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Gaius Vibius Volusianus라틴어, 253년 8월 사망), 흔히 볼루시아누스로 불리는 그는 251년부터 253년까지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로마 황제로 통치했다. 그의 전체 이름은 Gaius Vibius Afinius Gallus Veldumnianus Volusianus라틴어이다.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전투에서 사망한 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전장에서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갈루스는 데키우스의 살아남은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로 삼고, 볼루시아누스를 황위 계승자인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 251년 7월 또는 8월에 호스틸리아누스가 사망한 후, 볼루시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의 짧은 통치 기간은 치명적인 역병의 발생과 사산 제국 및 고트족과의 적대감으로 특징지어진다. 볼루시아누스와 그의 아버지는 253년 8월, 로마를 향해 진군하던 찬탈자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를 두려워한 자신들의 병사들에 의해 인테람나 (현 테르니)에서 살해당했다. 그들의 통치 기간은 총 2년 4개월 9일이었다.
2. 생애 및 가족 관계
볼루시아누스는 3세기 초에 태어났으며, 그의 생애 전반과 가족 관계는 그의 정치적 경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볼루시아누스는 장차 황제가 될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피니아 게미나 바에비아나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제한적이지만, 원로원 가문의 자제로서 그는 수사학, 철학, 군사학을 포함한 전형적인 로마 귀족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게는 비비아 갈라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2.2. 가족 관계 및 결혼
볼루시아누스는 선대 황제 데키우스의 딸이자 호스틸리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했다. 그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결혼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선대 황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권력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3. 가계도
볼루시아누스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인물 | 비고 |
---|---|---|
아버지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251년부터 253년까지 로마 황제 |
어머니 | 아피니아 게미나 바에비아나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아내 |
배우자 | (이름 불명) | 데키우스의 딸, 호스틸리아누스의 누이 |
여동생 | 비비아 갈라 |
3. 권력 승계
볼루시아누스의 권력 승계는 데키우스 황제 부자의 죽음 이후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황제로 추대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후 공동 황제로서 아우구스투스 칭호까지 받게 된다.
3.1. 카이사르 임명
251년 6월,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고트족과의 전투 중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전사하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전장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갈루스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 선대 황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데키우스의 살아남은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자신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이어서 251년 7월, 갈루스는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황위 계승자이자 후계자인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 볼루시아누스는 이와 동시에 프린켑스 유벤투티스(Princeps Juventutis라틴어, 청년 지도자) 칭호도 받았다.
3.2. 아우구스투스 승격
251년 7월 또는 8월, 호스틸리아누스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카이사르 열전의 저자는 호스틸리아누스가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한 반면, 조시무스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볼루시아누스가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호스틸리아누스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상황이었든, 호스틸리아누스 사망 이후 볼루시아누스는 즉시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252년에 아버지와 함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3년에는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4. 통치 기간
볼루시아누스는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251년부터 253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이 기간은 제3세기 위기로 알려진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제국은 역병, 외세 침입, 그리고 내부 반란이라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4.1.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의 공동 통치
볼루시아누스는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서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이들의 통치 방식은 제국의 안정보다는 현상 유지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주요 위협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재위 기간 동안 단 두 건의 칙령만을 발행했다. 이 시기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데키우스 황제 때만큼 극심하지는 않았지만, 252년 교황 코르넬리우스가 추방되었고 노바티아누스도 로마를 떠나야 했다.
4.2. 주요 사건 및 위협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여러 중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4.2.1. 역병의 영향
호스틸리아누스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알려진 역병은 로마 제국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이 역병은 흔히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국의 인구와 경제를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역병 희생자들에게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적절한 장례를 치러주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4.2.2. 외세의 침입
공동 통치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고트족과 사산 제국 양쪽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두 황제 모두 직접 침략에 맞서기보다는 로마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 사산 제국: 252년, 사산 제국은 메소포타미아를 빠르게 점령하고 유프라텐시스 속주 (현재의 시리아)의 바르발리소스 근처에서 벌어진 바르발리소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그들은 로마 영토로 진격하여 253년에는 장기간의 공성전 끝에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 고트족: 253년, 새로운 총독 아이밀리아누스가 고트족에게 공물을 지불하기를 거부하자, 고트족은 모이시아 인페리오르를 침략했다. 고트족은 두 개의 무리로 나뉘어 한 무리는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와 트라키아의 도시들을 약탈했고, 다른 무리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에페소스까지 진격했다.
4.2.3. 내부 반란
아이밀리아누스는 고트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많은 고트족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다뉴브강 너머로 몰아냈다. 이 승리의 명성은 매우 커서 아이밀리아누스의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그를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에 대항하는 황제로 선포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미래의 황제인 발레리아누스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 발레리아누스는 당시 라인강 방어선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밀리아누스는 빠른 속도로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발레리아누스가 어떤 지원도 보낼 수 있기 전에 도착했다. 공동 황제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아이밀리아누스의 훨씬 강력한 군대와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다. 전투를 막기 위해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253년 8월 움브리아의 인테람나 (현 테르니)에서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를 살해했다.
5. 화폐 및 주화
볼루시아누스 시대에 발행된 주화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특히 아우레우스 (금화) 주화는 두 가지 주요 유형으로 나뉘었다.

- 첫 번째 유형: 주화의 앞면(obverse)에는 볼루시아누스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reverse)에는 다섯 가지 다른 상징적 이미지가 나타났다.
- 앉아 있는 아이퀴타스 (Aequitas, 공정의 여신)
- 서 있는 아이테르니타스 (Aeternitas, 영원의 여신)
- 서 있는 아폴론
- 둥근 신전 안에 앉아 있는 유노
- 서 있는 빅토리아 (승리의 여신)
- 두 번째 유형: 주화의 앞면에는 방사형 왕관을 쓴 볼루시아누스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여섯 가지 다른 상징적 이미지가 나타났다.
- 앉아 있는 콘코르디아 (화합의 여신)
- 서 있는 펠리키타스 (Felicitas, 행복의 여신)
- 서 있는 리베르타스 (Libertas, 자유의 여신)
- 서 있는 프로비덴티아 (Providentia, 섭리의 여신)
- 서 있는 살루스 (Salus, 건강과 안녕의 여신)
- 투구를 쓴 서 있는 비르투스 (Virtus, 용기의 신)
볼루시아누스의 주화에는 전통적인 비문인 'Romae aeternae라틴어' (영원한 로마)와 'Pax aeternae라틴어' (영원한 평화) 외에도, 때때로 'Saeculum nouum라틴어' (새로운 시대)라는 비문이 새겨지기도 했다. 이는 당시 제국이 직면한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나 변화를 상징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6. 죽음
볼루시아누스는 253년 8월,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살해당했다. 그들은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병사들은 아이밀리아누스의 훨씬 강력한 군대와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고, 결국 황제 부자를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볼루시아누스와 갈루스는 움브리아 지방의 인테람나 (현 테르니)에서 자신들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로마 제국의 제3세기 위기 동안 빈번했던 군사적 불안정과 황제 암살의 전형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3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공동 황제로서 이들의 통치 기간은 총 2년 4개월 9일이었다. 그들의 죽음 이후 아이밀리아누스가 잠시 황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몇 달 만에 유사한 운명을 맞았다.
7. 역사적 평가 및 유산
볼루시아누스의 짧은 통치 기간은 로마 제국의 '제3세기 위기'라는 격동의 시대에 속한다. 그의 재위는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의 공동 통치였으며, 이 시기는 제국이 역병, 외세의 침입 (고트족과 사산 제국), 그리고 내부 반란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던 때였다.
역사적 기록은 볼루시아누스 개인의 통치 능력이나 업적에 대해 상세히 다루기보다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면했던 제국의 위기 상황과 비극적인 최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로마에 머무르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이는 당시 제국의 불안정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의 통치는 아이밀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종결되었으며, 이는 군사적 지지에 크게 의존했던 당시 황제들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볼루시아누스의 유산은 주로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이 겪었던 혼란과 무질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8. 관련 항목
- 로마 황제 목록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데키우스 (로마 황제)
- 호스틸리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
- 3세기 위기
- 고트족
- 사산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