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사토 요시노리는 1989년 12월 5일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과 형의 설득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그의 형 사토 히사노리(佐藤 史規)는 훗날 도호쿠 고등학교에서 다르빗슈 유의 백업 포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동생 사토 다카노리(佐藤 貴規) 또한 야구 선수로, 한때 요시노리와 함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소속되어 형제가 같은 팀에서 뛰었다. 아버지 사토 히사시(佐藤 寿)는 유한회사 미야기 관광 택시의 대표이사로, 요시노리가 야쿠르트에서 뛰던 시절에는 그의 등번호와 등록명을 새긴 택시를 운행하기도 했다.
1.2. 야구 입문
요시노리는 중학교 1학년이던 2002년, 리틀 야구 센다이 히가시 리그 소속으로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센다이 히가시 팀은 일본 대표로 아시아 대회를 거쳐 세계 대회에 진출했다. 세계 대회 첫 경기인 러시아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대회 10년 만에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팀은 결승전에서 미국 대표팀에 0-1로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요시노리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야구부가 있었지만, 그는 시니어 리그 센다이 세이부 팀에서 야구를 계속했고, 학교에서는 육상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2. 고교 시절 경력
2.1. 성장과 기록
2005년 센다이이쿠에이가쿠엔 고등학교에 입학한 요시노리는 입학 초기에는 구속이 130 km/h에 미치지 못했으며, 처음에는 백업 3루수로 뛰었다. 그러나 1학년 가을에는 구속이 140 km/h에 도달하며 투수로서 지역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학년 여름인 2006년에는 제8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에이스 투수로 출전하여 8월 7일 도쿠시마 상업고등학교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1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5-1 완투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8월 13일 니혼대학 야마가타 고등학교와의 다음 라운드 경기에서는 7개의 안타와 5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4실점(13탈삼진)하여 6-3으로 패배, 팀의 탈락을 막지 못했다. 그해 가을 도호쿠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여 2007년 봄에 열리는 제7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발 대회 출전권을 확보했다. 2007년 3월 23일 도코하 가쿠엔 기쿠가와 고등학교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는 1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150 km/h를 측정하는 호투를 펼쳤으나, 팀 타선이 1점에 그치며 2-1로 패배, 다시 한번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3학년 여름인 2007년에는 지역 미야기현 대회 결승전에서 라이벌 도호쿠 고등학교를 상대로 7월 31일 15이닝 동안 226구를 던지며 무실점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음 날인 8월 1일 재경기에서 148구를 던지며 도호쿠 고등학교를 2실점으로 막아내 6-2 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3년 연속 고시엔 대회로 이끌었다.


이어진 제8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8월 9일 지벤가쿠엔 고등학교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4-2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 8회에는 고시엔 구장의 스피드 건으로 154 km/h를 기록하며 당시 대회 최고 구속 기록(1980년 스피드 건 도입 이후)과 타이를 이뤘다. 이 경기에서 150 km/h 이상의 공을 19개나 던졌다. 8월 15일 지벤가쿠엔 고등학교 (나라)와의 2라운드 경기 4회말에는 155 km/h를 기록하며 대회 최고 구속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다음 이닝에 5실점하며 5-2 완투패를 당했다. 그는 고교 3년간 3번의 전국 대회에 출전했지만, 모두 2라운드를 넘어서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에 열린 미일 고교 야구 대회에서는 개인 최고 구속인 157 km/h를 기록했다.
2.2. 드래프트 및 기대
요시노리는 2007년 NPB 고교생 드래프트에서 가장 큰 기대를 모으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직구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슬라이더도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나카타 쇼(中田 翔Nakada Shō일본어)와 가라카와 유키(唐川 侑己Karakawa Yūki일본어)와 함께 '고교 빅 3'로 불렸다. 미야기현을 연고지로 하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비롯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주니치 드래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5개 구단이 1라운드에서 그를 지명했으며, 추첨 결과 야쿠르트가 교섭권을 획득했다. 야쿠르트는 그와 계약금 1.00 억 JPY, 성과급 5000.00 만 JPY, 연봉 1500.00 만 JPY에 가계약을 맺었으며, 11월 11일에 등번호 11번을 부여받았다. 그는 동명이인의 사토 요시노리 코치와 구별하기 위해 등록명을 요시노리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3. 프로 경력
사토 요시노리는 일본 프로 야구(NPB)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독립 리그와 대만 프로 야구에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3.1. 일본 프로 야구 (NPB)
사토 요시노리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데뷔하여 오랜 기간 활약하며 부상과 재활을 반복했고, 이후 고향 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3.1.1.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3.1.2. 도호쿠 라쿠텐 골든 이글스
3.2. 독립 리그 및 해외 리그
3.2.1. BC 리그 (사이타마 무사시 히트 베어스)
3.2.2. 대만 프로야구 (라쿠텐 몽키스)
4. 투구 스타일 및 특징
4.1. 투구 메커니즘
사토 요시노리는 신장 179 cm, 체중 80 kg으로, 전형적인 파워 피처치고는 비교적 작은 체구를 가졌다. 그의 투구 동작은 다소 독특하며, 왼 다리를 높이 들고 글러브를 무릎 앞까지 내린 후 가슴 쪽으로 당겨오는 동작을 취한다. 투구는 스리쿼터 팔 각도로 이루어진다. 센다이이쿠에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스리쿼터 폼의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4.2. 구종 및 구속
요시노리의 포심 패스트볼은 뛰어난 구속을 자랑하며, 보통 146 km/h에서 153 km/h 사이를 기록한다. 2010 시즌에는 한때 161 km/h에 도달하여 당시 일본인 투수 최고 구속 기록을 세웠다. 그는 직구 외에도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구사한다. 슬라이더는 130 km/h 전후의 날카로운 구종이며, 컷 패스트볼, 140 km/h 전후의 체인지업과 커브도 던진다. 슬라이더의 구위는 좋지만, 볼넷이나 폭투가 많은 등 제구력에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경 그의 평균 구속은 약 149 km/h였으나, 이후 잦은 어깨 부상으로 2016년 이후에는 140 km/h대 중반에 머물렀다.
4.3. 신체 조건 및 부상 관리
요시노리는 뛰어난 체력을 가졌다. 고교 시절 전국 대회에서 지벤가쿠엔 고등학교를 상대로 154구를 던진 완투승 경기에서 마지막 투구 구속이 151 km/h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프로 경력 동안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초기에는 손가락 물집이 자주 잡혔고, 이후 왼쪽 발목 통증, 왼쪽 정강이뼈 골절, 그리고 특히 오른쪽 어깨 부상(회전근개 손상, 클리닝 수술 등)이 반복되었다. 그는 이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재활에 임했으며, 2015년 오른쪽 어깨 수술 후에는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 소속이던 다르빗슈 유의 개인 훈련에 참여하여 2016 시즌부터 다르빗슈의 훈련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4.4. 타격 성향
요시노리는 투수로서 비교적 드문 우투좌타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였으나, 형이 사용하던 오른손 글러브를 물려받아 사용하면서 오른손 투수가 되었다. 왼손으로도 60 m를 던질 수 있다고 한다.
5. 개인사 및 가족
5.1. 형제 및 가족 관계
요시노리의 형 사토 히사노리(佐藤 史規)는 도호쿠 고등학교 야구부 OB이며, 동생 사토 다카노리(佐藤 貴規)는 센다이이쿠에이가쿠엔 고등학교 야구부 OB이다. 두 형제 모두 고교 시절 요시노리와 마찬가지로 고시엔 구장의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2017년부터는 도호쿠 복지대학 야구부 OB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인 야구 클럽팀 'TFU 클럽'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형 히사노리는 도호쿠 고등학교 시절 다르빗슈 유의 백업 포수였다. 요시노리는 야쿠르트에서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은 후인 2015 시즌 종료 후,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 소속이던 다르빗슈의 개인 훈련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2016 시즌부터는 다르빗슈의 훈련 방식을 자신의 조정법에 적용했다.
동생 다카노리는 2012년부터 요시노리와 같은 야쿠르트 소속이었으나, 육성 선수로 2014년에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2015년부터 2년간 BC 리그 후쿠시마 홉스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며 NPB 복귀를 목표로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계속 참가했다. 2016년을 끝으로 후쿠시마를 퇴단한 후, 2017년 2월 NPB 복귀를 단념하고 3월부터 형 히사노리의 소개로 TFU 클럽에 소속되었다.
요시노리의 아버지는 유한회사 미야기 관광 택시의 대표이사이다. 요시노리가 야쿠르트 소속이던 시절에는 그의 등록명과 지배하 선수 시절 등번호에 맞춰 팀 컬러인 남색 보닛에 '11 YOSHINORI'라는 흰색 로고가 그려진 택시를 회사에서 운행했다. 요시노리가 라쿠텐으로 이적한 2019년 이후에도 '11'을 지운 채 운행을 계속하고 있다.
5.2.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그의 고향과 본가가 피해를 입었으나,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러나 센다이이쿠에이 고등학교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1년 선배 사이토 이즈미가 거주지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 27일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이토는 생전에 요시노리 가족과도 교류가 있었기에, 발견 직후 아버지가 조문 시 요시노리의 사인과 야쿠르트 유니폼을 영전에 바쳤다. 요시노리 자신도 같은 달 2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쿠사나기 구장)에서 선발 승리한 후, 임창용으로부터 건네받은 위닝볼을 사이토의 유족에게 직접 전달하겠다고 밝히고 영전에 바쳤다. 그는 2012년 5월 23일 발매된 NHK 동일본 대지진 부흥 응원곡 '꽃은 핀다'(花は咲くHana wa Saku일본어)에 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6. 은퇴 후 경력
6.1. 코치 활동
2021년 12월 21일, 사이타마 무사시 히트 베어스에서 2022 시즌부터 투수 코치를 겸임한다고 발표되었다. 2023년 9월 15일에는 다시 사이타마 무사시 히트 베어스의 투수 코치로 복귀한다고 발표되었다.
2024년 10월 31일, 그의 친정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2025 시즌 2군 투수 겸 육성 담당 코치로 취임한다고 발표되었다. 등번호는 91번이다.
7. 주요 경력 및 기록
7.1. 수상 및 영예
- 이스턴 리그 다승왕 (2008년)
- 올스타전 출장: 2회 (2009년, 2011년)
- 2009년 올스타전은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난 선수 중 첫 출장이었다.
7.2. 주요 통산 기록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 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2008 | 야쿠르트 | 6 | 5 | 0 | 0 | 2 | 1 | 0 | 0 | .667 | 118 | 29.2 | 21 | 4 | 8 | 0 | 2 | 28 | 3 | 0 | 16 | 15 | 4.55 | 0.98 |
2009 | 22 | 21 | 0 | 0 | 5 | 10 | 0 | 0 | .333 | 520 | 121.0 | 109 | 9 | 57 | 0 | 5 | 91 | 5 | 0 | 61 | 47 | 3.50 | 1.38 | |
2010 | 25 | 25 | 2 | 1 | 12 | 9 | 0 | 0 | .571 | 724 | 167.2 | 158 | 11 | 74 | 4 | 8 | 149 | 8 | 0 | 78 | 67 | 3.60 | 1.38 | |
2011 | 15 | 15 | 3 | 1 | 7 | 6 | 0 | 0 | .538 | 425 | 100.2 | 84 | 6 | 41 | 1 | 8 | 83 | 5 | 0 | 34 | 32 | 2.86 | 1.24 | |
2016 | 5 | 5 | 0 | 0 | 2 | 3 | 0 | 0 | .400 | 120 | 25.2 | 26 | 1 | 20 | 0 | 1 | 18 | 2 | 0 | 16 | 13 | 4.56 | 1.79 | |
2017 | 10 | 10 | 0 | 0 | 3 | 5 | 0 | 0 | .375 | 234 | 54.1 | 48 | 4 | 33 | 0 | 0 | 46 | 0 | 0 | 29 | 26 | 4.31 | 1.49 | |
2018 | 7 | 7 | 0 | 0 | 1 | 2 | 0 | 0 | .333 | 155 | 34.1 | 34 | 4 | 20 | 0 | 1 | 37 | 1 | 0 | 17 | 17 | 4.46 | 1.57 | |
2019 | 라쿠텐(E) | 1 | 0 | 0 | 0 | 0 | 0 | 0 | 0 | - | 3 | 1.0 | 0 | 0 | 0 | 0 | 0 | 2 | 0 | 0 | 0 | 0 | 0.00 | 0.00 |
2023 | 라쿠텐(M) | 1 | 0 | 0 | 0 | 0 | 0 | 0 | 0 | - | 5 | 0.1 | 3 | 0 | 0 | 0 | 0 | 1 | 0 | 0 | 2 | 1 | 27.00 | 9.00 |
NPB 통산 | 91 | 88 | 5 | 2 | 32 | 36 | 0 | 0 | .471 | 2299 | 534.1 | 480 | 39 | 253 | 5 | 25 | 454 | 24 | 0 | 251 | 217 | 3.66 | 1.37 | |
CPBL 통산 | 1 | 0 | 0 | 0 | 0 | 0 | 0 | 0 | - | 5 | 0.1 | 3 | 0 | 0 | 0 | 0 | 1 | 0 | 0 | 2 | 1 | 27.00 | 9.00 |
- 라쿠텐(E)는 NPB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라쿠텐(M)은 CPBL의 라쿠텐 몽키스를 의미한다.
; 독립 리그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2021 | 사이타마 | 15 | 15 | 0 | 0 | 8 | 3 | 0 | 0 | .727 | 321 | 75.0 | 76 | 9 | 27 | 5 | 52 | 9 | 0 | 45 | 43 | 5.16 | 1.37 |
2022 | 12 | 9 | 0 | 0 | 5 | 3 | 0 | 0 | .625 | 264 | 58.1 | 66 | 6 | 23 | 1 | 45 | 7 | 0 | 38 | 27 | 4.17 | 1.53 | |
2023 | 10 | 10 | 0 | 0 | 6 | 3 | 0 | 0 | .667 | 269 | 62.2 | 58 | 4 | 20 | 1 | 47 | 4 | 0 | 27 | 17 | 2.44 | 1.24 | |
2024 | 11 | 10 | 0 | 0 | 3 | 6 | 0 | 0 | .333 | 212 | 46.1 | 61 | 2 | 11 | 2 | 42 | 7 | 0 | 37 | 26 | 5.05 | 1.55 | |
통산 | 48 | 44 | 0 | 0 | 22 | 15 | 0 | 0 | .595 | 1066 | 242.1 | 261 | 21 | 81 | 9 | 186 | 27 | 0 | 147 | 113 | 4.20 | 1.41 |
; 투수 기록
- 첫 등판·첫 선발 등판: 2008년 8월 30일, 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19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1과 2/3이닝 6실점(5자책점)
- 첫 탈삼진: 상동, 1회말에 우치카와 세이이치로부터 헛스윙 삼진
- 첫 승리·첫 선발 승리: 2008년 9월 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6이닝 3실점
- 첫 완투 승리: 2010년 7월 2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9이닝 3실점 7탈삼진
- 첫 완봉 승리: 2010년 8월 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6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피안타 8탈삼진
; 타격 기록
- 첫 타점: 2008년 9월 14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2차전(도쿄 돔), 5회초에 다카하시 히사노리로부터 좌익 희생 플라이
- 첫 안타: 2010년 7월 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1차전(아키타 현립 야구장), 2회말에 나카타 겐이치로부터 좌전 2점 적시타
; 등번호
- 11 (2008년 ~ 2015년, 2016년 7월 5일 ~ 2018년)
- 121 (2016년 ~ 2016년 7월 4일)
- 123 (2019년 ~ 2019년 7월 28일)
- 63 (2019년 7월 29일 ~ 2020년)
- 18 (2021년 ~ 2023년 6월 30일, 2024년)
- 15 (2023년 7월 2일 ~ 2023년 8월 30일)
- 91 (2025년 ~ )
; 등록명
- 由規 (요시노리) (2008년 ~ )
8. 평가 및 영향력
8.1. 별명 및 대중적 인식
요시노리는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에 지명된 후 기자회견에서 가족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다가 눈물을 흘렸고, 입단이 결정된 후의 격려회에서도 울음을 터뜨려 '울보 왕자' 또는 '강구(剛球) 왕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교 시절에는 열투 고시엔 프로그램에서 '미치노쿠의 프린스 K'라는 칭호가 붙기도 했다. 프로 데뷔 후 첫 승리를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거두며 팀의 연패를 끊자, 언론에서는 그를 '요미우리 킬러'라고 불렀다.
2008년 입단 1년차에는 1군 통산 투구 이닝을 29와 2/3이닝으로 제한하여 다음 해 신인왕 수상 자격을 유지했다. 당시 투수 코치 아라키 다이스케가 완투와 신인왕 중 무엇을 택할지 묻자, 그는 "신인왕입니다"라고 즉답하며 8이닝 1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2009년 신인왕 투표에서는 3위(6표)에 그쳤다.
2009년부터 모리나가 제과와 '위더 서포트 선수' 계약을 체결했으며, 만화 '스트라이프 블루'에 주인공 형(야쿠르트의 마무리 투수)과 친한 설정으로 실명 등장했다. 또한 2012년 5월 23일 발매된 NHK 동일본 대지진 부흥 응원곡 '꽃은 핀다'(花は咲くHana wa Saku일본어)에 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야쿠르트 시절 지배하 선수 계약에서 육성 선수 계약으로 전환될 때, 지배하 등록 선수 시절 등번호(11번)의 제곱수인 121번을 육성 선수 등번호로 사용했다. 야쿠르트 구단은 그가 지배하 선수로 복귀할 때까지 등번호 11번을 공번으로 비워두었으며, 2016년 복귀와 함께 다시 11번을 되찾았다. 2018년 전력외 통고 시에도 야쿠르트 구단은 그가 은퇴를 결심할 경우를 대비해 은퇴 세레머니 개최나 구단 직원으로의 재계약 등을 제안하며, 요시노리를 팀의 공로자로 대우하는 모습을 보였다.
8.2. 야구계에 미친 영향
요시노리의 고교 시절부터의 압도적인 구속과 프로 입단 후 기록한 161 km/h의 강속구는 일본 야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투구 스타일과 구속 기록은 후배 투수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인 투수의 구속 한계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재활하며 마운드에 복귀하려는 그의 끈기와 의지는 많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특히 육성 선수로 전환된 후 다시 지배하 선수로 복귀하는 과정은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야쿠르트 구단이 그를 대우하는 방식은 선수와 구단 간의 신뢰 관계와 선수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9. 은퇴
9.1. 은퇴 발표 및 배경
2024년 9월 19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대 히로시마 20차전 경기 전, 야쿠르트 구단 창립 55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레전드 OB 퍼스트 피치' 시구 행사에 현역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참가했다. 야쿠르트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가와모토 료헤이를 포수로 하여 131 km/h의 직구를 던졌다. 그는 이 시구를 통해 "진구에서 시작하고 진구에서 끝내는 것이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2024년 10월 8일, 소속팀인 사이타마 무사시 히트 베어스를 통해 현역 은퇴와 팀 퇴단을 공식 발표했다. 10월 16일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아무런 후회도 없다.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며 17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시즌에는 11경기 등판 중 10경기에 선발로 나서 3승 6패, 평균자책점 5.05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