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박철순은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1. 어린 시절과 고등학교
박철순은 1956년 3월 12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경남중학교를 거쳐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대전대성고등학교 야구부로 편입 전학을 갔으나, 당시 야구부 내 폭행 사건으로 인해 야구부가 해체되면서 다시 배명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투수로 활약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눈에 띄는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1.2. 대학교 및 아마추어 선수 경력
1975년 1월, 박철순은 체육 특기생으로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하여 연세대학교 야구부 소속이 되었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 공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 1978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하를럼 야구 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쿠바와의 경기에서는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79년에 참가한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의 활약은 미국 프로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는 이원국 선수에 이어 한국 야구 선수로는 두 번째로 미국 프로야구 팀과 계약하고 마이너 리그에 진출한 사례였다.
2. 프로 경력
박철순은 미국 마이너 리그에서 경험을 쌓은 후, KBO 리그의 출범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전설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1. 미국 프로야구 경력
박철순은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활동했다. 그는 싱글 A 팀인 스톡턴 포츠와 더블 A 팀인 엘패소 디아블로스에서 뛰었다. 마이너 리그에서 보낸 2년 동안 박철순은 통산 11승 12패, 4.30 ERA를 기록했다. 1981년에는 싱글 A 스톡턴 포츠에서 5승 7패 4.22 ERA, 더블 A 엘패소 디아블로스에서 3승 3패 5.77 ERA를 기록했으며, 텍사스 리그 최다승 부문 3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마이너 리그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트리플 A 진출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2.2. KBO 리그 경력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자 박철순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그는 리그 원년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기록들을 세웠다.
2.2.1. 데뷔 및 1982 시즌
KBO 리그 출범과 함께 귀국한 박철순은 서울 드래프트에서 1순위(전체 3순위)로 OB 베어스와 계약했다. 당시 OB 베어스는 3년 동안 대전에 머무는 조건으로 MBC 청룡과 함께 서울 연고권을 놓고 선수 지명 순서를 정했는데, OB가 1명, MBC가 2명을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박철순은 계약금 2000.00 만 KRW, 연봉 2400.00 만 KRW으로 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1200.00 만 KRW 내외였던 것을 고려하면 최고 대우를 받으며 입단했다.
박철순의 데뷔전은 KBO 리그 개막전 다음 날인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경기였다. OB 베어스는 1회 초 상대 팀의 감독 겸 선수인 백인천에게 적시 2루타를 허용하며 선취점을 내줬지만, 박철순은 1회 말 1점을 내준 뒤 5회 말 1안타와 내야 실책으로 1점을 더 허용했을 뿐 더 이상 MBC의 득점을 막아냈다. OB 베어스는 2회 초 신경식의 우전 안타와 5회 초 3점을 뽑아내며 4-1로 전세를 뒤집었다. 6회 초 이홍범의 솔로 홈런에 이어 9회 초에는 신경식과 양세종이 백투백 홈런을 터뜨리며 9-2로 첫 승리를 기록했다.
박철순은 4월 10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구원승을 달성한 것을 시작으로, 9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전 완투승까지 무려 22연승을 달성했다. 이 22연승 기록은 한국, 미국, 일본 프로야구를 통틀어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박철순의 맹활약에 힘입어 OB 베어스는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198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승 1무 1패로 꺾고 KBO 리그 원년 우승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해 박철순은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체인지업'(당시에는 '마구'로 불렸다)과 포크볼, 팜볼을 구사하며 24승 4패, 1.84 ERA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다승, 승률, 평균 자책점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정규 리그 MVP와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동시에 석권했다. 24승 중 16승이 선발승이었는데, 이는 이후 선동열(1986년 17선발승), 손민한(2005년 17선발승), 류현진 (2006년 18선발승), 양현종 (2017년 20선발승), 리오스 (2007년 22선발승) 등에 의해 갱신되기도 했다.
2.2.2. 후기 경력 및 역할
1982년의 절정의 기량은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박철순은 1983년 대부분의 시즌과 1984년 전체 시즌을 부상으로 인해 결장했다. 미국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88년에는 CF 촬영 도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부상들을 끊임없이 극복하고 다시 마운드에 올라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부상으로 인해 선발 투수로서의 이닝 소화 능력이 제한되면서, 박철순은 불펜 투수로도 전환하여 활약했다. 그는 13시즌 동안 OB 베어스에서 뛰며 꾸준히 리그에서 활동했다. 1994년 8월에는 38세의 나이로 태평양 돌핀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KBO 리그 최고령 완봉승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이후 송진우에 의해 갱신되었다). 또한,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의 우승에 기여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3. 부상과 재기
박철순은 선수 생활 내내 심각한 부상에 시달렸지만, 이를 극복하고 끊임없이 재기하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3.1. 부상의 영향
1982년 데뷔 시즌의 혹사 이후, 박철순은 고질적인 허리 부상에 시달렸다. 이 부상으로 인해 1983년 시즌 대부분과 1984년 시즌 전체를 결장해야 했다. 그는 미국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으나, 1988년에는 광고 촬영 도중 점프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만성적인 부상들은 그의 선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3.2. '불사조'의 재기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박철순은 끊임없이 재활에 매달려 마운드에 복귀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1985년 리그에 복귀한 그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다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별명은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는 이후 시즌에서도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13시즌 동안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때로는 플레잉코치로도 활동하며 팀에 기여했다. 비록 데뷔 시즌과 같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부상을 극복하고 꾸준히 마운드에 오르는 그의 모습은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4. 은퇴 및 은퇴 후 활동
박철순은 영광스러운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야구계 안팎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4.1. 은퇴
박철순은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의 우승에 기여한 후, 199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96년 9월 4일 대전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당시 40세 5개월 23일의 나이로 KBO 리그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을 세웠다. 이 경기가 그의 마지막 등판이 되었으며, 시즌을 마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997년에 열린 그의 은퇴식에서는 마운드에 입을 맞추는 '마운드 키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4.2. 코치 및 야구계 외 활동
1996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박철순은 곧바로 OB 베어스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1997년 7월 13일 음주 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어 100일간의 운전면허정지 처분을 받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또한 1998년 7월 15일에는 2군 훈련 도중 후배 선수를 구타한 고참 선수들을 구단이 문책하자 이에 반발하는 등 구단과의 마찰을 겪었다. 결국 그는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의 주동자로 낙인찍히는 등의 이유로 1998년 시즌 중 코치직을 사임하고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야구계를 떠난 후 잠시 경인방송에서 메이저 리그 해설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스포츠 용품 회사인 알룩 스포츠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의왕시 사회인야구협회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4.3. 방송 및 대외 활동
박철순은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까지 다양한 방송 출연과 광고 모델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1997년 11월 20일에는 KBS 《이것이 인생이다》의 '불사조의 노래-박철순의 야구인생과 사랑' 편에 출연하여 자신의 야구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여러 기업의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1983년 LF 남성캐주얼, 1988년 이랜드그룹 빅맨, 1994년 오리온 초코파이, 1996년 농심 큰사발(배우 허정민과 함께), 1999년 롯데네슬레코리아 테이스터스초이스, 2012년 기아 광고에 출연했다. 특히 1988년 이랜드 빅맨 광고 촬영 도중 점프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5. 논란 및 비판
박철순의 선수 경력과 개인적인 행실은 일부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5.1. 최동원 선수 폭행 사건
박철순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후배인 최동원 선수를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구타하여 병원 신세를 지게 한 사건으로 논란이 되었다. 당시 최동원은 이 사건으로 인해 연세대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학교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최동원 측에서 몇 달 후 학교 측에 사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기도 하는데, 최동원이 나중에 학교로부터 오히려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박철순의 최동원에 대한 구타는 언론에 보도된 것만 세 차례 이상이었다. 동국대학교전 직후, 3월 12일 중앙대학교와의 연습경기, 그리고 그 전 해 연고전에서 구타가 있었으며, 최동원의 말에 따르면 각각 10대씩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철순은 다른 선수들은 4대씩 때리던 것을 최동원만 봐줘서 2대만 때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동원이 전치 17일 진단을 받고 허리에서 피가 나왔으며, 구타에 사용된 배트가 부러졌다는 동기의 증언 등을 고려할 때, 박철순의 주장은 신빙성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2011년 박동희 기자가 최동원과 김성한을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박철순의 구타로 인해 최동원은 배트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고 허리에 피멍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최동원은 전치 2주 진단을 받고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음해로 인해 '무단이탈'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박철순은 자신이 그저 4학년 선배의 지시에 따른 것일 뿐 주도적인 입장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배 지시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박철순은 당시 복학생이었고, 오히려 4학년들보다 나이도 많고 학번도 빨랐다(박철순은 1954년생 75학번, 당시 4학년들은 1957년생 76학번). 따라서 박철순에게 직접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선배가 없었으며, 박철순이 구타를 주도했을 확률이 높다. 또한 박철순 본인도 "후배가 건방져서 때렸을 뿐"이라며 지시설을 직접 부인한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철순의 미국 진출은 연세대학교에서 더 이상 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사실상 쫓겨난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선배가 후배에게 기합을 주고 체벌하는 악습이 팽배하던 시기였지만, 박철순의 행위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도를 넘은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언론에도 보도되고 퇴학 이야기까지 나왔다. 최동원과 박철순은 중학교 선후배 관계인데 이때부터 트러블이 있었다는 말도 있으며, 해당 사건 탓인지 1990년까지 롯데 통산 최다 선발승(51선발승) 보유자인 최동원의 주요 팀이었던 롯데 팬들은 박철순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5.2. 사생활 관련 사건
박철순은 선수 경력 외에 개인적인 행실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논란을 겪었다. 1997년 7월 13일에는 술을 마시고 승용차를 운전한 혐의로 강남경찰서로부터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어 100일간의 운전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또한 1998년 7월 15일에는 OB 베어스 2군 훈련 도중 후배 선수를 구타한 고참 선수들을 구단이 문책하자 이에 반발하는 등 구단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코치직 사임과 야구계 이탈에 영향을 미쳤다.
6. 기록 및 수상
박철순은 KBO 리그에서 여러 주요 기록을 세우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6.1. KBO 주요 기록
박철순은 KBO 리그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기록들을 달성했다.
# | 기록 | 소속 | 날짜 | 구장 | 상대팀 | 경기 결과 | 주석 및 기타 |
---|---|---|---|---|---|---|---|
최다 연승 | 22연승 | OB | 1982. 9. 18 | 대전 | 롯데 | 당시 나이: 26세 6개월 6일 | |
최고령 승리 투수 | 39세 1개월 17일 | OB | 1995. 4. 18 | 잠실 | LG | 9 - 2 | 선발 7이닝 5안타 1실점 |
40세 5개월 23일 | OB | 1996. 9. 4 | 대전 | 한화 | 5 - 1 | 선발 5이닝 5안타 무실점 | |
최고령 완봉승 | 36세 5개월 | OB | 1992. 8. 12 | 잠실 | 해태 | 0 - 5 | |
38세 5개월 | OB | 1994. 8. 12 | 잠실 | 태평양 | 2005년 송진우가 39세 6개월 22일로 경신 | ||
최고령 세이브 | 40세 4개월 18일 | OB | 1996. 7. 30 | 잠실 | LG | 4 - 6 | 9회초 1사 1,3루 등판, 두 타자 범타 처리 2007년 송진우가 41세 3개월 15일로 경신 |
6.2. 수상 경력
- 1982년 KBO 리그 MVP
- 1982년 투수 트리플 크라운 (다승, 승률, 평균 자책점 1위)
7. 유산
박철순은 한국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업적은 영구 결번으로 인정받았다.
7.1. 영구 결번
2002년 4월 5일, 두산 베어스는 박철순의 등번호였던 2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이는 KBO 리그에서 선수에게 부여된 영구적인 최고의 영예 중 하나로, 박철순이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와 KBO 리그 초창기에 기여한 공로와 그의 상징성을 인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7.2. 전반적인 영향력 및 평가
박철순은 KBO 리그 원년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성공적인 안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2년의 22연승과 MVP 수상은 리그 초창기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프로야구의 흥행을 이끌었다. 그는 한국 야구 선수로는 두 번째로 미국 마이너 리그에 진출하며 해외 무대에 도전한 개척자로서의 위상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질적인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마운드에 복귀하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은 그의 투혼은 많은 팬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이는 단순히 뛰어난 선수를 넘어, 역경을 극복하는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일부 논란이 있었지만, 박철순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전설적인 선수이자, 그 이름만으로도 한국 야구의 한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