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선수 경력 이전
테리 펜들턴은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선수로서의 기량을 다졌다.
1.1. 학창 시절 및 아마추어 경력
펜들턴은 캘리포니아 주 채널 아일랜드 고등학교에서 2루수로 활약하며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옥스나드 대학교에서 뛰었으며, 1979년은 이 학교의 첫 야구팀 창단 해였다. 그는 콘도르스 팀이 주 챔피언십에 진출하는 데 기여하며 장학금을 받았다. 이후 1981년부터 1982년까지 프레즈노 주립 대학교로 편입하여 활약했다. 특히 1982년 시즌에는 팀이 4년 연속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시즌 98안타로 학교 기록을 세웠다. 그는 올-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텍스 클레벤저와 지미 윌리엄스와 함께 펜들턴의 등번호가 프레즈노 주립 대학교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펜들턴은 1982년 아마추어 드래프트 7라운드 전체 179순위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지명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12일 계약했다.
1.2. 마이너 리그 경력
펜들턴의 마이너 리그 경력은 1982년 시즌 존슨 시티 카디널스와 세인트 피터스버그 카디널스에서 시작되었다. 1983년 시즌에는 AA급 아칸소 트래블러스로 승격되었고, 리그 올스타 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꾸준한 발전을 보이던 펜들턴은 1984년 AAA급 루이빌 레드버즈로 승격되었다. 2루수로 네 경기를 뛴 후, 그는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남은 선수 경력 내내 주요 포지션이 되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단은 루이빌에서의 펜들턴의 3루수로서의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당시 주전 3루수였던 켄 오버크펠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하고, 펜들턴이 경험을 더 쌓는 동안 앤디 밴 슬라이크를 임시로 3루수에 배치했다. 그러나 밴 슬라이크가 30경기에서 7개의 실책을 저지르자, 카디널스는 펜들턴을 메이저 리그로 콜업했고, 그는 카디널스의 주전 3루수로 메이저 리그 경력을 시작했다.
2. 메이저 리그 선수 경력
테리 펜들턴은 198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이후, 여러 팀을 거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84-1990)
펜들턴은 1984년 7월 18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6번 타자로 출전한 그는 5타수 3안타를 기록하며 팀의 8대4 승리에 기여하는 등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984년 시즌 67경기에서 타율 .324, 20 도루를 기록했으며,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상 투표에서 7위에 올랐다. 1985년 시즌에도 주전 3루수로 활약했으나, 타율은 .240으로 떨어졌고, 17도루를 기록했지만 12번이나 도루 실패를 기록했다. 1985년 6월 9일 셰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메츠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 5회에 대니 힙과 테리 블로커가 우중간에서 충돌하는 틈을 타 조 삼비토를 상대로 그랜드 슬램 장내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8대2 승리에 기여했다. 카디널스는 1985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펜들턴은 4차전 3대0 승리 경기에서 팀의 유일한 3루타를 기록했다.
1986년 시즌 그의 성적은 소폭 개선되었다. 타율은 .239로 여전히 낮았고, 홈런은 단 1개에 불과했지만, 24도루, 26개 2루타, 5개 3루타를 기록했다. 이 시즌 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단은 펜들턴의 성적에 실망감을 표했지만, 화이티 허조그 감독은 그의 주루와 수비 (내셔널 리그 3루수 중 풋아웃과 어시스트에서 1위를 차지)가 팀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펜들턴은 1987년 시즌 들어 구단의 비판에 답하며 가장 좋은 시즌을 보냈다. 타율을 .286로 끌어올리는 등 많은 면에서 향상된 통계를 기록했다. 그는 팀의 내셔널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는데, 팀 내 홈런 2위, 타점 3위, 도루 공동 3위에 올랐다. 펜들턴의 수비는 골드 글러브 수상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1975년 켄 라이츠 이후 카디널스 3루수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또한 MVP 투표에서 공동 17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1987년 월드 시리즈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만나면서 펜들턴은 갈비뼈 부상으로 대부분의 경기에 결장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펜들턴은 스위치 히터 능력 덕분에 카디널스가 휴버트 H. 험프리 메트로돔에서 치른 4경기 중 3경기에서 지명타자로 출전할 수 있었다. 그는 시리즈에서 3경기에 출전하여 7타수 3안타를 기록했지만, 카디널스는 7차전에서 패배하며 3년 만에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준우승을 기록했다.
1988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펜들턴은 부진에 빠졌다. 첫 4시즌 동안 80개의 도루를 기록했지만, 1988년 시즌에는 단 3개의 도루만을 기록했으며, 이후 선수 경력 내내 1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하지 못했다. 1988년에는 부상도 그를 괴롭혔는데,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으로 몇 주 결장했으며, 9월 중순에는 관절경 수술을 받아 시즌을 조기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들턴은 1989년 시즌 반등을 노렸다. 그는 실제로 반등에 성공하여 선수 경력 중 유일하게 162경기 전 경기에 출전했고, 162안타로 리그 9위에 올랐으며, .971의 인상적인 수비율을 기록하며 두 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1989년의 인상적인 시즌에도 불구하고 펜들턴은 1990년 시즌에는 고전했다. 타율 .230, 출루율 .277을 기록하며 전체적인 생산성이 감소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신인 토드 자일과 시간을 나누어 뛰었다. 시즌이 끝난 후 자일이 카디널스의 미래 3루수로 여겨졌고, 펜들턴은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펜들턴의 1985년 돈러스 야구 카드에는 이름이 '제프 펜들턴'으로 잘못 표기되는 오류가 있었다.
2.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91-1994)
펜들턴이 1990년 11월 5일 자유 계약 선수가 된 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새로운 단장 존 슈어홀츠를 영입하며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지난 시즌 최하위 팀의 지휘를 맡은 슈어홀츠 단장은 시드 브림과 계약한 데 이어, 1990년 12월 3일 펜들턴과 4년, 1020.00 만 USD 계약을 체결하며 새로운 내야진의 절반을 보강했다.
새로운 팀과 새로운 계약과 함께 펜들턴은 1991년 시즌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는 브레이브스를 전년도 6위에서 내셔널 리그 지구 우승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타율 .319와 187안타로 내셔널 리그 전체 1위를 기록하며 개인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또한 개인 최고 기록인 22홈런과 8개 3루타를 기록했다. 인상적인 통계에도 불구하고 펜들턴은 올스타전에 선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배리 본즈를 단 15점 차이로 제치고 내셔널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펜들턴은 또한 통계적 개선을 인정받아 MLB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했다.
1991년 월드 시리즈에서 다시 미네소타 트윈스와 대결한 펜들턴은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7경기 모두 3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30타수 11안타, 2홈런을 기록했다. 시리즈 7차전 8회에 펜들턴이 2루타를 쳤을 때 로니 스미스가 홈으로 진루하지 않아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더블 플레이로 이닝이 종료되며 0대0 스코어가 유지되었다. 이는 브레이브스의 7차전 패배와 펜들턴의 세 번 연속 월드 시리즈 7차전 패배로 이어졌다. 특히 1987년과 1991년에 미네소타 트윈스에게 '적지에서 연패, 홈에서 3연승, 적지에서 연패'라는 동일한 패턴으로 패배를 경험했다.
1992년 시즌에도 펜들턴은 최상의 기량을 유지했다. 160경기에서 타율 .311, 21홈런, 94득점을 기록했다. 105타점으로 내셔널 리그 2위에 올랐으며, 이는 그의 선수 경력 중 유일하게 100타점을 넘긴 기록이다. 또한 199안타를 기록하여 내셔널 리그 1위이자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또한 640타수로 내셔널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타수를 기록했으며, 그의 유일한 MLB 올스타전 출전 기회를 얻었다. 펜들턴은 또한 3루수로서 세 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이는 1969년 클레테 보이어 이후 브레이브스 3루수로는 처음이었다. 브레이브스는 2년 연속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펜들턴이 25타수 6안타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6경기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1점 차로 4번이나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로써 펜들턴은 네 번의 월드 시리즈에서 모두 패배하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1985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에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1993년 시즌에도 펜들턴은 17홈런과 33개 2루타를 기록하며 장타를 계속 생산했지만,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633타수로 타수는 리그 2위였으나, 490아웃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아웃을 기록했다. 타율 .272는 이전 두 시즌보다 현저히 낮았고, 1994년 시즌에도 그의 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목과 등 경련으로 시즌의 일부를 부상자 명단에서 보냈으며, 시즌 타율이 .252에 그치자 자유 계약 선수 신분을 선택했다.
2.3. 이후 경력 (1995-1998)
펜들턴은 1994년 10월 24일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1995년 4월 7일 플로리다 말린스와 계약했다. 펜들턴은 타율을 .290으로 끌어올렸고, 133경기에서 14홈런을 기록했다. 1996년에는 말린스에서 111경기를 뛰며 타율 .251, 7홈런을 기록했다. 1995년과 1996년 대부분을 말린스에서 보낸 후, 그는 부상에 시달리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브레이브스는 5월에 데이비드 저스티스가 어깨 분리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제프 블라우저 유격수도 왼손 뼈 골절로 결장하게 되어 전력 손실이 컸다. 펜들턴을 영입함으로써 치퍼 존스가 그의 본래 포지션인 유격수를 맡고 펜들턴이 3루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펜들턴은 1996년 8월 13일 마이너 리그 유망주 루즈벨트 브라운을 상대로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어 복귀했다. 그는 선수 경력에서 다섯 번째 월드 시리즈인 1996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뉴욕 양키스에 6경기 만에 패배하면서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했고,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를 얻을 기회에서 5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브레이브스는 1996년 시즌 후 펜들턴을 방출했고, 그는 1997년 1월 27일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 그러나 타율 .248, 1홈런, 2도루를 기록한 후 1997년 7월 24일 방출되었다. 레즈에 있는 동안 펜들턴은 세 차례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며, 방출 후 남은 시즌을 회복에 전념하며 다른 구단과 계약하지 않았다. 1998년 1월,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베테랑 리더십을 찾고 있었고, 1월 20일 펜들턴과 계약하여 베테랑 존재감을 제공하고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펜들턴은 딘 팔머의 백업으로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98년 79경기에 출전하여 지명타자와 3루수 포지션을 오갔다. 15번째 프로 시즌인 1998년 시즌이 끝난 후 펜들턴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은퇴를 선언했다.
3. 주요 기록 및 성과
테리 펜들턴는 선수 경력 동안 꾸준한 활약으로 여러 중요한 기록과 개인 수상 경력을 쌓았다.
3.1. 통산 성적
테리 펜들턴은 15시즌 동안 총 1,893경기에 출전하여 다음과 같은 통산 성적을 기록했다.
항목 | 기록 |
---|---|
타율 | .270 |
안타 | 1,897 |
타수 | 7,032 |
득점 | 851 |
2루타 | 356 |
3루타 | 39 |
홈런 | 140 |
타점 | 946 |
도루 | 127 |
볼넷 | 486 |
출루율 | .316 |
장타율 | .391 |
수비율 | .957 |
수비에서는 내셔널 리그 3루수 중 풋아웃과 어시스트에서 각각 5번씩 리그 1위를 기록했다.
5차례의 월드 시리즈를 포함하여 총 66차례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펜들턴은 타율 .252 (230타수 58안타), 26득점, 12개 2루타, 3개 3루타, 3홈런, 23타점, 2도루, 12볼넷을 기록했다.
3.2. 주요 수상 및 업적
- 내셔널 리그 수위 타자 (1991년)
-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 (1991년)
- 골드 글러브 (1987년, 1989년, 1992년)
- 올해의 재기상 (1991년)
- MLB 올스타전 선정 (1992년)
4. 코치 경력
선수 은퇴 후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2년을 보낸 펜들턴은 2001년 11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타격 코치로 첫 코치직을 맡았다. 그는 2010년 시즌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다. 2006년에는 워싱턴 내셔널스의 프랭크 로빈슨 감독을 대체할 감독 후보 명단에 올랐지만, 몇 주 후 자진 사퇴했다. 2007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토니 라 루사 감독을 대체할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라 루사가 카디널스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는 보비 콕스 감독이 201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 브레이브스 감독 후보로도 언급되었다.
2010년 시즌 후 프레디 곤살레스가 브레이브스 감독으로 발표되면서 펜들턴은 타격 코치에서 1루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글렌 허바드의 뒤를 이었다. 2016년 5월 곤살레스가 해고되고 브라이언 스닛커가 감독 대행으로 취임하자, 스닛커는 펜들턴을 벤치 코치로 선택했다. 스닛커의 정식 감독 취임 이후 펜들턴은 2017년에도 벤치 코치를 맡았지만, 정규 시즌 종료 후인 2017년 10월 20일 다음 시즌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 것임을 통보받았다.
5. 은퇴 이후 개인 생활
테리 펜들턴은 1998년 메이저 리그에서 은퇴한 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야구계에서 잠시 떨어져 있었다. 그는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있다.
6. 유산 및 평가
테리 펜들턴은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총 다섯 번의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단 한 번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그가 플로리다 말린스로 이적한 1995년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그에게는 더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러한 점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로 꼽힌다. 펜들턴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브레이브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구단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뛰어난 수비와 중요한 순간의 타격 능력으로 팀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1991년 내셔널 리그 MVP 수상은 그의 선수 경력에서 정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