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발레스카 거트(Valeska Gert발레스카 거트독일어, 1892년 1월 11일 ~ 1978년 3월 16일)는 독일의 무용가, 팬터마임 예술가, 카바레 예술가, 배우이자 선구적인 퍼포먼스 아트 예술가이다. 베를린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표현주의와 다다이즘 예술 운동의 중심에서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춤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사회적 관습에 도전했다.
거트는 1933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독일 무대에서 추방당한 후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하여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뉴욕에서 '베거스 바'와 '발레스카스'와 같은 카바레를 운영하며 줄리안 벡, 주디스 말리나, 잭슨 폴록, 테네시 윌리엄스 등 당대 유명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전후 유럽으로 돌아와 카바레 활동을 재개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페데리코 펠리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볼커 슐렌도르프 등 거장들의 영화에 출연하며 재조명받았다. 그녀의 예술은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도발적인 특징으로 당대 관객들에게 충격과 매혹을 동시에 선사했으며, 후대 퍼포먼스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발레스카 거트는 베를린에서 유대인 제조 사업가 테오도어 자모슈와 아우구스타 로젠탈의 장녀로 게르트루트 발레스카 자모슈(Gertrud Valesca Samosch게르트루트 발레스카 자모슈독일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어린 시절부터 학업이나 사무직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거트는 아홉 살 때부터 춤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화려한 패션에 대한 애정과 춤에 대한 열정은 그녀를 춤과 퍼포먼스 예술의 길로 이끌었다. 1915년에는 마리아 모이시에게 연기를, 리타 사케토에게 춤을 배웠다.
2.2. 초기 경력
제1차 세계 대전은 그녀의 아버지 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그녀는 다른 부르주아 계층의 딸들보다 훨씬 더 스스로에게 의존해야 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거트는 베를린의 한 무용단에 합류하여 혁명적인 풍자 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1916년 초, 그녀는 첫 솔로 춤인 '오렌지 속의 춤(Dance in Orange댄스 인 오렌지영어)'을 창작하여 자신의 춤 스승인 리타 사케토의 프로그램의 일부로 베를린의 블뤼트너잘에서 공연했고, 다음 주에는 베를린 놀렌도르프플라츠의 UFA 영화관에서 두 영화 사이의 휴식 시간에 공연했다.
베를린의 도이체스 극장과 트리뷘에서 공연한 후, 거트는 표현주의 연극과 다다이즘의 혼합 매체 예술의 밤에 초청받아 공연했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욥(Hiob히오프독일어)'(1918), 에른스트 톨러의 '변형(Transformation트랜스포메이션독일어)'(1919), 프랑크 베데킨트의 '프란치스카(Franziska프란치스카독일어)'에서의 공연으로 그녀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3. 주요 예술 활동
발레스카 거트는 춤과 퍼포먼스 예술, 영화, 카바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활동을 펼치며 당대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춤과 퍼포먼스 예술

1920년대에 거트는 자신의 가장 도발적인 작품 중 하나인 '카나유(Canaille카나유프랑스어)'(매춘부를 의미)를 초연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오르가슴을 표현하는 춤을 선보였는데, 1922년 베를린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경찰을 부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그녀의 다른 진보적인 퍼포먼스에는 교통사고, 권투, 죽음 등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동시에 관객들에게 충격과 매혹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트는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조롱하고, 애처롭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며 무정부주의적인 강렬함과 예술적 두려움 없는 태도로 공연하여 다다이스트들에게도 추천받았다. 그녀는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했다. 1926년부터 그녀는 '톤텐체(Tontänze톤텐체독일어, 소리 춤)'라고 불리는 새로운 솔로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는 움직임, 몸짓, 표정에 소음과 단어 등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 것이었다.
3.2. 영화 활동
1923년부터 거트는 영화 연기에 부분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여 앤드루스 엥겔만, 아르놀트 코르프 등과 함께 공연했다. 그녀는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감독의 1925년작 '기쁨 없는 거리(Joyless Street조이리스 스트리트독일어)', 1929년작 '잃어버린 소녀의 일기(Diary of a Lost Girl다이어리 오브 어 로스트 걸독일어)', 그리고 1931년작 '서푼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더 스리페니 오페라독일어)'에 출연했다. 1923년에는 아리베르트 베셔를 만나 1938년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3.2.1. 필모그래피
연도 | 제목 | 국가 | 감독 | 역할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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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영화 | |||||
1918 | 콜롬바 (Colomba) | 독일 | 아르첸 폰 체레피 | ||
1925 | 우드 러브 (Wood Love) | 독일 | 한스 노이만 | 퍽 | |
1925 | 기쁨 없는 거리 (Joyless Street) | 독일 |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 프라우 그라이퍼 | 크레딧 미표기 |
1926 | 나나 (Nana) | 독일/프랑스 | 장 르누아르 | 조이 (하녀) | |
1928 | 알라우네 (Alraune) | 독일 | 헨리크 갈레엔 | 거리의 소녀 | |
1929 | 죽음 (Der Tod) | 독일 | 카를 코흐 | 실험 영화 | |
1929 | 잃어버린 소녀의 일기 (Diary of a Lost Girl) | 독일 |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 감독의 아내 | |
1930 | 이것이 인생이다 (Such Is Life) | 독일/체코슬로바키아 | 카를 융한스 | 웨이트리스 | |
1930 | 일요일의 사람들 (People on Sunday) | 독일 | 로베르트 지오드마크, 로쿠스 글리제, 에드가 G. 울머 | 본인 | |
유성 영화 | |||||
1931 | 서푼짜리 오페라 (The Threepenny Opera) | 독일 |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 피첨 부인 | |
1934 | 펫과 폿 (Pett and Pott) | 영국 | 알베르토 카발칸티 | 하녀 | 단편 |
1939 | 리오 (Rio) | 영국 | 존 브람 | 스페셜티 | 크레딧 미표기 |
1965 | 영혼의 줄리에타 (Giulietta degli spiriti) | 이탈리아/프랑스/서독 | 페데리코 펠리니 | 피즈마 | |
1966 | 라 본 담 (La Bonne dame) | 프랑스 | 피에르 필립 | ||
1973 | 8시간은 하루가 아니다 (Eight Hours Don't Make a Day) | 서독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 다른 할머니 | TV 시리즈 에피소드 |
1975 | 푸른 선원들의 유혹 (Die Betörung der blauen Matrosen) | 서독 | 울리케 오팅거 | 늙은 새 | |
1976 | 쿠 드 그라스 (Coup de Grâce) | 서독/프랑스 | 볼커 슐렌도르프 | 프라스코비아 고모 | 마지막 영화 출연작 |
1977 | 재미로, 놀이로만 - 발레스카 거트 만화경 (Nur zum Spaß, nur zum Spiel - Kaleidoskop Valeska Gert) | 서독 | 볼커 슐렌도르프 | 본인 | 다큐멘터리 |
3.3. 카바레 활동
1920년대에 거트는 샬 운트 라우흐 카바레에서 공연했다. 또한 '오렌지 속의 춤', '권투', '서커스', '일본 그로테스크', '죽음', '카나유' 등 자신의 춤으로 투어를 시작했다. 이 외에도 '디 벨트뷔네(Die Weltbühne디 벨트뷔네독일어)'와 '베를리너 타게스차이퉁(Berliner Tageszeitung베를리너 타게스차이퉁독일어)'과 같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4. 망명 및 국제적 활동
발레스카 거트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며, 런던, 미국, 유럽 대륙을 오가며 다양한 국제적 예술 활동을 펼쳤다.
4.1. 영국 망명
1933년, 거트는 유대인 혈통 때문에 독일 무대에서 활동이 금지되었다. 독일에서의 망명은 그녀를 한동안 런던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그녀는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활동했다. 런던에서 그녀는 실험 단편 영화 '펫과 폿(Pett and Pott펫 앤 폿영어)'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 작품은 오랫동안 그녀의 마지막 영화로 남아있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영국 작가 로빈 헤이 앤더슨과 결혼했는데, 이는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
4.2. 미국 망명
1939년 초,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유대인 난민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았다. 같은 해, 그녀는 카바레 활동에 계속 집중하기 위해 17세의 게오르크 크라이슬러를 리허설 피아니스트로 고용했다. 1940년 여름, 그녀는 프로빈스타운에서 한 예술가의 누드 모델로 일자리를 구했다. 1941년 말까지 그녀는 뉴욕시에 '베거스 바(Beggar's Bar베거스 바영어)'를 열었다. 이곳은 서로 맞지 않는 가구와 램프로 채워진 카바레/레스토랑이었다. 줄리안 벡, 주디스 말리나, 잭슨 폴록 등이 그녀를 위해 일했다. 테네시 윌리엄스 또한 잠시 버스보이로 일했지만, 팁을 합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거트는 그의 일이 "너무 엉성했다"고 언급했다. 1945년 2월, 거트는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허가 부족으로 '베거스 바'를 닫아야 했다.
거트는 1946년까지 매년 여름을 프로빈스타운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새로운 카바레 '발레스카스(Valeska's발레스카스영어)'를 열었다. 프로빈스타운에서 그녀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재회했다. 그녀는 윌리엄스에게 '베거스 바'를 위해 70세의 난쟁이 마드모아젤 펌퍼니켈을 고용했는데, 그녀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질투했다고 이야기했다. 1946년 여름, '발레스카스'를 운영하던 중 그녀는 창문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춤 파트너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 프로빈스타운 법원에 소환되었다. 그녀는 윌리엄스를 인물 증인으로 불렀고, 윌리엄스는 기꺼이 증인으로 나섰다. 그를 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스는 믿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그저 "그녀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4.3. 유럽 복귀
1947년 그녀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파리와 취리히에 머물렀는데, 취리히에서는 1948년에 반년 동안 '발레스카와 그녀의 주방 직원(Valeska und ihr Küchenpersonal발레스카 운트 이어 퀴헨페르조날독일어)'이라는 카바레 카페를 운영했다. 그 후 그녀는 베를린 봉쇄 중인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서부 극장의 구 '오페른켈러(Opernkeller오페른켈러독일어, 오페라 지하 저장고)'에 '바이 발레스카(Bei Valeska바이 발레스카독일어)' 카바레를 열었고, 그 후 1950년에는 '헥센퀴헤(Hexenküche헥센퀴헤독일어, 마녀의 부엌)' 카바레를 열었다. 이 카바레는 1956년 4월까지 매 겨울 활동했다. 같은 기간인 1951년 여름에는 실트섬의 캄펜 마을에 '치겐슈탈(Ziegenstall치겐슈탈독일어, 염소 우리)'이라는 카바레를 열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매 여름 이 작지만 유명한 카바레를 운영했다.
5. 후기 경력 및 재조명
1960년대에 그녀는 영화계에 복귀했다. 1965년, 그녀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혼의 줄리에타(Giulietta degli spiriti줄리에타 델리 스피리티이탈리아어)'에 출연했으며, 이 영화의 성공으로 1970년대에는 젊은 독일 감독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TV 시리즈 '8시간은 하루가 아니다(Eight Hours Don't Make a Day아흐트 슈툰덴 진 카인 탁독일어)'와 볼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1976년 영화 '쿠 드 그라스(Coup de Grâce쿠 드 그라스프랑스어)'에 출연했다.
1978년,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은 F. W. 무르나우 감독의 고전 영화 '노스페라투'의 리메이크작에서 부동산 중개인 녹 역할을 맡아달라고 그녀에게 제안했다. 계약은 3월 1일에 체결되었지만, 촬영이 시작되기 불과 2주 전 그녀는 사망했다.
6. 개인 생활
발레스카 거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남편은 아리베르트 베셔였으며, 두 번째 남편은 영국 작가 로빈 헤이 앤더슨이었다.
7. 사망

1978년 3월 18일, 독일 캄펜의 이웃과 친구들은 그녀가 4일 동안 보이지 않았다고 신고했다. 경찰 입회하에 문을 강제로 열었을 때 그녀는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녀는 3월 16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향년 86세였다.
8. 평가 및 유산
발레스카 거트는 20세기 초중반의 격동적인 시기에 예술적 경계를 허물고 사회적 관습에 도전한 선구적인 퍼포먼스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독창적인 접근 방식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8.1. 수상 경력
- 1970년: 독일 영화 평생 공로로 독일 영화상 금상 수상
- 2004년: 마인츠의 카바레 명예의 전당에 헌액
8.2. 예술적 영향력
발레스카 거트의 대담하고 새로운 춤 스타일은 동시대인들에게 일찍이 인정받았다. 그녀는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조롱하고, 때로는 애처롭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었고, 무정부주의적인 강렬함과 예술적 두려움 없는 태도로 공연했다. 이는 다다이스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며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10년, 베를린 현대 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에서 '멈춤. 움직이는 파편들(Pause. Bewegte Fragmente파우제. 베베그테 프라그멘테독일어)'이라는 전시회에서 발레스카 거트의 예술이 소개되었다. 큐레이터인 볼프강 뮐러와 미술사학자 안 파엔호이젠은 거트가 공연하는 모습을 담은 '아기(Baby베이비영어)'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포함시켰는데, 이 영상은 1969년 에른스트 미츠카가 촬영한 것이다. 미츠카의 거트 공연 영상인 '아기'와 '죽음'은 비디오 아트 컬렉션 '다시 기록! 40년 비디오 아트.de 파트 2(Record Again! 40 Jahre Videokunst.de part 2레코드 어게인! 피어치히 야레 비디오쿤스트.데 파트 츠바이영어)'에도 포함되어 있다.
8.3. 학술적 조명
발레스카 거트의 삶과 작품은 수많은 학술 연구와 문헌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녀의 독특한 예술 세계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역할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었으며,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춤과 연극, 그리고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그녀의 자서전과 다양한 2차 문헌들이 그녀의 예술적 유산과 영향력을 조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9. 외부 링크
- [https://www.imdb.com/name/0314960/ 발레스카 거트 IMDb]
- [http://film.virtual-history.com/person.php?personid=4991 발레스카 거트 사진]
- [https://portal.dnb.de/opac.htm?method=showSearch2&id=118538888&query=Valeska+Gert&cqlMode=true&reset=true 독일 국립도서관 발레스카 거트 검색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