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빌헬름 몽케(Wilhelm Mohnke빌헬름 몽케독일어)는 1911년 3월 15일 뤼베크에서 태어나 2001년 8월 6일 사망한 독일의 군인이자 무장친위대 장교이다. 그는 1931년 9월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33년 3월 창설된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인 SS-Stabswache Berlin슈타프스바헤 베를린독일어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제1SS기갑사단 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및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에서 주요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전쟁 말기 베를린 공방전에서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중심 정부 지구 방어 사령관인 몽케 전투단을 지휘했다.
몽케는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전쟁범죄 의혹에 연루되었는데, 1940년 프랑스 웜후트 학살, 1944년 6월 노르망디에서 발생한 캐나다군 포로 학살, 그리고 1944년 12월 벨기에 말메디 학살 사건 등에 대한 지휘 책임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는 소련군 포로로 10년간 수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혐의로도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으며,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군 경력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하는 등 나치 독일군 내에서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전쟁범죄 의혹에 대한 사법적 책임 회피로 인해 전후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2. 생애 초기 및 SS 경력
빌헬름 몽케는 나치당과 SS에 입대하기 전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SS 입대 후에는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 창설 멤버로서 초기 경력을 시작했다.
2.1. 출생 및 유년기
빌헬름 몽케는 1911년 3월 15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빌헬름 몽케라는 이름의 캐비닛 제작자였다. 아버지 사망 후 몽케는 유리 및 도자기 제조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경영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또한 경제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
2.2. SS 입대 및 초기 활동
몽케는 1931년 9월 1일 당원 번호 649,684번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 직후 그는 SS 번호 15,541번으로 슈츠슈타펠 (SS)에 합류했다. 몽케는 SS-Mann만독일어 (사병) 계급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 후, 베를린의 SS 본부는 모든 SS 연대에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로 전출시킬 최정예 병사 세 명의 이름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몽케는 1933년 3월 이 부대에 선발되었으며, 원 제국 수상부에 최초의 경호 임무를 수행한 SS-Stabswache Berlin슈타프스바헤 베를린독일어 (SS-참모 경호대 베를린)에 배정되었다. 1933년 3월, 그는 SS-운터슈투름퓌러로 임관했다. 8월까지 몽케는 두 명의 중대장 중 한 명이 되었다. 9월에는 SS-Sonderkommando Zossen존더코만도 초센독일어과 SS-Sonderkommando Jüterbog존더코만도 위터보크독일어 훈련 부대가 제프 디트리히의 지휘 아래 합병되면서 이 부대는 SS-Sonderkommando Berlin존더코만도 베를린독일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합병과 함께 몽케는 제2대대로 전출되어 제3중대 지휘를 맡았다. 1933년 11월, 맥주 홀 폭동 10주년을 맞아, Sonderkommando존더코만도독일어는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이 의식이 끝난 후 부대는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LAH)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았다. 1934년 4월 13일,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LAH를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LSSAH)로 개칭하도록 명령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활동
몽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다양한 주요 전역에 참전하며 지휘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전쟁범죄 의혹에 연루되었다.
3.1. 초기 전역 (폴란드, 프랑스, 발칸)
몽케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그는 1939년 9월 7일 부상을 입고 프라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공로로 몽케는 전상장 흑색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1939년 9월 29일 철십자장 2급을, 1939년 11월 8일 철십자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40년 프랑스 전투 발발 당시, 몽케는 제1SS기갑사단 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보병연대 제2대대 제5중대를 이끌었다. 대대장이 부상당하자 5월 28일 제2대대 지휘를 맡았다.
그는 발칸 전역 동안 제2대대를 지휘했는데, 이 전역 첫날인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공습으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은 그의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몽케는 이를 거부했다. 그의 부상은 매우 심각하여 발의 일부를 제거해야 했다. 1941년 12월 26일, 여전히 회복 중이던 몽케는 독일 십자장 금장(Gold)을 수여받았다. 몽케는 1942년 현역으로 복귀했으며, 1942년 3월 보충 대대로 전출되었다.
3.1.1. 웜후트 학살 의혹 연루
1940년 프랑스 전투 중 몽케는 웜후트 학살과 관련하여 웜후트 인근에서 영국군 (제48사단) 및 프랑스군 포로 80명(일부 기록에는 영국군 96명, 프랑스군 1명)을 살해하는 데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몽케는 이 혐의에 대해 단 한 번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며, 1988년 사건이 재개되었을 때 독일 검사는 기소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 내렸다. 1993년 후반 영국 정부가 이전 조사에서 일부 관련 파일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이 잠시 다시 불거졌지만, 그로부터 실질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몽케는 이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며 역사가 토마스 피셔에게 "영국 포로를 잡지 않거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3.2. SS 히틀러유겐트 사단 및 노르망디 전역
1943년 9월 1일, 1926년생 히틀러유겐트 출신 신병 16,000명이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창설에 참여했으며, 고위 부사관과 장교들은 대체로 동부 전선 참전 베테랑들이었다. SS-Obersturmbannführer오버슈투름반퓌러독일어 (SS 중령) 몽케는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에서 두 번째로 창설된 연대인 제26SS기갑척탄병연대 지휘관을 맡았다.
몽케는 노르망디 학살의 일부로 퐁트네-르-페스넬에서 캐나다군 포로 35명(일부 기록에 따르면 1944년 6월 7일 퐁트네-르-페스넬에서 캐나다군 포로 36명, 6월 8일 르 메닐-파트리에서 베른하르트 지프켄이 지휘하는 제2대대 소속 병력에 의해 캐나다군 포로 3명)을 살해하는 데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개입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재판을 받은 적은 없다. 몽케는 역사가 토마스 피셔에게 1941년 4월 전투 부상으로 인한 심한 오른쪽 다리 통증 때문에 때때로 모르핀과 같은 강력한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약물 복용이 그의 의사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신체 건강이 그의 배치에 영향을 미쳤음은 알려져 있다. 몽케는 1942년 3월부터 1943년 5월까지 라이프슈탄다르테의 보충 대대장이었다. 그 후 "충분히 통증이 없어" SS-Obersturmbannführer오버슈투름반퓌러독일어 쿠르트 마이어가 그에게 제12SS기갑사단에서 지휘를 맡도록 설득했고, 이는 1943년 9월 15일 제26SS기갑척탄병연대 지휘로 이어졌다.
제12SS기갑사단이 팔레즈 포위전을 뚫기 위해 싸우는 동안, 사단은 약 40~50%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몽케는 그의 전투단 (Kampfgruppe캄프그루페독일어)을 디브강 동쪽으로 철수시켰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전황이 독일에 불리해지고 전선이 센강으로 밀려나자, 몽케는 강 건너편을 보호하기 위해 서쪽 강둑에서 조직적인 저항을 이끈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몽케는 1944년 7월 11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8월 31일까지 이 전투단을 이끌었으며, 그날 심하게 부상당한 테오도어 비슈의 뒤를 이어 라이프슈탄다르테 (LSSAH) 사단장이 되었다.
3.3. 경호친위대 사단장 및 아르덴 대공세
라인강의 감시 작전과 북풍 작전은 서부 전선에서 히틀러가 감행한 최후의 대규모 공세이자 최후의 도박이었다. 이 계획은 미국군 전선을 돌파하여 안트베르펜까지 진격하여 서방 연합군을 분열시키고 독일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몽케의 제1SS기갑사단 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LSSAH)는 제1SS기갑군단에 소속되어 아르덴 대공세 작전의 선봉을 맡았다. 당시 나치 독일의 연료 위기로 인해 LSSAH는 차량에 필요한 연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1944년 12월 16일 작전이 시작되었으며, SS-Obersturmbannführer오버슈투름반퓌러독일어 요아힘 파이퍼의 전투단이 뫼즈강을 향한 진격을 이끌었다.
3.3.1. 말메디 학살 의혹 연루
1944년 12월 17일 07시경, 파이퍼의 전투단은 뷜링겐에 있는 미군 연료 보급소를 점령했다. 같은 날 13시 30분, 말메디 근처의 한 교차로에서 파이퍼의 LSSAH 부대원들이 최소 68명의 미합중국 포로를 총살했으며, 이 사건은 말메디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12월 17일 저녁까지 LSSAH의 선봉대는 스타블로에서 미 제99사단과 교전 중이었다. 몽케의 사단은 이틀째가 끝날 무렵 최소 36시간 지연되었다. 후퇴하던 미군은 몽케와 파이퍼가 온전히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중요한 다리와 연료 보급소를 폭파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더욱 늦췄다. 날이 갈수록 적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12월 24일에는 진격이 중단되었다. 1945년 1월 1일, 루프트바페는 연합군 비행장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개시했지만, 이 작전은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대체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이 무렵 연합군은 병력을 재편성하여 독일군의 어떠한 공격도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작전은 1945년 1월 27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사흘 후 몽케는 SS-Brigadeführer브리가데퓌러독일어 (SS 여단지도자)로 진급했다. 얼마 후 LSSAH와 제1SS기갑군단은 헝가리로 전출되어 그곳의 붕괴되는 상황을 보강하려 했다. 몽케는 공습으로 귀에 손상을 입는 등 부상을 당했다. 1945년 2월 6일 그는 최전선 근무에서 제외되어 총통 예비군으로 편입되었고, 오토 쿰이 그의 뒤를 이어 사단장이 되었다.
3.4. 베를린 공방전 및 최후의 날들

부상에서 회복된 후, 몽케는 히틀러에 의해 제국 수상부와 퓌러엄폐호가 포함된 베를린 중심 정부 지구(치타델레 구역)의 방어를 위한 Kommandant코만단트독일어 (전투 사령관)으로 직접 임명되었다. 몽케의 지휘소는 제국 수상부 지하 벙커에 위치했다. 그는 약 2,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몽케 전투단 (Kampfgruppe Mohnke캄프그루페 몽케독일어)을 편성했으며, 이는 두 개의 취약한 연대로 나뉘어 있었다. 이 전투단은 LSSAH 대공포 중대, 슈프린하겐의 LSSAH 훈련 및 보충 대대 (SS-Standartenführer슈탄다르텐퓌러독일어 안할트 지휘), 제국지도자 SS 호위 대대에서 온 600명, Führer-Begleit-Kompanie퓌러-베글라이트-콤파니독일어, 그리고 핵심 병력인 총통을 경호하던 800명의 라이프슈탄다르테 SS 경호대대로 구성되었다.
히틀러가 헬무트 바이틀링 장군을 베를린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몽케는 제국 수상부와 퓌러엄폐호 방어 목표를 유지하기 위해 바이틀링의 지휘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몽케의 SS 전투단, 바이틀링 장군의 제56기갑군단, 그리고 소수의 다른 부대들을 합한 베를린 방어 병력은 대략 45,000명의 병사와 40,000명의 국민돌격대로 총 85,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 붉은 군대 병력에 맞서야 했다. 베를린 방어 지역에 대한 포위 및 공격에 할당된 소련군 병력은 약 150만 명에 달했다.
몽케의 전투 병력이 독일 제3제국의 신경 중심부에 위치했기 때문에,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부터 시작되어 1945년 5월 2일 지역 전투가 끝날 때까지 맹렬한 포격에 시달렸다. 국회의사당과 제국 수상부 주변의 시가전은 치열하고 유혈 낭자했다. 소련군에게 국회의사당은 나치 독일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점령할 가치가 매우 높았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열릴 노동절 퍼레이드 이전에 점령하고자 맹렬한 공세를 펼쳤다.
3.4.1. 헤르만 페겔라인 군사 재판에서의 역할
베를린 전투가 그들 주변에서 격렬하게 전개되는 동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이었던 SS-Gruppenführer그루펜퓌러독일어 헤르만 페겔라인을 탈영 혐의로 재판하기 위해 몽케에게 군사 재판소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재판소는 한스 크렙스 장군,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장군, 요한 라텐후버 장군, 그리고 몽케 자신으로 구성되었다. 수년 후 몽케는 작가 제임스 P. 오도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직접 재판장을 맡게 되었다... 나는 피고인 [페겔라인]이 고위 장교들의 재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군사 재판소를 설치했다... 우리 군 판사들은 독일군 군사 재판 매뉴얼을 앞에 두고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가 앉자마자 피고인 페겔라인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재판을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만취 상태에서... 페겔라인은 먼저 법원의 관할권을 뻔뻔하게 도전했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가 아닌 힘러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남자는 비참한 상태였다 - 소리 지르고, 징징거리고, 구토하고,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이제 나는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전 진술을 포함하여 모든 가용한 증거에 따르면, 이 비참한 장교는 명백한 탈영죄를 범했다... 하지만 독일군 매뉴얼에는 어떠한 독일 병사도 명백히 온전한 정신과 신체를 가지고 자신에 대한 증거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재판받을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내 의견과 동료 장교들의 의견으로는 헤르만 페겔라인은 재판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재판을 종결했다... 그래서 나는 페겔라인을 [SS] 라텐후버 장군과 그의 보안대에 넘겼다. 나는 그 남자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3.4.2. 탈출 시도 및 항복
4월 30일, SS-Sturmbannführer슈투름반퓌러독일어 오토 균셰로부터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들은 후, 몽케는 회의에 참석하여 이전에 내려진 명령에 따라 소련 붉은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로 했다. 계획은 베를린에서 엘베강 서쪽의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하거나, 북쪽의 독일군 부대로 합류하는 것이었다. 탈출에 앞서 몽케는 치타델레 구역 내 (연락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지휘관들에게 히틀러의 사망과 계획된 탈출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들은 1945년 5월 1일 밤 11시, 열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 탈출을 시작했다. 몽케의 그룹에는 비서 트라우들 융게, 비서 게르다 크리스티안, 비서 엘제 크뤼거, 히틀러의 영양사 콘스탄체 만지알리, 에른스트-귄터 셴크, 그리고 발터 헤벨 등 약 20명이 포함되었다. 몽케는 프린첸알레에 주둔한 독일군 부대 쪽으로 탈출할 계획이었다. 그룹은 지하철을 따라 이동했지만 경로가 막히자 지상으로 나와 나중에 프린첸알레의 슐트하이스-파첸호퍼 양조장에서 피난민과 수백 명의 다른 독일 민간인 및 군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슈프레강을 안전하게 건너는 데 성공했다. 1945년 5월 2일, 헬무트 바이틀링 장군은 베를린에 남아있는 모든 독일군에게 완전한 항복을 명령했다.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안 몽케는 붉은 군대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몽케의 그룹 중 일부(일부 SS 대원 포함)는 자살을 택했다.
4. 전후 생활 및 포로 생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몽케는 소련군 포로로 장기간 수감되었으며, 석방 후 서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4.1. 소련군 수감 생활
항복 후, 몽케와 몽케 전투단의 다른 고위 독일 장교들(셴크 박사 포함)은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의 허가를 받아 제8친위군 참모장 주최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밤 10시 30분, 독일군들은 다른 방으로 안내되어 감금되었다. 다음날 밤인 5월 3일, 몽케와 나머지 독일군들은 NKVD에 인계되었다. 1945년 5월 9일, 그는 심문을 위해 모스크바로 비행기를 타고 이송되었고, 루뱐카 교도소로 이감된 후 6년 동안 독방에 수감되었다. 몽케는 그 후 보이코보 포로수용소의 장교 포로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1955년 10월 10일까지 포로 상태로 남아 있었다.
4.2. 말년과 사망
석방 후, 몽케는 서독 바르스뷔텔에 거주하며 소형 트럭 및 트레일러 딜러로 일했다. 1979년부터는 잡지 슈테른의 기자 게르트 하이데만과 접촉하여 나치즘 관련 문제에 대해 자문하고, 그를 과거 나치 활동가들과 연결해 주었다. 이 만남을 통해 하이데만은 히틀러의 일기를 위조한 콘라트 쿠야우를 만났다. 하이데만이 위조된 히틀러의 일기 내용을 몽케에게 보여주고 읽어주었을 때, 몽케는 내용의 실제적 오류를 지적했지만, 이는 무시되었다. 그는 2001년 8월 6일 90세의 나이로 바르스뷔텔-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5. 전쟁범죄 조사 및 논란
윌헬름 몽케는 여러 전쟁범죄 의혹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어떠한 유죄 판결도 받지 않아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5.1. 웜후트 학살 조사
1940년 프랑스 웜후트 인근에서 발생한 영국군 및 프랑스군 포로 학살 사건에 몽케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전후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몽케는 단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1988년 사건이 재개되었을 때, 독일 검찰은 기소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93년 말, 영국 정부가 이전에 관련 파일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이로 인해 실질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몽케는 이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며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5.2. 노르망디 학살 조사
1944년 노르망디에서 발생한 캐나다군 포로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몽케의 지휘 책임이 조사되었다. 특히 퐁트네-르-페스넬에서 캐나다군 포로 35명(혹은 36명)이, 르 메닐-파트리에서 3명의 캐나다군 포로가 몽케의 지휘를 받던 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캐나다 당국은 몽케를 조사했지만, 결국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확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인해 그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못했다.
5.3. 말메디 학살 조사
1944년 아르덴 대공세 중 말메디 근처에서 발생한 미군 포로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몽케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의 지휘 하에 있던 요아힘 파이퍼의 전투단이 이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비록 파이퍼는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몽케는 직접적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학살 명령을 직접 내린 증거가 부족했거나, 그의 지휘 책임에 대한 법적 입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해석되었다.
5.4. 조사 결과 및 역사적 평가
빌헬름 몽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여러 잔혹한 포로 학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이 모든 혐의에 대해 단 한 번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전후 조사에서 증거 부족을 이유로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그는 법적 처벌을 면했다. 이러한 결과는 전쟁범죄 책임자를 처벌하려는 전후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위급 SS 장교가 복잡한 증거 문제와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법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던 사례로 지적된다. 역사가들은 몽케의 사례를 통해 나치 독일 지휘관들의 지휘 책임과 실제 처벌 사이의 간극, 그리고 전쟁범죄 조사의 어려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생애는 독일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나치즘에 대한 충성, 그리고 그가 연루된 잔혹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논란을 남겼다.
6. 진급 이력
빌헬름 몽케의 SS 내 진급 이력은 다음과 같다.
날짜 | 계급 |
---|---|
1933년 3월 | SS-Untersturmführer운터슈투름퓌러독일어 |
1933년 10월 1일 | SS-Hauptsturmführer하우프트슈투름퓌러독일어 |
1940년 9월 1일 | SS-Sturmbannführer슈투름반퓌러독일어 |
1943년 6월 21일 | SS-Obersturmbannführer오버슈투름반퓌러독일어 |
1944년 6월 21일 | SS-Standartenführer슈탄다르텐퓌러독일어 |
1944년 11월 4일 | SS-Oberführer오버퓌러독일어 |
1945년 1월 30일 | SS-Brigadeführer브리가데퓌러독일어 |
7. 서훈 내역
빌헬름 몽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다음 훈장들을 수훈했다.
- 철십자장 2급 (1939년 9월 21일) 및 1급 (1939년 11월 8일)
- 전공십자장 2급 검 부착 (1940년 10월 3일)
- 보병돌격휘장 (1940년 10월 3일)
- 전상장 은장 (1941년 9월 15일)
- 독일 십자장 금장 (1941년 12월 26일) - 제2대대/Leibstandarte SS Adolf Hitler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소속 SS-Sturmbannführer슈투름반퓌러독일어로서 수훈
- 기사십자 철십자장 (1944년 7월 11일) - 제26SS기갑척탄병연대장 SS-Obersturmbannführer오버슈투름반퓌러독일어로서 수훈
8. 대중 매체 등장

- 2004년 독일 영화 다운폴 (Der Untergang데어 운터강독일어)에서 배우 앙드레 헤니케에 의해 몽케가 묘사되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관청가의 방어 사령관으로서 부대를 지휘하는 한편, 민간인 피난을 걱정하는 진정한 군인으로 그려졌으며, 베를린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탈출 장면도 묘사되었다.
9. 같이 보기
- 독일 십자장
- 기사십자 철십자장
- 말메디 학살
- 베를린 공방전
- 제1SS기갑사단 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 웜후트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