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박진(朴振, Park Jin영어; 1956년 9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제40대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제16대, 17대, 18대, 21대 국회의원을 지낸 4선 의원이다.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 해외공보비서관 및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국회의원 재임 중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과 북한인권법 통과에 기여하며 외교 및 통일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주요국과의 외교 관계를 조율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재임 기간 동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및 2023년 나고르노카라바흐 공세 등 국제 분쟁에 대한 한국의 입장 표명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국회에서 해임 건의안이 통과되기도 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는 또한 대영 제국 훈장 3등급인 CBE를 수훈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박진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학업에 매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2.1. 유년 시절 및 가족 관계
박진은 1956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함경도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1·4 후퇴 시기에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에 '박내과 의원'을 개원했다. 모친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이다. 그의 본관은 여주 박씨이며, 기독교 신자이다. 부인은 조윤희이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2.2. 학력
박진은 은석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일중학교로 전학했으나 다시 남대문중학교로 전퇴했다. 이후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해외 유학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더했는데, 1985년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1993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 LL.M 과정을 수료했으며,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3. 외교관 경력
박진은 외무고시 합격 후 외교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다양한 해외 연구 활동을 통해 외교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쌓았다.
3.1. 외무부 입부 및 초기 경력
박진은 1977년 8월 제11회 외무고시에 합격하며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8년 외무부 사무관으로 임용되었으며,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민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대한민국 해군 중위 계급으로 전역했다. 1983년에는 국비 해외 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3.2. 해외 연구 및 활동
박진은 외교관 경력 중 여러 해외 유수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연구 활동을 수행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 도쿄대학에서 외국인 연구생으로 활동했으며,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는 뉴캐슬 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이후 귀국하여 1999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했으며, 2013년 3월부터 2020년 5월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2014년에는 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의 글로벌 펠로우로 활동했으며, 2015년에는 아시아미래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2025년 1월부터는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할 예정이다.
4. 정치 경력
박진은 외교관 경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으로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으며, 주요 정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1. 정계 입문
박진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5월부터 1994년 1월까지 대통령비서실 홍보2비서관을 지냈으며, 1994년 1월부터 1996년 7월까지 해외공보비서관, 1996년 7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정무비서관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김영삼 대통령의 통역관으로도 활동했다. 1998년 10월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1년 8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특별보좌역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4.2. 국회의원 활동
박진은 총 4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4.2.1. 지역구 및 선거 결과
박진은 200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50.3%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제16대 국회의원(초선)이 되었다.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구에 다시 출마하여 42.8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종로구에서 48.43%의 득표율로 3선 의원이 되었다.
오랜 기간 종로구에서 활동했던 그는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강남구 을 지역구로 옮겨 미래통합당 (현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 50.94%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4선 의원이 되었다.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서대문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42.37%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그는 제16대 국회의원 시절인 2002년 8월 8일부터 2004년 5월 29일까지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제17대 국회의원 시절인 2004년 5월 30일부터 2008년 5월 29일까지는 국방위원회 간사, 중국의 고구려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위원,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정보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시절인 2008년 5월 30일부터 2012년 5월 29일까지는 지식경제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제21대 국회의원 시절인 2020년 5월부터 2024년 5월까지는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2021년 8월부터 2024년 5월까지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선거 연도 | 구분 | 대수 | 직책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2002년 | 8·8 재보선 | 16대 | 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 | 한나라당 | 23,300표 | 50.3% | 1위 | 당선 | 초선 |
2004년 | 총선 | 17대 | 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 | 한나라당 | 37,431표 | 42.81% | 1위 | 당선 | 재선 |
2008년 | 총선 | 18대 | 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 | 한나라당 | 34,113표 | 48.43% | 1위 | 당선 | 3선 |
2020년 | 총선 | 21대 | 국회의원 | 서울 강남구 을 | 미래통합당 | 51,762표 | 50.94% | 1위 | 당선 | 4선 |
2024년 | 총선 | 22대 | 국회의원 | 서울 서대문구 을 | 국민의힘 | 42,059표 | 42.37% | 2위 | 낙선 |
4.2.2. 주요 입법 활동
박진은 국회의원으로서 주요 외교 및 안보 관련 법안의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18대 국회 전반기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주도했다. 또한 북한인권법 통과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2008년에는 한미의회외교협회 회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조 바이든을 만났다.
4.3. 정당 내 주요 직책
박진은 소속 정당에서 다양한 주요 당직을 맡으며 당내 활동에 기여했다. 2003년 7월부터 2004년 3월까지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냈으며, 2004년 7월부터 2005년 2월까지, 그리고 2007년 9월부터 2008년 6월까지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에는 한나라당 서울특별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둔 2007년 1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2020년 6월에는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 외교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국민의힘으로 당명이 변경된 후에도 2021년 9월까지 같은 직책을 유지했다. 2021년에는 2021년 재보궐선거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서울동행위원회 공동부위원장 및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 후보의 국민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과 살리는 선거대책위원회 산하 글로벌비전위원회 위원장, 서울을 살리는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외에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한나라당 서울특별시 지부 종로구 지구당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 6월에는 대한장애인농구협회 회장을 지냈다. 2004년에는 한영협회 회장 및 국제민주연합 부의장을 맡았고, 사단법인 한미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2012년 2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새누리당 서울특별시당 종로구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사단법인 한미협회 회장, 2017년 1월부터 재단법인 한미동맹재단 고문을 맡았다. 2020년 6월부터 2020년 9월까지 미래통합당 서울특별시당 강남구 을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2020년 7월부터 2024년 5월까지 국회 글로벌외교안보포럼 대표의원, 국회 미래정책연구회 공동대표의원, 국회 세계한인경제포럼 구성의원을 역임했다. 2020년 1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한-미 의회외교포럼 공동회장을 지냈으며, 2020년 9월부터 2024년 1월까지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강남구 을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2020년 10월에는 국민의힘 약자와의동행위원회 국민동행 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2021년 7월부터 2022년 5월까지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2024년 5월부터 2024년 6월까지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서대문구 을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5. 외교부 장관 재임
박진은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을 총괄하며 다양한 국제 외교 활동을 펼쳤다.
5.1. 주요 외교 활동 및 정책
박진은 2022년 4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에 의해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되었고, 2022년 5월 12일 정식 임명되었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한미 정책협의대표단 단장을 맡아 미국과의 동맹 강화에 주력했다.
박진은 정의용의 뒤를 이어 제40대 외교부 장관이 되었으며, 후임은 조태열이다.

재임 기간 동안 박진은 주요국 외교장관들과 회담을 가졌다. 2022년 7월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총격 사건 추모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여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대신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강제징용 문제의 조속한 해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구체적인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양측의 의견을 교환하는 데 그쳤다. 같은 해 8월에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ASEAN 관련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여 하야시 요시마사와 다시 회담을 갖고 양국 간 현안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한 캐치올 규제 해제를 요청했으나,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와 별개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2022년 8월 9일에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를 방문하여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다. 당시 낸시 펠로시의 대만 방문으로 미중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중국 측은 미국이 추진하는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한국이 참여하지 말 것과 THAAD 기지 운용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칩4 동맹이 중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THAAD는 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2022년 6월 6일에는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만났으며, 2023년 2월 2일에는 NASA 본부에서 빌 넬슨 NASA 국장, 전 우주비행사 파멜라 멜로이와 회동했다.
박진은 2024년 1월 10일 조태열이 새로운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장관직에서 퇴임했다.

5.2. 국제 사회에서의 평가
박진의 외교부 장관 재임 기간 동안 일부 외교적 결정과 발언은 국내외에서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2023년 나고르노카라바흐 공세에서 이스라엘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한국의 지지 입장은 두 국가가 각각 집단살해와 인종 청소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논란이 되었다.
2022년 9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미국, 캐나다 순방이 외교적 성과 없이 "외교 참사"로 끝났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국회에서는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통과되었다 (국민의힘이 보이콧으로 집단 퇴장한 가운데 170명 중 168명 찬성). 그러나 다음 날인 9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박진의 해임을 거부했다.

6. 사상 및 철학
박진은 자신의 정치적, 외교적 관점을 여러 차례 피력했으며, 이는 그의 정책 방향과 발언을 통해 드러났다.
6.1. 정치 및 외교관으로서의 관점
박진은 국제 관계와 안보에 있어 실용주의적 접근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2005년 9월 독도 수호를 위한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전력 증강을 제안하고, 독도가 가진 영토적 상징성을 고려하여 여야 의원들의 독도 방문을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로 2010년 4월 18일에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으로서 김형오 국회의장과 함께 독도에 상륙했다.
그러나 2008년 6월 18일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박진은 서울에서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문제 담당 차관보를 만났을 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를 언급하며 "한국은 너무나 많은 민주주의를 가지게 되었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정치적 보수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평가된다.
그는 외국어 구사 능력도 뛰어나, 2022년 5월 2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중남미 수교 60주년 기념 특별 포럼에서 스페인어로 개회사를 하기도 했다.
7. 개인사 및 가족
박진은 부인 조윤희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함경도 출신으로, 부친은 함경북도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1·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 명륜동에 '박내과 의원'을 개원했다. 모친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이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8. 논란 및 비판
박진은 정치 경력 및 공직 수행 과정에서 여러 차례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8.1. 기밀 누설 및 언론 관계 논란
2004년 10월, 박진은 국방 관련 국정감사를 앞두고 탄약 비축량 등 구체적인 군사 기밀이 담긴 자료를 언론에 제공하여 군사 기밀 누설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며 과도한 비밀 보호가 오히려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해명했으나, 결국 국회 윤리특별위원회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았다.
8.2. 성추행 사건 관련 발언
2006년 3월 3일,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었던 최연희 의원의 여성 기자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후, 박진은 이 사건의 원인을 "폭탄주 문화"로 지목하며 국회 기자회견에서 망치로 술이 담긴 유리잔을 깨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성추행의 본질이 술이 아닌 사람에게 있음을 왜곡하고 사건의 책임을 술 문화에 전가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8.3. 정치 자금 및 법적 문제
박진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도 연루된 '박연차 게이트'에 휘말렸다. 그는 당시 2.00 만 USD의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1심에서는 300.00 만 KRW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의원직 상실 위기에 처했으나, 항소심에서는 2.00 만 USD 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고 차명 후원금 기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되어 80.00 만 KRW의 벌금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간신히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8.4. 아들 취업 관련 논란
2022년 외교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박진의 장남이 해외 온라인 도박 사이트 운영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해당 회사의 '설립 임원'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박진은 장남이 회사의 창립자임을 부인하며, "회사의 안내를 보면 게임 회사, 넓게 보면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라이선스를 주는 회사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현금을 걸고 포커를 플레이하더라도) 넓게 보면 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명하며 장남의 근무처가 도박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온라인 포커를 게임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8.5. 외교적 실언 및 논란
2022년 4월 26일, 박진은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 준비 사무실 출근길에서 기자로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축전을 보냈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먼저 개인적으로 푸틴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한다"고 답했다가, 잠시 후 주변의 반응을 의식하고 "아, 마크롱 대통령"이라고 정정하는 실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9. 영향 및 평가
박진은 대한민국의 외교 및 정치 분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한국 사회와 국제 관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 미쳤다.
9.1. 한국 정치 및 외교에 미친 영향
박진은 국회의원으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과 북한인권법 통과를 주도하며 한국의 대외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외교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발휘했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으로서 한미동맹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실용주의적 외교 노선을 추진했다. 그의 외교 활동은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9.2. 후대에 미친 영향
박진은 외교관, 국회의원, 외교부 장관 등 다양한 공직을 거치며 한국 외교 정책의 발전과 국제 관계에 대한 이해 증진에 기여했다. 특히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회 외교를 통해 국제 협력을 증진하려 노력한 점은 후대 정치인과 외교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력은 전문성을 갖춘 외교 인재가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0. 관련 항목
- 종로구 (1988년 선거구)
-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
- 강남구 을
- 서울 강남구의 국회의원
-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
- 정의용
- 조태열
- 전현희
- 박수민 (19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