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버트 고든 오어(Robert Gordon Orr, 1948년 3월 20일 출생)는 캐나다의 전직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뛰어난 스케이팅 속도, 득점력,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활용하여 수비수 포지션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오어는 내셔널 하키 리그(NHL)에서 12시즌 동안 활약했으며, 그중 처음 10시즌은 보스턴 브루인스에서, 이후 2시즌은 시카고 블랙호크스에서 뛰었습니다.
오어는 수비수로서 유일하게 아트 로스 트로피를 두 차례 수상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그는 수비수 단일 시즌 최다 포인트 및 어시스트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NHL 최고의 수비수에게 주어지는 제임스 노리스 기념 트로피를 8회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리그 최우수 선수(MVP)에게 주어지는 하트 기념 트로피를 3회 연속으로 수상했습니다. 1979년 31세의 나이로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이는 당시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2017년에는 NHL이 선정한 "위대한 NHL 선수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어는 8세에 조직적인 하키를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포워드로 뛰었지만 이후 수비수로 전환하여 자신의 스케이팅 기술을 활용한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도록 권장되었습니다. 12세에 이미 NHL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14세에 브루인스의 주니어 하키 계열사인 오샤와 제너럴스에 입단하여 4시즌 중 3시즌 동안 올스타로 활약했습니다.
1966년 브루인스에 합류한 오어는 1941년 이후 스탠리컵 우승이 없었고 1959년 이후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하지 못했던 팀을 변화시켰습니다. 오어와 함께 브루인스는 1970년과 1972년에 두 차례 스탠리컵을 우승했으며, 두 번 모두 오어는 우승을 확정 짓는 골을 기록하고 플레이오프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그의 경력 마지막 주요 업적은 1976년 캐나다 컵 국제 하키 토너먼트에서 MVP를 수상한 것입니다. 1976년 오어는 자유 계약 선수로 보스턴을 떠나 블랙호크스에 합류했지만, 반복되는 부상으로 왼쪽 무릎이 사실상 망가져 1978년 30세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오어의 첫 프로 계약은 스포츠 에이전트가 협상한 최초의 프로 하키 계약 중 하나였으며, 그를 NHL 역사상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신인 선수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계약은 NHL 최초의 백만 달러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 오어는 자신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소유했던 대부분의 것을 팔아야 했습니다. 오어는 자신의 에이전트였던 앨런 이글슨과 결별하고 계약 문제 해결을 위해 블랙호크스를 고소했습니다. 오어와 그의 가족은 보스턴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하며 재정적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오어는 이글슨의 사기 유죄 판결과 변호사 자격 박탈로 이어진 조사에 협조했으며, NHL의 연금 계획 통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도 지지했습니다.
하키 경력 이후 오어는 여러 프로팀의 스카우트로 활동했습니다. 1996년에는 선수 에이전트 사업에 뛰어들어 오어 하키 그룹(Orr Hockey Group)의 사장을 역임했으며, 이 회사는 2018년 와서먼 미디어 그룹에 인수되었습니다. 오어는 또한 자선 활동과 텔레비전 광고 출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1996년부터는 매년 CHL 탑 프로스펙트 게임에서 주니어 하키 선수 팀을 지도했습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보비 오어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패리 사운드의 조지아만 연안에 위치한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키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오어는 1948년 3월 20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패리 사운드의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여 생존이 위태로웠습니다. 오어는 5세가 되던 1953년에 "마이너 스쿼트" 디비전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하키를 시작했는데, 이는 그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신니를 한 지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몸집이 작고 다소 허약했지만, 곧 자신 또래의 누구보다도 빠르게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고, 이는 링크를 도는 경주와 실제 경기에서 그의 속도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10세가 될 때까지 오어는 포워드인 윙으로 뛰었습니다. 그의 코치이자 전 NHL 선수였던 버코 맥도널드는 오어를 수비수로 전환시켰습니다. 맥도널드는 오어가 수비수로 뛰면서도 스틱 핸들링, 스케이팅, 득점 능력을 활용하여 공격적인 돌파를 시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오어는 나중에 맥도널드에게 "버코는 제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공을 돌렸습니다.
2.2. 가족
오어의 할아버지 로버트 오어는 20세기 초 북아일랜드 밸리미나에서 패리 사운드로 이주한 최고 수준의 축구 프로 선수였습니다. 오어의 아버지 더그 오어는 한때 하키 유망주였으며, 1942년 애틀랜틱 시티 시걸스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습니다. 대신 더그 오어는 캐나다 왕립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전쟁 후 그는 패리 사운드로 돌아와 전쟁 전에 결혼했던 아르바 스틸과 재회했으며, 캐나다 인더스트리 리미티드 다이너마이트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더그와 아르바는 패트리샤, 로니, 보비, 페니, 더그 주니어 등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오어의 할머니 엘시 오어는 그가 태어난 세인트 조셉 병원의 간호사였습니다. 오어의 어머니 아르바는 2000년 11월 암 진단을 받은 지 18개월 만에 사망했으며, 아버지 더그는 2007년에 사망했습니다.
2.3. 초기 하키 개발
오어는 1961년 봄 온타리오주 가나노크에서 열린 유소년 하키 토너먼트에서 경기하던 중 보스턴 브루인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브루인스의 렌 블레어는 그를 "더그 하비와 에디 쇼어의 조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브루인스는 즉시 오어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블레어는 오어의 가족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했습니다. 1961년 가을, 브루인스는 그의 마이너 하키 팀을 후원하기 위해 1000 CAD를 투자했습니다.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등 세 개의 다른 NHL 팀들도 오어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그는 1962년 브루인스와 계약했습니다. 오어는 브루인스와 계약한 이유에 대해 "그들은 미래의 팀입니다. 그들은 재건 중이며 저는 그 재건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블레어는 온타리오주 오샤와에 새로운 경기장을 갖춘 오샤와 제너럴스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계획에 참여했습니다. 브루인스는 이미 나이아가라 폴스 플라이어스라는 주니어 하키 프랜차이즈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브루인스를 설득하여 또 다른 프랜차이즈를 소유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브루인스가 프랜차이즈의 51%를 소유하되, 오어는 오샤와에서 뛰어야 한다는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오어가 14세였을 때, 블레어는 오어 가족을 설득하여 보비가 플라이어스의 트라이아웃 캠프에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캠프가 끝나고 브루인스와 계약할 시기가 되자, 브루인스 구단주 웨스턴 애덤스와의 만남이 틀어지면서 오어는 패리 사운드로 돌아갔습니다. 블레어는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아르바를 설득하여 보비가 집을 떠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다고 확신시켰습니다. 보비가 18세에 브루인스에 전속될 것을 약속하는 "C 양식"에 오어 가족의 서명을 받기 위해, 블레어는 보비가 패리 사운드에서 학교를 다니고 제너럴스 훈련은 건너뛰며 주말에만 남쪽으로 3시간을 운전하여 경기를 뛰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계약 보너스는 1.00 만 CAD와 새 차, 그리고 브루인스가 가족 집의 치장 벽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3. 주니어 경력
오어는 프로 경력 이전에 온타리오 하키 협회(OHA)의 오샤와 제너럴스 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리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3.1. 오샤와 제너럴스
오어는 1962-63 시즌에 새로운 제너럴스 팀의 일원으로 메트로 주니어 A 리그에서 주니어 하키에 데뷔했습니다. 당시 오어는 14세에 불과했지만, 18세, 19세, 20세 선수들과 경쟁했습니다. 1963-64 시즌에는 메트로 리그가 해체되고 오샤와가 온타리오 하키 협회(OHA)에 합류하면서 추가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어는 오샤와로 이주하여 R. S. 맥러플린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지역 가족과 함께 하숙했습니다. 이 시즌에 오어는 수비수로서 주니어 기록인 29골을 득점했으며, OHA의 첫 올스타 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어의 골과 포인트 기록은 주니어 경력 동안 매년 증가했으며, OHA에서 뛰는 매 시즌 OHA 퍼스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습니다. 오어는 주니어 4년차인 1965-66 시즌에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오어는 38골을 기록하여 자신의 골 득점 기록을 경신했으며, 제너럴스에서 경기당 2포인트를 기록하며 총 94포인트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제너럴스는 리그에서 4위를 차지했지만, 세인트 캐서린스 블랙호크스, 몬트리올 주니어 캐나디언스, 키치너 레인저스를 물리치고 OHA 챔피언십인 J. 로스 로버트슨 컵을 우승했습니다. 팀은 북부 온타리오 챔피언인 노스 베이 트래퍼스와 퀘벡 챔피언인 쇼위니건 브루인스를 꺾고 캐나다 주니어 챔피언십인 메모리얼 컵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1966년 메모리얼 컵 결승전에서 오샤와의 희망은 오어가 쇼위니건과의 경기에서 사타구니 부상을 입으면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부상은 선수의 스케이팅 능력을 약화시키는 고통스러운 부상이었습니다。토론토의 메이플 리프 가든에서 열린 이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제너럴스는 오어가 주니어에서 마지막으로 뛰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광고했으며, 그가 경기에 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브루인스 경영진은 오어가 더 이상 부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도록 결승전에 뛰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오어와 그의 부모는 그가 전국 챔피언십을 위해 뛰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가 브루인스와 정식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그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한다면 보스턴에서 절대 뛰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블레어는 브루인스 구단주의 지시를 거역하고 오어가 뛰도록 허락했습니다. 오어는 유니폼을 입고 일부 경기에 출전했지만, 큰 활약을 하지 못했고 에드먼턴이 오샤와를 꺾고 컵을 차지했습니다. 오어의 출전을 허락한 오샤와 코치 베프 귀돌린은 해고되었고, 블레어는 스스로 팀을 떠나 확장 팀인 미네소타 노스 스타스에 합류했습니다.
4. 프로 경력
보비 오어의 프로 하키 경력은 보스턴 브루인스와 시카고 블랙호크스에서 펼쳐졌으며, 특히 브루인스 시절에는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수많은 수상으로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4.1. 보스턴 브루인스 (1966-1976)
1964년 오어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는 NHL에서 뛰기까지 2년이 남아 있었고 그의 아버지 더그는 브루인스의 유망주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그는 브루인스의 블레어에게 보비를 위한 더 많은 돈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더그 오어는 패리 사운드에서 열린 유소년 패스트피치 소프트볼 토너먼트 만찬에서 토론토 변호사 앨런 이글슨을 만나 상황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글슨은 가족을 위해 무료로 일하기로 동의했으며, 다음 2년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보비와 이글슨은 오어가 나중에 형제 같은 관계라고 묘사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켰습니다. 두 사람은 곧 팀이 되어 아버지 더그 없이 보비의 미래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이글슨은 오어에게 최고의 연봉을 받게 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브루인스의 단장 햅 엠스가 계약 보너스로 5000 USD를, 리그 첫 2년간 연봉으로 7000 USD와 8000 USD를 제안했을 때, 이글슨은 2년간 10.00 만 USD를 요구했습니다. 오어는 브루인스에서 뛰기를 거부하고 칼 브루어처럼 캐나다 국가대표팀에서 뛰겠다고 했습니다. 오어는 NHL에서 뛰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이글슨의 전략에 따랐고 국가대표팀에서 뛸 의향이 있었습니다. 브루인스와 오어는 2.50 만 USD의 계약 보너스와 2년간 "10만 달러 미만"의 연봉에 합의했는데, 이 금액은 비밀로 유지되었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신인 연봉이 9000 USD였던 것을 감안할 때, 오어의 연봉은 2.50 만 USD에서 4.00 만 USD 사이로 추정되었습니다. 공식 계약식은 엠스의 보트 바바라 린에서 진행되었는데, 이글슨과 엠스는 협상 중에도 이 보트에서 협의했습니다.
당시 이 계약으로 오어는 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 이상으로 이 계약은 프로 하키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계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선수들은 NHL 경영진이 지불하는 연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프로 하키에서 스포츠 에이전트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글슨에게는 이것이 그의 스포츠 사업 제국의 시작이었습니다. 오어 계약을 기반으로 이글슨은 새로운 내셔널 하키 리그 선수 협회(NHLPA)의 전무 이사가 되었고, 아이스하키 스포츠 및 사업 분야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4.1.1. 데뷔 및 혁신적인 플레이
오어는 1966-67 시즌에 프로 선수로서 브루인스에 합류했습니다. 브루인스는 오어가 수비수에 적합하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그를 센터로 기용했습니다. 프리시즌 동안 오어는 등번호 27번을 받았습니다. 오어의 주니어 등번호(2번)가 에디 쇼어를 기리기 위해 영구 결번된 상태였기 때문에, 브루인스는 정규 시즌 전에 그에게 과거 브루인스 스타 딧 클랩퍼의 등번호인 5번을 제안했지만, 오어는 대신 베테랑 수비수 알버트 랑글루아가 비워둔 등번호 4번을 선택했습니다. 오어는 1966년 10월 19일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와의 경기에서 NHL 정규 시즌 데뷔전을 치렀고, 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10월 22일, 그는 몬트리올 캐나디언스를 상대로 첫 NHL 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검프 워슬리를 넘어선 슬랩 샷이었고, 보스턴 가든의 관중들은 오어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첫 시즌 동안 오어는 베테랑 선수들의 도전을 받았고, 첫 NHL 싸움에서 몬트리올의 터프가이 테드 해리스를 물리치며 존경을 얻었습니다. 1966년 12월 4일,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의 수비수 마르셀 프로노보스트가 그를 보드에 부딪히게 하여 오어의 무릎에 NHL 첫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는 9경기를 결장했고 브루인스는 그 중 6경기를 패배했습니다. 팀은 17승 43패 10무의 기록으로 최하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보스턴 가든의 관중 수는 4만 천 명 증가했습니다.
이 시즌 동안 오어는 13골과 28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NHL 역사상 수비수로서 최고의 신인 시즌 중 하나였습니다. 오어는 리그 최우수 신인에게 주어지는 칼더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으며, NHL 세컨드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습니다. 뉴욕 레인저스의 수비수 해리 하웰은 그 해 리그 최고의 수비수에게 주어지는 노리스 트로피를 수상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하웰은 자신이 수상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며 "오어는 이제부터 이 트로피를 독점할 것입니다"라고 예측했습니다. 오어는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습니다.
4.1.2. 스탠리컵 우승 및 주요 수상
1967-68 시즌, 오어의 두 번째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46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11골 20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시즌 전, 오어는 여름 동안 위니펙에서 열린 자선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쳐 5주 동안 깁스를 해야 했습니다. 12월에는 프랭크 마호블리치의 체크로 인해 오어의 쇄골 골절과 어깨 탈구가 발생했습니다. 오어는 1월에 NHL 올스타전에 출전하기 위해 복귀했는데, 이는 그의 총 8번의 올스타전 출전 중 첫 번째였습니다. 오어는 왼쪽 무릎 통증으로 인해 이후 5경기를 쉬어야 했습니다. 2월에는 왼쪽 무릎이 뻣뻣해진 후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이탈해야 했습니다. 그는 무릎에 대한 수많은 수술 중 첫 번째를 받았는데, 인대를 복구하고 연골을 제거하는 수술이었습니다. 오어는 시즌을 마치기 위해 복귀했지만, 오프시즌 동안 뼈 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오어는 기록적인 8회 연속 노리스 트로피 중 첫 번째를 수상했으며, NHL의 퍼스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하트 트로피 투표에서 4위를 차지했습니다.
1966-67 시즌에 최하위를 기록했던 브루인스는 1968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는데, 이는 1958-59 NHL 시즌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었습니다. 프리시즌 동안 브루인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거래 중 하나로 시카고 블랙호크스로부터 필 에스포지토, 프레드 스탠필드, 켄 호지를 영입했습니다. 브루인스는 또한 신인 글렌 새서와 데릭 샌더슨을 영입하여 '빅 배드 브루인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 더욱 공격적인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플레이오프 진출에 만족했던 브루인스는 1라운드에서 결국 챔피언이 된 몬트리올에게 스윕당했습니다.
1968-69 시즌, 오어는 무릎을 쉬게 하기 위해 프리시즌을 건너뛰었지만 시즌 시작에는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그는 매 경기 후 무릎에 얼음찜질을 해야 했고, 얼음의 균열에 스케이트가 걸려 무릎을 삐끗한 후 9경기를 결장했습니다. 그는 라인업에 복귀하여 통증을 참고 시즌을 마쳤는데, 때로는 속도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직접 플레이하기보다는 팀 동료들에게 의존했습니다。다른 경기에서는 오어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12월 14일 시카고를 상대로 첫 NHL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2개의 어시스트를 추가하여 5포인트 밤을 보냈습니다. 그는 시즌 동안 21골을 기록하여 수비수 골 득점 기록을 경신했으며, 총 64포인트를 기록하여 수비수 단일 시즌 최다 포인트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다시 노리스 트로피를 수상하고 퍼스트 팀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하트 트로피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오어는 그 시즌에 토론토의 신인 수비수 팻 퀸과 불화를 겪었습니다. 시즌 막바지 경기에서 오어가 메이플 리프스 골텐더 브루스 갬블로부터 퍽을 빼내려 하자 퀸이 오어를 크로스 체크하여 얼음에 쓰러뜨렸습니다. 오어는 퀸을 발로 찼고 퀸도 오어를 발로 찼습니다. 온 아이스 심판들이 이를 말렸지만, 불화는 1969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까지 이어졌습니다. 브루인스는 NHL 동부 디비전에서 2위를 차지했고 1라운드에서 메이플 리프스와 맞붙었습니다. 보스턴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퀸은 돌진 중 고개를 숙인 오어를 오픈 아이스 히트로 가격하여 오어를 의식 불명으로 만들었습니다. 팔꿈치 사용으로 5분 페널티를 받은 퀸은 페널티 박스에서 팬에게 공격당했고, 퀸은 스틱으로 팬을 휘둘러 유리를 깨뜨렸습니다. 퀸이 돌아오자 보스턴 팬들은 얼음 위로 쓰레기를 던졌습니다. 오어는 뇌진탕 후 회복되었지만 들것에 실려 라커룸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장에 있던 보스턴 경찰관에 따르면, "여기 팬들은 오어를 건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프랭크 메리웰이자 잭 암스트롱을 합쳐 놓은 것과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깨끗한 체크 같았습니다." 경기는 브루인스가 10-0으로 앞서자 난투극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브루인스는 메이플 리프스를 스윕했지만, 2라운드에서 몬트리올 캐나디언스에게 6경기 만에 패배했습니다. 오어는 토론토와의 3차전에 복귀하여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브루인스가 1965년 이후 처음으로 토론토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9-70 시즌, 오어는 이전 시즌 득점 기록의 거의 두 배인 120포인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리그 기록(팀 동료 필 에스포지토가 이전 시즌에 세운 기록)에 6포인트 모자란 수치였습니다. 그는 리그 득점 선두를 차지했습니다. 오어는 역사상 유일하게 아트 로스 트로피를 수상한 수비수이며, 1974-75 시즌에 두 번째로 이 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리스 트로피와 아트 로스 트로피 외에도 오어는 정규 시즌 MVP에게 주어지는 하트 기념 트로피를 3회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이후 플레이오프 활약으로 코언 스미스 트로피를 수상하여 한 시즌에 4개의 주요 NHL 상을 모두 수상한 역사상 유일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오어는 9골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970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에서 브루인스를 이끌었습니다. 이 여정은 1970년 5월 10일에 절정에 달했는데, 그는 하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골 중 하나를 기록하며 보스턴에게 1941년 이후 첫 스탠리컵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골은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를 스윕하는 데 기여했으며, 4차전 1차 연장전 40초에 팀 동료 데릭 샌더슨과의 주고받기 패스로 나왔습니다. 오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퍽이 저를 지나쳤다면, 2대1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약간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데릭이 저에게 훌륭한 패스를 주었고, 패스를 받았을 때 저는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로질러 스케이트를 타자, 글렌(골텐더)은 크리즈를 가로질러 움직여야 했고, 패드를 약간 열어야 했습니다. 저는 정말 퍽을 골문 안으로 넣으려고 노력했고, 성공했습니다. 제가 지나가자 글렌의 다리가 열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퍽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점프했습니다.

레이 루시에가 촬영한, 득점 후 블루스 수비수 노엘 피카드에 의해 걸려 넘어져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승리의 팔을 들어 올린 오어의 사진은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하키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오늘날 캐나다 방송 협회의 하키 나이트 인 캐나다 텔레비전 방송의 오프닝 시퀀스에 강조되어 사용됩니다.
다음 1970-71 시즌, 막강한 브루인스는 수십 개의 리그 공격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오어 자신은 139포인트(37골 102어시스트)로 리그 득점 2위를 차지했는데, 에스포지토에 13포인트 뒤졌지만, 수비수 단일 시즌 최다 포인트 기록과 모든 포지션 선수의 플러스-마이너스 기록(+124)을 세웠습니다. 오어의 102어시스트는 웨인 그레츠키가 1980-81 시즌에 109어시스트를 기록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던 리그 기록이었습니다. 오어의 브루인스는 컵 챔피언십을 다시 차지할 강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1971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한때 브루인스 소유였던 몬트리올 캐나디언스의 신인 골텐더 켄 드라이든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시즌 동안 브루인스는 오어에게 순금 퍽을 수여했는데, 이는 그 시즌에 100포인트 이상을 기록한 브루인스 선수 4명(에스포지토, 오어, 조니 부칙, 켄 호지)에게 주어진 네 개의 퍽 중 하나였습니다. 오어는 나중에 자신의 퍽을 앨런 이글슨에게 주었습니다. 2007년 이글슨은 이 퍽을 기념품 경매에서 1.65 만 CAD에 팔았습니다.
오어는 1971년 8월 26일, 시즌당 20.00 만 USD에 5년 계약을 새로 체결했는데, 이는 NHL 최초의 백만 달러 계약이었습니다. 다음 1971-72 시즌, 오어는 다시 에스포지토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했으며, 이번에는 117포인트(37골 80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다시 하트 트로피와 노리스 트로피를 수상하며 브루인스가 동부 지구에서 1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72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에서 오어는 다시 브루인스를 스탠리컵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플레이오프 득점 선두(19어시스트로 24포인트)를 차지하고 뉴욕을 상대로 우승을 확정 짓는 골을 기록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두 번째 코언 스미스 트로피를 수상하여 이 상의 첫 2회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레인저스 포워드 빅 해드필드는 "우리는 그들과 거의 대등하게 경기했지만, 그들에게는 보비 오어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때 오어는 자신의 왼쪽 무릎이 악화되고 있으며 남은 시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어는 또한 1972년 NHL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하여 한 시즌에 3개의 MVP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이후로 니클라스 리드스트룀(2002)과 케일 마카(2022)만이 같은 시즌에 노리스 트로피와 코언 스미스 트로피를 수상했습니다.
1972-73 시즌에는 브루인스에 격변이 있었습니다. 전임 감독 신든이 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브루인스 선수 게리 치버스, 데릭 샌더슨, 조니 맥켄지는 신생 월드 하키 협회에 합류했습니다. 톰 존슨 감독은 시즌 52경기 만에 해고되었고, 한때 오어를 지도했던 베프 귀돌린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1920년대 창단 이후 팀을 소유했던 애덤스 가문은 팀을 스토어러 브로드캐스팅에 매각했습니다. 브루인스의 시즌은 1973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에스포지토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조기에 끝났습니다. 오어는 정규 시즌 동안 101포인트를 기록했지만(부상으로 63경기만 출전), 플레이오프 패배에서는 2포인트에 그쳤습니다.
1973-74 시즌, 오어는 브루인스를 정규 시즌에서 다시 1위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포인트 기록은 32골 90어시스트로 122포인트로 반등했습니다. 그 시즌에 오어는 1973년 11월 15일 뉴욕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3골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수비수 단일 경기 최다 포인트 기록(이후 경신됨)을 세웠습니다. 블루 라인에서 날린 한 골은 레인저스 수비수 로드 사일링의 스틱을 부러뜨렸습니다.
브루인스는 다시 1974년 스탠리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6경기 만에 패배했습니다. 1차전 3피리어드 후반 2-2 동점 상황에서 오어는 플라이어스의 슛을 막기 위해 열린 보스턴 골문을 다리로 막아냈고, 이어서 퍽을 가지고 아이스를 올라가 골텐더 버니 패런트를 넘어뜨리며 슬랩 샷으로 득점하여 경기 종료 1분여를 남기고 브루인스에게 3-2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5차전에서는 오어가 쇼트핸드 러시로 보스턴의 첫 골을 어시스트했고, 이어서 두 골을 직접 득점하며 브루인스가 5-1로 승리했습니다. 결정적인 6차전에서 오어는 플라이어스의 보비 클라크와의 몸싸움 후 페널티 박스에 있었고, 이어진 파워 플레이에서 플라이어스가 득점했습니다(이것이 컵 우승 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기 종료 4초를 남기고 브루인스가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오어는 페이스오프를 따내고 필사적으로 아이스 길이만큼 슛을 날렸지만, 플라이어스 골문 바로 옆으로 벗어났습니다(골텐더 패런트는 "그의 슛이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면 골이었을 것입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1974-75 시즌, 오어는 수비수로서 자신의 이전 골 기록을 경신하여 46골을 기록했으며, 89어시스트를 추가하여 6년 연속 100포인트 시즌을 달성했습니다. 그의 수비수 골 기록은 1985-86 시즌 폴 코피가 48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는 리그 득점왕과 아트 로스 트로피를 두 번째로 수상했습니다. 1974-75 시즌은 그의 마지막 풀 시즌이었고, 에스포지토와 함께 뛴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브루인스는 애덤스 디비전에서 2위를 차지했고, 1975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시카고 블랙호크스에게 3전 2선승제 시리즈에서 2대1로 패배했습니다. 이 시즌으로 그는 6년 연속 100포인트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포워드든 수비수든 모든 포지션의 선수에게 기록적인 것이었습니다(이후 경신됨). 사실, 수비수가 100포인트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역사상 단 9번뿐입니다(폴 코피 5회, 데니스 포트빈, 앨 맥키니스, 브라이언 리치, 에릭 칼손 각 1회).
4.1.3. 부상 및 계약 문제
1975-76 시즌은 오어의 브루인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고,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시즌 후 오어의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 계약 선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브루인스는 1975년 8월 스토어러 브로드캐스팅에 의해 매각되었고, 새로운 제이콥스 소유주 그룹은 구매 조건으로 오어를 잔류시키겠다고 약속해야 했습니다. 브루인스와 오어는 1975년 여름 제이콥스 그룹과 구두 합의에 도달했는데, 여기에는 오어가 선수 생활을 마친 후 브루인스 지분 18.5%를 갖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합의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합의는 세금 문제로 합법적인지, 그리고 리그가 승인할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1975년 9월 20일, 오어는 또 다른 수술을 받았습니다. 브루인스와 오어, 이글슨 간의 계약 협상은 어려워졌습니다. 브루인스의 보험사는 오어와의 계약을 보험에 들지 않으려 했고, 의사들은 브루인스에게 오어가 더 이상 오래 뛰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오어는 1975년 11월 8일, 브루인스가 에스포지토를 뉴욕 레인저스로 트레이드한 다음 날 라인업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팀을 위해 다음 10경기를 뛸 수 있었지만, 11월 28일 무릎 통증으로 경기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무릎에 또 다른 수술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7~8주만 결장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그의 무릎은 치료에 반응하지 않았고 그는 패리 사운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시즌은 10경기 만에 끝났고, 그는 다시 브루인스에서 뛰지 않았습니다. 그의 임박한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은 브루인스가 그를 트레이드할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어졌지만,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잔류시키기 위해 계속 협상했습니다.
브루인스 경력 동안 오어는 종종 경기 후 언론이 원하는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오어는 대신 트레이너실에 숨곤 했습니다. 팀 동료 테리 오라일리는 그를 "매우 사적이고 매우 수줍은 사람이었지만, 우연히도 세계 최고의 하키 선수였다"고 묘사했습니다. 브루인스 홍보 이사 네이트 그린버그에 따르면 "그날 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오어를 트레이너실에서 나오게 하여 언론과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항상 그렇게 하지 않거나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정말로 팀 동료들이 적절한 찬사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들이 항상 그를 원했습니다." 오어는 2013년까지 자신의 전기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목받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2. 시카고 블랙호크스 (1976-1979)
1975년 9월, 브루인스와 이글슨은 오어에게 10년 동안 400.00 만 USD를 지급하는 계약에 합의했지만, 오어의 무릎에 수술이 필요해지자 브루인스는 제안을 시즌당 29.50 만 USD와 1980년 6월에 92.50 만 USD 또는 브루인스 지분 18.6%를 지급하는 것으로 줄였습니다. 이글슨은 이 제안을 거절했고, 1976년 6월 7일 토론토 스타에 "보스턴은 5년 계약에 92.50 만 USD 또는 1980년 클럽 지분 18.6%를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가 선수 겸 구단주가 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인용되었습니다. 1976년 6월 9일, 오어가 시카고와 계약한 후, 이글슨은 더 글로브 앤드 메일에 브루인스의 제안이 "연간 29.50 만 USD에 5년 계약이었습니다. 또한, 오어는 1980년 6월에 현금으로 92.50 만 USD를 받거나 브루인스 주식의 18.6%를 받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 테셔의 1990년 토론토 스타의 유명한 기사에 따르면, 오어는 이글슨이 협상 중이나 그 이후에도 자신에게 그 제안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이글슨은 기자들에게 공개적으로 그 제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어와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1976년, 브루인스는 오어에게 시즌당 60.00 만 USD를 제안했지만, 그는 매 시즌 훈련 캠프 시작 시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했고 첫 해 연봉만 보장되었습니다. 이글슨은 당시 "보비 오어가 브루인스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레미 제이콥스가 그에게 또 다른 만남을 요청하고 전체 상황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떠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오어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보스턴은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어와 이글슨은 잠재적인 팀 목록을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로 좁혔습니다. 시카고는 블랙호크스와 5년 보장 계약을 제안했고, 1976년 6월 8일 그는 공식적으로 블랙호크스와 계약했습니다. 브루인스의 단장 해리 신든은 블랙호크스의 템퍼링에 대해 불평하며 시카고 구단주 빌 워츠에게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를 받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오어가 소유한 문서에 따르면, 그들은 유효한 주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어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기 전인 1976년 5월 비밀 회의에서 블랙호크스와 계약했습니다.
당시 브루인스 감독 돈 체리는 오어가 브루인스와 재계약하지 않은 이유가 당시 오어가 이글슨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시사했습니다(오어는 이글슨을 형제 같다고 묘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체리는 오어가 브루인스 팀 사장과 직접 대화하기를 거부하여 이글슨이 보스턴의 제안에 대한 충분한 세부 사항을 오도하거나 숨길 수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오어의 브루인스 이탈은 험악했고, 그 이후로 그는 브루인스와 공식적인 역할을 맡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이글슨이 블랙호크스 구단주 빌 워츠와 NHL 회장 존 지글러와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특정 선수들의 연봉을 억제하기 위해 공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오어는 1980년에 이글슨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시카고와의 5년 계약은 300.00 만 USD였으며, 30년에 걸쳐 지급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지급을 분산시킨 것은 세금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수 시절, 그는 시카고의 급여 수표를 한 번도 현금화하지 않았는데, 하키를 하기 위해 돈을 받았으며 경기에 뛰지 않으면 연봉을 받지 않겠다고 진술했습니다.
4.2.1. 마지막 시즌 및 은퇴
오어는 시카고와 계약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다음 세 시즌 동안 단 26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그는 1977-78 시즌 전체를 결장했습니다. 1978년까지 오어는 12번 이상의 무릎 수술을 받았고, 걷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거의 스케이트를 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78년 여름, 그는 복귀를 결정했습니다. 그는 1978-79 시즌 6경기를 뛰었고,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블랙호크스에 은퇴를 알렸습니다. 그는 시카고 단장 밥 풀포드의 보조 역할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978년 10월 28일 디트로이트의 올림피아 스타디움에서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마지막 NHL 골과 포인트를 기록했습니다.
오어는 657경기에서 270골, 645어시스트, 총 915포인트를 기록하고 953페널티 시간을 기록하며 은퇴했습니다. 은퇴 당시 그는 리그 역사상 수비수 골, 어시스트, 포인트 부문에서 선두였으며, 어시스트 전체 10위, 포인트 전체 19위였습니다. 2018년 기준으로 오어보다 경기당 평균 포인트가 높은 은퇴 선수는 웨인 그레츠키, 마리오 르뮤, 마이크 보시뿐이며, 이들은 모두 포워드였습니다. 고디 하우는 "보비를 잃은 것은 NHL이 겪은 가장 큰 타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키 명예의 전당은 명예의 전당 헌액을 위한 일반적인 3년 대기 기간을 면제했으며, 오어는 31세에 헌액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 중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오어는 3년 대기 기간이 면제된 8번째 선수였으며, 다음 두 명은 마리오 르뮤(1997)와 웨인 그레츠키(1999)였습니다. 그 후 명예의 전당은 "특정 인도주의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어떤 선수에 대해서도 대기 기간을 면제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등번호 4번 저지는 1979년 1월 9일 브루인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기념식에서 보스턴 가든의 관중들은 끊임없이 박수를 보냈고, 그 결과 지속적인 환호 때문에 그날 저녁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어야 했습니다. 관중들은 오어가 브루인스 저지를 입을 때까지 감사 연설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날은 보스턴에서 "보비 오어 데이"로 선포되었고, 이 행사는 자선 기금으로 수천 달러를 모금했습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과 매사추세츠 주 하원에 참석하여 5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보스턴 셀틱스 농구 슈퍼스타 래리 버드는 경기 전 영감으로 항상 가든 천장의 오어의 영구 결번 4번을 올려다보았다고 말했는데, 이는 빌 러셀, 밥 쿠지, 존 해블리첵과 같은 셀틱스 스타들의 영구 결번보다 더 자주 보았다는 의미였습니다.
5. 국제 대회 참가
보비 오어는 프로 경력 중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캐나다를 대표했습니다.
5.1. 1976 캐나다 컵
오어가 시카고와 계약한 후, 블랙호크스는 그에게 1976년 캐나다 컵 토너먼트에서 팀 캐나다를 위해 뛰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오어는 1972년 서밋 시리즈에 소련을 상대로 뛰지 못했고, 캐나다를 위해 뛰고 싶어 했습니다. 오어는 무릎 수술로 인해 서밋 시리즈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비선수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오어의 캐나다 컵 참가는 잘못된 생각으로 여겨졌고, 이글슨은 나중에 그것이 그의 경력을 끝낸 '마지막 지푸라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어 자신은 토너먼트 전에 "더 이상 오래 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리즈가 저를 망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시즌은 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이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팀을 보니 제가 그렇게 많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오어의 캐나다 컵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토너먼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토너먼트 전체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팀 동료 보비 클라크에 따르면, 오어는 "경기 아침에는 거의 걸을 수 없었고, 오후에도 거의 걸을 수 없었지만, 밤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에서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그는 모든 경기에서 최고의 선수였고, 토너먼트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예전처럼 스케이트를 탈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뛰어났습니다." 팀 동료 대릴 시틀러는 "보비 오어는 한쪽 다리로도 다른 누구보다 두 다리로 뛰는 것보다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6. 플레이 스타일 및 영향력
오어는 그의 독특하고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아이스하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경기는 단순한 수비수의 역할을 넘어섰으며, 탁월한 스케이팅 능력과 공격적인 기여로 포지션의 개념을 재정의했습니다.
6.1. 스케이팅 및 공격적 기여
오어와 브루인스가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관중석은 항상 매진되었습니다. 오랜 브루인스 코치이자 단장인 해리 신든은 "보비는 우리와 함께한 첫 경기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쯤 NHL의 스타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더 보스턴 글로브의 칼럼니스트 댄 쇼네시는 "오어 시대 동안 브루인스는 5시즌 동안 우리 도시에서 매일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보스턴 레드삭스나 보스턴 셀틱스보다 더 컸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오어는 양방향 경기에 대한 통솔력으로 하키 경기에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오어의 공격적인 스타일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수비수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흔했던 뒤로 물러서는 수비 플레이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오어는 유려한 스케이팅과 엔드-투-엔드 러싱으로 유명했습니다. 오어의 러싱은 그가 퍽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효과적으로 득점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수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브루인스의 필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상대방이 아무리 빨라도 보비는 플레이의 틀 안에서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 빠르게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업-아이스에 잡혀 상대 팀이 수적 우위를 가지고 돌진할 때, 그때 그의 진정으로 위대한 속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플레이를 막는 데 거의 항상 기여했습니다." 오어는 또한 대부분의 경력을 표준 NHL 링크보다 2.7 m (9 ft) 짧은 보스턴 가든에서 뛰면서 이점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의 러싱 스타일에 매우 적합했으며, 표준 링크보다 더 빠르게 아이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오어의 플레이 스타일은 그의 왼쪽 무릎에 부담을 주어 부상과 수술로 이어져 그의 경력을 단축시켰습니다. 오어에 따르면 왼쪽 무릎은 모든 충격을 받았고 "13~14번" 수술을 받았습니다. 오어는 왼손잡이 슛이었지만 오른쪽에서 뛰었습니다. 그는 퍽을 가지고 오른쪽 윙을 따라 질주하며 속도와 힘을 사용하여 상대 수비수를 제치려 했습니다. 그는 왼쪽 무릎을 앞세우고 왼팔을 들어 올려 상대방을 막아내며 퍽을 '보호'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상대 수비수의 히트가 종종 왼쪽 무릎에 가해지는 위치에 놓였습니다. 또한, 그는 종종 상대 골리, 골대 또는 엔드 보드에 충돌하곤 했습니다. 오어는 2008년에 "그것은 제가 플레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렇게 하면 맞게 됩니다. 더 오래 뛰었으면 좋았겠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플레이할 때는 전력을 다합니다. 저는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참여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오른쪽 무릎은 경력 동안 기본적으로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스포츠 작가 밥 맥켄지에 따르면 그의 왼쪽 무릎은 "보스턴 시내의 도로 지도"처럼 보입니다. 그의 왼쪽 무릎은 2008년 마스터카드 광고에 사용되었는데, 그의 흉터 자국이 각 흉터 자국이 생긴 해와 그의 많은 업적을 연결하는 애니메이션에 사용되었습니다. 200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에 따르면 오어는 이후 두 번의 무릎 교체 수술을 받아 통증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오어는 또한 치명적으로 정확한 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골텐더 버니 패런트는 "그의 슛이 골문 안으로 들어가면 골입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오어는 스틱에 테이프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서전 오어: 나의 이야기에서 그는 "제 경우, 테이프가 전혀 없는 블레이드에 퍽이 닿는 느낌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스틱에 테이프를 감아야 한다면 최대한 적게 사용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년 동안 저는 점점 더 적게 사용했고, 결국 한 줄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테이프를 전혀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골텐더 켄 드라이든은 오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 느낌은 독특했습니다. 모든 캐나디언스 선수들은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를 본 해변가 사람들처럼 작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함께 이끌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를 그렇게 다르게 만든 이유입니다. 마치 다섯 명의 선수가 그의 속도로 당신에게 돌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팀 동료들을 밀어붙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리그 최고의 선수와 함께 뛰고 있고 그가 당신에게 퍽을 주고 있는데, 당신은 그것을 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전보다 더 잘해야 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의 감독 프레드 셰로는 1974년 스탠리컵 결승전 이후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어가 있었고 그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17명의 훌륭한 하키 선수들이 있었고, 그들 모두가 전력을 다했습니다. 17명 대 1명의 싸움이었습니다." 다른 브루인스 선수들이 자주 오어에게 퍽을 패스했고, 오어의 스케이팅 능력 때문에 지정된 체커가 그를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셰로는 "그의 [플라이어스] 포워드 라인 전체가 골문 앞에서 소용돌이치며, 보통 교차 패턴으로, 오어의 경로에 이동식 장애물 역할을 하도록" 대응했습니다.
오어는 또한 그의 성질로도 유명했습니다. 전 코치 돈 체리는 브루인스가 지고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한 경기에서 일어난 사건을 회상합니다. 경기 종료 1분 전, 오어는 브루인스 선수 중 한 명을 아이스 밖으로 끌어내고 벤치를 떠나 로스앤젤레스 킹스 선수를 공격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오어는 체리에게 "그가 우리를 비웃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체리에 따르면 그는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또 다른 경우로 1967년 11월, 오어는 토론토 메이플 리프의 브라이언 코나처의 스틱에 얼굴을 맞았습니다. 보스턴 팀 동료 조니 맥켄지는 코나처를 뒤에서 쓰러뜨리고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던 오어는 얼음에서 일어나 맥켄지를 코나처에게서 떼어내고 코나처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반격하지 않던 코나처는 브루인스의 켄 호지에게도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오어는 그날 이후로 토론토에서 야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어는 종종 오어와 비슷한 스타일로 뛰었고 나중에 보스턴의 최고 수비수로 오어의 뒤를 이은 브래드 파크와 비교되었으며, 두 사람은 종종 경기 중 서로 싸우며 브루인스와 뉴욕 레인저스 간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부추겼습니다. 파크는 "보비 오어 다음으로 2위로 평가받았다고 해서 속상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오어는 경기 최고의 수비수일 뿐만 아니라 스케이트를 신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슈퍼스타에게 2위로 평가받는 것은 전혀 모욕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6.2. 수비수 포지션의 혁신
오어는 수비수 포지션을 혁신하여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유려한 스케이팅과 엔드-투-엔드 러싱을 통해 퍽을 효과적으로 득점하고 필요할 때 수비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흔했던 뒤로 물러서는 수비 플레이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오어는 수비수로서 리그 득점왕과 어시스트 기록을 세우며 이 포지션의 공격적인 잠재력을 입증했습니다. 그의 플레이는 수많은 후배 수비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 하키에서 수비수의 역할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7.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보비 오어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선수 에이전트 및 권익 옹호 활동을 통해 스포츠 산업에 계속해서 기여했습니다.
7.1. 재정적 어려움과 회복
오어가 은퇴한 직후, 독립 회계사는 오어의 부채가 그의 자산을 초과하여, NHL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 중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파산 상태였음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오어의 세금도 검토 중이었습니다. 이글슨은 오어의 수입을 받고 오어에게 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법인을 설립했지만, 이 약정은 미국과 캐나다 세무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1980년 7월 그의 자산은 총 45.66 만 USD였고, 그의 세금, 법률 및 회계 비용은 총 46.95 만 USD에 달했습니다. 한때 오어가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다'고 말했던 이글슨은 오어가 '수입을 초과하는 생활'을 하고 자신의 투자 조언을 무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오어는 1980년 4월 1일 이글슨과 결별했습니다. 오어와의 법적 합의의 일환으로 이글슨은 오어-월튼 하키 캠프를 포함한 오어의 여러 자산을 62.00 만 USD에 구매하기로 동의했으며, 이는 오어의 은행 대출금 45.00 만 USD를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오어는 시카고의 보조 코치로 잠시 활동했으며, NHL과 하트퍼드 웨일러스의 컨설턴트로도 일했습니다. 블랙호크스는 그에게 계약 잔액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고, 오어는 그들을 고소하여 1983년에 그들이 빚진 돈의 3분의 1인 45.00 만 USD에 합의했습니다. 이 중 20.00 만 USD는 세금과 법률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어는 보스턴 지역으로 돌아와 파트너인 톰 켈리와 폴 샨리와 함께 캔-암 엔터프라이즈(Can-Am Enterprises)를 설립하여 뱅크보스턴과 스탠다드 브랜즈를 포함한 오어의 광고 계약 고객을 확보했습니다. 오어는 결국 광고 계약과 홍보 활동 덕분에 재정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7.2. 선수 에이전트 및 옹호 활동
오어는 나중에 이글슨의 수년간의 비행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한때 이글슨을 "형"으로 여겼지만, 1980년에 이글슨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그와 결별했습니다. 이글슨은 고객들에게 계약 조건을 오도했을 뿐만 아니라, NHLPA 자금을 사기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어는 이글슨이 고객의 동의나 지식 없이 신탁 자금을 대출한 것에 대해 어퍼 캐나다 법률 협회에 이글슨의 법적 비행에 대한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한 여러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98년, 이글슨은 사기, 횡령, 갈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유죄 판결 후, 오어는 이글슨이 건설자로서 명예의 전당에서 제명되지 않으면 하키 명예의 전당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한 18명의 전직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거의 확실한 제명에 직면하자 이글슨은 대신 사임했습니다.
오어는 또한 1991년 은퇴한 NHL 선수들이 선수 연금 기금에 대한 NHL의 통제에 대해 NHL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도 관여했습니다. 이글슨은 1969년 NHLPA가 NHL 구단주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 선수들이 연금 기금의 수탁자 자리 하나를 포기하도록 주선했습니다. 오어와 전 브루인스 선수 데이브 포브스는 스포츠 신문 더 내셔널과 이 소송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오어는 "우리 돈이 현재 선수들의 연금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NHL의 대응은 오어와 포브스에게 명예훼손 및 비방 통지를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칼 브루어는 당시 NHL 회장 존 지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어를 옹호했습니다. "NHL과 회원 클럽들이 우리 게임의 아이콘인 보비 오어를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1947년에 NHL과 함께 연금 계획을 시작한 야구 선수들의 계획 자산이 약 5.00 억 USD인 반면, 우리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자산은 3190.00 만 USD에 불과하다는 것은 흥미롭지 않습니까?" 연금 소송은 1994년 두 법원이 NHL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후 마침내 선수들이 승리했습니다. NHL은 이 사건을 캐나다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대법원은 사건을 심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오어는 1996년 하키 선수들을 대리하는 에이전트가 되었습니다. 투자자들과 함께 오어는 보스턴 변호사 밥 울프가 설립한 울프 어소시에이츠(Woolf Associates) 에이전시를 인수했습니다. 이해 상충을 방지하기 위해 오어는 로웰 록 몬스터스 마이너 프로 하키 팀에 대한 투자를 매각하고 NHLPA와 계약을 맺은 신용카드 회사와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오어는 공인 에이전트가 되었지만, 하키 클럽과 직접 협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수 에이전트 릭 커런은 2000년에 자신의 에이전시를 오어의 에이전시와 합병했습니다. 커런과 오어는 파트너 폴 크레펠카와 함께 2002년 2월 오어 하키 그룹(Orr Hockey Group)을 법인화했습니다.
오어 하키 그룹은 제프 카터, 스티브 다우니, 테일러 홀, 네이선 호튼, 코너 맥데이비드, 애덤 맥퀘이드, 콜튼 오어(친척 아님), 패트릭 샤프, 제이슨 스페자, 에릭 스탈, 조던 스탈, 마크 스탈, 캠 워드와 같은 NHL 선수들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스페자는 오어가 에이전트인 경험에 대해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를 매우 존경합니다. 그의 테이프를 보면 그가 상대했던 선수들에 비해 얼마나 터무니없이 뛰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고, 그가 말하는 방식으로는 그가 보비 오어라는 것을 알 수조차 없습니다."
몇 년 동안 오어는 매년 CHL 탑 프로스펙트 게임에서 돈 체리가 지도하는 유사한 팀을 상대로 캐나다 하키 리그 주니어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지도했습니다. 보스턴에서 잠시 그의 전 코치였던 체리는 오어를 역대 최고의 하키 선수로 여기며, 오어가 스케이트, 득점, 싸움, 수비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만능 선수였다고 언급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오어의 팀은 대부분의 경기에서 승리했으며, 오어가 체리를 상대로 지도한 11번 중 7번을 이겼습니다. 오어의 참여는 선수 에이전트로서 이해 상충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는 시리즈에서 코치를 그만두었습니다. 시리즈 주최측은 오어를 설득하여 시리즈 코치로 복귀시켰습니다. 그는 2011년 경기 전에 둘째 손주가 태어나면서 다시 물러났습니다. 한 팀은 여전히 '팀 오어'라는 이름을 유지했습니다.

은퇴 후 오어는 브루인스와 함께 여러 차례 의식적인 첫 퍽 드롭을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2010년 NHL 윈터 클래식에서 보비 클라크와 함께 한 행사, 그리고 2016년 10월 20일 밀트 슈미트와 함께 보스턴 브루인스의 시즌 첫 홈 경기에서 퍽을 떨어뜨린 행사가 포함됩니다.
2013년 11월 3일, 오어의 오랜 염원이었던 자서전 오어: 나의 이야기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 논픽션 부문에서 8위로 데뷔했습니다.
2020년 10월부터 오어는 뉴햄프셔 유니언 리더 신문에 도널드 트럼프의 인격을 찬양하고 미국 유권자들에게 그를 재선출할 것을 촉구하는 전면 광고를 게재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8. 개인적인 삶
보비 오어는 가족과의 깊은 유대감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은퇴 후에도 전 팀 동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다양한 자선 활동에 참여하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8.1. 가족
휴가 중 오어는 미시간주 트렌턴 출신의 언어 치료사 마가렛 루이스 "페기" 우드(Margaret Louise "Peggy" Wood)를 만났는데, 그녀는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은 1972년 크리스마스에 약혼했고, 1973년 9월 패리 사운드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대런과 브렌트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대런은 오어 하키 그룹에서 선수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어의 어머니 아르바는 2000년 11월 암 진단을 받은 지 18개월 만에 사망했고, 아버지 더그는 2007년에 사망했습니다. 오어는 2009년에 손녀 알렉시스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되었고, 2011년 1월에는 둘째 손주 로버트가 태어났습니다.
8.2. 자선 활동
오어는 전 브루인스 직원 및 팀 동료들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릭 샌더슨이 알코올 및 처방약 남용 문제로 무일푼이 되었을 때, 오어는 자신의 돈을 들여 샌더슨이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수십 년 후, 오어와 샌더슨은 하키 선수들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업을 함께 시작했습니다. 오어는 또한 1994년 알코올 중독으로 탬파베이 라이트닝에서 해고된 브루인스 트레이너 존 (프로스티) 포리스탈을 도왔습니다. 포리스탈의 음주는 그의 형제 존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그는 직업 없이 보스턴으로 돌아왔으며 곧 뇌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오어는 포리스탈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1년 동안 자신의 집에서 그를 돌보았습니다. 오어는 그의 장례식에서 운구자였습니다.

오어는 또한 자선 활동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언론에 언급되는 것을 피했습니다. 전 이글-트리뷴 작가 러스 콘웨이는 오어와 콘웨이가 프로그램, 페넌트, 퍽, 사진, 보스턴 기념품 상자를 들고 보스턴 아동 병원을 방문했던 한 일화를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오어가 예고 없이 아이들을 방문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고, 아픈 와중에도 놀라움과 기쁨에 웃었습니다. 보비 오어! 그는 아이들 각자와 이야기하고 농담하며 이름을 묻고 머리를 쓰다듬고 상자에서 작은 선물을 주고 스틱을 남기고 보이는 모든 곳에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오어는 콘웨이에게 신문에 한 마디도 인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했습니다. 오어는 수많은 자선 기금 모금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1980년, 오어는 전국 다발성 경화증 협회로부터 "사회에 대한 수많은 이타적인 기여"로 다발성 경화증 실버 희망 상자 상을 수상했습니다.
다른 개인적인 관심사 중 오어는 어린 시절부터 낚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소 퍼즐을 빠르게 푸는 재능이 있습니다. 오어는 또한 옷차림과 스타일 감각으로도 유명합니다. 브루인스 시절 포리스탈과 함께 독신으로 살 때, 오어는 또한 깨끗한 아파트를 유지하고 술, 담배, 나이트클럽 출입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오어는 깨끗한 이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9. 유산 및 평가
보비 오어는 하키 역사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수많은 명예와 수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9.1. 명예와 수상
1970년, 오어는 미국 성취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 상을 수상했습니다. 1979년, 오어는 캐나다 훈장 장교로 서훈되었습니다. 그의 고향 패리 사운드에는 오어의 이름을 딴 두 개의 건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비 오어 명예의 전당으로, 그의 캐나다 훈장 메달과 다른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비 오어 커뮤니티 센터로, 다목적 엔터테인먼트 시설입니다. 1995년, 보비 오어는 온타리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오어는 토론토의 캐나다 명예의 거리에 별을 새겨 영예를 얻었습니다. 2004년, 오어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오샤와 남부에 개교했습니다. 2008년 11월 27일, 오샤와 제너럴스는 오어의 등번호 2번 저지를 영구 결번했습니다. 제너럴스는 오어가 1966년 NHL로 이적한 이후 이 번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어는 오샤와에서 4년 동안 자신을 도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저는 14세부터 18세까지 오샤와에서 많은 성장을 했고, 제 인생의 그 시기에 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10년 2월, 오어는 2010년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올림픽 기를 운반한 8명의 기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보스턴의 TD 가든 옆에는 오어의 청동 동상이 서 있습니다. 이 동상은 오어와 함께 브루인스의 첫 스탠리컵 우승 40주년 기념일인 2010년 5월 10일에 공개되었으며, 우승 골을 득점한 직후의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막식에는 오어와 그의 전 팀 동료 여러 명이 참석했습니다. 오어는 기념식에서 동상에 대해 "이 동상으로 우리가 기념하는 이 특별한 순간과 시간은 우리가 보스턴 가든에 들어설 때마다 함께 향수를 느끼며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광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12년,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이아몬드 주빌리 메달을 받았습니다.
1975년 보스턴 글로브 신문이 뉴잉글랜드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오어는 테드 윌리엄스, 빌 러셀, 칼 야스트렘스키, 밥 쿠지와 같은 야구 및 농구 스타들을 제치고 보스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10. 경력 업적 및 통계
보비 오어는 12시즌 동안 657경기에 출전했으며(이 중 처음 9시즌, 총 621경기만 풀 시즌이었습니다), 27세 이후에는 단 47번의 NHL 경기에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기록과 업적을 달성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10.1. 주요 수상 및 트로피
- OHA 퍼스트 올스타 팀 - 1964년, 1965년, 1966년
- 칼더 기념 트로피 (올해의 신인) - 1967년 (당시 최연소 수상자이자 주요 NHL 상 최연소 수상자)
- NHL 세컨드 올스타 팀 - 1967년 (신인으로서 퍼스트 팀에 들지 못한 유일한 풀 시즌)
- NHL 올스타전 출전 -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5년
- NHL 퍼스트 올스타 팀 -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 제임스 노리스 트로피 수상 -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8회 연속)
- NHL 플러스/마이너스 상 리더 -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4년, 1975년 (역사상 최다)
- 아트 로스 트로피 수상 - 1970년, 1975년
- 하트 기념 트로피 수상 - 1970년, 1971년, 1972년 (3회 연속)
- 코언 스미스 트로피 수상 - 1970년, 1972년 (플레이오프 MVP 상 첫 2회 수상자)
- 스탠리컵 챔피언 - 1970년, 1972년
- 루 마시 트로피 (캐나다 올해의 운동선수) - 1970년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 "올해의 스포츠맨" 상 - 1970년
- NHL 올스타전 MVP - 1972년
- 1975년 보스턴 글로브 신문 뉴잉글랜드 주민 여론조사에서 보스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로 선정
- 레스터 B. 피어슨 상 수상 - 1975년
- 캐나다 컵 토너먼트 MVP - 1976년
- 레스터 패트릭 트로피 수상 - 1979년
- 그의 등번호 4번 저지는 1979년 1월 9일 보스턴 브루인스에 의해 영구 결번됨.

-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 - 1979년 (의무적인 3년 대기 기간 면제, 31세로 최연소 헌액자)
- 1997년 더 하키 뉴스 전문가 위원회 선정 역대 두 번째 위대한 하키 선수로 선정 (웨인 그레츠키 다음, 고디 하우 앞).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도 선정됨.
- 1999년 ESPN의 스포츠센추리: 20세기 위대한 운동선수 50인에서 31위 선정
- 2010년 더 하키 뉴스 선정 역대 최고의 수비수
- 2017년 내셔널 하키 리그 선정 역사상 "위대한 NHL 선수 100인" 중 한 명
10.2. 주요 기록
- 수비수 단일 시즌 최다 100포인트 시즌 (6회, 1969-70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 한 시즌에 4개의 주요 NHL 상(하트, 노리스, 아트 로스, 코언 스미스 트로피)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선수 (1969-70 시즌), 그리고 같은 시즌에 노리스와 아트 로스 트로피를 모두 수상한 유일한 선수
- 스탠리컵 우승을 확정 짓는 연장전 시작 후 최단 시간 골 (0:40; 1970년, 4차전)
- 수비수 단일 NHL 시즌 최다 포인트 (139; 1970-71 시즌)
- 수비수 단일 NHL 시즌 최다 어시스트 (102; 1970-71 시즌)
- 단일 NHL 시즌 최고 플러스/마이너스 등급 (+124; 1970-71 시즌)
- 통산 플러스/마이너스 등급 역대 2위 (+597; 전체 선두로 은퇴)
- 플러스/마이너스가 통계로 기록되기 시작한 1968 시즌 이후 풀 시즌에서 +30 미만으로 마친 적이 없음
- 통산 경기당 평균 포인트 역대 4위 (1.393) (최소 500포인트 이상 기록한 수비수 중 최고)
- 통산 어시스트 역대 66위, 통산 포인트 역대 109위
이후 경신된 기록:
- 수비수 단일 NHL 시즌 최다 골 (1969년부터 1986년까지) (1968-69 시즌 21골, 1969-70 시즌 33골, 1970-71 시즌 37골, 1974-75 시즌에 46골로 자신의 기록 경신; 1985-86 시즌 폴 코피가 48골로 경신)
- 단일 NHL 시즌 최다 어시스트 (1970년부터 1981년까지) (1969-70 시즌 87어시스트, 1970-71 시즌 102어시스트로 경신; 웨인 그레츠키와 마리오 르뮤에 의해 경신)
- 수비수 최장 연속 포인트 득점 기록 (1971년부터 1984년까지) (15경기, 1970-71 시즌과 1973-74 시즌에 세움)
- 수비수 단일 경기 최다 포인트 (1973년부터 1977년까지) (7포인트, 1973년 11월 15일 경기)
- 모든 포지션 선수 중 최장 연속 100포인트 이상 시즌 기록 (1974년부터 1980년까지) (6회, 1969-70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 통산 플러스/마이너스 등급 (1978년부터 1985년까지) (+597)
- 수비수 통산 골 득점 (270골) (1986년 데니스 포트빈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10.3. 경력 통계 요약
정규 시즌 | 플레이오프 | |||||||||||
---|---|---|---|---|---|---|---|---|---|---|---|---|
시즌 | 팀 | 리그 | GP | G | A | Pts | PIM | GP | G | A | Pts | PIM |
1962-63 | 오샤와 제너럴스 | 메트로 주니어 A 리그 | 34 | 6 | 15 | 21 | 45 | - | - | - | - | - |
1963-64 | 오샤와 제너럴스 | 온타리오 하키 리그 | 56 | 29 | 43 | 72 | 142 | 6 | 0 | 7 | 7 | 21 |
1964-65 | 오샤와 제너럴스 | OHA | 56 | 34 | 59 | 93 | 112 | 6 | 0 | 6 | 6 | 10 |
1965-66 | 오샤와 제너럴스 | OHA | 47 | 38 | 56 | 94 | 92 | 17 | 9 | 19 | 28 | 14 |
1966-67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61 | 13 | 28 | 41 | 102 | - | - | - | - | - |
1967-68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46 | 11 | 20 | 31 | 63 | 4 | 0 | 2 | 2 | 2 |
1968-69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67 | 21 | 43 | 64 | 133 | 10 | 1 | 7 | 8 | 10 |
1969-70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76 | 33 | 87 | 120 | 125 | 14 | 9 | 11 | 20 | 14 |
1970-71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78 | 37 | 102 | 139 | 91 | 7 | 5 | 7 | 12 | 25 |
1971-72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76 | 37 | 80 | 117 | 106 | 15 | 5 | 19 | 24 | 19 |
1972-73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63 | 29 | 72 | 101 | 99 | 5 | 1 | 1 | 2 | 7 |
1973-74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74 | 32 | 90 | 122 | 82 | 16 | 4 | 14 | 18 | 28 |
1974-75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80 | 46 | 89 | 135 | 101 | 3 | 1 | 5 | 6 | 2 |
1975-76 | 보스턴 브루인스 | NHL | 10 | 5 | 13 | 18 | 22 | - | - | - | - | - |
1976-77 | 시카고 블랙호크스 | NHL | 20 | 4 | 19 | 23 | 25 | - | - | - | - | - |
1978-79 | 시카고 블랙호크스 | NHL | 6 | 2 | 2 | 4 | 4 | - | - | - | - | - |
OHA 합계 | 193 | 107 | 173 | 280 | 391 | 29 | 9 | 32 | 41 | 45 | ||
NHL 합계 | 657 | 270 | 645 | 915 | 953 | 74 | 26 | 66 | 92 | 107 |
국제 통계
연도 | 팀 | 이벤트 | GP | G | A | Pts | PIM |
---|---|---|---|---|---|---|---|
1972 | 캐나다 | 서밋 시리즈 | 0 | 0 | 0 | 0 | 0 |
1976 | 캐나다 | 캐나다 컵 | 7 | 2 | 7 | 9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