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사제 서품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신학교에서 교육받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모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며 초기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1.1. 출생과 교육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의 레사크도드(Raissac-d'Aude)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르카손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수학했다.
1.2. 사제 서품과 초기 사목 활동
신학교 과정을 마친 후 브뤼기에르는 1815년 12월 2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그는 10여 년간 모교인 카르카손 신학교에서 철학 및 신학을 가르치며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선교 활동에 대한 열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2. 동남아시아 선교 활동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암(현 태국)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시암 대목구의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2.1. 파리 외방전교회 입회 및 시암 파견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로서 활동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1825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처음에는 베트남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아시아에 도착한 1827년에 당시 시암 대목구의 주교인 에스프리-마리-조제프 플로랑스(Esprit-Marie-Joseph Florens) 주교가 단 한 명의 선교사제만을 두고 있었다는 상황을 고려하여 시암(현 태국)으로 재배정되었다. 그는 1826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도착한 후 방콕으로 이동하여 시암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2.2. 시암 대목구 부대목구장 임명
시암에 파견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곳에서 선교사로서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플로랑스 주교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828년 2월 5일,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시암 대목구의 부대목구장 겸 카프사(Capsus)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29년 6월 29일에는 플로랑스 주교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1830년에 클로드-앙투안 데샤반(Claude-Antoine Deschavannes)과 장-밥티스트 팔레고아(Jean-Baptiste Pallegoix) 등 두 명의 새로운 선교사제가 방콕에 도착하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페낭으로 이동하여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제너럴 칼리지(General College)에서 자크-오노레 샤스탕(Jacques-Honoré Chastan), 장-밥티스트 부쇼(Jean-Baptiste Boucho), 장 피에르 바르브(Jean Pierre Barbe), 그리고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등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2.2.1. 소수 민족 및 교육에 대한 집중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암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태국어를 익혔지만, 그곳의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태국인이 아니라 크메르족, 중국인, 베트남인 또는 포르투갈인과 아시아인의 혼혈 후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국 불교도들이 개종에 적극적이지 않자, 그는 선교 노력을 소수 민족 집단에 집중했다. 또한 그는 수년간 방콕의 성모 승천 대성당 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육 활동에도 기여했다.
3. 조선 대목구장 임명
시암에서의 선교 활동 중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교황청에 의해 새롭게 설립된 조선 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3.1. 조선 선교 자원
아시아 지역에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 자금과 선교사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시암에서의 그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에 조선 선교를 스스로 자원했다. 당시 조선은 신유박해 등 천주교 박해가 극심한 상황이었으며, 그는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조선 교회의 설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시암의 플로랑스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떠나면 자신의 후임이 없어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선교에 대한 그의 뜻을 지지했다.
3.2. 조선 대목구 설립 및 임명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교황 교서 "비구와 사제"(Quas Civitatum)를 통해 조선 대목구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조선은 중국 베이징 대목구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선교 관할 구역이 되었다.
4. 조선으로의 여정 및 사망
브뤼기에르 주교는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후 조선 입국을 위해 길고 험난한 여정을 떠났으나, 조선 국경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중국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4.1. 중국 경유 및 준비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소식을 듣고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1832년 9월 12일, 그는 페낭 신학교의 조셉 왕(Joseph Wang) 신학생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마카오, 푸젠성, 산시성을 거쳐 육로로 이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그리스도인 박해와 조선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잠시 은신했으며, 시완쯔(Xiwanzi)에 머물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를 만났다. 모방 신부 역시 조선 선교에 자원했다. 그는 중국에서 약 3년간 조선 입국을 준비하며 체류했다. 1834년 9월 22일 산시성을 떠나 10월 7일에는 만리장성에, 10월 8일에는 시완쯔에 도착하는 등 조선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계속했다.
4.2. 조선 도착 전 사망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셉 왕 신학생과 피에르 모방 신부와 함께 마침내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조선 국경에 채 도달하기도 전, 열하성(Rehe) 뻬리쿠 부근에서 병에 걸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1835년 10월 20일 뇌일혈 등의 증세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맞이한 비극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 이후, 조선 선교를 위해 함께 길을 나섰던 모방 신부는 이후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와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 주교와 합류하여 조선에 입국했으나, 세 명 모두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5. 유산과 유해 이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비록 조선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의 저술과 사후 유해 이장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5.1. 저술 활동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를 위한 여정 중 남긴 기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저술 활동 중 <만주 여행기>는 프랑스 선교사 아킬레스 달레(Charles Dallet)가 쓴 중요한 사료인 <조선 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라는 책 속에 실려 있다. 이 기록물은 당시 조선과 그 주변 지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5.2. 서울로의 유해 이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사망 당시 조선으로 함께 향하던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그가 죽은 열하성 뻬리쿠에 임시로 매장되었다. 그로부터 약 96년이 지난 19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유해는 조선으로 이장되어 서울 용산의 성직자 묘지에 안치되었다. 이는 그가 조선 교회의 첫 교구장으로서 갖는 상징적 의미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