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백선엽은 1920년 11월 23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아버지 백윤상과 어머니 방효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6년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 백인엽, 누나 백복엽과 함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27년 1월, 그의 어머니는 생활고로 인해 자녀들과 함께 대동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으나, 큰누이의 설득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후 어머니와 누이들은 고무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렸고, 백선엽은 학비가 크게 감면되어 만수소학교에서 4년간, 이후 약송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평양부립도서관에서 책과 신문 사설을 읽는 것을 즐기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백선엽은 군인의 꿈을 키웠으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직에 종사했으나, 같은 해 말 만주국 봉천의 중앙육군훈련처에 합격하며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사범학교 재학 중 학비 지원을 받은 대가로 졸업 후 2년간 교사로 근무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나, 중훈의 군의관이었던 원용덕의 도움과 학교 간부의 노력으로 졸업 자격을 유지한 채 근무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의 외조부는 대한제국군 참령(소령)까지 지낸 군인이었다.
1.1. 만주국 군 복무
1941년 12월 30일, 백선엽은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우수하게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되어 3년 동안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창설된 부대로, 만주국 북부 일대에 출몰하는 중국 공산당 주도의 항일 게릴라(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 등)를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 부대였다. 이 부대는 보병과 기갑 혼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 360명 규모에서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절반과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백선엽은 1943년 12월 러허성에서 간도특설대 기관총·박격포 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 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총 108차례의 토벌 작전을 수행했으며, 백선엽은 1944년 봄 러허성에서 팔로군 소탕 작전에 참여하여 정보 수집 등 특수 공작에서 큰 공을 세워 여단장의 표창을 받았다. 1944년 여름에는 허베이성으로 이동하여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에 대한 작전을 벌였다. 작전 종료 후 원대 복귀 명령을 받고 귀대했다. 1944년 가을 평양에서 노인숙과 결혼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 중위로,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 해제를 당했다.
그의 간도특설대 복무는 퇴역 후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백선엽은 1993년 한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후 친일 행각 비난이 일자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며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에서는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기술했다.
간도특설대는 대(對)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 타격, 공작, 정보, 심리, 매복, 추격, 섬멸 작전을 주로 행했으며,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대에서도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과 한국전쟁 시 빨치산 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력은 그의 일본어 저서인 《대 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이 대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을 창설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1.2. 국군 입대 및 초기 경력
일제 패망 후, 백선엽은 고향 평양으로 돌아와 당시 민중의 신망을 받던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을 찾아가 그의 비서로 잠시 활동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그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며 공산주의 체제가 확립되자, 백선엽은 1945년 12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중국 지역에서 공산 게릴라 토벌 임무를 수행했던 경력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이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 개설된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2월 26일 국방경비대 육군부위(중위)로 임관했다. 이후 같은 해 1월 15일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5연대 A중대장을 거쳐 1947년 1월 1일 중령으로 진급하며 제5연대장을 맡았다. 그는 부산에 주둔하며 부산항에 도착하는 미군 물자를 완벽하게 관리하고 감독하여 군수품 횡령을 막고 분실률을 50%대에서 10% 미만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1948년 4월, 미군정 하에 국방부 격인 통위부가 조직되자 백선엽은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세호, 김창룡 등 방첩대 요원 양성에 주력하며 군 내에 증식하던 남조선노동당 좌파 세포에 대항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정보국원 교육을 중단하고 군 내부의 좌익 세포 일제 제거에 나섰다. 이 숙군 운동으로 약 1,000명의 남로당 동조자가 체포되었고, 오일균 소령, 최남근, 김종석 중령 등 다수의 중견 및 젊은 장교들이 총살되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 소령도 고위 군내 당 세포로 밝혀져 검거되었으나, 백선엽은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전향을 권고하고 구명에 적극 나섰다. 그는 미 육군 대위 이드, 하우스만, 로버츠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하고,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냈다. 결국 박정희는 불명예 제대 후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백선엽은 박정희에게 급여가 없자 동료 및 부하 장교들의 월급에서 일부를 갹출하여 그의 생활비를 지원하며 삶의 동기를 부여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박정희는 군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백선엽은 숙군 작업에 대해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라고 회고했다.
1.3. 한국전쟁 이전의 지휘관 경력
1948년 11월 대령으로 진급한 백선엽은 1949년 7월 30일 광주에 주둔하던 국군 제5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지리산과 호남 지방에서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1950년 4월 22일, 그는 제1사단장으로 전보되어 긴장이 고조되던 38선 전방의 개성 지역 동서 90 km의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제1사단은 제11, 제12, 제13연대를 예하에 두었다.
2. 한국 전쟁 참전 및 지휘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장으로서 초기 방어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낙동강 방어선과 다부동 전투 등 주요 격전지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국군의 전선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북진 작전과 중공군 개입에 따른 후퇴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휴전 협상에서는 한국군 대표로 참여했다. 전쟁 기간 중 그는 군단장, 참모총장, 연합참모의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치며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했다.
2.1. 전쟁 발발과 초기 방어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백선엽은 서울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3개월 예정의 고급 간부 재훈련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는 개전 10일 전인 6월 14일부터 교육에 임하고 있었기에 부대를 일시적으로 떠나 있었다. 오전 7시경,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으로부터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라는 급박한 전화를 받으며 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다.
백선엽은 즉시 제1사단 지휘권을 재인수하여 개성-문산 지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다. 제1사단은 북한군의 파상 공세에 맞서 임진강에서 4일간 방어 전투를 벌였다. 서울 서쪽의 유일한 방어선이었던 제1사단은 서울 함락 시까지 전투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북한군 T-34/85 전차를 앞세운 압도적인 공세에 밀려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혼란 속에서도 사단의 편제를 유지하며 지연전을 펼쳐 질서 있는 후퇴를 지휘하는 데 성공했다.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제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제6사단, 이성가 대령의 제8사단뿐이었다. 이 공로로 백선엽은 1950년 7월 25일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
2.2. 주요 전투 및 방어 작전
서울 함락 후 백선엽의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다. 이곳에서 제1사단은 연합군의 최후 방어선인 부산 교두보의 북쪽 경계선인 88514 m (55 mile) 전선을 책임지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시기 제1사단은 미국 부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으며, 한국군과 미군 간의 첫 번째 합동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제1사단은 북한군 제2, 제3, 제15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 기간 동안 제1사단은 적절한 대전차 무기를 보급받아 '헌터-킬러 팀'을 구성하여 북한군의 T-34-85 전차를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50년 8월의 다부동 전투는 한국전쟁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백선엽은 북한군 3개 사단에 맞서 불퇴전의 진지를 구축하고, 미군 제27연대와 함께 방어했다. 한국군 부대는 연이은 손실로 인해 피난민과 학생들을 병력으로 충원해야 했으며, 병력의 절반은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은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훈시를 하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호소하며 직접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전황을 반전시켰다. 이는 한국전쟁 중 사단장이 직접 돌격한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리더십은 제1사단의 전의를 의심하던 마이켈리스 연대장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이후 미군과 한국군 간의 신뢰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3. 북진과 중공군 개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백선엽의 제1사단은 미 제1군단 예하로 북진에 참여했다. 9월 18일, 제1사단은 북한군 전선에 생긴 틈을 뚫고 적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퇴로를 차단했다.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평양 점령 후에도 계속 북진 명령을 받은 제1사단은 10월 25일 운산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포로를 심문한 백선엽은 중공군 대규모 부대의 개입을 판단하고 미군 측에 이를 경고했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그의 경고를 믿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가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후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중공군 제39군에 포위된 제1사단은 운산을 중심으로 원진을 형성하여 방어했다(운산 전투). 11월, 제1사단은 운산을 포기하고 청천강으로 후퇴했다.
1950년 12월 초,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한 유엔군의 철수전에서 제1사단은 후위 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12월 중순, 유엔군은 38선까지 후퇴했고, 제1사단은 다시 임진강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12월 말 시작된 중공군의 신정 공세로 유엔군의 서울 포기가 결정되었고, 제1사단은 안성으로 후퇴했다(제3차 서울 전투).
1951년 1월 하순, 유엔군의 재반격에 따라 제1사단도 북진을 재개하여 2월 초에는 한강 남안에 진출했다. 이 기간 중 용인에서 포획한 중국군 포로를 심문한 백선엽은 그들의 사단장이 과거 만주국군에서 전술가로 이름을 날렸던 왕가선이며, 연대장은 군관학교 시절 구대장이었던 전연화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1951년 3월 중순, 제1사단은 공산군으로부터 서울을 탈환했다.
2.4. 휴전 협상 대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된 유엔군과 북한 및 중공군 간의 휴전 회담에서 백선엽은 제1군단장 직을 유지한 채 한국군 대표로 참여했다. 그의 인선에는 한국군의 추천도 있었지만, 동해안 작전에서 백선엽을 잘 알고 있던 터너 조이 중장과 아서 버크 소장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 백선엽은 근본적으로 휴전 협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통일 한국의 포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952년 5월,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국 국민의 휴전 반대 입장을 강력히 전달하기도 했다.
1951년 9월, 백선엽은 이형근 소장과 한국군 대표를 교체하고 제1군단으로 복귀했다. 그는 38선 부근의 펀치볼과 피의 능선(Heartbreak Ridge)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이제 소모전 양상으로 싸우고 있었으며,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진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인명 손실이 있었지만, 그에 비해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전쟁의 교착 상태로 인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한반도는 분단된 채로 남게 되었다.
2.5. 전후 군 지휘 및 진급
한국전쟁 기간 동안 백선엽은 다른 지휘관들을 괴롭혔던 부대 해체와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또한 미군 장교들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행동과 성공은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당시 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에 미군 지휘부가 한국군을 유용한 동맹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1년 4월 6일, 대관령 부근에서 탑승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김백일 후임으로 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4월 15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한국 제1군단은 수도사단, 제11사단, 제1101야전공병단이 배속되어 동해안을 따라 전개된 부대였다. 미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제1군단은 북진을 선도했다. 1951년 5월 15일, 중공군과 북한군의 5월 공세가 시작되면서 군단 좌익의 한국 제3군단이 패주했으나, 밴 플리트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한국 제1군단은 미 제3사단과 함께 동서에서 적을 협격하여 격퇴했다. 5월 말, 한국 제3군단은 해체되고 한국군 군단은 제1군단만 남게 되었다.
1951년 11월, 전황이 안정되자 지리산 남부 지역의 공산 빨치산으로 인한 치안 악화가 문제시되었다. 여수·순천 사건으로 지리산에 도피한 세력과 남조선노동당, 그리고 스레지해머 작전으로 인한 북한군 붕괴 시 산악 지대에 남은 북한군 잔존 부대가 합쳐져 '남부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1951년 2월 치안 작전을 맡았던 제11사단 예하 일부 부대가 거창 사건을 일으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기에, 빨치산 토벌 경험자인 백선엽이 이 임무를 맡았다. 제1군단에서 수도사단, 미 제10군단에서 한국 제8사단을 차출하여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신설되었다. 약 5만 명으로 추정되던 공산 게릴라 토벌 작전은 1951년 12월 1일부터 1952년 3월 14일까지 진행되었다. 작전 종료 후 백선엽은 광주에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수도사단과 함께 신설될 군단을 구성하는 핵심이 되었고, 1952년 4월 백선엽이 군단장이 되는 제2군단을 편성했다. 제2군단은 수도사단(송요찬 준장), 제3사단(백남권 준장), 제6사단(백인엽 준장)의 3개 사단과 한국군에 없었던 군단 직할 포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중부 전선의 금성 정면을 담당했다. 1952년 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7월, 백선엽은 한국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전군의 행정 개선, 보충 교육 훈련, 치안 유지를 총괄했으며, 17개 교육 시설을 재건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포로 문제로 난항을 겪던 휴전 회담에서 유엔군과 정부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수행했다. 1953년 1월 31일, 그는 32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5월, 전후 안전 보장 체제 정비 논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고, 뉴욕에서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생도대장을 맡고 있던 마이켈리스 준장과 재회했으며, 맥아더 장군을 면회했다. 이후 미군 학교들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에서 2주간 군사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휴전 회담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1953년 7월 중순, 중공군의 최종 공세가 시작되자 테일러 군사령관의 요청으로 한국 제2군단(정일권 중장)의 반격을 지도했다.
1954년 2월 24일, 백선엽은 신편된 한국 제1야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155마일 휴전선 방어 책임을 미8군으로부터 사실상 인수받아 43개월 동안 초대 제1군사령관으로서 야전군의 기틀을 다졌다. 1957년 5월, 그는 다시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부터 발생한 일방적인 감군 여론에 반대했으며, 1959년 2월에는 합동참모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여 최신식 무기 도입 등 한국군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김종필 중령 등을 중심으로 한 젊은 장교들의 청군 운동으로 인해 스스로 용퇴를 결심하고, 1960년 5월 31일 육군에서 전역했다.
3. 군 퇴역 후 활동
군에서 퇴역한 백선엽은 외교관, 장관,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활동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부터 국내 교통 인프라 구축, 그리고 기업 경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어졌다.
3.1. 외교관 활동
1960년 5월 31일 육군에서 전역한 백선엽은 그해 7월 15일 주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7월 4일에는 주프랑스 대사로 전보되었고, 동시에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룩셈부르크 등 서유럽 및 중근동, 아라비아 등 17개국 대사를 겸임했다. 1961년 7월 16일에는 한국-세네갈 친선사절단 대표로 세네갈을 방문하여 두두 티암 세네갈 수상과 면담했다. 1962년에는 가봉, 토고, 세네갈, 카메룬, 차드, 모리타니 주재 전권대사를 겸임했다. 1963년 8월 27일에는 주카메룬 신임 대사(당시 주프랑스 대사 겸임)로서 아마두 아히조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며 양국 관계 수립에 기여했다.
1965년 7월 12일에는 초대 주캐나다 대사로 부임하며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3.2. 정부 및 공직 활동
1969년 10월 21일, 백선엽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교통부 장관으로서 서울의 지하철 건설을 지휘하는 등 대중교통 인프라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1970년에는 일본항공 351편 납치 사건 당시 김포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일본항공기 납치 사건 해결에도 관여했다.
1971년 1월 25일 교통부 장관직에서 퇴임했다. 이는 과적 화물선 침몰로 3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낸 남영호 침몰 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었다. 퇴임 후에는 반공 및 안보 강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86년에는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어 안보 및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어 기념 사업을 이끌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노근리 사건 대책단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5월에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2009년 3월 23일,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기를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을 검토했으나, 그의 만주군·간도특설대 복무 경력과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 토벌 이력으로 인해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
2013년에는 주한 미 육군으로부터 "명예 미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각종 공식 행사에서 주한 미8군 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2019년 1월 30일에는 백선엽이 고문으로 활동하던 예비역 장성 단체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비판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 10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3. 기업 활동 및 자문
교통부 장관 퇴임 후 백선엽은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1971년 6월 충주비료 주식회사 사장에 선출되었고, 이어서 한국종합화학공업 주식회사 사장을 겸임했다.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로도 선출되었다. 1972년 2월 28일에는 호남비료 사장을 겸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그는 기업 경영 지식을 쌓기 위해 1972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고, 1973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1973년 4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에 재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주)한국에탄올 사장에 선출되어 1980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에는 대한화학펄프 사장을 겸임했고, 1975년에는 비료공업협회 회장이 되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는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했으며, 1976년에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도 수료했다.
1979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한국전쟁 참전 공로가 인정되어 사회 원로로서 각종 행사에 초빙되었다. 1981년 초 선인재단 간부들의 비리 문제가 불거지자 책임을 지고 선인재단 이사장직에서 사퇴했으며, 같은 해 3월 한국종합화학 사장직에서도 사임했다. 1980년 3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사임 후 한국후지쯔사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이후 비료공업협회 회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4. 논란 및 역사적 평가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그의 만주국군 복무 경력과 친일 논란, 그리고 한국전쟁사 서술에서의 편향성 의혹 등으로 인해 사망 후에도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보수와 진보 진영 간에 극명하게 엇갈린다.
4.1. 만주국 군 복무 및 친일 논란
백선엽의 가장 큰 논란은 그의 만주국군 복무, 특히 간도특설대에서의 활동 경력이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만주국 내 항일 독립군과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러허성과 허베이성에서 팔로군과의 전투를 수행한 부대였다. 150여 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백선엽은 자신이 쓴 대부분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거의 다루지 않았으나, 일본어로 출판된 회고록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에 대해 "그러나 역사상의 비극적인 그것(역사적으로 불가피했었던 간도특설대 대원)만큼은 너무도 유감스럽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백선엽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백선엽 본인은 2009년 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며 직접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과거 저술에서 "우리들이 쫓았던 게릴라 중에는 조선인이 섞여있다"는 식의 서술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며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백선엽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시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인정했다.
4.2. 한국전쟁사 서술 및 공적 평가 논란
백선엽의 영향력이 대한민국 국군 창군 관련을 비롯하여 한국전쟁의 공식 전사(戰史)·군사(軍史) 서술에 미쳤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1960~70년대 간행된 <6.25 전쟁사> 시리즈를 2003년부터 11권으로 증보 개정하는 편찬 사업을 진행했는데, 이 사업의 자문위원장이 백선엽이었다. 이로 인해 "백선엽이 전쟁 초기의 전사를 임의로 개작해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유리하도록 서술케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의 한국전쟁 공적에 대한 과장 논란도 존재한다. 박경석 예비역 육군 준장은 "6.25 전쟁사를 모르는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은 마치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인민군을 다 막아 대한민국이 구출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240km나 되는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 3개 사단, 한국군 5개 사단, 즉 8개 사단이 합심해서 방어해낸 것인데 그중 일부분이었던 백선엽이 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공적을 폄훼하기보다는, 미군 등 국제적인 민주화 세력과 인민군 대학살극을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승리라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최전방 격전지에 소년병 징집 문제와 관련한 논란도 있었다. 백선엽은 노년에 한국전쟁 소년병 위령 관련 행사에 참석했으나, 국군의 소년병 징집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는 답변을 회피하여 논란이 되었다.
4.3. 국립묘지 안장 및 기타 논란
백선엽은 생전에 자신이 사망하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국립묘지 안장 문제를 두고 큰 논란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가능케 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으로서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반민족 친일 행적이 추측되는 백선엽이 현충원에 묻히면 안 된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립했다. 국가보훈처는 서울 국립현충원의 장군 묘역이 만장되었기 때문에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밝혔다. 백선엽을 국가가 냉대한다고 주장하는 보수계 시민 단체들은 광화문 광장에 자발적으로 '시민 분향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2019년 1월 30일, 백선엽이 고문으로 활동하던 예비역 장성 단체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과 2018년 9월 평양에서 체결된 포괄적 군사 합의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5. 유산 및 영향력
백선엽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과 한국전쟁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군사적 리더십은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과 수상 경력이 존재한다.
5.1.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전쟁사에 미친 영향
백선엽은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군사적 리더십과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 강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지휘한 제1사단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 속에서도 편제를 유지하며 질서 있는 후퇴를 성공시켰고,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미군과의 성공적인 합동 작전을 통해 전선을 지켜냈다. 특히 다부동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이러한 활약과 미군과의 원활한 관계는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졌고, 이는 냉전 시대에 한국군이 미국의 중요한 동맹으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주한미군 사령관 이·취임식 때마다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으로 시작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으며, 미 제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은 '백선엽관'으로 명명되었다. 그의 한국전쟁 경험담 육성 녹음은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회고록 《군과 나》는 미군 주요 군사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그를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부르며 극진히 예우했다. 2013년에는 미8군 명예 사령관으로 위촉되었고, 2016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8군 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되었다. 그의 만주군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은 훗날 국군 육군 정보국장과 한국전쟁 시 빨치산 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대비정규전 부대 창설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5.2. 수상 경력 및 기념 사업
백선엽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태극무공훈장 (2회), 을지무공훈장 (2회), 충무무공훈장, 무공포장, 6.25사변종군기장, 금탑산업훈장, 석탑산업훈장, 일등수교훈장 (3회) 등을 수여받았다.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훈장, 동성훈장, 항공훈장, 공로훈장 (최고 사령관, 사령관, 장교, 레지온네어 등 여러 등급), 수훈 공공 근무 국방부 훈장, 수훈 민간 근무 육군 훈장 등을 받았다. 특히 2000년에는 트루먼-레이건 자유 메달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캐나다 공적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및 공로 훈장, 전쟁의 십자가 훈장, 벨기에 레오폴 사령관 훈장, 중화민국 구름과 배너 훈장 및 찬란한 별 훈장, 필리핀 레지옹 도뇌르 훈장, 태국 흰 코끼리 훈장, 네덜란드 법과 자유의 십자가 훈장, 에티오피아 별 훈장, 부르키나파소 국가 공로 훈장, 그리스 피닉스 훈장 및 조지 1세 훈장, 쿠바 수훈 근무 훈장, 니제르 공로 훈장, 일본 서보장 (1995년) 등 다양한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한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유엔 한국근무기장을 수여받았다.
기념 사업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 근처에 1951년 4월 1일 다부동 전투의 전승을 기념하는 '백선엽 호국구민비'가 설립되었다. 2010년에는 육군본부 신축 강당에 '백선엽 장군실'이 마련되었고, 육군 제1사단은 백선엽 장군 기념석을 제막했다. 2010년 '한국전쟁기념재단'이 출범하면서 백선엽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6월 8일 충남대학교에서 명예 군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5년 11월에는 국방대학교 창설 60주년 기념식에서 첫 번째 명예 군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쟁 중 국군과 경찰의 유자녀, 전쟁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하였다. 이 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후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 한국전쟁 이후 운영에서 손을 뗌으로써 19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넘겨져 운영되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 시설로 운영되고 있으며,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
6. 개인사
백선엽은 1920년 11월 23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아버지 백윤상(1890년생, 백락순의 삼남, 메이지 대학 졸업)과 어머니 방효열(1893년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는 방흥주로 대한제국군 참령(소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에게는 누나 백복엽(1917년생)과 동생 백인엽(1923년생, 훗날 선인학원 이사장 역임)이 있었다. 사촌 누나로는 기업인이자 사채업자였던 백희엽이 있다.
1944년 가을 평양에서 노인숙(1925년생)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백남혁, 백남흥과 딸 백남희, 백남순을 두었다.
백선엽은 2020년 7월 10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7. 저서
백선엽 장군이 저술한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From Pusan to Panmunjom영어 (1992)
- 《군과 나》 (1989)
- 《실록 지리산》 (1992)
- 《길고 긴 여름 날 1950년 6월 25일》 (1999)
-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3》 (2010)
-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2010)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2012)
-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2016)
일본에서 출간된 저서:
- 韓国戦争一千日 白善燁回想録한국전쟁 일천일 백선엽 회상록일본어 (1988)
- 対ゲリラ戦 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대 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일본어 (1993)
- 若き将軍の朝鮮戦争 白善燁回顧録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 회고록일본어 (2000)
- 指揮官の条件 朝鮮戦争を戦い抜いた軍人は語る지휘관의 조건 조선전쟁을 싸워 이긴 군인은 말한다일본어 (2002)
- 朝鮮半島 対話の限界 危機克服への戦略構想조선반도 대화의 한계 위기 극복을 위한 전략 구상일본어 (2003)
중국에서 출간된 저서:
- 最寒冷的冬天 Ⅱ - 一位韩国上将亲历的朝鲜战争가장 추운 겨울 Ⅱ - 한 한국 상장이 직접 겪은 조선전쟁중국어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