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ccession to the throne
발데마르 4세는 유년기와 청년기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보냈으며,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 속에서 국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초부터 덴마크의 재건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1.1. Childhood and exile
발데마르 4세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토페르 2세와 포메라니아의 에우페미아 왕비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페르 2세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두 형인 에리크와 오토가 각각 홀슈타인인들의 손에 사망하거나 투옥되면서, 발데마르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 대부분을 망명 생활로 보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4세 황제의 바이에른 궁정에서 망명자로 지내며 왕위 복귀를 기다렸다.
1.2. Accession to the throne
1340년 6월 24일 성 요한의 날, 홀슈타인의 렌츠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가 닐스 에베센과 그의 병사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에베센의 주도로 비보르에서 열린 의회(Landsting)에서 발데마르는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 초, 그는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 2세와 홀슈타인-렌츠부르크의 아델레이드 사이의 딸인 헬비그와 결혼했다. 결혼은 쇤데르보르 성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부부는 비보르에서 덴마크 국왕과 왕비로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헬비그는 지참금으로 윌란반도 북부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저당 잡힌 영토인 노르윌란트를 가져왔고, 이를 통해 발데마르는 콘게오강 북쪽 윌란반도 영토의 약 4분의 1을 통제하게 되었다.
덴마크는 수년 동안 국왕이 부재했던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20세의 젊은 발데마르가 아버지처럼 대귀족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왕실 헌장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그러나 발데마르는 영리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덴마크를 통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국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한편, 닐스 에베센은 1340년 11월 2일 쇤데르보르 성 포위전에서 홀슈타인인들로부터 윌란반도 중부를 해방하려 시도했으나, 그와 그의 부하들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전사했다.
2. Reign and reunification of Denmark
발데마르 4세는 덴마크의 영토와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주요한 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2.1. Efforts to reclaim and unite territories
아버지 크리스토페르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덴마크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국토는 여러 조각으로 저당 잡혔다. 발데마르 4세는 이러한 국가 부채를 상환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첫 기회는 왕비 헬비그의 지참금에서 왔다. 그는 콘게오강 이북의 농민들로부터 걷은 세금으로 윌란반도 북부의 나머지 저당을 갚았다. 1344년에는 북프리슬란트를 회복했고, 즉시 이 지역에 세금을 부과하여 남부 윌란반도에 대한 부채 7,000 마르크 은화를 상환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재정 요구로 인해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받은 농민들은 점차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발데마르는 다음 목표로 셸란섬을 삼았다. 코펜하겐 성과 도시를 소유하고 있던 로스킬레 주교는 이 둘을 발데마르에게 양도했는데, 이는 외레순 해협을 통한 무역에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안전한 거점을 제공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통치한 최초의 덴마크 국왕이었다. 발데마르는 다른 성과 요새를 점령하거나 매입하여 홀슈타인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자금이 부족해지자 그는 칼룬보르와 쇠보르 성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군사 작전 도중, 그는 에스토니아를 통제하고 있던 튜턴 기사단과의 협상을 위해 에스토니아로 향했다. 덴마크인들은 에스토니아로 거의 이주하지 않았으므로, 발데마르는 멀리 떨어진 동부 지방이었던 덴마크령 에스토니아를 19,000 마르크에 양도하여, 그에게 더 중요한 덴마크 본토의 저당을 갚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1346년경 발데마르 4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다. 프란치스코회 연대기 작가 데트마르 폰 뤼베크는 발데마르 4세가 1346년 뤼베크로 이동한 후,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에리크 2세와 함께 프로이센으로 가서 리투아니아인들과 싸웠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은 무산되었고, 대신 발데마르는 교황의 허가 없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그는 성공적으로 순례를 마치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성묘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사전 승인 없이 이러한 여정을 떠난 것에 대해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발데마르는 군대를 소집했다. 1346년, 그는 홀슈타인인들의 주요 본부였던 보르딩보르 성을 되찾았다. 그해 말까지 발데마르는 셸란섬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보르딩보르를 자신의 개인 거주지로 삼고, 성을 확장했으며, 현재 도시의 상징이 된 거위 탑을 건설했다.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발데마르의 무자비함은 많은 이들이 태도를 바꾸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가혹한 세금 정책은 농민들을 굴복시켰고, 농민들은 그저 세금을 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347년까지 발데마르는 독일인들을 완전히 몰아냈고, 덴마크는 다시 하나의 국가로 재건되었다.
수입이 증가하면서 발데마르는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뉘보르 성과 동부 퓐섬 그리고 인근의 작은 섬들을 계략을 통해 손에 넣었다. 발데마르의 관심이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스카니아로 향할 무렵, 지역 전체에 재앙이 닥쳤다.
2.2. Financial and administrative policies
발데마르 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강력한 재정 및 행정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그는 과도한 세금 정책을 통해 국가 부채를 상환하고 왕실 재정을 재건하려 했다. 콘게오강 이북의 농민들에게 부과된 세금은 윌란반도의 저당을 갚는 데 사용되었고, 1344년 북프리슬란트를 회복한 후에도 즉시 세금을 부과하여 남부 윌란반도의 부채 상환에 활용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세금 요구는 농민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
그는 로스킬레 주교로부터 코펜하겐 성과 도시를 넘겨받음으로써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무역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통치한 최초의 덴마크 국왕으로, 이를 통해 상업적 이점을 왕실 수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성과 요새를 매입하거나 무력으로 점령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홀슈타인인들을 몰아냈다.
행정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군사력을 기반으로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기용했으며, 이는 1440년까지 덴마크 통치자들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독일-슬라브계 귀족인 헨닝 포데부스크를 1365년부터 1388년까지 총리(drost)로 임명하는 등 많은 외국인들을 궁정 관리와 고문으로 기용했다.
2.3. Impact of the Black Death
1349년 흑사병이 덴마크에 도달했다. 전설에 따르면 선페스트는 윌란반도 북부 해안에 좌초된 "유령선"을 통해 덴마크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배에 오른 사람들은 시신이 부어오르고 얼굴이 검게 변한 것을 발견했지만,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기 위해 충분히 머물렀고, 그 과정에서 병을 옮기는 벼룩을 인구에게 퍼뜨렸다.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2년 동안 흑사병은 산불처럼 덴마크 전역을 휩쓸었다. 리베에서는 한 교구 내에 12개의 교구가 사라졌다. 일부 마을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1349년에서 1350년 사이 흑사병으로 인한 덴마크 전체 인구의 사망률은 33%에서 66%에 달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농촌 사람들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완전히 버렸다.
발데마르 국왕은 흑사병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이 재앙을 그의 적들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토와 재산을 늘리는 데 활용했다. 그는 다음 해에도 세금을 줄이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는 경작하는 농민 수가 줄어들고 경작지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귀족들 또한 수입이 줄어들고 세금 부담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로 인해 다음 해에는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2.4. Relations with the nobility and internal resistance
발데마르 4세의 왕권 강화 시도는 덴마크 귀족들과의 지속적인 갈등과 내부 저항을 야기했다. 1354년, 국왕과 귀족들은 다네호프(덴마크 궁정)에서 만나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헌장에는 다네호프가 매년 최소 한 번, 6월 24일 성 요한의 날에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1282년에 제정되었던 옛 체제가 복원되었고, 크리스토페르 2세의 헌장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이의 전통적인 권리들이 다시 인정되었다.
그러나 발데마르는 헌장의 조항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 백작들이 이전 몇 년 동안 덴마크로부터 빼앗았던 남부 윌란반도 영토의 추가적인 부분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로 인해 퓐섬 전역으로 반란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그는 홀슈타인인들이 남겨둔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퓐섬의 나머지 지역을 장악했다. 헌장은 국왕이 조항을 무시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산발적인 반란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에는 북유럽 전역에 공황을 초래한 통화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1358년, 발데마르는 윌란반도의 지도자 닐스 부게(Niels Bugge, 1300년경~1358년경)와 여러 다른 귀족, 그리고 두 주교들과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다시 퓐섬으로 향했다. 그러나 국왕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그들은 불쾌한 마음으로 회의장을 떠났다. 그들이 윌란반도로 돌아갈 배를 찾기 위해 미델파르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고용한 어부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발데마르 국왕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고, 이에 윌란반도의 저항적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국왕이 또다시 폐지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에서 서로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발데마르의 가혹한 통치 방식, 끝없는 세금 징수, 그리고 귀족 가문들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권리 침해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끊임없는 봉기를 초래했다. 특히 윌란반도의 유력 지주 가문들은 발데마르의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바탕으로 왕권을 확장했지만, 이로 인한 귀족들의 반발은 그의 통치 전반에 걸쳐 중요한 내부 문제로 작용했다.
3. Foreign policy
발데마르 4세의 외교 정책은 덴마크의 재통일과 왕권 강화를 위한 군사적 대립 및 복잡한 국제 관계가 특징이었다.
3.1. Conflicts with the Hanseatic League
발데마르 국왕은 발트해 지역에서 이미 주요 강대국이 되어가던 한자 동맹의 세력 확장에 대해 거의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와의 소규모 분쟁이 끝나기도 전에 발데마르는 스웨덴령 고틀란드섬, 특히 비스뷔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대를 소집하여 선박에 싣고 1361년 고틀란드를 침공했다. 발데마르는 비스뷔 성 앞에서 고틀란드 군대와 싸워 그들을 격파했고, 이 과정에서 1800명의 고틀란드 병사가 사망했다. 도시가 항복하자 발데마르는 성벽의 일부를 허물고 입성했다. 도시를 점령한 후, 그는 세 개의 거대한 맥주 통을 설치하고 도시 원로들에게 사흘 안에 통을 은과 금으로 채우지 않으면 병사들을 풀어 도시를 약탈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놀랍게도 통들은 첫날 밤이 지나기 전에 모두 채워졌다. 교회들은 귀중품을 약탈당했고, 그 재물들은 덴마크 선박에 실려 발데마르의 거주지인 보르딩보르로 옮겨졌다. 발데마르는 자신의 칭호 목록에 "고틀란드의 왕"을 추가했다. 그러나 한자 동맹의 회원 도시였던 비스뷔에 대한 그의 행동은 훗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발데마르는 스웨덴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려 했다. 그는 스웨덴 왕세자 호콘 6세와 약혼했던 홀슈타인 백작 게르하르트 3세의 딸인 엘리자베트를 붙잡아 수녀원으로 강제로 보냈다. 그리고 망누스 국왕에게 자신의 딸 마르그레테 1세를 아들과 결혼시키도록 설득했다. 망누스 국왕은 동의했지만, 스웨덴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망누스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했다. 그들은 발데마르의 맹렬한 적수 중 한 명이었던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를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했다. 알브레히트는 즉시 발데마르의 발목을 잡기 위해 나섰다. 그는 한자 동맹 국가들에게 발데마르가 외레순 해협과 수익성 높은 청어 무역에 대한 접근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설득하여 자신과 협력하도록 했다.
발데마르는 한자 함대를 공격하여 그들을 외레순 해협의 어장에서 몰아내려 했다. 한자 동맹 회원국들은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뤼베크의 주도 아래, 그들은 발데마르에게 무역 개입에 대한 불만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1362년, 한자 동맹 국가들, 스웨덴, 노르웨이는 발데마르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보복을 꾀했다. 한자 동맹은 함대와 군대를 보내 덴마크 해안을 황폐화시켰고, 코펜하겐과 스카니아 일부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윌란반도의 반란 귀족들과 연합하여, 이들은 1368년 부활절에 발데마르를 덴마크에서 추방했다.
3.2. Interventions in Sweden and Norway
발데마르 4세는 1350년에 폴란드와 튜턴 기사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은 1363년에 갱신되었다.
그는 스웨덴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355년 스웨덴 왕자 에리크 12세는 아버지인 망누스 4세 국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스카니아와 스웨덴의 다른 지역을 장악했다. 망누스 국왕은 에리크와의 문제에 대한 도움을 얻기 위해 발데마르에게 접근하여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에리크 12세는 1359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360년, 발데마르는 군대를 이끌고 외레순 해협을 건너 망누스를 압박하여 헬싱보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헬싱보리를 점령함으로써 발데마르는 사실상 스카니아 전역을 되찾았다. 망누스는 스카니아를 유지할 만한 힘이 없었기에, 스카니아는 다시 덴마크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발데마르는 할란드와 블레킹에 역시 장악했다.
발데마르는 스웨덴 왕위 계승에도 개입하려 했다. 그는 스웨덴 왕세자 호콘 6세와 약혼했던 엘리자베트 폰 홀슈타인 백작부인을 붙잡아 수녀원에 강제로 입회시켰다. 그리고 망누스 국왕에게 자신의 딸 마르그레테 1세를 아들과 결혼시키도록 설득했다. 망누스 국왕은 이에 동의했으나, 스웨덴 귀족들은 이를 반대하며 망누스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했다. 그들은 발데마르의 숙적 중 한 명이었던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를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했다. 알브레히트는 즉시 발데마르를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발데마르가 외레순 해협과 수익성 높은 청어 무역에 대한 한자 동맹의 접근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한자 동맹 국가들이 자신과 협력하도록 설득했다.
3.3. Treaty of Stralsund
1363년 덴마크와 폴란드는 동맹을 갱신했다. 1368년 부활절에 한자 동맹, 스웨덴, 노르웨이 연합군과 윌란반도 귀족들의 반란으로 덴마크에서 추방된 발데마르 4세는 자신의 친구이자 고문인 헨닝 포데부스크를 대리인으로 지명하여 한자 동맹과의 협상을 맡겼다.
협상 결과, 발데마르가 한자 동맹의 자유 무역 및 외레순 해협에서의 어업권을 인정하는 한 휴전이 유지되기로 합의했다. 한자 동맹은 스카니아 해안의 여러 도시와 헬싱보리 요새를 15년 동안 통제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국왕에게 발데마르 사후 덴마크의 왕위 계승에 한자 동맹이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발데마르는 1370년 스트랄준트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은 한자 동맹의 청어 무역 참여 권리와 무역 함대에 대한 세금 면제 혜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 조약으로 발데마르는 4년간의 부재 끝에 덴마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발데마르는 고틀란드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고, 이는 그와 덴마크에게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남겼다.
4. Personal life
발데마르 4세는 국왕으로서 공적인 삶 외에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사건과 이야기가 전해진다.
4.1. Marriage and family
1330년대,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마르 5세는 발데마르 4세와 자신의 삼촌인 게르하르트 3세 백작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고, 발데마르 4세와 자신의 여동생인 헬비그의 결혼을 주선했다. 헬비그는 지참금으로 저당 잡힌 노르윌란트 주(윌란반도 영토의 4분의 1)를 가져올 예정이었다. 결혼식은 1340년 쇤데르보르 성에서 거행되었다. 헬비그는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 2세와 홀슈타인-렌츠부르크의 아델레이드의 딸이었다. 결혼 후, 부부는 비보르로 가서 덴마크의 국왕과 왕비로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발데마르 4세와 헬비그 왕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크리스토페르 | 1341년 | 1363년 6월 11일 | 롤란 공작. 요절함.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 1345년 | 1350년 | 메클렌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3세와 약혼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 |
잉에보르 | 1347년 | 1370년 | 메클렌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3세와 결혼. 에리크 7세의 외할머니. |
덴마크의 카타리나 | 1349년 | 1349년 | 요절함. |
덴마크의 발데마르 | 1350년 | 1363년 6월 11일 | 요절함. |
마르그레테 1세 | 1353년 3월 15일 | 1412년 10월 28일 | 노르웨이 국왕 호콘 6세와 결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여왕. 올라프 2세의 어머니. |
또한, 셸란섬 오레뷔고르에서 태어난 사생아 에리크 셸란스파르가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는 로스킬레 대성당에 왕관을 쓰고 매장되었다고 전해지나, 다른 증거들은 그가 에리크 6세 국왕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2. Cultural references and legends
발데마르 4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발라드, 시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특히 그의 정부(情婦)였던 토베(Tove)에 관한 유명한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옌스 페터 야콥센이 자신의 작품 구레의 노래(Gurresange)에 포함시켰으며, 토베가 헬비그 왕비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전설은 원래 그의 선조인 발데마르 1세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훗날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해 1900년부터 1903년까지(그리고 1910년까지) 그의 유명한 합창곡인 구레의 노래(Gurre-Lieder)로 작곡되었다.
5. Death


발데마르 4세는 한자 동맹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에게 강제로 양보하게 했던 권리를 주장하려던 반란 귀족들을 진압하고 스웨덴 및 노르웨이와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었다. 그가 남부 윌란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점차적으로 확보하던 도중 병에 걸렸다.
발데마르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은 반란을 일으킨 덴마크인들을 파문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발데마르는 1375년 10월 24일 북부 셸란섬에 위치한 구레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소뢰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신뢰할 수 있는 고문이었던 헨닝 포데부스크도 사망했을 때 발데마르 옆에 있는 소뢰 수도원에 묻혔다.
6. Legacy
발데마르 4세는 덴마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는 덴마크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1. Achievements and historical significance
발데마르 국왕은 덴마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의 인물이었다. 그는 수세기 동안 덴마크로부터 상실되었던 영토들을 점진적으로 되찾았다. 그의 군사적 기량과 그에게 충성하는 귀족들을 기반으로 국왕의 권한을 확장했으며, 이는 1440년까지 덴마크 통치자들의 기반이 되었다.
발데마르 4세는 종종 덴마크 중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국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사료들은 그를 정책과 경제 양쪽에 재능을 가진, 지적이고 냉소적이며 무모하면서도 영리한 통치자로 묘사한다. 그의 통치는 덴마크의 재통일을 이루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6.2. Criticisms and controversies
발데마르 4세의 왕권 강화는 덴마크인들에게 처음에는 환영받았지만, 그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과 가혹한 정책은 곧 심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왔다. 그의 무자비한 방식, 끝없는 세금 징수, 그리고 귀족 가문들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권리의 강탈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전국적인 봉기를 야기했다.
특히 윌란반도의 주요 지주 가문들은 발데마르의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들을 압박했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세금을 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1349년부터 1350년까지 흑사병이 덴마크를 휩쓸어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 해에도 세금을 줄이는 것을 거부하여 농민과 귀족 모두에게 더 큰 재정적 부담을 지웠다. 이는 그의 통치 전반에 걸쳐 귀족과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많은 외국인들을 궁정 관리와 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 또한 일부 국내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덴마크를 재건하고 중앙집권적인 왕국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6.3. "Atterdag" epithet and public image
발데마르 4세의 별칭인 "아테르다그"(Atterdag덴마크어)는 보통 "다시 찾아온 날"(its literal meaning in Danish)로 해석되며, 이는 암울했던 국왕 부재기 이후 덴마크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었음을 의미한다. 이 별칭은 또한 중세 저지 독일어 "테르 타게"(ter tagegml)("요즘"이라는 뜻)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 플레처 프랫은 발데마르의 전기에서 이 단어가 "또 다른 날"을 의미하며, 이는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나든, 좋든 나쁘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발데마르 4세에 대한 많은 이야기, 발라드, 시들이 창작되었다. 그는 19세기 중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과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덴마크가 독일과 전통적인 남부 윌란 지역을 두고 싸울 때, 덴마크의 영웅적인 국왕 중 한 명으로 "재창조"되었다. 이러한 재조명은 그의 역사적 이미지를 덴마크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7. Descendants
발데마르 4세는 슐레스비히의 헬비그 왕비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중 특히 막내딸인 마르그레테 1세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위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롤란 공작 크리스토페르(1341년 ~ 1363년): 발데마르 4세의 장남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1345년 ~ 1350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잉에보르(1347년 ~ 1370년): 메클렌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3세와 결혼했으며, 훗날 덴마크 국왕이 되는 에리크 7세의 외할머니가 되었다.
- 덴마크의 카타리나(1349년): 태어난 해에 사망했다.
- 덴마크의 발데마르(1350년 ~ 1363년 6월 11일):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마르그레테 1세(1353년 3월 15일 ~ 1412년 10월 28일): 노르웨이 국왕 호콘 6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여왕이자, 올라프 2세의 어머니이다.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맏딸 잉에보르의 아들인 알브레히트가 그의 할아버지인 알브레히트 2세에 의해 발데마르의 후계자로 제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막내딸 마르그레테와 호콘 6세의 아들인 그의 외손자 올라프 2세가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마르그레테 1세는 올라프 2세의 이른 죽음 이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치하며 칼마르 동맹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