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잭슨 폴록의 초기 생애는 미국 서부에서의 성장과 뉴욕으로의 이주 과정에서 형성된 다양한 경험과 예술적 영향을 통해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의 기반을 다졌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폴 잭슨 폴록은 1912년 1월 28일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스텔라 메이(결혼 전 성은 매클루어)와 리로이 폴록은 아이오와주 팅글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팅글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폴록의 어머니는 아이오와주 링골드 카운티 팅글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리로이 폴록은 원래 성이 매코이였으나, 양부모의 성을 따랐다. 스텔라와 리로이 폴록은 장로교 신자였으며, 각각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혈통이었다.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정부의 토지 측량사로 일하며 여러 직업을 위해 이사했다. 직물공 가문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했던 어머니 스텔라는 십대 시절 드레스를 만들어 팔았다. 1912년 11월, 폴록이 생후 10개월이었을 때 스텔라는 아들들을 샌디에이고로 데려갔고, 폴록은 다시는 코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이후 애리조나주와 캘리포니아주 치코에서 성장했다.

1.2. 교육
로스앤젤레스의 버몬트 스퀘어 인근에 살면서 매뉴얼 아츠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퇴학당했다. 그는 이미 1928년에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퇴학당한 경험이 있었다. 1930년, 그는 형 찰스 폴록을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여 두 형제 모두 아트 스튜던츠 리그 오브 뉴욕에서 토머스 하트 벤턴 밑에서 공부했다. 벤턴의 시골 미국 주제는 폴록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의 리드미컬한 물감 사용 방식과 강렬한 독립성은 폴록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 초, 폴록은 동료 미술 학생인 글렌 라운즈, 그리고 스승인 벤턴과 함께 여름 동안 미국 서부를 여행했다.
1.3. 초기 영향과 뉴욕으로의 이주
어린 시절 폴록은 아버지와 함께 측량 여행을 하면서 미국 원주민 문화를 탐구했다. 그는 또한 멕시코 벽화 운동의 화가들, 특히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오로스코의 프레스코화 프로메테우스를 폴록은 나중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불렀다. 1930년 미술 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 후, 1936년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뉴욕에서 운영하는 실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액체 물감 사용법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에는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의 297 m2 (3200 ft2) 규모의 벽화 "미국 문명의 서사시"를 연구했다.
2. 예술적 발전과 경력
폴록의 예술적 경력은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기법을 발전시키고, 전성기를 거쳐 후기 스타일 변화를 겪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2.1. 초기 경력과 WPA 참여
폴록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공공사업진흥국(WPA)의 연방 미술 프로젝트에서 일했다. 이 시기 동안 폴록은 만성적인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융 학파의 정신과 의사인 조지프 L. 헨더슨 박사에게, 그리고 1941년부터 1942년까지는 바이올렛 스토브 드 라즐로 박사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다. 헨더슨 박사는 폴록이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하며 그의 예술을 통해 치료에 접근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에는 융 학파의 개념과 원형이 표현되었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폴록이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1943년 7월, 폴록은 페기 구겐하임과 갤러리 계약을 맺었다. 그는 구겐하임의 새 타운하우스 입구를 위한 2.4 m (8 ft) 크기의 벽화(1943)를 제작하는 의뢰를 받았다. 구겐하임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마르셀 뒤샹의 제안에 따라, 폴록은 이 작품을 벽이 아닌 캔버스에 그려 이동성을 확보했다. 이 대형 벽화를 본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나는 그것을 한 번 보고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예술이다'라고 생각했으며, 잭슨이 이 나라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화가임을 알았다"고 극찬했다. 그의 첫 전시회 카탈로그는 폴록의 재능을 "화산 같고, 불꽃 같으며, 예측 불가능하고, 규율이 없으며, 아직 결정화되지 않은 광물적 풍요로움 속에서 스스로 쏟아져 나온다"고 묘사했다.
2.2. 독자적 기법의 발전
폴록은 1936년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뉴욕에서 운영하는 실험 워크숍에서 액체 물감 사용법을 처음 접했다. 그는 1940년대 초반의 남성과 여성, 붓기 I이 있는 구성과 같은 캔버스 작품에서 물감 붓기를 여러 기법 중 하나로 사용했다. 뉴욕주 스프링스로 이주한 후, 그는 캔버스를 스튜디오 바닥에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드리핑' 기법으로 불리게 될 자신만의 독자적인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 기법을 통해 폴록은 '액션 페인팅'과 '올오버 페인팅'이라는 자신만의 서명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는 캔버스를 수직으로 세워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함으로써, 모든 방향에서 캔버스를 보고 물감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2.3. 드리핑 시기 (1947-1950)
폴록의 가장 유명한 그림들은 1947년에서 1950년 사이의 '드리핑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다른 예술가들이 폴록과 그의 '드리핑 페인팅'에 미친 영향을 조사할 때, 폴록이 1936년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실험 워크숍에서 일하고 공부했던 시간은 거의 조사되거나 인정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로버트 스토어에 따르면, "그의 직업 생활에서 현대 멕시코 벽화가들로부터 배우고 관찰하는 데 보낸 10년과 동등한 경험은 없다"고 한다. 특히 토머스 하트 벤턴과의 정규 교육 기간이 짧았음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또한 '드리핑' 기법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폴록은 여러 차례 시케이로스와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모순된 진술을 했다. 예를 들어, 1947년 폴록은 1941년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나바호족 모래 예술가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작업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그렸다고 말했고(1936년 시케이로스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지 5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양인들이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폴록은 '드리핑'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고, 1949년 8월 8일자 라이프 잡지에 4페이지에 걸쳐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현존 화가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소개되었다. 폴록의 절친한 친구인 알폰소 오소리오와 미술사학자 미셸 타피에의 중재 덕분에, 젊은 갤러리스트 폴 파케티는 1952년 3월 7일부터 파리의 스튜디오 폴 파케티에서 폴록의 1948년부터 1951년 작품들을 유럽 최초로 전시할 수 있었다. 명성의 정점에 있을 때 폴록은 갑자기 드리핑 스타일을 포기했다. 폴록의 드리핑 그림은 예술가 재닛 소벨의 영향을 받았는데,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나중에 폴록이 소벨의 작품이 "자신에게 인상을 주었다"고 "인정했다"고 언급했다.
2.4. 후기 경력과 스타일 변화
1951년 이후 폴록의 작품은 색상이 더 어두워졌으며, 프라이머를 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검은색으로만 그린 작품들도 포함되었다. 이 그림들은 그의 '블랙 푸어링(Black pourings)'이라고 불렸는데, 뉴욕의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전시되었을 때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파슨스는 나중에 이 중 하나를 친구에게 절반 가격에 팔았다. 이 작품들은 폴록이 추상과 구상화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는 나중에 다시 색을 사용하고 구상적인 요소를 계속 사용했다. 이 시기에 폴록은 더 상업적인 갤러리인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로 옮겼고, 수집가들의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는 매우 컸다. 이러한 압박과 개인적인 좌절감으로 인해 그의 알코올 의존증은 더욱 심해졌다.
3. 예술성 및 기법
잭슨 폴록의 예술성은 다양한 선배 예술가들의 영향과 자신만의 혁신적인 기법, 그리고 작품에 대한 독자적인 철학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3.1. 영향과 예술 철학
토머스 하트 벤턴,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의 작품은 폴록에게 영향을 미쳤다. 폴록은 1940년대에 미국 원주민의 모래 그림 시연을 관찰했다.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폴록은 "나는 그림에 더 가까이, 더 일부가 된 기분이다. 이렇게 하면 그림 주위를 걸어 다니며 네 방향에서 작업할 수 있고 말 그대로 그림 안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부 인디언 모래 화가들의 방법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나는 자연이다"라고 자신의 예술 철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드리핑 기법에 영향을 미친 다른 요소로는 멕시코 벽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자동 기술법이 있다. 폴록은 "우연"에 의존하는 것을 부인했으며, 보통 특정 작품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법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몸의 움직임, 물감의 점성 있는 흐름, 중력의 힘, 그리고 캔버스에 물감이 흡수되는 정도를 결합한 것이었다. 이는 통제 가능한 요소와 통제 불가능한 요소의 혼합이었다.
오스트리아 예술가 볼프강 파알렌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원주민 토템 예술에 대한 기사도 폴록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 기사에서는 토템 예술의 공간 개념이 예술가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다. 폴록은 파알렌의 잡지 DYN 4-5(1943)의 아메리칸 인디언 호에 서명과 헌사가 있는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1940년 전시회에서 파알렌의 초현실주의 그림들을 보기도 했다. 또 다른 강력한 영향은 파알렌의 초현실주의적 푸마주 기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것" 또는 "가능한 것"을 묘사할 새로운 방법을 찾던 화가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이 기법은 로베르토 마타의 워크숍에서 시연된 적이 있으며, 스티븐 나이페는 "한번은 마타가 초현실주의 기법인 푸마주를 시연할 때, 잭슨(폴록)은 (피터) 부사에게 무대 속삭임으로 '나는 연기 없이도 저걸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폴록의 화가 친구 프리츠 불트만은 심지어 "모든 것을 시작한 것은 볼프강 파알렌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3.2. 기법: 붓기, 떨어뜨리기, 액션 페인팅
폴록은 당시에는 새로운 매체였던 알키드 에나멜과 같은 합성 수지 기반 페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가용 물감 대신 가정용 페인트를 사용한 것에 대해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굳은 붓, 막대기, 심지어 바스팅 주사기까지 물감 도포기로 사용했다. 폴록의 물감을 붓고 떨어뜨리는 기법은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의 기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기법을 통해 폴록은 자신이 선택한 도구에서 캔버스로 물감이 흘러내리는 자신만의 특징적인 팔림프세스트 그림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는 수직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모든 방향에서 캔버스를 보고 물감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폴록은 구상적 표현에서 벗어나, 서양 전통의 이젤과 붓 사용에 도전했다. 그는 전신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대형 캔버스에 표현되었다. 1956년 타임지는 그의 그림 스타일 때문에 폴록에게 "잭 더 드리퍼(Jack the Dripper)"라는 별명을 붙였다.
1950년, 젊은 사진작가 한스 나무스는 작업 중인 폴록의 사진(정지 사진과 동영상 모두)을 찍고 싶어 했다. 폴록은 사진 촬영을 위해 특별히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나무스가 도착했을 때 폴록은 그림이 이미 완성되었다며 사과했다. 나무스는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캔버스가 바닥 전체를 덮고 있었다...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폴록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그는 물감 통과 붓을 집어 들고 캔버스 주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느렸던 그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지고 춤을 추는 듯이 변하며 검은색, 흰색, 녹슨 색 물감을 캔버스에 던졌다. 그는 리와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의 사진 촬영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계속되었는데, 아마도 30분 정도였을 것이다. 그 시간 내내 폴록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이 정도의 활동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마침내 그는 '이것으로 됐다'고 말했다."
폴록의 최고의 그림들은 그의 올오버(all-over) 선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역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캔버스의 한 부분이 추상적이든 구상적이든 상관없이 형상으로 읽혀야 하고, 다른 부분이 배경으로 읽혀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폴록의 선이나 그것이 움직이는 공간에는 안과 밖이 없다. 폴록은 선을 세상의 사물을 표현하는 기능에서뿐만 아니라, 캔버스 표면에서 추상적이든 구상적이든 형태나 형상을 묘사하거나 경계를 짓는 역할에서도 해방시켰다.
3.3. 명명법: 제목에서 번호로
그림 속에서 구상적인 요소를 찾으려는 관람객의 시도를 계속해서 피하기 위해, 폴록은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는 이에 대해 "수동적으로 바라보며 그림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무엇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주제나 선입견을 가져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그는 예전에는 그림에 관습적인 제목을 붙였지만, 이제는 단순히 번호를 매긴다. 숫자는 중립적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즉 순수한 그림으로 보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4. 개인적인 삶과 고군분투
잭슨 폴록의 삶은 그의 예술만큼이나 격렬하고 복잡했으며, 특히 알코올 의존증과의 싸움과 아내 리 크래스너와의 관계가 그의 개인적인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4.1. 알코올 의존증과 정신 건강
폴록은 평생 동안 알코올 의존증과의 힘든 싸움을 벌였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융 학파의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폴록이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한다. 그의 경력이 절정에 달하고 수집가들의 작품 수요가 커지면서 받은 압박감과 개인적인 좌절감은 그의 알코올 의존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4.2. 리 크래스너와의 관계
폴록과 리 크래스너는 1942년 맥밀런 갤러리에서 함께 전시하면서 만났다. 크래스너는 폴록의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흥미를 느꼈고, 전시회 후 예고 없이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 만났다. 1945년 10월, 폴록과 크래스너는 두 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에서 결혼했다. 11월에는 뉴욕시를 떠나 롱아일랜드 남쪽 해안의 이스트햄프턴에 있는 스프링스 지역으로 이사했다. 페기 구겐하임으로부터 받은 선수금 대출의 도움으로 그들은 스프링스 파이어플레이스 로드 830번지에 목조 주택과 헛간을 구입했다. 폴록은 헛간을 스튜디오로 개조했다. 그 공간에서 그는 자신이 영원히 동일시될 물감 작업의 '드리핑' 기법을 완성했다. 부부는 일이 없을 때 함께 요리하고 베이킹하며, 집과 정원을 가꾸고, 친구들을 초대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크래스너가 남편의 예술에 미친 영향은 1960년대 후반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인해 비평가들이 재평가하기 시작한 부분이다. 크래스너의 현대 미술과 기법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훈련은 그녀가 폴록을 현대 미술의 최신 흐름에 맞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크래스너는 종종 남편에게 모더니즘 회화의 원칙을 가르친 것으로 여겨진다. 폴록은 이후 자신의 스타일을 더 조직적이고 국제적인 현대 미술 장르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었고, 크래스너는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판단자가 되었다. 두 예술가의 결혼 초기에 폴록은 자신의 작품에서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동료들의 의견을 신뢰했다. 크래스너는 또한 그를 많은 수집가, 비평가, 예술가들, 예를 들어 신진 예술가로서 그의 경력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줄 허버트 매터와 같은 인물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미술상 존 버나드 마이어스는 "리 폴록이 없었다면 잭슨 폴록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동료 화가 프리츠 불트만은 폴록을 크래스너의 "창조물,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언급하며, 두 사람 모두 크래스너가 폴록의 경력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했다.
잭슨 폴록이 아내의 작품에 미친 영향은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논의된다. 많은 사람들은 크래스너가 남편의 혼란스러운 물감 튀김을 자신의 작품에서 재현하고 재해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크래스너가 자신의 직관을 사용하여 폴록의 "나는 자연이다" 기법으로 자연을 예술에 재현하려 했다는 여러 설명이 있다.
4.3. 기타 관계 및 개인적 갈등
1956년, 폴록의 계속되는 알코올 의존증과 다른 예술가 루스 클리그먼과의 불륜으로 인해 폴록과 크래스너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그는 리 크래스너와 자녀를 가질 수 없었던 슬픔 속에서 그녀를 떠나 젊은 여인 루스를 취했지만, 그의 잠재의식 속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5. 죽음
1955년, 폴록은 그의 마지막 두 작품인 향기와 탐색을 그렸다. 그는 1956년에는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토니 스미스의 집에서 철사, 거즈, 석고로 만든 조각 작품들을 만들었다. 모래 주조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폴록이 자신의 그림에서 자주 만들어내던 것과 유사하게 질감이 풍부한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폴록과 크래스너의 관계는 폴록의 계속되는 알코올 의존증과 다른 예술가 루스 클리그먼과의 불륜으로 인해 1956년 무너지기 시작했다. 1956년 8월 11일 오후 10시 15분, 폴록은 음주 상태로 자신의 올즈모빌 컨버터블을 운전하다 단독 차량 충돌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크래스너는 유럽에서 친구들을 방문 중이었고, 친구로부터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 사고는 폴록의 집에서 1609 m (1 mile)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발생했으며, 동승자 중 한 명인 에디스 메츠거도 사망했다. 다른 동승자인 루스 클리그먼은 생존했다.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폴록은 술에 취해 히스테리컬하게 웃으며 맹스피드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44세에 사망한 폴록을 위해 1956년 12월, 그의 사망 4개월 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추모 회고전이 열렸다. 1967년에는 그의 작품에 대한 더 크고 포괄적인 전시회가 그곳에서 개최되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그의 작품이 MoMA와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대규모 회고전으로 기려졌다.

남은 생애 동안 그의 미망인 리 크래스너는 그의 유산을 관리하며 변화하는 미술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폴록의 명성이 확고하게 유지되도록 했다. 부부는 스프링스의 그린 리버 공동묘지에 묻혀 있으며, 큰 바위가 그의 무덤을, 작은 바위가 그녀의 무덤을 표시하고 있다.
6. 비평적 수용과 논쟁
잭슨 폴록의 작품은 당대부터 사후까지 중요한 비평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예술은 다양한 이론적 해석과 정치적 맥락 속에서 논의되었다.
6.1. 당대의 비평적 반응
폴록의 작품은 중요한 비평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비평가 로버트 코츠는 한때 폴록의 여러 작품들을 "무의미한, 단지 무질서한 무작위적 에너지의 폭발"이라고 비난했다. 1959년 레이놀즈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악취미한 농담이다"라고 보도했다. 반면 프랑스 추상 화가 장 엘리옹은 폴록의 작품을 처음 보고 "시작도 끝도 없었기 때문에 공간을 계속해서 채워나갔다"고 말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폴록의 작품을 지지했다. 이는 예술사를 형식의 점진적인 순수화와 역사적 내용의 제거로 보는 그린버그의 관점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폴록의 작품을 당대 최고의 회화이자 입체주의와 세잔을 거쳐 마네에 이르는 서양 전통의 정점이라고 여겼다.
6.2. 이론과 해석
1952년 아트뉴스에 실린 기사에서 해럴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만들며 "캔버스에 그려질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그냥 그리기'로 결정되었을 때였다. 캔버스 위의 제스처는 정치적, 미학적, 도덕적 가치로부터의 해방의 제스처였다"고 썼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액션 페인터' 패러다임을 폴록을 모델로 삼았다고 추정했다.
폴록은 자신의 예술을 "공간에 정지된, 움직임으로 가시화된 기억"이라고 묘사했다.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미국 문화와 가치를 홍보하는 조직인 문화자유회의는 폴록의 작품 전시회를 후원했다. 에바 콕크로프트를 포함한 일부 좌파 학자들은 미국 정부와 부유한 엘리트들이 폴록과 추상표현주의를 수용하여 미국을 세계 미술의 선두에 내세우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평가절하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콕크로프트는 폴록이 "냉전의 무기"가 되었다고 썼다.
7. 유산과 영향
잭슨 폴록의 예술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와 미술 시장에서도 그의 존재감을 확고히 하며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7.1. 후대 예술가 및 사조에 미친 영향
폴록이 생 캔버스에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기법은 색면 추상 화가인 헬렌 프랑켄탈러와 모리스 루이스에게 채택되었다. 프랭크 스텔라는 1960년대 자신의 작품에서 '올오버(all-over) 구성'을 특징으로 삼았다. 조지프 글래스코는 1949년 알폰소 오소리오에 의해 폴록에게 소개되었다. 글래스코는 평생 동안 폴록의 예술적 영향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했으며, 특히 1970년대 초중반에 그의 스타일이 리듬과 과정에 중점을 둔 올오버 콜라주 회화로 변화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 해프닝 예술가 앨런 캐프로, 조각가 리처드 세라와 에바 헤세, 그리고 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폴록이 창작 과정에 중점을 둔 방식을 유지했으며, 그들은 그의 작품의 외형보다는 과정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2004년, 하나: 넘버 31, 1950은 500명의 예술가, 큐레이터, 비평가, 딜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 작품 중 8위에 올랐다.
7.2. 문화적 영향과 대중 매체
1990년대 초반, 세 그룹의 영화 제작자들이 폴록의 전기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각각 다른 원작을 기반으로 했다. 가장 진전된 것으로 보였던 프로젝트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바우드 필름과 로버트 드 니로의 트라이베카 프로덕션의 합작이었다(드 니로의 부모는 크래스너와 폴록의 친구였다). 크리스토퍼 클리블랜드가 쓴 각본은 폴록의 친구들의 회고록 모음집인 제프리 포터의 1985년 구술 전기 폭력적인 무덤으로를 기반으로 할 예정이었다. 스트라이샌드는 리 크래스너 역을, 드 니로는 폴록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 두 번째는 폴록 사망 전 6개월 동안 그의 연인이었던 루스 클리그먼의 1974년 회고록 사랑 이야기를 기반으로 할 예정이었다. 이 영화는 해럴드 베커가 감독하고 알 파치노가 폴록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
2000년, 퓰리처상 수상 전기 잭슨 폴록: 아메리칸 사가를 기반으로 에드 해리스가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전기 영화 폴록이 개봉했다. 마샤 게이 하든은 리 크래스너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해리스의 프로젝트였다. 해리스 자신이 영화에 나오는 작품들을 직접 그렸다. 폴록-크래스너 재단은 어떤 제작도 승인하거나 협력하지 않았다.
2009년 9월, 미술사학자 헨리 애덤스는 스미스소니언 잡지에서 폴록이 자신의 유명한 그림 벽화(1943)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고 주장했다. 이 그림은 현재 1.40 억 USD의 보험 가치를 가지고 있다. 2011년, 공화당 아이오와주 하원의원 스콧 래커는 아이오와 대학교가 소유한 이 작품을 팔아 장학금을 마련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그의 법안은 큰 논란을 일으켜 빠르게 철회되었다. 잭슨 폴록의 작품 중 하나는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영화의 중요한 장면에서 악당 케일럽 베이츠는 인공지능의 핵심 과제를 "고의적이지도, 무작위적이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인 인지 상태를 설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를 폴록이 그림을 그릴 때 달성하는 인지 상태에 비유한다. 2009년 1월 28일 구글은 폴록의 기일에 맞춰 로고를 그의 작품과 비슷한 그림으로 바꾼 적이 있다.
7.3. 미술 시장과 사후 인정
1973년, 넘버 11, 1952 (일명 블루 폴스)는 호주 고프 휘틀럼 정부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을 위해 200.00 만 USD에 구입되었다. 이는 당시 현대 회화에 지불된 최고가였으며, 이 그림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전시품 중 하나이다. 블루 폴스는 1998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회고전의 중심 작품이었으며, 이 그림이 구매된 이후 미국에서 전시된 것은 처음이었다.

2006년 11월, 폴록의 넘버 5, 1948은 익명의 구매자에게 1.40 억 USD에 비공개로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또 다른 예술가 기록은 2004년에 세워졌는데, 195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미국관에 전시되었던 중간 크기의 드리핑 그림인 넘버 12(1949)가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1170.00 만 USD에 팔렸다. 2012년에는 은회색 바탕에 빨강, 노랑, 파랑, 흰색이 섞인 드리핑과 붓질의 조합을 보여주는 폴록의 넘버 28, 1951이 뉴욕 크리스티스에서 2050.00 만 USD에 팔렸는데, 이는 예상 범위인 2000.00 만 USD에서 3000.00 만 USD 이내였다.
2013년, 폴록의 넘버 19(1948)는 크리스티스에서 5836.38 만 USD에 팔렸으며, 이 경매는 하룻밤에 총 4.95 억 USD의 판매액을 기록하여 크리스티스 역사상 가장 비싼 현대 미술 경매로 기록되었다. 2016년 2월, 블룸버그 뉴스는 케네스 그리핀이 잭슨 폴록의 1948년 그림 넘버 17A를 데이비드 게펜으로부터 2.00 억 USD에 구입했다고 보도했다. 2023년에는 국제 경찰 기관들이 국제 미술 밀수 조직을 추적하여 불가리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폴록의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 그림은 최대 5000.00 만 EUR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카스민 갤러리는 잭슨 폴록의 독점적인 글로벌 대리권을 발표했으며, 카스민은 2016년부터 리 크래스너를 대리하고 있다.
8. 진위 여부 및 분석
잭슨 폴록의 작품은 그의 독특한 기법만큼이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과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왔다.
8.1. 진위 논쟁
폴록-크래스너 재단은 1990년 폴록-크래스너 감정 위원회를 설립하여 1978년 카탈로그의 보충판에 포함될 새로 발견된 작품들을 평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폴록-크래스너 재단이 감정 사건에 관여하기를 거부했다. 2006년에는 테리 호튼이라는 트럭 운전수가 1992년 캘리포니아주의 한 중고품 가게에서 5달러에 추상화를 구입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누가 잭슨 폴록이야?가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폴록의 그림일 수 있지만, 그 진위는 논란이 되고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토머스 호빙은 이 그림이 프라이머가 칠해진 캔버스에 그려졌다고 언급했는데, 폴록은 그러한 캔버스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뉴욕에 본사를 둔 크놀러 갤러리가 2007년 런던의 헤지펀드 백만장자 피에르 라그랑주에게 1700.00 만 USD에 판매했던 무제 1950은 뉴욕 남부 지방법원에서 진위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화가의 고전적인 드리핑 및 스플래시 스타일로 제작되었고 "J. Pollock"이라고 서명된 이 작은 그림(0.4 m (15 in) by 0.7 m (28.5 in))에는 1970년경까지 상업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노란색 물감 안료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소송은 2012년 비공개 합의로 해결되었다.
8.2. 프랙탈 분석
1999년, 물리학자이자 예술가인 리처드 테일러는 컴퓨터 분석을 사용하여 폴록의 그림 패턴과 자연 경관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여러 크기 스케일에서 반복되는 패턴)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폴록 자신의 말인 "나는 자연이다"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의 연구팀은 폴록의 스타일을 '프랙탈 표현주의'라고 명명했다.
2003년, 뉴욕주 웨인스콧의 한 보관함에서 폴록 스타일의 그림과 드로잉 24점이 발견되었다. 2005년, 폴록-크래스너 재단은 진위 논쟁에서 처음으로 프랙탈 분석을 사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리건 대학교의 연구원들은 이 기법을 사용하여 분석된 6점의 논란이 되는 그림과 14점의 확립된 폴록 작품 간의 패턴 차이를 식별했다. 하버드 대학교 연구원들의 그림 안료 분석 결과, 한 그림에서는 1980년대에야 특허를 받은 합성 안료가, 다른 두 그림에서는 폴록 생전에는 구할 수 없었던 재료가 발견되었다.
이후 10개 이상의 과학 그룹이 50점 이상의 폴록 작품에 대해 프랙탈 분석을 수행했다. 2015년 프랙탈 분석을 포함한 기법을 사용한 연구에서는 실제 폴록 작품과 위조 작품을 구별하는 데 93%의 성공률을 달성했다. 프랙탈 표현주의에 대한 현재 연구는 프랙탈을 볼 때 인간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지 신경과학자들은 폴록의 프랙탈이 컴퓨터 생성 프랙탈 및 자연 발생 프랙탈과 동일한 스트레스 감소 효과를 관찰자에게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9. 기록 보관소 및 재단
잭슨 폴록의 유산은 그의 작품과 개인 문서를 보존하고, 그의 예술적 정신을 기리며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다양한 기관과 재단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
9.1. 폴록-크래스너 재단 및 주택/스튜디오
리 크래스너는 1983년 폴록의 서류들을 미국 미술 기록 보관소에 기증했다. 이 서류들은 나중에 그녀 자신의 서류들과 함께 보관되었다. 별도의 조직인 폴록-크래스너 재단은 1985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폴록과 그의 미망인 모두의 공식적인 유산 관리 기관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크래스너의 유언에 따라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재능 있는 개별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폴록-크래스너 재단의 미국 저작권 대표는 아티스트 라이츠 소사이어티이다.

폴록-크래스너 하우스 및 스튜디오는 스토니브룩 대학교의 비영리 계열사인 스토니브룩 재단이 소유하고 관리한다.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 집과 스튜디오에 대한 정기 투어가 진행된다.
9.2. 문서 및 소장품
미국 미술 기록 보관소는 또한 그의 형 잭슨과 관련된 서신, 사진 및 기타 파일들을 포함하는 찰스 폴록의 서류들을 소장하고 있다.
10. 주요 작품
- (1942) Male and Female 필라델피아 미술관
- (1942) Stenographic Figure 뉴욕 현대미술관
- (1942) The Moon Woman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 (1943) 벽화 아이오와 대학교 미술관
- (1943) The She-Wolf 뉴욕 현대미술관
- (1943) Blue (Moby Dick) 오하라 미술관
- (1945) Night Mist 노턴 미술관
- (1945) Troubled Queen 보스턴 미술관
- (1946) Eyes in the Heat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베네치아
- (1946) The Key 시카고 미술관
- (1946) The Tea Cup 프리더 부르다 컬렉션
- (1946) Shimmering Substance, from The Sounds In The Grass 뉴욕 현대미술관
- (1946) Free Form, 뉴욕 현대미술관
- (1947) Portrait of H.M. 아이오와 대학교 미술관
- (1947) Full Fathom Five 뉴욕 현대미술관
- (1947) Cathedral 댈러스 미술관
- (1947) Enchanted Forest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 (1947) Lucifer 스탠퍼드 대학교 앤더슨 컬렉션
- (1947) Sea Change 시애틀 미술관
- (1948) Painting
- (1948) 넘버 5 개인 소장
- (1948) Number 8 뉴버거 미술관 (뉴욕 주립 대학교 퍼처스 캠퍼스)
- (1948) Number 13A: Arabesque 예일 대학교 미술관, 코네티컷 뉴헤이븐
- (1948) Composition (White, Black, Blue and Red on White) 뉴올리언스 미술관
- (1948) Summertime: Number 9A 테이트 모던
- (1948) Number 19
- (1949) Number 1 글렌스톤 미술관
- (1949) Number 3 허시혼 박물관 및 조각 공원, 워싱턴 D.C.
- (1949) Number 10 보스턴 미술관
- (1949) Number 11 인디애나 대학교 미술관, 인디애나 블루밍턴
- (1950) Number 1, 1950 (Lavender Mist) 국립 미술관
- (1950) 인디언 레드 바탕의 벽화, 1950 테헤란 현대미술관
- (1950) 가을의 리듬 (넘버 30), 19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1950) Number 29, 1950 캐나다 국립 미술관
- (1950) Number 32,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품 컬렉션, 뒤셀도르프
- (1950) 하나: 넘버 31, 1950 뉴욕 현대미술관
- (1951) Number 7 국립 미술관
- (1951) Black and White (Number 6)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 (1952) 컨버전스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 (1952) 블루 폴스: No. 11, 1952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
- (1952) Number 12, 1952 넬슨 A. 록펠러 주지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플라자 미술 컬렉션
- (1953) Portrait and a Dream 댈러스 미술관
- (1953) Easter and the Totem 뉴욕 현대미술관
- (1953) Ocean Greyness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 (1953) 더 딥 퐁피두 센터
11. 관련 항목
- 추상표현주의
- 액션 페인팅
- 드리핑 페인팅
- 리 크래스너
- 클레멘트 그린버그
- 페기 구겐하임
- 토머스 하트 벤턴 (화가)
-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 칼 구스타프 융
- 프랙탈
- 미국 미술 기록 보관소
- 폴록-크래스너 재단
- 폴록-크래스너 하우스 및 스튜디오
- 넘버 5 (그림)
- 블루 폴스
- 하나: 넘버 31, 1950
- 가을의 리듬 (넘버 30)
- 인디언 레드 바탕의 벽화
- 벽화 (1943년 그림)
- 폴록 (영화)
- 엑스 마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