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mateur career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도쿄도 스미다구의 시타마치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했다. 1993년, 슈토쿠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제7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팀을 8강으로 이끌었으며, 같은 해 가을에 열린 국민 체육 대회 고등학교 야구 경기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고시엔 대회에서는 한 경기 4개의 희생 번트를 기록하며 투수로서도 2경기 연속 완봉승을 달성했다. 슈토쿠 고등학교 동기로는 다마키 도모타카, 1년 후배로는 엔도 류지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 통산 60경기에 등판해 17승 11패, 평균자책점 2.58, 239 탈삼진의 기록을 남겼다. 고마자와 대학 시절에는 3년 선배인 가와하라 준이치, 다카기 히로유키, 혼마 미쓰루와 한솥밥을 먹었고, 1년 후배인 아라이 다카히로, 3년 후배인 다케다 히사시 등과 함께 활약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사회인 야구팀인 도시바에 입단하여 1999년 제70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하고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는 맹활약을 펼쳤다. 도시바 동기로는 시미즈 나오유키가 있었다. 같은 해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1순위(역지명) 지명을 받아 입단하게 되었으며, 고마자와 대학 선배인 가와하라 준이치와 다시 팀 동료가 되었다.
2. Professional career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NPB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성공적인 투수 생활을 보낸 후 MLB로 진출하여 다양한 팀에서 경험을 쌓았다.
2.1. Yomiuri Giants (NPB)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2000년 NPB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데뷔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핵심 투수로 성장했다.
2.1.1. 2000-2005 seasons
2000년 4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호리우치 쓰네오 이후 처음으로 데뷔전에서 선발 승리 투수가 되는 등 시즌 초부터 맹활약했다. 신인왕은 수위타자를 차지한 긴조 다쓰히코에게 돌아갔지만, 다카하시는 최종적으로 9승 6패, 평균자책점 3.18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요미우리 좌완 투수로는 최초로 데뷔 첫해 규정 투구 이닝을 소화한 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2000년 일본 시리즈 5차전(후쿠오카 돔)에 선발 등판하여 일본 시리즈 역대 10번째이자 요미우리 투수로는 5번째로 첫 등판 완봉승을 기록하며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도 9승을 올렸지만, 규정 투구 이닝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해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 2002년에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10승)를 달성하며 2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소화했고,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0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면서 팀의 2년 만의 일본 제일에 공헌했다.
2003년 5월 21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는 완봉 페이스로 투구했으나, 좌익수 크리스 레이섬이 2아웃 상황에서 플라이볼 처리 후 실투로 공을 스탠드에 던져 2루 주자의 득점을 허용하며 완봉승을 놓쳤다. 하지만 경기는 2대1로 승리하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시즌 전체로는 부상 영향으로 13경기 등판에 그쳐 4승 4패, 평균자책점 3.84의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2004년에도 부상으로 인해 활약이 저조하여 16경기에서 5승 10패로 패전이 더 많았지만, 8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그해 팀의 유일한 완봉승을 기록했다. 2005년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불안정한 투구가 많아 8승 12패를 기록했다. 특히 5월 8일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와쿠마 히사시와 투수전을 벌이다 패배하여 구단 역사상 최초의 교류전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소화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성적은 17승 26패, 평균자책점 5.00으로 부진을 겪었다.
2.1.2. 2006 season
2006년 시즌에는 몸쪽 공격 스타일을 도입하여 시범 경기에서 연이은 쾌투를 선보였다. 그러나 시즌 개막 직후인 4월 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아오키 노리치카의 파울 볼이 벤치로 날아들어 얼굴을 직격, 오른쪽 뺨이 골절되는 부상으로 장기 이탈했다. 부상에서 복귀한 후에는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여 15 세이브를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35경기에서 2승 6패 15세이브 4 홀드, 평균자책점 4.94였다. 10월 1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는 연장 12회에 타이론 우즈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하며 도쿄 돔 개장 이래 처음으로 상대 팀의 리그 우승 및 헹가래를 허용하는 굴욕을 겪었다. 오프 시즌 재계약 협상에서는 기요타케 히데토시 구단 대표에게 이듬해 선발 복귀를 강력히 요청했으며, 아타미 고라쿠엔 호텔에서 열린 송년회에서는 술이 약간 취한 틈을 타 하라 다쓰노리 감독에게 술을 따르며 "2007년에는 꼭 선발로 뛰고 싶습니다"라고 다시 한번 간곡히 요청한 일화가 있다.
2.1.3. 2007 season

2007년 시즌에는 선발로 복귀하여 개막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4월에는 월간 5승을 기록하며 요미우리 좌완 투수로는 1979년 5월 니우라 히사오 이후 28년 만의 쾌거를 달성했다. 6월 21일에는 부친상을 당했으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6월 23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팀 내 우에하라 고지가 1999년 7월 4일 달성한 이래 12개 구단 중 가장 먼저 10승을 달성했다. 이는 6월 중 달성 기록으로는 1990년 6월 22일 사이토 마사키 이후 처음이었다. 입단 8년 만에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하여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에서 열린 2차전에서 선발 등판했다. 야마사키 다케시에게 홈런을 맞아 2이닝 동안 2실점을 기록했지만, 아베 신노스케의 3점 홈런 등 센트럴 리그 타선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 투수가 되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개인 최고 성적인 14승을 올리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시즌 막바지인 8월 2일부터 9월 15일까지 한 달 이상 승리 없이 부진한 시기를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세스 그레이싱어에게 평균자책점 1위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2연승을 거두며 생애 첫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최고 승률 타이틀도 얻었다. 그러나 그해부터 도입된 2007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2위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3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1점 리드 상황에서 4회에 타이론 우즈에게 역전 3점 홈런을, 7회에는 다니시게 모토노부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는 등 7이닝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어 2007년 일본 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닛폰 TV의 한 방송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이며, 구도 기미야쓰, 구와타 마스미 등 베테랑들이 떠나고 우쓰미 데쓰야, 가나바 겐토, 부활한 기사누키 히로시 등 젊은 투수들이 부상하는 가운데 (우에하라 고지와 함께) 자이언츠 투수진의 최고참 투수로서 팀의 리더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2.1.4. 2008-2009 seasons
2008년에는 생애 첫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되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 등판했으나, 빗줄기가 강하고 불운한 안타도 겹치면서 4이닝 5실점으로 부진했고 팀도 2대6으로 대패했다. 이후 등판에서도 부진이 이어져 5월 20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교류전에서 3회 도중 6실점을 기록하며 재조정을 명령받아 다음날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6월 27일 재등록된 후에는 컨디션을 되찾았지만, 시즌 초반의 부진이 영향을 미쳐 8승에 그쳤고 규정 투구 이닝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팀은 리그 2연패를 달성했고,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2008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일본 시리즈 진출에 1승만을 남겨둔 4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7이닝 1실점 호투를 펼쳤다. 구원 투수들이 동점을 허용하여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8회에 팀이 역전에 성공하며 6년 만에 일본 시리즈 진출을 확정 지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200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과 6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2차전에서는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4회 나카지마 히로유키에게 역전 2점 홈런을 허용했다. 6회에는 1사 1,2루의 위기를 맞아 교체되었지만 5과 1/3이닝 동안 2실점의 호투를 보였다. 그 직후 팀이 동점에 성공하여 패전 투수는 면했고, 9회에 알렉스 라미레스의 끝내기 홈런으로 팀이 승리했다. 그러나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6차전에서는 1회에 1안타 2볼넷으로 2사 만루 위기를 맞은 후 히라오 히로쓰구에게 3점 적시 2루타를 허용하며 선제점을 내주었다. 2회는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그 직후 대타로 교체되어 2이닝 3실점으로 강판되었다. 타선은 세이부 라이온스 선발 호아시 가즈유키에게 1점을 뽑았지만 더 이상 공략하지 못했고, 4회 1사 1,3루의 기회에서도 2번째 투수로 2일 휴식 후 등판한 기시 다카유키로부터 득점을 얻지 못하며 팀은 패배했고 다카하시 자신도 3번째 일본 시리즈 등판에서 첫 패전 투수가 되었다. 다음날에도 팀이 패하며 일본 제일은 놓쳤다.
2009년에는 8월 말까지 5승 6패로 부진했지만, 9월 이후 5연승을 기록하며 시즌을 10승 6패로 마쳤다. 이로써 개인 통산 3번째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으며, 평균자책점도 2.94를 기록하며 2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소화하고 팀의 리그 3연패에 기여했다. 2009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3년 연속으로 주니치 드래건스와 맞붙었으며, 3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1회 모리노 마사히코에게 2일 연속 선제 2점 홈런을 허용했지만, 이후 무실점으로 막아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5이닝 2실점으로 선발의 역할을 다했다. 팀은 다음날 4차전에서 승리하여 2009년 일본 시리즈 진출을 확정 지었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5이닝 5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어 홈구장에서의 우승 헹가래를 놓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차전에서 팀이 승리하며 7년 만의 일본 제일을 차지했다. 11월 17일에는 해외 FA권을 행사하며 10년간 몸담았던 요미우리와 결별하고 피터 그린버그가 대표 이사를 맡은 PEG사와 업무 제휴를 맺은 GSE그룹의 나카니시 고를 대리인으로 하여 메이저 리그 이적을 목표로 할 것을 발표했다.
2.2. Major League Baseball (MLB)
NPB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2010년부터 MLB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2.1. New York Mets
2010년 2월 11일, 뉴욕 메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으며, 계약에는 2010년 10월 31일까지 자유 계약으로 풀려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등번호는 톰 글래빈이 사용했던 '47'번으로 결정되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13 이닝 4실점(평균자책점 2.77)의 좋은 성적을 남기며 개막 직전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했다. 4월 7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 연장 10회에 팀의 6번째 투수로 등판하며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으나, 타자 4명을 상대로 2안타 1볼넷 1실점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4월 23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는 선발 존 메인의 부진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강판으로 긴급 등판했다. 3 이닝을 2안타 1볼넷 7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며 메이저 리그 첫 승리를 기록했다. 타석에서도 가와카미 겐신으로부터 메이저 리그 첫 안타를 때려냈는데, 첫 타석 첫 안타였던 탓에 벤치로 돌아오자 팀 동료들이 "이치로! 이치로!"라고 외쳤다고 본인이 회고한 바 있다. 5월 21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첫 선발 등판하여 6 이닝 5안타 무실점의 호투를 펼쳤지만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다.

8월 16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팀은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의 부상 이탈로 여러 투수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방침이었는데, 이날 다카하시의 호투로 마무리 투수로 지명되었다. 10월 1일 워싱턴 내셔널스전에서는 동점 상황인 9회부터 등판하여 2 이닝을 무안타 무실점 4탈삼진으로 막아냈고, 연장 10회 조시 토레이가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면서 일본인 메이저 리거로는 4번째, 메츠에서는 1985년의 릭 아길레라 이후 25년 만에 신인으로서 두 자릿수 승리(10승)를 달성했다.
최종적으로 선발 투수로는 4승 4패, 평균자책점 5.01, WHIP 1.45로 부진했지만, 구원 투수로는 6승 2패 8세이브, 내셔널 리그 9위에 해당하는 평균자책점 2.04, WHIP 1.13을 기록하며 좋은 성과를 냈다. 특히 규정 투구 이닝 미만으로 시즌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린 MLB 일본인 투수는 2000년의 하세가와 시게토시 이후 두 번째 사례였다. 이 해 일본인 메이저 리거 중에서는 구로다 히로키(11승)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승수를 기록했다. 오프 시즌에는 재계약 협상이 결렬되어 11월 5일 웨이버 공시되었으며, 대리인을 아른 텔렘으로 변경했다.
2.2.2. Los Angeles Angels of Anaheim
2010년 12월 2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총 800.00 만 USD 규모의 2년 계약을 맺었다. 등번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부터 애착이 있었던 '21'번으로 결정되었다.

2011년 시즌에는 원포인트 릴리프나 여러 이닝을 소화하는 등 다양한 상황에서 구원 투수로 기용되었다. 5월에는 11경기 등판에서 0승 1패, 평균자책점 6.30, WHIP 1.80으로 부진했으나, 6월에 컨디션을 회복하며 전반기에는 36경기 등판에서 2승 2패, 평균자책점 3.62, WHIP 1.33을 기록했다. 8월 15일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통산 100경기 등판을 달성했고, 후반기에는 25경기 등판에서 2승 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23, WHIP 1.07의 성적을 남겼다. 시즌 전체적으로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61경기에 등판했으며, 우타자를 피안타율 .206으로 막아내는 등 강한 면모를 보였다. 5월과 8월에는 평균자책점이 6점대 이상을 기록했으나, 6월과 9월에는 평균자책점 0점대를 기록하는 등 기복이 심한 시즌을 보냈다. 일본인 선수와의 대결에서는 스즈키 이치로를 3타수 무안타, 마쓰이 히데키를 2타수 무안타(단, 다카하시가 요미우리 시절 홍백전이나 시범 경기에서 마쓰이에게 8타수 4홈런으로 매우 약했다는 일화가 있다), 니시오카 쓰요시를 2타수 무안타로 막아내는 등 모두 무안타로 처리했다.
2012년 시즌에는 4월에 8경기 등판에서 0승 1패, 평균자책점 9.95, WHIP 1.89로 부진했으나, 5월에는 10경기 등판에서 0승 1패, 평균자책점 1.86, WHIP 0.93으로 회복세를 보였다. 전반기에는 28경기 등판에서 0승 2패, 평균자책점 4.15, WHIP 1.08을 기록했다. 7월 28일 팀에 잭 그레인키가 합류함에 따라 트리플 A 팀인 솔트레이크 비스로 강등되었으나, 스콧 다운스의 부상으로 7월 31일 다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8월에는 8경기 등판에서 0승 1패, 평균자책점 7.71, WHIP 1.57로 다시 부진에 빠져 8월 19일 재차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
2.2.3. Pittsburgh Pirates, Chicago Cubs, and Colorado Rockies
2012년 8월 24일, 웨이버 공시를 통해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했다. 파이리츠에서는 9경기 등판에 그쳤으며, 평균자책점 8.64, WHIP 1.68을 기록했다。전년도에 이어 일본인 선수와의 대결에서는 스즈키 이치로를 3타수 무안타,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1타수 무안타, 아오키 노리치카를 1타수 무안타로 막아냈다. 당시 파이리츠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다투고 있었으나, 9월 27일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사라졌고, 9월 30일에는 20년 연속 시즌 최하위가 확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다카하시는 "올해는 여러모로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즐거웠다. 나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새로운 동료들도 생겼다. 미국에 올 때 잠 못 이룰 정도로 고민했다. 쉽게 돌아갈 수 없다. 내가 납득할 때까지 여기서 뛰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피츠버그는 2012년 10월 31일 다카하시를 무조건 방출했다.
2012년 12월 27일, 시카고 컵스와 스프링 트레이닝 초대가 포함된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2013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는 2차례 선발 등판을 포함해 9경기에서 평균자책점 4.42, WHIP 1.36을 기록하며 성적이 저조했지만, 개막전 로스터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막 후 3경기에서 3 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부진했고, 4월 16일 지명 할당되어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었다. 4월 18일에는 트리플 A 팀인 아이오와 컵스로 강등되었다.
2013년 6월 22일,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은 관계로 로키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콜로라도 스프링스 스카이삭스 소속으로 뛰었다. 전반기에는 7경기 등판에서 1승 0패, 평균자책점 11.70, WHIP 3.00을 기록했다. 후반기에는 11경기 등판에서 0승 1패, 평균자책점 3.45, WHIP 1.41로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메이저 리그 복귀에는 실패했다.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2.3. Yokohama DeNA BayStars (NPB)
2013년 시즌을 마친 후인 12월 2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는 다카하시 히사노리와 2년 계약을 체결했음을 발표했다. 이로써 다카하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떠난 지 5년 만에 다시 NPB 및 센트럴 리그 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등번호는 뉴욕 메츠 시절에도 착용했던 '47'번을 배정받았다. 2014년 1월 20일, 구단은 등록명을 '尚成'(히사노리)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2014년(이적 첫해)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좋은 투구를 선보일 때도 있었지만, 타선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홈런을 많이 허용하는 경우가 잦아 결국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특히 친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3연속 홈런을 맞고 강판되는 아픔도 겪었다.
2015년 1월 30일, 구단은 등록명을 본명인 '髙橋 尚成''으로 되돌린다고 발표했다. 4월 29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선발 등판했으나, 2 이닝 동안 6실점한 후 2군으로 강등되었다. 9월 13일, 다카하시는 자신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이번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은퇴 이유에 대해 "미국(MLB)에서 돌아온 전년부터 은퇴를 계속 생각해왔다. 이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몸은 무리를 해서라도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게 되었다. 동기 부여가 올라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10월 2일 친정팀 요미우리와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경기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다. 다카하시는 1회 초 선두 타자 한 명만을 상대하는 투수로 등판했다. 선두 타자 다치오카 소이치로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한 듯했으나, 송구가 빗나가 1루수가 포구하지 못하여 출루를 허용한 시점에서 강판되었다(기록은 1루 실책이었다). 경기 후에는 은퇴 세리머니가 진행되었고, 그는 팬들과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지막에는 마운드 위에서 헹가래를 받았으며, 요미우리 시절 동료이자 동갑내기인 다카하시 요시노부 등과 포옹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2월 2일부로 NPB로부터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2.4. Retirement and post-playing career
현역에서 은퇴한 후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호리프로와 전속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며 다양한 야구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 2016년부터는 스포츠 호치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NHK-BS의 메이저 리그 중계와 프로그램 '월드 스포츠 MLB'의 해설을 맡았다. 또한 TBS 라디오(2017년까지), 닛폰 TV, BS닛테레, 닛테레 G+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문 채널), BS-TBS, TBS 채널, CBC 라디오 등의 부음성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2018년에는 라디오 닛폰의 야구 해설자도 겸임했다. 같은 해 4월 1일부터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그라제니'에서는 해설자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2022년 8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다카하시가 임시 투수 코치로 취임한다고 발표했다. 등록 기간은 8월 2일부터 20일까지였다. 2023년에는 이승엽 신임 감독의 요청으로 스프링 캠프 기간 동안 두산 베어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2025년에는 캐리비안 시리즈 참가를 위해 결성된 팀 '재팬 브리즈'의 투수 코치로 참가했으나, 팀은 예선에서 전패하며 탈락했다.
3. Playing style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정교한 투구 스타일을 자랑하는 좌완 투수였다. 그의 평균 직구 구속은 약 143 km/h (88.8 mph)였으며, 최고 구속은 약 148 km/h (92 mph)에 달했다. 그는 포심 패스트볼 외에도 슬라이더, 싱커(체인지업으로도 불림), 슈트(투심 패스트볼으로도 불림), 커브볼을 다양하게 구사했으며, 드물게 포크볼과 컷 패스트볼도 섞어 던진다.
그는 코너를 정교하게 찌르는 투구를 특기로 삼았다. 2010년 메이저 리그 진출 후에도 코너를 더욱 철저히 공략하는 투구를 지향한 결과, NPB 시절에 비해 사사구 허용률은 높아졌지만 탈삼진율이 크게 상승했다. 이는 그의 투구 스타일이 변화에 적응하며 더욱 효과적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4. Personal life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대외적으로 아내와 자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자동차 애호가로도 유명하며, 2023년 기준으로 테슬라 모델 3는 그가 소유했던 15번째 차량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동기 부여이자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다고 밝혔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동성인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팀에 있었기 때문에 팀 내에서는 '히사노리'로 불렸고, 경기 기록에서는 '다카하시 히사'로 표기되었다. 그는 요미우리에서 동료였던 다카하시 요시노부, 우에하라 고지보다 단 하루 일찍 태어났다. 부모님이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었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이언츠를 응원했으며, 왼손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맡을 수 없는 포지션의 선수였던 시노즈카 가즈노리를 동경했다. 어릴 적부터 프로 야구 선수가 된다면 요미우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4.1. Public image and anecdotes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선수 시절 젊은 시절에는 술을 마시면 흥에 겨워 도를 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200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우승 기념 축승회에서는 바닥에 엎드려 엉덩이를 노출하고 흥분하는 모습이 생중계되었는데, 이는 사실 선배들이 장난으로 바지를 벗긴 것이었다. 이 행동으로 당시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엔카이 부초'(연회 부장)로 지명되기도 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송년회에서는 나가시마 감독 앞에서 '도콘 고메테' 노래에 맞춰 젓가락을 지휘봉처럼 흔들기도 했다.
2002년 축승회에서도 표범 무늬 T백을 입고 엉덩이를 노출했으며, 급기야 코피까지 흘리는 모습이 중계되기도 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에게 "자각을 가지라"고 말했다. 또한, 다카하시는 나중에 아내의 질책을 받았으며, 그해 일본 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이하라 하루키 감독으로부터 "더럽고 품위가 없다. 전국 방송에서 보여줄 것이 못 된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본 시리즈 4차전에 선발 등판한 다카하시는 호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고, 이 경기에서 요미우리는 세이부를 상대로 4연승을 거두며 일본 제일을 차지했다. 경기 후 축승회가 열렸지만, 다카하시는 앞서 언급된 신체 노출 퍼포먼스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 특히 엉덩이 노출은 한편으로는 환영받았지만, '구도(球道)의 신사'를 모토로 하는 요미우리 선수로서는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일부 팬들의 비판도 강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 중기부터는 이러한 과격한 퍼포먼스를 공개적으로 하지 않게 되었다. 앞서 비판했던 이하라 하루키 감독은 2007년부터 요미우리의 야수 종합 코치를 맡았고, 그해 리그 우승이 임박했을 때는 다카하시의 '엉덩이 노출'을 용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 축승회에서는 다카하시가 엉덩이를 노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2년간 우승을 했음에도 축승회에서 노출하는 일은 없었다.
다카하시는 나중에 일본 야구계로 복귀했을 때, 위와 같은 행동들은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니 잊달라고 언급한 바 있다.
5. Awards and achievements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NPB와 MLB를 거치며 다양한 개인 타이틀과 수상 경력을 쌓았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핵심 투수로서 인정받았다.
5.1. Titles and awards
- 아시안 게임: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팀 경쟁)
; 일본 프로 야구 (NPB)
- 최우수 평균자책점 : 1회 (2007년)
- 최고 승률 : 1회 (2007년)
-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 연맹 표창이 없었음. (센트럴 리그에서는 1972년까지와 2013년 이후 표창)
- 베스트 나인 : 1회 (투수 부문: 2007년)
- 최우수 투수: 1회 (2007년)
- 월간 MVP : 2회 (투수 부문: 2002년 5월, 2007년 4월)
- 최우수 배터리상 : 1회 (2007년, 아베 신노스케와 함께 수상)
- JA 전농 Go・Go상 : 1회 (최다 탈삼진상: 2005년 5월)
-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일본생명상 : 1회 (2007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1회 (2000년)
5.2. Records and milestones
; 일본 프로 야구 (NPB)
; 첫 기록
-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 2000년 4월 6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3차전(나고야 돔), 8이닝 1실점
- 첫 탈삼진: 상동, 3회말에 이노우에 가즈키로부터 헛스윙 삼진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2000년 5월 7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8차전(도쿄 돔)
- 첫 홀드: 2005년 7월 20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말 1사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과 2/3이닝 무실점
- 첫 세이브: 2006년 7월 16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말 6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이닝 무실점
; 타격 기록
- 첫 안타·첫 타점: 2000년 4월 2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5회초에 기쿠치하라 쓰요시로부터 3루타 적시 내야 안타
; NPB 이정표 기록
- 통산 1000 투구 이닝: 2007년 9월 9일, 대 한신 타이거스 21차전(도쿄 돔), 1회초 3아웃에 다카하시 미쓰노부를 1루수 뜬공으로 달성 (역대 307번째)
- 통산 1000 탈삼진: 2009년 8월 16일, 대 한신 타이거스 18차전(도쿄 돔), 4회초에 시모야나기 쓰요시로부터 루킹 삼진 (역대 125번째)
; 기타
- 올스타전 출장: 1회 (2007년)
6. Career statistics
6.1. Pitching statistics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 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자책 | WHIP |
---|---|---|---|---|---|---|---|---|---|---|---|---|---|---|---|---|---|---|---|---|---|---|---|---|---|
2000년 | 요미우리 | 24 | 23 | 3 | 2 | 1 | 9 | 6 | 0 | -- | .600 | 563 | 135.2 | 133 | 10 | 36 | 3 | 2 | 102 | 1 | 0 | 59 | 48 | 3.18 | 1.25 |
2001년 | 30 | 23 | 3 | 1 | 0 | 9 | 9 | 0 | -- | .500 | 584 | 134.2 | 126 | 20 | 52 | 2 | 3 | 99 | 4 | 0 | 65 | 59 | 3.94 | 1.32 | |
2002년 | 24 | 23 | 2 | 0 | 1 | 10 | 4 | 0 | -- | .714 | 669 | 163.1 | 143 | 16 | 39 | 1 | 6 | 145 | 4 | 1 | 58 | 56 | 3.09 | 1.11 | |
2003년 | 13 | 13 | 3 | 0 | 0 | 4 | 4 | 0 | -- | .500 | 364 | 86.2 | 79 | 14 | 27 | 1 | 4 | 78 | 1 | 1 | 42 | 37 | 3.84 | 1.22 | |
2004년 | 16 | 16 | 3 | 1 | 1 | 5 | 10 | 0 | -- | .333 | 402 | 91.0 | 107 | 18 | 26 | 0 | 3 | 61 | 3 | 0 | 59 | 55 | 5.44 | 1.46 | |
2005년 | 27 | 26 | 4 | 2 | 0 | 8 | 12 | 0 | 1 | .400 | 695 | 163.0 | 171 | 18 | 48 | 1 | 4 | 135 | 1 | 0 | 88 | 81 | 4.47 | 1.34 | |
2006년 | 35 | 4 | 0 | 0 | 0 | 2 | 6 | 15 | 4 | .250 | 266 | 62.0 | 70 | 10 | 15 | 2 | 1 | 51 | 1 | 0 | 36 | 34 | 4.94 | 1.37 | |
2007년 | 28 | 27 | 2 | 2 | 0 | 14 | 4 | 0 | 0 | .778 | 764 | 186.2 | 168 | 21 | 50 | 4 | 2 | 141 | 1 | 0 | 63 | 57 | 2.75 | 1.17 | |
2008년 | 23 | 22 | 0 | 0 | 0 | 8 | 5 | 0 | 0 | .615 | 518 | 122.0 | 127 | 16 | 30 | 0 | 5 | 94 | 2 | 0 | 63 | 56 | 4.13 | 1.29 | |
2009년 | 25 | 25 | 1 | 0 | 0 | 10 | 6 | 0 | 0 | .625 | 610 | 144.0 | 147 | 16 | 36 | 1 | 6 | 126 | 0 | 2 | 58 | 47 | 2.94 | 1.27 | |
2010년 | NYM | 53 | 12 | 0 | 0 | 0 | 10 | 6 | 8 | 3 | .625 | 516 | 122.0 | 116 | 13 | 43 | 7 | 0 | 114 | 1 | 1 | 51 | 49 | 3.61 | 1.30 |
2011년 | LAA | 61 | 0 | 0 | 0 | 0 | 4 | 3 | 2 | 7 | .571 | 281 | 68.0 | 58 | 7 | 25 | 8 | 0 | 52 | 1 | 0 | 30 | 26 | 3.44 | 1.22 |
2012년 | 42 | 0 | 0 | 0 | 0 | 0 | 3 | 0 | 3 | .000 | 173 | 42.0 | 39 | 6 | 10 | 1 | 0 | 41 | 0 | 0 | 24 | 23 | 4.93 | 1.17 | |
PIT | 9 | 0 | 0 | 0 | 0 | 0 | 0 | 0 | 0 | ---- | 39 | 8.1 | 10 | 2 | 4 | 0 | 0 | 8 | 0 | 0 | 8 | 8 | 8.64 | 1.68 | |
'12계 | 51 | 0 | 0 | 0 | 0 | 0 | 3 | 0 | 3 | .000 | 212 | 50.1 | 49 | 8 | 14 | 1 | 0 | 52 | 0 | 0 | 32 | 31 | 5.54 | 1.25 | |
2013년 | CHC | 3 | 0 | 0 | 0 | 0 | 0 | 0 | 0 | 0 | ---- | 14 | 3.0 | 3 | 1 | 2 | 0 | 0 | 3 | 0 | 0 | 2 | 2 | 6.00 | 1.67 |
2014년 | DeNA | 10 | 10 | 0 | 0 | 0 | 0 | 6 | 0 | 0 | .000 | 230 | 51.0 | 65 | 14 | 21 | 0 | 1 | 33 | 0 | 1 | 33 | 30 | 5.29 | 1.71 |
2015년 | 6 | 2 | 0 | 0 | 0 | 0 | 1 | 0 | 0 | .000 | 45 | 8.1 | 14 | 3 | 4 | 0 | 0 | 4 | 0 | 0 | 12 | 8 | 8.64 | 2.16 | |
NPB : 12년 | 261 | 214 | 21 | 8 | 3 | 79 | 73 | 15 | 5 | .520 | 5710 | 1348.1 | 1350 | 176 | 384 | 15 | 37 | 1069 | 18 | 5 | 636 | 568 | 3.79 | 1.29 | |
MLB : 4년 | 168 | 12 | 0 | 0 | 0 | 14 | 12 | 10 | 13 | .538 | 1023 | 243.1 | 226 | 29 | 84 | 16 | 0 | 221 | 2 | 1 | 115 | 108 | 3.99 | 1.27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6.2. Fielding statistics
연도 | 구단 | 투수 (P) | |||||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2000 | 요미우리 | 24 | 3 | 34 | 1 | 4 | .974 |
2001 | 30 | 5 | 28 | 0 | 1 | 1.000 | |
2002 | 24 | 10 | 25 | 1 | 0 | .972 | |
2003 | 13 | 3 | 17 | 0 | 0 | 1.000 | |
2004 | 16 | 4 | 15 | 1 | 2 | .950 | |
2005 | 27 | 2 | 18 | 2 | 1 | .909 | |
2006 | 35 | 2 | 10 | 1 | 1 | .923 | |
2007 | 28 | 16 | 23 | 1 | 2 | .975 | |
2008 | 23 | 8 | 21 | 0 | 1 | 1.000 | |
2009 | 25 | 11 | 33 | 1 | 4 | .978 | |
2010 | NYM | 53 | 5 | 15 | 1 | 0 | .952 |
2011 | LAA | 61 | 2 | 12 | 1 | 1 | .933 |
2012년 | 42 | 4 | 4 | 0 | 0 | 1.000 | |
PIT | 9 | 0 | 0 | 0 | 0 | ---- | |
'12계 | 51 | 4 | 4 | 0 | 0 | 1.000 | |
2013년 | CHC | 3 | 0 | 1 | 0 | 0 | 1.000 |
2014년 | DeNA | 10 | 2 | 12 | 0 | 2 | 1.000 |
2015년 | 6 | 0 | 3 | 1 | 0 | .750 | |
NPB | 261 | 66 | 239 | 9 | 18 | .971 | |
MLB | 168 | 11 | 32 | 2 | 1 | .956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7. Uniform numbers and registered names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프로 경력 동안 여러 등번호와 등록명(활동명)을 사용했다.
; 등번호
- 36 (2000년 ~ 200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 17 (2002년 ~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 21 (2007년 ~ 200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1년 ~ 2012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 47 (2010년, 뉴욕 메츠; 2013년, 시카고 컵스; 2014년 ~ 2015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 41 (2012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 등록명
- 高橋 尚成 (高橋 尚成Takahashi Hisanori일본어, 2000년 ~ 2009년, NPB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0년 ~ 2013년, MLB; 2015년, NPB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 尚成 (尚成Hisanori일본어, 2014년, NPB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