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박세직(朴世直, 1933년 9월 18일 ~ 2009년 7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관료, 정치인이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총무처 장관, 체육부 장관,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서울특별시장, 제14·15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박세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33년 9월 18일,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구평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구평동)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읍 죽장리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군인으로 첫 경력을 시작하여 주요 지휘관을 역임한 후 전두환 정부에서 고위 관료로 활동하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과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군인, 관료, 정치인으로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2.1. 유년기와 학력
박세직은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매진했으며, 군 복무 중에도 학업을 이어가 다양한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2.1.1. 정규 학력
박세직은 부산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2기로 입학하여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된 후에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군 복무 중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와 1959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육학과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및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1.2. 비학위 수료 및 명예 박사 학위
박세직은 정규 학위 외에도 여러 비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8기와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11기를 수료하며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또한, 그는 다양한 국내외 기관으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철학 박사, 미국 메릴랜드 주립 타우슨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과학 박사, 미국 텍사스 댈러스 그리스도 침례대학교에서 명예 인문과학 박사, 미국 애주사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대구대학교에서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를, 대전대학교에서 명예 군사학 박사 학위를 추서받았다. 그는 불어, 영어, 일본어 등에도 능통했으며 회화 실력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2.2. 군 복무
박세직은 195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수(1961년)를 시작으로 국방부 장관 보좌관, 육군 보병 제3사단장(1980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1981년)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수도경비사령관 재직 당시, 신군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1981년 8월 6일 고위층 청탁행위라는 명분으로 해직과 동시에 강제 예편당했으나, 이후 조사 결과 무혐의로 판정받았다. 198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2.3. 초기 관료 경력
군 예편 이후 박세직은 전두환 정부에서 다양한 공직 활동을 시작했다. 1981년 8월 동력자원부 정책 자문위원 겸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이 되었고, 1982년 1월 15일 동력자원부 자문관, 1982년 3월 15일 한국전력공사 부사장 및 수석부사장을 거쳤다. 이후 1982년 11월 30일 국가안전기획부 차장보(차관급), 1983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장관급) 등을 역임했다.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박세직은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으로서 조사단장으로 버마(현 미얀마)에 파견되었다. 그는 버마 측의 의혹을 해소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85년 2월 19일 장세동이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임명되자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물러나 제7대 총무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페루 대통령 취임식을 참관하고 귀국했으며, 1986년 1월 8일 제4대 체육부 장관이 되어 전임자인 노태우 등과 함께 1986년 아시안 게임의 기획 및 준비,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사전 준비를 총괄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박세직은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 요직을 거치며 여러 중요한 활동과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3.1. 서울 올림픽 리더십
1986년 5월 7일, 박세직은 노태우의 뒤를 이어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전에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며 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박세직은 1988년 10월 2일까지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서 대회를 총괄했으며,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 시대의 동서 화합에 기여하고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성공적인 대회로 평가받았다.
3.2. 국가안전기획부장
박세직은 1988년 12월 5일부터 1989년 7월 18일까지 제16대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을 역임했다. 이 직책은 부총리급에 해당했으며, 그는 국가의 안보와 정보 업무를 총괄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국가안전기획부는 국내외 정보 수집 및 분석, 국가 안보 위협에 대한 대응 등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3.3. 서울특별시장
1990년 12월 27일, 박세직은 고건의 뒤를 이어 제23대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91년 2월 18일 이해원이 후임으로 임명될 때까지 54일간 짧은 기간 동안 서울시장직을 수행했다. 재임 기간 동안 서울시의 주요 행정을 책임지며 시정 발전에 기여했다.
3.4.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치 경력
박세직은 군과 관료 생활을 거쳐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92년 4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북 구미시 지역구에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59,098표(72.89%)를 득표하며 당선되어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경북 구미시 갑 지역구에 신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30,415표(45.47%)를 득표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1992년 5월부터 2000년 5월까지 두 차례 국회의원을 연임하며 의정 활동을 펼쳤다.
국회의원 재임 중인 1992년 7월 11일, 황영조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조직된 손기정-황영조 기념사업회의 위원에 위촉되었다. 1997년에는 세계화추진위원장에 임명되어 대한민국의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
3.5. 말년 활동
박세직은 2006년 4월 21일 재향군인회 제31대 회장에 선출되어 3년 임기를 수행했다. 이후 2009년 4월 13일 제32대 회장으로 연임되어 활동하며 각종 안보 강연 활동과 보수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사망 전까지 재향군인회 회장으로서 국가 안보 및 보훈 활동에 헌신했다.
4. 저서 및 논문
박세직은 다양한 분야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그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했다.
4.1. 저서
- 미소짓는 아내
-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 서울 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
- 서울 올림픽 묻혀진 이야기
4.2. 논문
- 지휘통솔의 이론과 실제
- 부국 / 강군론
- 한반도 주변정세와 평화통일 방향
- 2002년 월드컵과 한일 양국의 미래
- 신, 경, 애의 3/3 행복론
5. 사생활
박세직은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의 사망은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5.1. 가족
박세직은 홍숙자(1938년 ~ )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5.2. 사망
2009년 7월 27일, 박세직은 과로로 인한 급성 폐렴으로 서울에서 별세했다. 향년 77세였다. 그의 사망 당시, 그는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6. 유산과 평가
박세직은 대한민국의 군사, 행정, 스포츠,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업적은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6.1. 공헌과 긍정적 평가
박세직의 가장 큰 공헌은 단연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이다. 그는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대회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전반을 총괄하며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 올림픽은 냉전 시대의 동서 진영 화합에 기여하고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재향군인회 회장으로서 재임 기간 동안 국가 안보 의식 고취와 보훈 사업 발전에 기여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6.2. 비판과 논란
박세직은 1981년 신군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강제 예편당했으나, 이후 전두환 정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차장, 부장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권위주의 정부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특히 국가안전기획부는 당시 비민주적인 공작 활동과 인권 침해 논란이 있었던 기관이었기에, 그가 이 기관의 고위 책임자로 재직했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정치적 소속과 역할은 민주화 과정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
7. 선거 결과
박세직이 출마했던 국회의원 선거의 상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선거명 | 대수 | 직책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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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총선 | 14대 | 국회의원 | 경북 구미시 | 민주자유당 | 59,098표 | 72.89% | 1위 | 당선 | 초선 |
1996년 | 총선 | 15대 | 국회의원 | 경북 구미시 갑 | 신한국당 | 30,415표 | 45.47% | 1위 | 당선 | 재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