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교육
도모히토 친왕은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서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황족으로서의 제약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1.1. 유년기와 학업
도모히토 친왕은 1946년 1월 5일, 가나가와현 하야마정에 위치한 미카사노미야 어가우소(三笠宮御假寓所)에서 다이쇼 천황의 막내아들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다카기 자작가의 딸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큰아버지인 쇼와 천황에게는 첫 번째 조카이기도 했다. 유년기에는 누나인 고노에 야스코와 함께 데메이 황후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심여학원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의 교육 방침은 '방임주의'였기에, 그는 어린 시절에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초등과 시절에는 일반 학생들과 달리 등하교 시 신발장이 특별실에 따로 마련되었고, 그를 '도모짱'이라고 부른 친구는 교사에게 '무엄하다! 왕자님이라고 불러라!'라고 호되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 스키, 소프트볼 등의 스포츠에 열중하여, 특히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한 스키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스키 배지 테스트 1급을 취득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편, 학업 성적은 '엉망진창으로 나빴다'고 고백했다.
가쿠슈인 고등과 응원단에 들어가 3학년 때는 단장을 맡았다. 응원단에서의 위엄을 위해 수염은 2학년 때 인중만, 3학년 때 턱수염도 기르기 시작했다(당시 가쿠슈인 고등과에는 수염에 관한 교칙은 없었다). 훗날 텔레비전 프로그램 『테쓰코의 방』에 출연하여, "고등학생이 되면서 건달처럼 행세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으며, 음주는 더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1966년 1월, 성년식을 맞아 대훈위에 서임되고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15일, 그는 자신의 애차인 프린스 스카이라인 GT-B를 운전하던 중 시부야구 진구마에의 오모테산도에서 U턴을 시도하다 오토바이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오토바이 운전자는 왼쪽 대퇴골 골절로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소년도 경상을 입었다. 도모히토 친왕은 이 사고를 계기로 "다시는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 유리코 비에게 약속하고, 운전면허증을 도쿄도 공안위원회에 반납했다.
1.2. 초기 활동 및 공적 데뷔
1968년, 그는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정치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4월부터 1970년 8월까지 2년 6개월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서 유학했다. 이 유학은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과 큰고모인 지치부노미야 세쓰코 비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는데, 모들린 칼리지는 큰아버지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재학했던 곳이기도 하다.
유학 초기에 그의 영어 실력은 'How do you do?'와 'Thank you very much.'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어학 학교 'Godmer House School'에서 3개월간 어학을 익힌 뒤 칼리지로 옮겨, 일주일에 한 번 제출하는 논문을 '열에 여섯일곱 정도의 힘으로' 끝내고 '나머지 시간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썼다'고 말했다. 그의 보증인은 케즈윅 가문의 존 케즈윅이었으며, 처가인 아소 가문도 그를 돌보아주었다.
영국 체류 중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대를 받아 버킹엄 궁전에서 에든버러 공작 필립, 당시 왕세자 찰스, 앤 공주와 만남을 가졌다. 유럽 체류 기간 중 6개월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즐겼다. 1970년 1월 5일 24번째 생일을 맞아 런던 주영 일본 대사 공저에서 가장무도회를 열었다. 이때 친구들이 "증조할아버지 메이지 천황을 닮았으니 대원수 복장을 입으라"고 권유하여, 아버지(당시 일본 제국 육군 기병 장교)로부터 기병 장교 군복을 받아 입었다. 일본 일부 신문은 이를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또한 주차 위반 벌금 독촉을 받고도 납부하지 않아 황족임에도 체포영장이 발부되기도 했다.
학위를 취득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삿포로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사무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거주했다. 그의 초봉은 4.17 만 JPY이었다. 1975년에는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 세계 해양 청소년 대회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2. 결혼과 가족
도모히토 친왕은 아소 노부코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부부 관계는 순탄치 않아 말년에는 별거 상태였다.
2.1. 결혼 생활
1972년 2월, 도모히토 친왕은 당시 16세였던 아소 노부코에게 청혼했으나, 그녀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8년 뒤인 1980년 4월 18일 황실 회의를 거쳐 약혼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7일 결혼식을 올렸다. 노부코는 아소 시멘트 회장이자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의 셋째 딸이며, 어머니는 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 총리의 셋째 딸인 아소 가즈코이다. 그녀는 또한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노부코는 결혼과 동시에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비'라는 칭호를 받았다. 친왕 부부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 아키코 여왕(彬子女王Akiko Joō일본어, 1981년 12월 20일 도쿄 출생)
- 요코 여왕(瑶子女王Yōko Joō일본어, 1983년 10월 25일 일본 적십자사 의료센터 출생)
친왕 가족은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카사카에 위치한 아카사카 어용지 내의 한 단지에서 살았다. 그러나 2009년 10월, 그의 부인 노부코 비는 남편과 딸들과 별거하여 따로 거주하기 시작했다.
2.2. 자녀 및 가정 생활
도모히토 친왕 부부는 두 딸 아키코 여왕과 요코 여왕을 두었다. 도모히토 친왕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엄격하고 세심한 면모를 보였다. 예를 들어, 맏딸 아키코 여왕이 영국으로 유학을 갈 때 "너는 세금으로 공부하는 것이니 남들보다 더 분발해야 한다"고 훈계했다고 한다. 아키코 여왕은 훗날 아버지가 자신에게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며 특별히 칭찬한 적은 없었고, 오히려 할아버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아키코의 국사관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 소식에 대해 "진무 천황 이래의 쾌거다"라고 칭찬해주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차녀인 요코 여왕은 "아버지는 성격이 너무 세심한 데가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활에서는, 도모히토 친왕은 부인 노부코 비와 서로 '논치', '도모상'이라고 부르며 애정을 표현했다. 노부코 비는 남편의 식도암을 처음 발견했으며, 투병 중에는 직접 의사와 영양사로부터 조사하여 하루 6끼를 모두 다른 메뉴로 준비해주었다. 이에 도모히토 친왕은 감탄하며 노부코 비가 요리책을 출판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7월 이후 노부코 비는 스트레스성 천식 치료를 위해 별거에 들어갔는데, 이는 도모히토 친왕이 알코올 의존증 치료 과정에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부부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2.3. 별거 및 친왕가 지위 변화
도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미카사노미야 본가와는 독립된 생계를 꾸리며 '도모히토 친왕가'를 이루어 다른 친왕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서거한 후 친왕가는 당주 부재 상태에 놓였고, 2013년 6월 10일 궁내청은 "서거 시점으로 소급하여 친왕가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원칙적으로 도모히토 친왕의 서거와 동시에 친왕가가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종전의 관례상으로는 도모히토 친왕비 노부코가 당주를 이어야 했으나, 오랜 별거와 친왕 서거 후에도 두 딸과 동거하지 않았던 상황이 고려되었다. 이에 따라 남겨진 노부코 비와 두 딸 아키코 여왕, 요코 여왕은 미카사노미야 본가로 합류하게 되었다. 또한, 도모히토 친왕의 저택도 '미카사노미야 동저'로 개칭되었다. 노부코 비는 도모히토 친왕이 서거하기 전 여러 차례 병문안을 시도했으나 '가족의 의향'에 따라 면회할 수 없었고, 장례식에도 상주 측의 의향으로 참석이 허락되지 않아 부부 간의 갈등이 사망 후까지 이어졌음이 드러났다.
3. 공무 및 사회 활동
도모히토 친왕은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공적 직책과 명예 직책을 맡으며 사회 복지, 스포츠 진흥, 국제 교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1. 복지 및 스포츠 진흥 활동
그는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1970년~1972년)과 1975년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큰아버지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장애인 복지와 스포츠 진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장애인들이 스포츠 활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했으며, 직접 지도에도 나섰다.

도모히토 친왕은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기독교 침례교 계통의 근디스트로피 장애인 복지 시설인 사회 복지법인 '아리노마마샤'(있는 그대로의 집)의 운영에 관여하는 등 시설 활동에도 참여했다. 또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장애인 복지에 대한 인식 개선에 힘썼다.
그는 사회 복지 법인인 유아이 주지카이, 아리노마마샤, 공익 재단 법인 신기술 개발 재단, 은사재단 제생회 등과 다카마쓰노미야 비 암 연구기금과 같은 의료 및 복지 관련 단체의 임원을 다수 역임했다. 또한, 그는 일본 당구 협회, 일본 직업 스키 교사 협회, 일본 학생 빙상 경기 연맹 등 스포츠 관련 단체의 임원도 많이 맡았으며, 전국 대학 럭비 풋볼 선수권 대회, 전일본 프로 포켓 당구 선수권 대회, 경륜의 '도모히토 친왕배·세계 선수권 기념 토너먼트' 등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우승컵과 트로피가 수여되기도 했다. 1987년 아오모리현에서 창설되어 매년 개최되는 '이와키 산 스키 마라톤 대회'에서는 대회 총재를 맡았을 뿐 아니라, 직접 코스 설정을 지휘하고 선수로도 출전하는 등 운영 면에서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3.2. 국제 교류 활동
영국 유학을 계기로 국제 친선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일영협회 명예 총재를 비롯해 여러 외국과의 교류에도 의욕적으로 나섰다.
- 1992년 12월, 도모히토 친왕 부부는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 의과대학에 신설된 암 병동을 지원했다.
- 1994년에는 하와이를 방문하여 쿠아키니 병원의 재건을 지원했다.
- 1994년 2월, 친왕 부부는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열린 1994년 동계 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 1998년 4월, 친왕 부부는 튀르키예를 방문하여 터키-일본 재단 문화 센터 개관식에 참석했다. 이들은 이미 1990년 일본-튀르키예 관계 100주년 기념 행사 일환으로 터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친왕은 일본 중동 문화센터에 일본 아나톨리아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2002년 10월, 2003년 6월, 2003년 10월에 세 차례 더 터키를 방문하여 후원자들을 이끌고 터키의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 1998년 6월, 도모히토 친왕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벨상 수상자인 하워드 월터 플로리 박사를 기념하는 의학 과학 재단의 기금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 같은 해 12월, 그는 태국을 방문하여 제13회 아시안 게임에 참석했다.
- 2003년 4월, 도모히토 친왕은 딸 아키코 여왕과 함께 노르웨이를 방문하여 시각 장애인 크로스컨트리 스키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석했다.
3.3. 기타 공적 직위
그는 젊은 시절 닛폰 방송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올나이트 닛폰'에서 디스크 자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무이한 경력이었다. 1975년 10월 28일 오전 1시부터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스튜디오에 앉아 위스키 온 더 록을 마시며 황실, 자신의 신상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복지 이야기 등을 비틀즈의 '헤이 주드' 같은 음악과 함께 2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당시 방송을 들은 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2시 이후로는 발음이 잘 안 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방송에서 그는 자신의 황위 계승 서열이 7위인 점을 마음에 들어 한다며 "미치코 황태자비가 더 이상 아들을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함께 출연한 구로야나기 데쓰코가 궁내청 직원들이 프로그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묻자, 그는 "딱히 뭐... 이젠 그냥 포기했겠죠, 나에 대해서는"이라고 대답했다.
1981년 11월, 그와 노부코 비는 자위대 음악제에 참석하기를 희망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황족은 자위대와 거리를 두어왔기에(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음악제는 관열식이나 관함식과는 달리 일반 대중 홍보가 주 목적이었으므로, 귀빈이 아닌 특별 초대자 대우로 준비가 이루어졌다.
4. 견해와 논란
도모히토 친왕은 황족으로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실의 미래와 사회 문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다. 특히 황위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으며, 일부 발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4.1. 황위 계승 논쟁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국 헌법상의 제약으로 인해 천황 및 황족이 여계 천황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도모히토 친왕은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복지 단체 '하쿠호카이'(柏朋会하쿠호카이일본어)의 회보 『더 토도』(ざ・とど더 토도일본어)에서 "어디까지나 공적인 지위에서가 아닌 개인적인 견해"라는 전제를 달고 여계 천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기관지는 시판되지 않았다. 여기서 도모히토 친왕은 여계 천황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옛 황족들의 황적 복귀 등을 촉구했다.
그는 "(2천 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헤이세이의 시대에 와서 그리 쉽게 바꾸어도 되는가"라며 여계 천황을 용인하자는 의견을 비판했다. 또한, "만세일계인 125대 천황의 황통이 귀중한 이유는 신화 시대의 초대 진무 천황 이래 연속해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남계'로 이어져 왔다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도모히토 친왕은 남계 계승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제시했다.
- 1947년 황적에서 이탈한 옛 황족들을 황적에 복귀시킬 것.
- 여성 황족(내친왕)에게 옛 황족(남계)으로부터 양자를 들이게 하여 그 인물에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할 것.
- 폐절된 지치부노미야나 다카마쓰노미야의 제사를 옛 황족들 중 선정하여 다시 잇도록 함으로써 궁가를 재흥시킬 것.
- 예전처럼 '측실'(즉 일부다처제) 제도를 부활시킬 것. 다만, 그는 자신(도모히토 친왕)으로서는 찬성하지만 국내외적으로 현재의 세태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이 '측실 부활' 발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훗날 그는 이 발언이 "그저 농담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한 "폐하(당시 아키히토 상왕)나 황태자 전하(당시 나루히토)는 자신들의 가계 문제이므로 직접 발언할 수 없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나라를 형성하는 '민초'의 일원으로서 2665년(신무 천황 즉위 기원, 통칭 '황기')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제대로 의견을 갖고 발언해주지 않으면, 언젠가 '천황이 필요 없다'는 논의로까지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여계 천황 용인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견을 마무리했다.
2006년 1월 3일자 마이니치 신문과 잡지 『분게이슌주』 2006년 2월호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특히 『분게이슌주』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와 황실 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가 '여계 천황 용인 방침이 천황 폐하(당시 아키히토)의 내심을 따른 것이 아닌가'라는 소문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 신중한 폐하가 여계 천황이나 장자 우선 계승에 찬성하실 리는 없다. 소문은 사실무근의 억측일 것"이라고 천황의 진의를 추측했다.
4.2. 황실 및 사회에 대한 발언
도모히토 친왕은 2007년 10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가쿠슈인 시절에는 야마노테선을 타고 통학했고,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리기도 했다"며, "그들은 가쿠슈인 교복을 발견하면 언제나 덮치곤 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했다. 또한 이 인터뷰에서 나루히토 당시 왕세자의 이른바 '인격 부정 발언'(人格否定発言인격 부정 발언일본어)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편지에 답변했다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을 텐데, 의견을 표명한 것에 대한 형식적인 답장밖에 오지 않았다"며 나루히토에게 발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의례적인 답장만 받고 사안이 진척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또한 알코올 의존증을 공표한 사실을 언급하며 "황실은 스트레스 덩어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에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4.3. 대중의 비판과 논란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 발표 이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사적 자문 기관인 '황실 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의 좌장인 깃카와 히로유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황족의 의견을 듣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라고 지적했으며, "헌법의 해석권은 유식자 회의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5년 11월 4일, 고이즈미 당시 총리는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한 기자 질문에 대해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황족으로부터 의견을 듣는 것은 헌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으며,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답했다. 같은 해 11월 7일, 유식자 회의 회의를 마친 깃카와 히로유키는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는 회의에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여계 천황 용인 자세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같은 날 고이즈미 총리 역시 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유식자 회의의 방침을 지지한다는 뜻을 비쳤다.
2005년 11월 14일, 시즈오카현 지사 이시카와 요시노부는 정례 기자회견에서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해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공감한다"고 발언했다. 나아가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졸속적인 논의에 의문을 표하며 "전통적인 국체의 근간과 관련된 것을 불과 몇 개월 만에 결론을 내리고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무 졸속적이다. 유식자 회의에는 황실 문제에 대해 오랜 세월 연구해 온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사히 신문은 2006년 2월 2일자 사설에서 『도모히토 전하, 이제 발언은 좀 자제하심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발언이자 상징 천황제라는 일본국 헌법의 대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다"라고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에 대해 산케이 신문은 다음 날인 3일 사설에서 『아사히 사설, "언론 봉쇄"를 삼가라』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주간문춘이나 주간신조도 각각 『도모히토 친왕 전하에게 "입 다물라"고 명한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의 실명과 식견』, 『도모히토 친왕 전하에게 "입 다물라" 명하는 아사히 신문은 그리도 대단한가?』 등의 주장을 내놓으며 아사히 신문을 비판했다.
1995년에는 그가 "경륜이나 경정 등에 명의를 빌려주고 해마다 1000.00 만 JPY 가까운 사례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국회에서 문제시되기도 했다. 당시 후지모리 쇼이치(藤森昭一) 궁내청 장관은 "궁가에서 쓰려던 것이 아니라 공공을 위해 기부할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도모히토 친왕은 황족으로서 외부 활동이 많았기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그를 살생부에 올려 그가 자주 다니는 이발소, 레스토랑, 화랑 등을 조사하기도 하여 신변 경비가 강화되기도 했다. 또한 황족으로서의 제약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982년에는 '황적 이탈 발언'(皇籍離脱発言황적 이탈 발언일본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시 궁내청은 그의 의사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쇼와 천황은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황실에 대한 기대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파악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5. 건강 문제와 사망
도모히토 친왕은 오랜 기간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았으며, 특히 암과 알코올 의존증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5.1. 장기간의 투병 생활
도모히토 친왕은 1990년대부터 암과 알코올 의존증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1991년 1월, 그는 처음으로 식도암 수술을 받았다. 1995년까지 혀뿌리, 목의 림프절, 후두 등에서 총 6차례에 걸쳐 암 수술을 받았으며, 이러한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1999년 투병기 『암을 말하다』(癌を語る암을 말하다일본어)를 출판했다.
2006년 9월 16일에는 세수하던 중 넘어져 턱뼈가 골절되었는데, 이는 화학 요법 치료로 인해 뼈가 약해진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또한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2010년 1월 8일에는 5번째 입원). 입원 중에도 병원에서 공무에 출석하여, "삐져서 안 나오는 거냐"는 발언과 같이 행동력과 예리한 발언력을 여전히 보여주었다.
당초 한 달로 예정되었던 입원은 3주 만에 퇴원했다. 그해 10월 20일에는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를 진행할 정도로 회복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인두암이 발견되어 2008년 3월에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은 목소리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나,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게 되면서 4월에 폐렴이 발병하여 재입원했다. 이때 목의 일부를 막는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대를 진동시키는 공기의 통로가 막혀 목소리를 잃었다. 이후 그는 공무를 볼 때 전기식 인공 후두를 목에 대고 대화해야 했다.
2010년 8월 19일에는 부정맥 치료로 입원했고, 9월 정기 검진에서 목에 새로운 암이 발견되어 12월 14일 내시경 수술을 받았다. 2011년 2월에는 폐렴으로 입원했으며, 7월 8일에는 중인두 상피에서 발견된 암 절제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1991년 이후 암 관련 수술 및 치료는 이때까지 총 14차례에 달했다.
2012년 1월에는 인후에서 또 종양이 발견되어, 사사키 연구소 부속 교운도 병원(당시)에서 1월 10일, 7시간 30분에 걸쳐 종양과 주변 림프절 적출 및 결손 부위 복부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세포 조직 검사 결과, 의사단은 도모히토 친왕의 병세가 '인후암 재발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3월에는 식사를 방해하던 목의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다. 1991년 1월 암 발견 이후 21년간, 암 수술 및 치료는 총 16차례에 이르렀다.
5.2. 사망과 장례
2012년 6월, 그의 목에서 두 차례 출혈이 발생하여 수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6월 4일 밝혀졌다. 다음 날인 6월 5일, 궁내청은 도모히토 친왕의 신장, 폐, 간 기능이 저하되어 의식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결국 2012년 6월 6일 15시 35분, 그는 입원 중이던 도쿄도 지요다구의 사사키 연구소 부속 교운도 병원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서거했다. 향년 66세였다. 궁내청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사망 원인을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발표했다.
그의 장례식인 '斂葬의 儀'는 같은 해 6월 14일에 거행되었으며, 상주는 장녀인 아키코 여왕이 맡았다. 장례식에는 약 660명이 참석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오치아이 사이조에서 화장되었고, 도시마가오카 묘지에 안장되었다.
5.3. 사후 친왕가의 지위
도모히토 친왕이 서거한 후, 그의 가족은 2013년 6월 11일 궁내청의 발표에 따라 미카사노미야 본가로 통합되었다. 이는 황족 수가 한 명 줄었음을 의미하지만, 그의 아내와 딸들의 생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궁내청 관계자는 밝혔다.
6. 개인 생활과 성격
도모히토 친왕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다양한 취미와 일화들은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6.1. 일상생활과 취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키, 소프트볼 등 스포츠에 열중했다. 특히 스키는 고등학교 때 1급 자격증을 딸 정도로 뛰어났으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로 유학 기간 중 6개월을 스키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당구와 럭비에도 조예가 깊어 관련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황족으로서 대외 활동이 잦았으며, 닛폰 방송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올나이트 닛폰'에서 직접 디스크 자키를 맡았던 것은 그의 자유롭고 파격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한 그는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며 자신의 견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6.2. 성격과 일화
도모히토 친왕은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는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한 유명 클럽에서 "화장실이 더러워서 내가 닦아놨다"고 말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소탈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된다.
그는 부부 관계에 있어 아내 노부코 비와 서로 '논치', '도모상'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을 정도로 가까웠으나, 성격 차이와 그의 알코올 의존증 치료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인해 말년에는 별거에 들어섰다. 노부코 비는 그가 서거하기 전 여러 차례 병문안을 시도했으나 면회하지 못했고, 장례식에도 상주 측의 의향으로 참석이 허락되지 않아 황실 내 갈등이 외부로 드러나기도 했다.
차녀 요코 여왕은 아버지 도모히토 친왕에 대해 "성격이 너무 세심한 데가 있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1977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테쓰코의 방'에서 자신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담배를 피우고 음주를 했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등, 그는 황족으로서의 체면보다는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7. 저작
도모히토 친왕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여러 권의 단독 저서 및 공저를 출간했다. 그의 저서들은 자전적인 이야기, 투병 경험, 그리고 황실과 사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담고 있다.
7.1. 단독 저서
- 『도모상의 영국 유학』(トモさんのえげれす留学도모상의 영국 유학일본어) (분게이슌주, 1971년)
- 『황족의 혼잣말』(皇族のひとりごと황족의 혼잣말일본어) (후타미 쇼보, 1977년)
- 『눈은 친구: 도모상의 장애인 스키 교실』(雪は友だち : トモさんの身障者スキー教室눈은 친구: 도모상의 장애인 스키 교실일본어, 고분샤, 1985년 3월 15일)
- 『털보 전하 일기』(ひげの殿下日記털보 전하 일기일본어) (쇼가쿠칸, 2022년)
7.2. 공저
- 『추억의 쇼와 천황: 가까이서 뵌 천황 폐하의 본모습』(思い出の昭和天皇 おそばで拝見した素顔の陛下추억의 쇼와 천황: 가까이서 뵌 천황 폐하의 본모습일본어) (고분샤, 1989년 12월)
- 야마다 도미야, 사와치 히사에와 공저, 사이토 다케시 인터뷰: 『생명의 시간』(いのちの時間생명의 시간일본어) (신초샤, 1995년). (신초 문고판: 1998년)
- 『암을 말하다』(癌を語る암을 말하다일본어) (슈후노토모샤, 1999년)
- 가세 히데아키, 사쿠라이 요시코, 고보리 게이이치로 인터뷰: 『황실과 일본인: 도모히토 친왕 전하께 여쭙습니다』(皇室と日本人--寬仁親王殿下お伺い申し上げます황실과 일본인: 도모히토 친왕 전하께 여쭙습니다일본어) (메이세이샤, 2006년)
- 구도 미요코 인터뷰: 『황족의 "공"과 "사": 추억의 인물, 추억의 시간』(皇族の「公」と「私」-思い出の人、思い出の時황족의 "공"과 "사": 추억의 인물, 추억의 시간일본어) (PHP 연구소, 2009년)
- 『이제 베일을 벗다: 젠틀맨의 극의』(今ベールを脱ぐ ジェントルマンの極意이제 베일을 벗다: 젠틀맨의 극의일본어) (쇼가쿠칸, 2010년), 친구 3명(구로스 도시유키, 구로카와 미쓰히로, 핫토리 스스무)과의 신사복 담론.
8. 칭호, 영예 및 공식 표기
도모히토 친왕은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칭호와 영예를 부여받았으며, 그의 공식 표기 방식 또한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8.1. 칭호와 공식 표기
도모히토 친왕은 신위가 친왕이며, 《황실전범》에 따른 경칭은 '전하'이다. 일본 황통보(皇統譜)상 표기는 '寬仁親王'이며, 일본 정부의 공식 표기 및 본인의 저술 활동에서는 구자체가 사용되었으나, 신문 등에서는 신자체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생전 도모히토 친왕은 결혼을 계기로 독립된 생계를 꾸렸지만,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사자(嗣子)였기에 미카사노미야를 계승할 자로 여겨져 따로 궁호를 받지는 않았다. 언론 보도에서 종종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님'과 같은 일본식 황족 경칭이 사용되었지만, 궁호는 일반 국민의 '성씨'처럼 동일 호적 내 가족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므로, 당주 이외의 황족에게 '○○미야'를 붙이는 것은 본래 정식 호칭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오용은 나루히토의 조카인 히사히토 친왕을 비롯한 다른 황족에 대한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2001년 12월, 장녀 아키코 여왕의 성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주요 신문들이 아키코 여왕을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님(さま)의 장녀 아키코 님'이라고 기재한 것에 대해, 친왕은 자신이 총재를 맡고 있는 일본 직업 스키 교사 협회의 홍보지 '총재 칼럼'에서 "나는 '미카사노미야'(아버지의 궁호)가 아니고 '도모히토 친왕'이며, 아키코는 신위가 '여왕'으로 경칭은 '전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정확하게는 '도모히토 친왕 전하의 제1녀 아키코 여왕 전하께는......'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직접 밝혔다. 또한 '가시와도모카이'(柏朋会하쿠호카이일본어)의 회보 『더 토도』(ざ・とど더 토도일본어)에서도 농담조로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이 아니라 '도모히토 친왕'이 맞다"고 기술했다.
1947년 10월 14일, 다이쇼 천황의 직계를 제외한 11개 궁가 51명의 옛 일본 황족들이 황적 이탈하기 전에는 궁가의 수가 많았고, 도모히토 친왕처럼 '사자로서 굳이 궁호를 받지 않았던 친왕·왕'이 있는 궁가가 많아 그러한 '사자에 해당하는 친왕이나 왕'을 '○○와카미야'(若宮, 젊은 궁님)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으나, 현행 일본 헌법하에서는 이 호칭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한편 정부의 정식 표기(내각 고시나 궁내청 고시 등)에서는 도모히토 친왕뿐 아니라 황족에게 궁호가 주어지는 일은 없기(황태자 제외), 관보에서의 표기는 반드시 '도모히토 친왕'(비의 경우는 '도모히토 친왕비 노부코')으로 기재되며 '미카사노미야'가 붙는 일은 없다. 그러나 매스 미디어에서는 '알기 쉬움'을 위해 '(쇼와 천황의 동생인 다카히토 친왕이 창설한) 미카사노미야 가의 도모히토 님'이라고 보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8.2. 국내외 영예
도모히토 친왕은 일본 국내외에서 다양한 영예와 훈장을 받았다.
- 일본 국내 영예
- 대훈위국화대수장 (1966년 1월 5일 수여)
- 외국 영예
-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기사 (1982년 3월 9일 수여)
8.3. 명예 학위 및 직위
도모히토 친왕은 학술 및 사회 각 분야에서 여러 명예 학위와 명예 직책을 맡았다.
- 명예 학위
- 앙카라 대학교 명예 박사
- 명예 직위
- 사회 복지 단체 유아이 주지카이 회장
- 아리노마마샤 회장
- 사회 복지 단체 은사재단 제생회 회장
- 신기술 개발 재단 회장
- 다카마쓰노미야 비 암 연구기금 회장
- 일본 당구 협회 회장
- 일본 직업 스키 교사 협회 회장
- 대학 빙상 및 아이스하키 연맹 회장
- 일본-튀르키예 협회 회장
- 일본 중동 문화 센터 회장
- 일본 럭비 풋볼 협회 명예 회장
- 일본-영국 협회 명예 회장
- 노르웨이-일본 협회 명예 회장
9. 가계
도모히토 친왕의 가계는 일본 황실의 중요한 흐름을 보여주며, 그의 혈통은 메이지 천황과 다이쇼 천황으로 이어진다.
9.1. 조상
도모히토 친왕은 다이쇼 천황의 황손이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으로, 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도모히토 친왕 | 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 조부: 다이쇼 천황 |
---|---|---|
조모: 데메이 황후 | ||
모: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 | 외조부: 다카기 마사나리 자작 | |
외조모: 다카기 구니코 |
도모히토 친왕의 부계 혈통은 다음과 같다.
- 진무 천황 (전승에 따르면 초대 천황)
- 게이타이 천황 (450년 ~ 534년)
- 긴메이 천황 (509년 ~ 571년)
- 비다쓰 천황 (538년 ~ 585년)
- 오시사카 황자 (556년경 ~ 미상)
- 조메이 천황 (593년 ~ 641년)
- 덴지 천황 (626년 ~ 671년)
- 시키 황자 (미상 ~ 716년)
- 고닌 천황 (709년 ~ 786년)
- 간무 천황 (737년 ~ 806년)
- 사가 천황 (786년 ~ 842년)
- 닌묘 천황 (810년 ~ 850년)
- 고코 천황 (830년 ~ 867년)
- 우다 천황 (867년 ~ 931년)
- 다이고 천황 (885년 ~ 930년)
- 무라카미 천황 (926년 ~ 967년)
- 엔유 천황 (959년 ~ 991년)
- 이치조 천황 (980년 ~ 1011년)
- 고스자쿠 천황 (1009년 ~ 1045년)
- 고산조 천황 (1034년 ~ 1073년)
- 시라카와 천황 (1053년 ~ 1129년)
- 호리카와 천황 (1079년 ~ 1107년)
- 도바 천황 (1103년 ~ 1156년)
- 고시라카와 천황 (1127년 ~ 1192년)
- 다카쿠라 천황 (1161년 ~ 1181년)
- 고토바 천황 (1180년 ~ 1239년)
- 쓰치미카도 천황 (1196년 ~ 1231년)
- 고사카 천황 (1220년 ~ 1272년)
- 고후카쿠사 천황 (1243년 ~ 1304년)
- 후시미 천황 (1265년 ~ 1317년)
- 고후시미 천황 (1288년 ~ 1336년)
- 고곤 천황 (1313년 ~ 1364년)
- 스코 천황 (1334년 ~ 1398년)
-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1351년 ~ 1416년)
-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1372년 ~ 1456년)
- 고하나조노 천황 (1419년 ~ 1471년)
- 고쓰치미카도 천황 (1442년 ~ 1500년)
- 고카시와바라 천황 (1464년 ~ 1526년)
- 고나라 천황 (1495년 ~ 1557년)
- 오기마치 천황 (1517년 ~ 1593년)
- 마사히토 황자 (1552년 ~ 1586년)
- 고요제이 천황 (1572년 ~ 1617년)
- 고미즈노오 천황 (1596년 ~ 1680년)
- 레이겐 천황 (1654년 ~ 1732년)
- 히가시야마 천황 (1675년 ~ 1710년)
- 간인노미야 나오히토 친왕 (1704년 ~ 1753년)
- 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 (1733년 ~ 1794년)
- 고카쿠 천황 (1771년 ~ 1840년)
- 닌코 천황 (1800년 ~ 1846년)
- 고메이 천황 (1831년 ~ 1867년)
- 메이지 천황 (1852년 ~ 1912년)
- 다이쇼 천황 (1879년 ~ 1926년)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 도모히토 친왕
9.2. 후손
도모히토 친왕과 노부코 비 사이에는 두 명의 딸이 있다. 두 딸 모두 서거 후 미카사노미야 본가로 합류했다.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
아키코 여왕 | 1981년 12월 20일 | ||
요코 여왕 | 1983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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