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 (Владимир Кириллович Романов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은 1917년 8월 30일(구력 8월 17일)에 태어나 1992년 4월 21일에 사망한 러시아 제위 요구자이자 로마노프 황실의 수장(1938년 ~ 1992년)이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에서 태어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며,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의 사망 후 황실 수장직을 승계하며 러시아 제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억류되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주로 스페인과 프랑스를 오가며 생활했다. 그의 레오니다 바그라티온-무흐란스카야 공주와의 결혼은 로마노프 가문의 '동등 결혼' 원칙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그의 딸 마리아의 계승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991년 생애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으며, 이듬해 미국 마이애미에서 사망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 자리를 놓고 마리아와 니콜라이 로마노프 공자를 중심으로 한 계승권 논쟁이 계속되었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로마노프 가문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2. 생애 초반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러시아 혁명 이후 로마노프 황실이 겪은 망명 생활 속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린 시절과 교육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1917년 8월 30일(구력 8월 17일) 핀란드 대공국의 포르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외동아들이었다. 그의 친조부모는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였으며, 외조부모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비였다. 그는 어릴 적 알렉산드르 3세를 닮은 크고 잘생긴 아이로 묘사되었다.
블라디미르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핀란드로 피신했으며, 1920년에는 핀란드를 떠나 독일의 코부르크로 이주했다. 1922년 8월 8일, 그의 아버지 키릴 대공은 스스로를 '러시아 제위의 보호자'로 선언했으며, 2년 후인 1924년 8월 31일에는 '전 러시아의 황제이자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아버지의 황제 칭호 선언에 따라 블라디미르는 체사레비치(황태자)와 대공의 칭호 및 '황실 전하'라는 경칭을 받았다. 1930년, 그의 가족은 독일을 떠나 프랑스 생브리악쉬르메르로 이주했으며, 그곳에 망명 황실을 세웠다.
2.2. 망명 생활과 교육
1930년대 블라디미르는 한동안 영국에서 거주하며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링컨셔에 있는 블랙스톤 농업 기계 공장에서 일했다. 학업과 초기 사회 경험을 마친 후 그는 프랑스 브르타뉴로 돌아와 토지를 매입하여 지주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3. 제위 요구와 제2차 세계 대전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 자리를 계승하며 러시아 제위에 대한 요구를 공식화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3.1.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 주장
1938년 10월 12일, 그의 아버지 키릴 대공이 사망하자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황실의 수장직을 승계했다. 같은 해, 그는 카르파토 우크라이나의 섭정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며 러시아를 해체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그는 황실의 수장으로서 러시아의 영토 보전을 중시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3.2.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행보
제2차 세계 대전 중 블라디미르는 프랑스 브르타뉴의 생브리악쉬르메르에 거주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26일, 그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 중대한 시각에 독일과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24년간 러시아 국민을 노예화하고 억압해 온 공산주의와 볼셰비즘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으니, 나는 조국의 모든 충실하고 충성스러운 아들들에게 호소합니다.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의 무서운 멍에로부터 우리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여러분의 능력껏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 성명은 추축국의 선전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나, 1942년 블라디미르는 나치 독일이 러시아 망명자들에게 소련과의 전쟁을 지원하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그는 측근들과 함께 콩피에뉴의 억류 캠프에 수감되었다.
1944년, 독일 국방군은 해안으로부터의 연합군 침공을 우려하여 블라디미르의 가족을 내륙으로 이동시켰다. 독일군은 그들을 파리로 데려가려 했으나, 비텔로 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비텔 역시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그들은 다시 독일로 이송되었다. 블라디미르는 1945년까지 그의 누나 마리아 키릴로브나의 남편 소유의 성인 바이에른주 아모르바흐에서 거주했다. 독일의 패전 이후, 블라디미르는 소련군에게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오스트리아로, 이어서 리히텐슈타인 국경으로 피신했다. 그는 보리스 스미슬로프스키 장군의 군대와 함께 국경을 넘으려 했으나, 리히텐슈타인과 스위스 모두 그에게 출국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아 그는 미국 점령 지역의 오스트리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블라디미르의 외숙모이자 오를레앙-보르본의 베아트리스 인판타는 그에게 스페인 비자를 확보해 주었고, 이후 그는 그녀와 함께 산루카르데바라메다에서 거주했다.
4. 전후 생활과 계승권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망명지에서의 삶을 이어갔으며, 그의 결혼은 로마노프 가문의 계승권에 대한 오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4.1. 전후 망명지 생활
전쟁이 끝난 후 블라디미르는 주로 마드리드에서 생활했으며, 브르타뉴에 소유한 사유지와 파리를 자주 방문하며 지냈다. 1952년 그는 서방 강대국들이 소련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4.2. 결혼과 정통성 논란
블라디미르는 1948년 8월 13일 로잔에서 레오니다 게오르기예브나 바그라티온-무흐란스카야 공주와 결혼했다. 혁명 이전 로마노프 황실법은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혈통과 '왕실 또는 주권 가문의 구성원' 간의 '동등 결혼'을 통해 태어난 자녀만이 러시아 제위 계승권에 포함되며,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녀는 왕위 계승이나 황실 구성원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규정했다. 레오니다 공주가 속한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중세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지아의 왕가였으나, 그녀의 직계 남성 조상 중 1505년 이후로 조지아의 왕으로 통치한 자는 없었다. 또한 그녀의 바그라티오니 가문 분가인 무흐라니 가문은 1801년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후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블라디미르와 레오니다의 결혼이 과연 '동등 결혼'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는 1783년 게오르기옙스크 조약에서 러시아가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왕족 지위를 인정했음을 근거로 1946년 12월 5일 러시아 황실 수장으로서 이 결혼의 정통성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1911년 타티아나 콘스탄티노브나 공주의 결혼을 귀천상혼으로 간주한 바 있어, 이 결혼의 유효성, 그리고 블라디미르의 제위 계승권이 그의 딸 마리아에게 정당하게 계승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1969년,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딸 마리아를 '제위 큐라트릭스(섭정)'로 공개적으로 지명하며 망명 중인 왕조의 수장으로 그녀가 계승할 것을 예상하자, 황실의 다른 세 분가 수장들인 프세볼로트 이오안노비치 공자(콘스탄티노비치 가문), 로만 페트로비치 공자(니콜라예비치 가문),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공자(미하일로비치 가문)는 블라디미르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딸의 왕조적 지위가 자신들의 자녀들과 다르지 않으며, 그의 아내가 다른 로마노프 공자들의 아내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969년 12월 23일, 블라디미르는 논란이 많은 칙령을 발표하며, 만약 그가 자신이 황실 구성원으로 인정한 로마노프 남성들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 그의 딸 마리아가 '제위 큐라트릭스'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분가에 계승권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으며, 다른 분가의 수장들은 블라디미르의 행동이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4.3. 러시아 방문
1991년 11월, 블라디미르는 아나톨리 솝차크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조국을 방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방문 당시 그는 제위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위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5. 사망과 사후 계승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사망은 로마노프 가문의 계승권 논쟁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5.1. 사망과 장례식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1992년 4월 21일 미국 마이애미의 노던 트러스트 은행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은행가 및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던 중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러시아로 송환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안장되었다. 이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로마노프 가문의 구성원이 이러한 방식으로 안장된 사례였다. 언론은 그의 장례식을 "군주제 복원을 향한 단계라기보다는 로마노프 가문에 대한 시 정부와 러시아 당국의 의무로 간주되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공식적으로는 러시아 황제의 증손자에 불과했음에도 '러시아 대공'이라는 칭호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 어떤 칭호를 새길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 대변인은 이 장례식이 '우리 속죄'의 일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5.2.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 계승 논쟁
블라디미르의 사망 후, 그의 딸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는 자신의 분가의 러시아 황실법 해석에 따라 러시아 황실의 수장직을 계승했다. 그러나 이는 블라디미르 대공 사망 이전에 '로마노프 가문 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니콜라이 로마노프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와 니콜라이 로마노프 공자는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계승권 논쟁의 배경이 되었다.
한편, 블라디미르가 1773년부터 러시아 황실 수장들이 겸임했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의 칭호 또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칭호는 살리카 법에 따른 상속 규정이 적용되어 계승 논쟁이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이 칭호는 블라디미르의 재종손자인 폴 일린스키가 상속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블라디미르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 칭호를 실제로 사용한 마지막 인물로 알려져 있다.
6. 평가와 유산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러시아 혁명 이후 로마노프 가문의 상징적인 수장으로서 복잡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행동은 후대에 다양한 유산을 남겼다.
6.1. 역사적 평가
러시아 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은 붕괴된 제국의 상징이자 망명 중인 황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나치 독일에 대한 완전한 협력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1991년 그의 러시아 방문은 러시아 사회가 제정 시대의 유산을 재조명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혁명 이후 단절되었던 황실의 존재를 러시아 국민들에게 다시금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6.2. 비판과 논란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생애와 관련된 가장 큰 비판과 논란은 로마노프 황실의 가문 법규 해석, 특히 그의 결혼과 딸 마리아의 계승권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에 집중된다. 그의 결혼이 '동등 결혼' 원칙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은 로마노프 가문 내 다른 분가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그는 남자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직계 혈통으로 계승권을 넘기기 위해 법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결정은 로마노프 가문 내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그의 사망 이후에도 황실 수장 자리를 놓고 여러 파벌 간의 논쟁이 계속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나치 독일의 대볼셰비키 '십자군'을 지지하는 듯한 성명을 발표했던 이력은 그의 정치적 판단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낳기도 했다.
7. 영예
- 프로이센 제국 및 왕실: 흑수리 훈장 기사
8. 가계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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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 | ||
부모 | ||
2.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 3.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 빅토리아 멜리타 | |
조부모 | ||
4.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5.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마리 | |
6.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 7. 러시아 대공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 |
증조부모 | ||
8. 알렉산드르 2세 | 9. 헤센 대공녀 마리 | |
10.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 11. 로이스 추 쾨스트리츠 공녀 아우구스타 | |
12.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앨버트 | 13. 영국 여왕 빅토리아 | |
14. 알렉산드르 2세 | 15. 헤센 대공녀 마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