1.3. 초기 경력 및 수련
1938년부터 히노하라는 기타노 병원과 교토 병원 (현 국립병원기구 교토 의료 센터)에서 근무했다. 1939년에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심장병학을 전공했다. 그는 교토대학 YMCA 地塩寮지엔료일본어에 거주했다.
1941년, 그는 성루가 국제병원의 내과 의사가 되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도쿄대학 학벌이 강한 도쿄에서 활동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히노하라는 도쿄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고, 성루가 국제병원에는 학벌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도쿄로 상경했다. 그의 첫 업무는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 성루가 국제병원의 가루이자와정 진료소에서 근무하는 것이었다. 이후 1944년까지 매년 여름 가루이자와에서 근무했다.
1942년에 결혼했다. 같은 해, 히로시마 여학원 원장을 정년 퇴직하고 도쿄에 올라와 있던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덴엔초후 교회의 교회 임원의 소개로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던 여성과 3개월간 교제한 뒤 결혼했다.
1945년에는 자원하여 대일본제국 해군 군의 소위로 임관되었다. 요코하마시 도쓰카구에 위치한 도쓰카 해군 병원과 해군 위생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급성 신장염으로 입원하게 되어 제대했다.
1951년 성루가 국제병원 내과 과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에모리 대학교 의학부 내과에서 1년간 유학하며 Paul Beeson폴 비슨영어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메이오 클리닉에서 전인 의료에 대해 접했다. 1952년 귀국하여 성루가 국제병원 원장보좌(연구·교육 담당)로 취임하여 1972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교토대학 의학부 제3내과 교수직 제안을 거절했다. 또한 투병 중이던 그의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는 도쿄 간호 교육 모범 학원 강사 (1954년까지), 新渡戸文化短期大学니토베 분카 단기대학일본어 강사, 의사 국가 시험 시험 위원, 의사 연수 심의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53년에는 국제기독교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이후 4년간 '사회 위생학' 등을 강의하며 같은 대학 진료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57년에는 이시바시 단잔 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그의 주치의를 맡았다. 1958년,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하던 그의 아버지가 극심한 간염으로 인해 리치몬드 기념 병원에서 사망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삶은 혁신적인 의료 활동, 활발한 학술 및 교육 활동, 그리고 대중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저술 활동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단순한 의사를 넘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2.1. 의료 활동 및 공중 보건
히노하라는 1941년부터 도쿄 중심부의 성루가 국제병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쿄 대공습 당시에도 의사로서 활동했다. 1990년부터는 병원의 명예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혈전으로 인한 심장병과 뇌졸중 등 이전에 '성인병'이라 불리던 질병들의 예방을 위해 '習慣病습관병일본어'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구 후생성은 이 개념을 받아들여 1996년에 '생활습관병'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이는 이후 널리 수용되었다. 히노하라는 일본에서 인간도크라 불리는 연례 건강 검진 관행을 확립하고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일찍부터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종말기 의료의 보급에도 힘썼다.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병원장이었던 히노하라는 성루가 국제병원을 전면 개방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모든 외래 환자 진료와 통상 업무를 중단시키고, 83세의 나이에도 진두지휘하며 640명의 피해자를 치료했다. 이 신속한 대응은 3년 전 히노하라의 제안으로 북유럽 병원 시찰에서 영감을 받아 복도와 대기실 벽면에 약 2,000개의 산소 배관을 설치하고 넓은 로비와 예배당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시설들은 비상시 응급 처치 장소로 활용되었고, 이는 출근 시간대에 발생한 테러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사건의 전말은 NHK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프로젝트X~도전자들~'에서도 다루어졌다. 위기관리 평론가 사사 아쓰유키는 히노하라가 프랄리독심 요오드화 메틸 등 모든 해독제를 방출하기로 결정한 것을 예로 들며 그의 공적은 '국민영예상' 감이라고 평했다.
히노하라는 100세를 넘긴 만년에도 2~3년 앞까지 스케줄이 꽉 찬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도 원고 집필에 몰두했으며, 평소 4시간 30분 수면, 주 1회 밤샘 작업을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96세에 밤샘 작업을 중단하고 수면 시간을 5시간으로 늘렸다고 한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현장에서 활동하겠다는 신념을 관철했으며, "적어도 11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4년 5월 중순, 혈액에서 대장균이 발견되어 입원했다. 4일 만에 회복되었으나, 만약을 위해 검사한 결과 대동맥판막협착증이 발견되었다. 고령으로 인해 수술이 어려웠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동 시에는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2014년 6월 21일 칼럼을 통해 공표했다. 그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자신의 생각에 힘을 얻었다는 감상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2015년에는 일본과 잉글랜드 여자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중 몸이 좋지 않아 성루가 국제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심방세동이 발견되었다. 이후부터는 힘껏 응원하고 싶은 경기는 생방송이 아닌, 결과를 안 후에 녹화본으로 감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2.2. 학술 및 교육 활동
히노하라는 다양한 학술 및 교육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 의학계와 교육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제3내과 조수를 시작으로, 성루가 간호대학 학장(1974년부터 1998년까지), 성루가 국제병원 원장, 국제기독교대학 교수, 자치 의과대학 객원 교수, 하버드 대학교 객원 교수 등을 지냈다. 또한 국제 내과학회 회장(1984년부터 1986년까지)을 역임했는데, 이는 동양인으로는 최초였다.
그는 일본 순환기 학회 명예 회원이 되었으며, 토마스 제퍼슨 대학교에서 인문학 명예 박사 학위를,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에는 간세이 가쿠인 대학교에서도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히노하라는 1973년에 재단법인 라이프 플래닝 센터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96년에는 공익 재단법인 성루가 라이프 사이언스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1986년 일본 바이오 뮤직 연구회(현 일본 음악 치료 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고, 2001년에는 일본 음악 치료 학회의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특히 1987년 78세부터 시작한 'いのちの授業생명의 수업일본어'을 통해 전국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의 그릇'에 대해 가르쳤다. 이 수업은 그의 모교인 고베 시립 스와야마 초등학교 방문이 NHK 교육 텔레비전의 '시리즈 수업'에 방영되면서 더욱 확산되었고, 2016년까지 전국 200개 이상의 초등학교에서 실시되었다.
2.3. 저술 및 대중적 영향
히노하라 시게아키는 수많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대중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2001년 12월에 출판된 그의 저서 '生きかた上手이키카타 조즈일본어'(사는 법의 달인)는 12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성루가 국제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으며, 고령자들에게 '희망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레오 부스칼리아의 그림책 '프레디의 나뭇잎 여행'의 뮤지컬화 기획 및 원안에도 참여했다. 또한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칼럼 '95세의 나, 있는 그대로 간다'에서 '기미가요'를 대신할 새로운 국가의 제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2005년 강연에서는 미국의 교수 선발에서 나이를 불문하는 경향과 달리 일본 대학의 정년 제도가 시대에 역행한다고 지적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병원에서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 후, 아무리 피곤해도 대중 앞에서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히노하라 시게아키', '히노하라 시고메이' 등의 필명으로 동인지에 시와 수필을 기고하는 등 글쓰기에도 능했다. 2015년에는 NHK 전국 학교 음악 콩쿠르 초등부 과제곡 '地球をつつむ歌声지구를 감싸는 노랫소리일본어'의 작사를 담당했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방면에서 대중과 소통하며 사회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3. 사상 및 철학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삶과 의료 활동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기독교적 신념과 '생명의 그릇'이라는 독특한 철학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3.1. 기독교적 신념과 삶의 철학
히노하라의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히노하라 자신도 7세에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은 그의 삶과 의료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의료를 단순한 질병 치료를 넘어선 전인적인 돌봄이자 봉사로 여겼다.
그의 핵심 철학 중 하나는 'いのちの器이노치노 우츠와일본어' (생명의 그릇)였다. 그는 2015년 대림절 시작일인 11월 29일, 수많은 청중 앞에서 "생명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까요? 만약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효하게 사용한다면, 우리의 삶은 미래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그의 '생명의 수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메시지였다.
히노하라의 좌우명은 윌리엄 오슬러의 "의학은 과학에 기반을 둔 예술이다"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GHQ)에 접수된 성루가 국제병원 도서관에서 미국의 의학 서적과 잡지를 읽으면서 윌리엄 오슬러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 경험은 그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쳐, 예방과 생활 습관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에 대해 "무기에는 무기, 폭력에는 폭력으로 응하는 악순환을 끊고, 전쟁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굳건한 정신이 필요하다"며, "지성이야말로 인간이 받은 보물이다"라고 주장했다. 10년 이상 진행한 '생명의 수업'에서는 "괴롭힘은 폭력이다"라고 주장하며 불모함을 역설했다. 2015년 출간된 저서 '戦争といのちと聖路加国際病院ものがたり전쟁과 생명과 성루가 국제 병원 이야기일본어'의 띠지에도 "전쟁은 괴롭힘과 같습니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95세 때 어린이를 위한 책에서는 "다툼의 뿌리에 있는 괴로운 감정,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미운 상대를 용서하는 용기로 싸움을 끝낼 수 있다", "'아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십시오"라고 썼다.
4. 개인사 및 특별 경험
히노하라 시게아키는 그의 공적인 활동만큼이나 흥미로운 개인사와 특별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인생관과 철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1. 가족 관계 및 취미
히노하라는 어린 시절 적면공포증이 심해 동급생들로부터 '긴토키 씨'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간세이 가쿠인 중학부의 변론부 활동 외에도 연극, 피아노 연주, 합창 지휘 등 사람들 앞에 서는 활동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고 한다.
그의 취미 중 하나는 피아노였다. 결핵으로 투병하던 시절, 그는 '녹턴'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2008년 2월 17일 NHK 교육 텔레비전의 'N향 아워' 프로그램에 히노하라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작곡가 이케베 신이치로에 의해 일부가 연주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하코네 에키덴 (도쿄-하코네 왕복 대학 역전 경주)과 축구 경기를 즐겨 보았으며, 2015년 나데시코 재팬의 골키퍼 가이호리 아유미의 열렬한 팬이었다.
글쓰기 또한 그의 오랜 취미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동인 잡지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히노하라 시게아키', '히노하라 시고메이'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2015년 10월 말, 그는 왼쪽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 증상을 겪었는데, 정형외과 진찰 결과 손가락 근육 문제였고 가벼운 마사지로 해결되었다. 이 일화를 통해 그는 자신이 전문으로 하는 내과, 순환기 이외의 질병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외출 전 옷차림을 '부적'처럼 여겨 계절에 맞춰 재킷과 넥타이를 신중하게 골랐다. 특히 나가시마 가즈시게가 칭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포켓스퀘어에 신경을 많이 썼고, 외출 전 아내가 건네는 몇 장의 후보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다.
식사 습관은 저녁 식사가 중심이었다. 아침에는 주스에 올리브유를 뿌려 마셨고, 점심은 우유, 배아 쿠키, 사과만으로 해결했다. 저녁 식사는 주 2회는 고기, 나머지는 생선을 비교적 푸짐하게 먹었으며,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음식을 조절했다. 그는 "집중하고 있으면 배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1951년 미국 유학 시절, 한 달 60달러의 현지 생활비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당시 1달러에 360 JPY였던 시대에 그는 동료들과의 점심 식사를 거절하고 혼자 콜라, 프라이드치킨, 햄버거를 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무심코 패스트푸드를 먹고 싶어지는 면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음식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땅콩과 설탕, 된장을 갈아 만든 '땅콩 된장'과 미국 유학 시절 먹었던 땅콩 버터 바른 빵이었다.
4.2. 요도호 납치 사건 및 전쟁 경험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 중 하나는 1970년 3월 31일 발생한 요도호 납치 사건이었다. 그는 후쿠오카시에서 열리는 일본 내과학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에서 일본 적군파에 의해 납치되어 다른 승객들과 함께 인질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하이재킹이었고,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하이재킹'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히노하라는 기내에서 손을 들어 "하이재킹은 비행기를 납치하여 승객을 인질로 잡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범인 그룹은 인질들에게 책을 제공했는데, 히노하라만이 요청하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빌려 읽었다. 그는 4일간 구금되었고 죽음까지 각오했으며, 이 사건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트라우마였다고 언급했다. 당시 함께 탑승했던 도라노몬 병원의 沖中重雄오키나카 시게오일본어 원장은 고령으로 후쿠오카에서 풀려났지만, 히노하라는 대한민국 김포 국제공항에서 풀려났다. 그는 사건 이후 자신의 삶을 '덧붙여진 생명'으로 여기고 내과 의사로서의 명성을 추구하는 삶을 멈췄으며, 이 사건이 그의 인생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동승했던 도쿄대학 의학부 교수 吉利和요시토시 카즈오일본어 (범인 중에 그의 제자가 있었다)와 함께 승객들의 건강 진단을 실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쿄 대공습을 겪으면서 충분한 의료를 제공하지 못했던 경험은 히노하라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잉 투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재해나 전쟁 시 다수의 환자 발생에 대비하여 광대한 로비와 예배당 시설을 갖춘 성루가 국제병원의 신병원을 1992년에 건설했다. 이 준비는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평소에는 너무 넓다고 비난받던 로비와 예배당 시설이 긴급 응급 처치 장소로 기능했다. 병원장이었던 히노하라의 판단에 따라, 사건 직후 당일 모든 외래 진료를 중단하고 피해자들을 무제한으로 수용하여 병원은 피해자 치료의 거점이 되었고, 이는 아침 러시 아워에 발생한 테러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했다.
히노하라에 따르면, 전시에 성루가 국제병원은 정부에 의해 '大東亜中央病院대동아 중앙 병원일본어'으로 개명되었다. 특별고등경찰이 병원에 들이닥쳐 자신과 동료들을 스파이 혐의로 취조하거나, 환자로 위장하여 병원을 드나들며 감시했다. 높은 십자가 탑에 있던 숙직실은 헌병대에 의해 침입당했고, 탑의 십자가는 잘려 나갔다.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 봉사를 위하여'라는 병원 이념이 새겨진 석비는 화강암 판으로 덮어 가려야만 했다. 그는 당시 박아둔 못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패전 후 성루가 국제병원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GHQ)에 접수되었다. 이때 히노하라는 점령군이 도서관에 가져온 미국 의학 서적과 잡지를 읽으며,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던 의학 박사 윌리엄 오슬러 (1849~1919)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예방과 생활 습관 개선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5. 사망 및 유산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사망은 일본 사회와 의료계에 큰 추모의 물결을 일으켰으며, 그가 남긴 유산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5.1. 사회적 평가 및 기억
히노하라 시게아키는 2017년 7월 18일, 도쿄도 세타가야구 자택에서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107세였다 (만 105세). 같은 날짜로 종삼위에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는 다마 영원의 성루가 국제병원 예배당 부속 묘비에 안장되어 있다.
히노하라는 일본 최초로 인간도크를 개설하고, 일찍부터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종말기 의료 보급에 힘쓰는 등 오랜 기간 일본 의학 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기존에 '성인병'이라 불리던 질병군을 '생활습관병'으로 개칭한 것도 히노하라의 제안이었다.
그는 성루가 국제병원 명예원장을 지냈으며 수많은 저서로 잘 알려져, 고령자들의 '희망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저서 '生きかた上手이키카타 조즈일본어'는 120만 부 이상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히노하라의 업적은 다양한 수상으로도 빛났다. 2005년 문화훈장 수훈, 1999년 문화공로자 선정 외에도, 1993년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82년에는 일본 의사회 최고 우공상을 수상했다. 1992년 도쿄도 문화상, 1998년 도쿄도 명예 도민, 1999년 주오구 명예 구민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에도 2003년 NHK 방송 문화상, 아사히 신문사 아사히 사회 복지상, 가메오카시 평생 학습 대상-이시다 바이간상 등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오스트리아 알베르트 슈바이처 협회로부터 알베르트 슈바이처 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일본 유니세프 협회 대사로 임명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넓혔다.
그는 "있는 그대로 간다"는 신념으로 평생 현역으로서 의료계와 사회에 봉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의 메시지와 철학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6. 관련 항목
- 인간도크
- 생활습관병
- 성루가 국제병원
- 요도호 납치 사건
-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윌리엄 오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