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하산은 1856년 소말리아 사회의 부족 구조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 종교적 수련을 거쳐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민족적 자각을 형성했습니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하산은 1856년 4월 7일 하우드의 부후들레 근처 사크마디코 호수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부에서는 소말리아 북부 키리트 출생설도 제기됩니다. 소말리족에게 가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의 증조부 셰이크 이스만은 다로디족의 지파인 오가덴족 출신으로, 셰벨리강 하류의 바르데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스만은 훗날 주바강 연안의 바르데라로 이주했습니다. 무함마드의 할아버지 하산 누르는 소말리아 북동부(후일 영국령 소말릴란드 동부)의 둘바한테족 거주지로 이주하여 여러 종교 시설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딜도 셰이크가 되었으며, 둘바한테족 여성들과 결혼하여 3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티미로 사데는 둘바한테족의 지파인 알리 게리족 출신으로, 이 씨족은 오가덴족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압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가계는 오가덴족 바 게리족의 레르 하마르에 속하지만, 둘바한테 유목민으로 성장했습니다. 둘바한테 유목민은 낙타와 말을 다루는 데 능숙했으며 전사로서도 뛰어났습니다. 무함마드는 특히 외조부 사데 모간을 존경했습니다. 무함마드는 11세에 쿠란을 암송하여 하피즈로 인정받는 등 뛰어난 기수였으며, 이후에도 종교적 학문을 계속하여 19세에 셰이크 칭호를 얻었습니다.
1.2. 교육과 종교적 수련
1875년 할아버지가 급사한 해에 무함마드는 쿠란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후, 그는 이슬람교 연구를 위해 직업을 그만두고 하러르, 모가디슈, 수단 등을 순회했습니다. 무함마드가 사사한 스승은 소말리족과 아랍인을 포함하여 72명에 달합니다. 1891년, 무함마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오가덴족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3년 후, 30세가 된 무함마드는 두 명의 삼촌을 포함한 13가족과 함께 메카로 하즈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메카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수단 출신의 신비주의자 모하메드 살리흐에게 배웠습니다. 모하메드 살리흐는 '살리히야의 가르침'(Saalihiya영어)을 전수했으며, 무함마드는 이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3. 초기 활동과 사상 형성
1895년, 무함마드는 소말리아로 돌아와 북부 해안 도시 베르베라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소말리아 북부의 족장들은 영국과 개별적으로 협정을 맺고 있었고, 무함마드가 오기 10년 전부터 거의 영국령 소말릴란드와 다름없었습니다. 베르베라는 대안의 예멘 아덴을 통해 인도에 식육을 수출하여 '아덴의 정육점'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무함마드는 베르베라에서 살리히야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교단(후일 살리히야단)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일행은 사람들에게 카트와 양 꼬리 지방 섭취를 중단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베르베라에서는 살리히야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베르베라의 기성 카디리야파 타리카는 곧 새로운 타리카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살리히야 교단의 가장 저명한 셰이크는 이스마일 이븐 이샤크 알-우르와이니와 1895년 베르베라에 도착하여 자신만의 모스크를 짓고 포교를 시작한 다라위시 에미르 하산(영국인들은 '미친 물라'라고 불렀음)이었습니다. 그는 카트와 씹는 담배를 강력히 반대했는데, 이 두 가지는 카디리야파가 허용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른 논쟁들 중에서도 그는 아우 가스와 하지 이브라힘 히르시를 포함한 베르베라의 주요 카디리야 셰이크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1897년 소말리 카디리야의 지도자인 셰이크 마다르가 논쟁에 초청되었고, 격렬한 토론 끝에 카디리야 타리카가 승리하고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은 반박당했습니다. 영국 당국은 이러한 소요와 혼란을 주시했고, 그는 결국 도시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분열은 깊었고 양측은 서로를 이단으로 비난했습니다. 하산은 이 논쟁이 있은 지 불과 2년 만에 카디리야 현상 유지에 대한 반박의 일환으로 살리히야를 기반으로 한 다라위시 운동을 결성했습니다.
1897년, 무함마드와 살리히야단은 둘바한테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베르베라를 떠났습니다. 도중 무함마드는 가톨릭교회의 보살핌을 받는 소말리족 고아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나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소말리아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또한 1899년, 무함마드는 영국군 병사를 만나 그들에게서 총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총은 영국군이 병사에게 대여한 것이었고, 병사는 상사에게 총을 판 것이 아니라 도난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영국군 하사관이 무함마드에게 총을 돌려달라는 고압적인 문서를 보냈고, 무함마드는 이에 분노하여 자연스럽게 그의 포교 활동은 영국과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 비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정부와 영국 행정부는 무함마드의 포교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1899년 3월, 소말리 아덴 경찰의 전직 대원이자 퍼시 콕스(1893~1895년 제일라와 베르베라의 전 영사-주재관)의 소말릴랜드 탐사대 가이드였던 두왈레 히르시가 코브 파르도드의 타리카에 소총을 훔쳐 팔았다고 알려졌습니다. 해안의 부영사 해리 에드워드 스필러 코르도는 코브 파르도드의 물라들에게 소총 반환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아흐메드 아단이라는 소말리 기마 경찰관이 전달했습니다.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온 아단은 코르도와 인터뷰를 했고, 다음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아단은 그곳에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친척이었습니다. 그의 처남인 두알레 아오렙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단이 그들에게 소총이 있는지 묻자, 처음에는 6정밖에 없었지만 하푼에서 55정을 새로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단은 새로 받은 소총 중 2~3정을 보았는데, 모두 새 마틴 소총이었습니다. 그들은 14발짜리 소총이 한두 정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단은 일부 물라들이 스나이더 소총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셰이크 자신과 일부 물라들은 매일 표적 사격 연습을 했고, 나무에 방패를 세워두었습니다. 아단은 매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 중 일부는 좋았고 다른 일부는 나빴습니다. 그들은 아단을 카피르(불신자)라고 부르며 아단의 제복을 비웃고, 왜 정부 옷을 입었는지 물었습니다. 그곳에는 둘바한테, 하브르 톨자알라, 하브르 유니스 등 모든 부족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흐메드 아단의 인터뷰에서 특히 드러나는 것은 소말리인 살란이 전달한 또 다른 편지로 인해 발생한 혼란입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타리카의 물라들을 격노시켰습니다.
"셋째 날, 물라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종종 집에 오곤 했다. 나는 그에게 갔고, 그는 내가 가져온 편지에 대한 답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방금 소말리인이 가져온 또 다른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그것에 대해 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고, 누가 가져왔는지 물었다. 그는 "소말리인"이라고 말했다. 살란이라는 사람이 그날 왔다. 나는 그가 편지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가져온 편지의 뒷면에 쓰여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정부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셰이크)는 "이것이 당신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다른 편지에 대한 답장은 내일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 편지에 "나쁜 말"이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나에게 두 통의 편지를 주었고, 나는 떠나 토요일 밤에 베르베라에 도착했다."
두 번째 편지는 물라들을 자극했고, 답장의 적대적인 어조는 소말리인 살란이 가져온 모욕적인 두 번째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소총에 관한 간결하지만 비교적 무해한 답장과 혼란스러운 무례한 두 번째 편지에 대한 답장 모두 영국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2. 다라위시 운동 및 저항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하산은 종교적 신념과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바탕으로 다라위시 운동을 조직하여 소말리아의 독립을 위한 저항 활동을 이끌었으며, 이는 그의 리더십과 군사 전략을 보여줍니다.

2.1. 다라위시 운동의 형성
총영사 제임스 헤이스 새들러에 따르면, 다라위시 반란과 21년간의 소요를 촉발시킨 소식은 하브르 유니스의 술탄 누르 아흐메드 아만에 의해 퍼지거나 조작되었습니다. 문제의 사건은 1899년 베르베라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회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되어 입양된 소말리 어린이 집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술탄 누르가 이 사건을 직접 경험했는지 아니면 전해 들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가 1899년 6월 코브 파르도드의 타리카에서 이 사건을 전파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습니다. 1899년 데리아 하산 술탄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사예드 하산은 영국이 "우리의 종교를 파괴하고 우리의 아이들을 그들의 아이들로 만들었다"고 말하며, 술탄 누르가 베르베라의 로마 프랑스 선교회와 겪은 사건을 암시했습니다. 다라위시는 곧 기독교 활동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 부상하여 기독교 선교에 맞서 이슬람교의 자신들의 버전을 옹호했습니다.
무함마드는 연설과 시를 통해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 문화를 파괴하고 소말리족 아이들을 기독교화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와 영국의 동맹이 소말리아에 위협이 된다고 언급하며, 기독교도 침략자들로부터 이슬람의 위기를 수호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며 이는 지하드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소말리족이 일치단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며, 함께 싸우지 않는 자는 불신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무함마드는 부르코를 거점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국내 통일을 선언하고, 튀르키예와 수단에서 무기를 확보하며 소말리아 각지의 지지자들을 다라위시 국가의 관리로 임명했습니다. 무함마드는 군사 조직도 정비하고, 이슬람 수행승 다르비시를 본떠 청빈을 중시하며 자신의 나라도 다라위시(Daraawiish)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성격은 살리히야단의 조직을 기초로 한 엄정한 계급제 중앙집권 국가였습니다.
무함마드는 기독교도들을 바다로 몰아낼 것을 선언하고, 먼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을 소총 20정으로 무장한 1,500명의 병력으로 공격했습니다. 나아가 소말리아 전역의 소말리족에게 사절을 보내 참여를 촉구하고, 예멘에도 사절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2.2. 다라위시 국가 수립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다라위시의 수도는 일리그에서 누갈 중심부의 탈레로 옮겨졌으며, 이곳에서 다라위시는 거대한 석조 요새 3개와 여러 채의 가옥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 소외된 씨족 출신의 새로운 경비병들을 두었습니다. 1913년까지 다라위시는 소말리반도의 전체 내륙 지역을 지배하며 질달리(Jildali)와 미라시(Mirashi)에, 그리고 오가덴의 워더와 남부 소말리아의 베레트웨인에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2.3. 영국, 이탈리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1900년, 에티오피아에서 파견된 일단은 무함마드를 생사 불문하고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일환으로 오가덴족의 모하메드 수베르로부터 다수의 낙타를 약탈했습니다. 수베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무함마드는 3월 4일, 지지가에서 에티오피아 일단을 공격하여 약탈당한 낙타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무함마드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주변의 평판도 높아졌습니다. 6월이 되자 무함마드는 영국과 협력 관계에 있던 소말리족 이사크족 지파의 일파를 습격하여 낙타 약 2,000마리를 약탈했습니다. 이 전투들의 승리로 무함마드는 오가덴족 사이에서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무함마드는 오가덴족의 유력한 족장의 딸과 결혼했고, 여동생 토히야 셰이크 압딜을 오가덴족 모하메드 수베르족의 유력자 압디 모하메드 왈레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독재적인 방식에 불만을 품은 모하메드 수베르의 족장 후센 히르시 달라 일제흐가 무함마드 일행을 습격하여 다라위시 국가의 수상이었던 친구 아우 압바스가 살해당하고 무함마드는 도망쳤습니다. 몇 주 후, 모하메드 수베르족은 화해하기 위해 사절 32명을 보냈지만, 무함마드는 이들을 체포하여 전원 처형했습니다. 이에 놀란 모하메드 수베르족이 에티오피아의 원조를 요청하자, 무함마드 일행은 근거지를 영국령 소말릴랜드 동부의 누갈로 옮겼습니다.
누갈로 옮긴 무함마드는 둘바한테족으로부터 병력을 모아 세력을 회복했습니다. 이때부터 무함마드는 사예드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00년 말,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는 영국에 공동으로 다라위시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영국은 이에 응하여 스와인 중령에게 유럽인 고문 20명과 소말리 병사 1,500명을 주어 1901년 5월 22일 영국령 소말릴랜드 중부 도시 부르코에서 출발했습니다. 에티오피아도 이에 맞춰 병사 1만 5천 명을 보냈습니다. 이에 맞서는 다라위시군은 병력 2만 명이었고, 그 중 40%가 기병이었습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는 다라위시군이 우세하여 영국군과 에티오피아군, 나아가 이탈리아군에게까지 큰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는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 전쟁을 치르느라 소말리아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세로 인해 무함마드를 종교적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다른 소말리족들도 속속 무함마드에게 협력을 표명했습니다.
1904년 1월 9일, 영국 장군 찰스 에거튼이 지달레 평원에서 다라위시군 7천 명을 살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무함마드 일행은 마제르텐족의 지배지로 도망쳐 3월 21일 일리그(현 에일)에 도착했으며, 이후 몇 년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1910년경에는 무함마드의 횡포에 분노한 600명이 큰 나무 아래에서 비밀리에 모여 타리카의 수장 셰이크 살라로부터 무함마드를 파문하는 추방 서한을 받은 후 무함마드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의 이탈은 사예드를 약화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때 그는 '나쁜 조언의 나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무함마드 일행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무함마드 일행의 본거지인 누갈을 이탈리아의 보호 하에 두는 조건으로 자치권을 인정하여 영국과 무함마드는 일시적으로 화해했습니다.
무함마드는 소말리아 남부에서도 협력자를 모집하여 다로디족의 지파인 마레한족을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레한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바르데라에서 도로에 이르는 주바강 유역과 그 남쪽에 있는 타나강 사이 지역으로, 이 협력을 통해 소말리아 남부도 다라위시의 영역에 포함되었습니다. 다만 마레한은 지파 간의 세력 관계가 복잡하여, 마레한의 지파 레르 구리는 주바강에서 타나강에 이르는 초원에서 방목 생활을 했지만, 북부에 거주하는 다른 마레한 지파 갈티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습니다. 또한 게도주 북부에서 수장을 맡고 있던 알리 데레와 레르 구리는 협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마레한은 그동안 큰 전투와는 무관했기 때문에 영국군이나 에티오피아를 후방에서 견제할 만한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출신 씨족인 오가덴에 대해서도 모든 부족으로부터 협력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무함마드와 영국의 전쟁은 1908년에 재개되었습니다. 1910년부터 1914년 사이, 무함마드는 거점을 누갈 지역의 일리그에서 탈레로 옮겼습니다. 무함마드는 탈레에 석조 요새 3개를 짓고, 자신을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건설했습니다. 다라위시는 1913년까지 왈산갈리족이 거주하는 질달리에서 미라시(현 소말리아 북부), 오가덴족이 거주하는 워더에서 쿼라히(Gorahai)(현 에티오피아), 베레트웨인(현 소말리아 중부) 등 각지에 요새를 건설하여 소말리족 거주 지역의 거의 전부를 지배했습니다. 1913년 8월 9일, 영국령 소말릴랜드의 주요 도시 부르코에서 서남쪽으로 48280 m (30 mile) 떨어진 '검은 언덕'에서 이사크족의 지파 하바르 요니스족이 만든 소말릴랜드 낙타 경비대 110명을 습격하여, 대장인 영국인 리처드 코필드 대령을 포함한 57명을 사상시켰습니다. 무함마드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리처드 코필드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습니다. 같은 해, 다라위시는 과거 처음으로 포교 활동을 했던 도시 베르베라를 습격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1914년, 영국은 다라위시에 대항하기 위해 경비대를 확장하여 소말릴랜드 낙타 부대를 창설했습니다. 에이드리언 카튼 드 위아르트와 헤이스팅스 이스메이를 참모로 둔 영국군 본대도 주둔하고 있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철수했습니다. 무함마드 일행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오스만 제국과 독일의 협력을 얻어 영국의 시설을 공격했습니다. 영국이 석조 기지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 일행은 이곳을 습격하여 약탈과 살해를 자행했습니다. 또한 당시 베르베라 서쪽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이 이곳에서 철수했습니다.
2.4. 종교적 및 내부 갈등
경쟁 관계에 있는 카디리야파 학파의 주요 셰이크들에게 반박당한 후 베르베라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라와 출신의 저명한 셰이크 우와이스 알-바라위와 사예드 사이에 격렬한 시가 오갔는데, 우와이스는 1908년 베나디르 반란의 지도자였습니다. 우와이스는 다음과 같은 카시다를 낭송하며 사예드를 비판했습니다.
- صل على محمد واله واصرف بهم من كل سوء داهيه
- من اقتدى محمدا بشرعه لا يقتدى جماعة الشيطانية
- هم المبيحون دماء العلما والمال والحريم هم إباحيه
- ويمنعون الدرس للعلوم كالفقه والنحو هم الكراميه
- بكل شيخ مات كالجيلاني لا يتوسلون كالجناحيه
- لا يقتدرون خلف من له شعر سيماهم التحليق كالوهابيه
- ويشترون الجنة بمال في دارنا جهرا هم الكلابيه
- ويختلون بالحريم للإجا زة كأمهم فذا سفاحيه
- يتبعون رأيهم لا كتبنا ويدعون النور من بلاسيه
- ويفعلون النكر في ذكرهم فعلا وقولا يقتضي كفرانيه
- كاللعب قائلين أألله شكا به جلهم الشماليه
- لهم ضجيج وأنين وحنيــــــــن وفحيح كالكلاب الناحيه
- ويكثرون الحلف بالطلاق وينكرون الكلفة الالهيه
- ضلوا وأضلوا العباد في الثرى برا وبحرا اي من السماليه
- أليس ذو لب وفهم يغترر بهم ففر عنهم كالدواهيه
우와이스 알 바라위의 살리히야에 대한 카시다에서:
- 무함마드(사예드)와 그의 가족에게 기도하고, 그들을 통해 모든 악한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그의 율법을 통해 무함마드(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방한 자들은 사탄의 파벌을 따르지 않습니다.
- 그들은 울라마의 피와 재산과 여성을 허용하는 자들, 그들은 방탕한 자들입니다.
- 그들은 법학과 문법과 같은 학문 연구를 금지하며, 그들은 혐오스러운 자들입니다.
- 알-질라니와 같이 죽은 모든 셰이크를 통해 그들은 죄의 파벌처럼 간청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를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특징은 와하브파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입니다.
- 그들은 우리 땅에서 공개적으로 돈으로 천국을 거래하며, 그들은 개의 종파입니다.
- 그들은 허가를 받기 위해 여성들과 희롱하며, 마치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행동하니, 이는 간통입니다.
- 그들은 우리의 책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따르며, 사탄의 파벌에서 빛을 주장합니다.
-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지크르에서 부정적인 행동과 말을 하며, 이는 신성모독을 요구합니다.
- 마치 그들의 게임처럼 "그것이 신인가?"라고 말하며, 그들(다라위시)의 북부 파벌은 그들을 찬양합니다.
- 그들은 울부짖는 개처럼 소란을 피우고, 신음하고, 한숨 쉬고, 헐떡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자주 이혼 맹세를 사용하며, 알라의 의식을 거부합니다.
- 그들은 길을 잃었고, 소말리인 중 누구든지 육지와 바다에서 사람들을 길을 잃게 합니다.
- 이성과 이해를 가진 자가 그들에게 속지 않습니까?
- 그러니 재앙에서 벗어나듯 그들에게서 도망치십시오.
긴 답변과 함께 사예드는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배교한 배교자들(카디리야파)의 말,
선지자의 길, 곧은 길에서 벗어난 자들,
왜 그토록 명백한 진실이 너희에게는 숨겨져 있는가?"
이러한 논쟁은 양측 모두에서 타크피르 또는 배교 비난으로 이어졌고, 1909년 다라위시에 의한 우와이스의 살해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셰이크 우와이스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사예드는 마지막 시 '보라, 마침내 우리가 늙은 마법사를 죽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로 우와이스의 죽음을 조롱했습니다.
1909년경, '나쁜 조언의 나무'("Anjeel tale waa"영어)라고 불리게 된 큰 나무 아래 비밀 회의에서 약 400명의 다라위시 추종자들이 물라를 파문하는 타리카 수장 셰이크 살라의 추방 서한을 받은 후 물라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의 이탈은 사예드를 약화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때 그는 '나쁜 조언의 나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습니다.
3. 사상과 시
사예드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의 사상은 그의 종교적 배경과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비말족에게 보낸 서신인 '리살라 릴-비말'(Risala lil-Bimal영어)에서 무슬림 사상가이자 종교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생각을 가장 광범위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서신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비말족은 수적으로 강력하고, 전통적으로 종교적으로 헌신적인 용맹한 전사들이며,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있어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을 매료시켰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비말족은 19세기 첫 10년 동안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광범위하고 대규모의 저항을 펼쳤습니다. 이탈리아는 강력한 비말족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원정대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비말족은 다라위시 투쟁에 동참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이를 통해 사예드는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 사예드는 전략적 항구 도시인 메르카와 그 주변을 지배하던 비말족에게 상세한 신학적 성명을 제출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남부로 '다라위시즘'(반란을 의미하게 됨)이 확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던 베나디르의 강력한 비말족은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의 종교적 메시지를 따르거나 그의 견해를 고수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표와 정치적 전술을 크게 이해했습니다. 이 경우 다라위시는 비말족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데 관여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비말족의 반란을 종식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말-다라위시 동맹을 막으려 했으며, 이는 그들이 오비아와 미제르텐족의 병력을 예방책으로 사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시는 민족주의적 메시지와 사회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주요 시로는 리처드 코필드 대령의 죽음을 기념한 '리처드 코필드의 죽음'과 내부 갈등으로 인한 이탈을 다룬 '나쁜 조언의 나무', 그리고 '하단 와예이'(Haddaan waayey소말리어), 종교적 민족주의적 호소인 '마카시야 우운카'(Maqashiiya uunka소말리어), 배신과 예절을 다룬 '아프바카일레'(Afbakayle소말리어), 관용을 다룬 '마리야마 시이크'(Mariyama Shiikh소말리어), 식민주의자들이 지불하는 봉급 뒤에 숨겨진 악의를 다룬 '다르다란'(Dardaaran소말리어) 등이 있습니다.
4. 말년과 죽음

1920년 초, 영국군은 잘 조율된 공중 및 지상 공격으로 다라위시 정착지를 강타하여 엄청난 패배를 안겼습니다. 다라위시의 요새는 손상되었고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다라위시는 아비시니아의 오가덴 영토로 후퇴하여 하브르 유니스의 보호를 받던 오가덴 바 하와들레 씨족을 습격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응하여 레르 차이나셰의 모하메드 불랄레는 3,000명의 전사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군대는 토그데르에서 출발하여 1920년 7월 20일 새벽, 다라위시가 진을 치고 있던 시넬레에 도착하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약 800명에 달하던 다라위시는 빠르게 패배하여 700명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소수의 생존자들은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는 패배한 다라위시로부터 낙타 60,000마리와 소총 700정을 노획했습니다. 그러나 전투 도중 하지 와라베는 하산의 천막으로 들어갔지만, 하산의 차가 여전히 뜨거운 채로 천막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도망자가 된 물라는 오가덴의 메마른 황무지로 계속 서쪽으로 도망쳤습니다.
1920년 10월, 그는 약 4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아르시주의 셰벨리강 상류에 위치한 이미의 과노에 정착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아비시니아 주둔군을 지휘하던 피타와라리 세이움은 그의 도착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장교 가라즈마치 아얄레를 보내 그가 왜 아비시니아 영토에 들어왔는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물라는 장교를 잘 대접하며, 영국군에게 전투에서 패배하여 아비시니아로 보호를 받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타와라리에게 선물로 소총 4정와 리볼버 1정을 보내고, 그 대가로 약간의 식량을 요청했습니다. 피타와라리 세이움은 이 문제를 라스 타파리에게 보고했고, 라스 타파리는 물라를 공격하지 말고 감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식량은 제공되지 않았고 물라의 진영에는 기근이 닥쳐, 남아있던 추종자들 대부분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소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졌다고 전해집니다.
1920년 12월 21일, 하산은 64세의 나이로 인플루엔자로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에티오피아 소말리주의 이미 마을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2009년 중반, 소말리주 행정부는 그의 유해를 발굴하여 이미에 있는 그의 옛 성에 재매장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산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알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사망했지만, 지역 정보부 장관 굴레드 카소웨는 VOA 소말리 섹션에 몇몇 매우 나이 든 사람들이 하산의 무덤에 대한 세부 정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해는 기니르와 에티오피아 소말리주의 묘지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사예드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의 유해인지 확인하기 위해 DNA 검사를 시도했습니다.
5. 평가 및 유산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하산은 소말리아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독립 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삶과 활동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5.1. 소말리아 민족주의에서의 위상
하산은 일부에게 범소말리아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의 일원들에게는 20세기 전환기의 위대한 혁명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는 '소말리아 인민의 아버지'로 불리며 현대 소말리아 민족주의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5.2. 비판과 논란
하산은 영국에 의해 '미친 물라'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의 통치 방식과 관련하여 비판과 논란도 존재했습니다. 모하메드 수베르의 족장 후센 히르시 달라 일제흐가 그의 독재적인 통치에 분노하여 그를 살해하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산은 이 음모를 알아채고 도망쳤으나, 그의 외삼촌 아우 압바스가 살해당했습니다. 몇 주 후, 모하메드 수베르가 화해를 위해 32명의 사절단을 보냈으나, 하산은 이들 모두를 체포하여 살해했습니다.
또한 그는 경쟁 관계에 있던 카디리야파의 셰이크들에게 반박당한 후 베르베라를 떠났으며, 셰이크 우와이스 알-바라위와는 격렬한 시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논쟁은 양측 모두에서 타크피르(배교 비난)로 이어졌고, 1909년 다라위시에 의해 우와이스가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셰이크 우와이스가 하산이 학자들의 피를 흘리는 것을 합법적이라고 여겼다는 비난이 역설적으로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5.3. 문화적 영향
그의 시는 소말리아의 문학적 유산에 기여했습니다. 다라위시 투쟁과 그 지도자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에 대한 내용은 다큐멘터리 영화 '소말리아의 타는 듯한 바람'(The Parching Winds of Somalia영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라 모하메드 자마 아울의 역사 로맨스 소설 '무지는 사랑의 적'(Ignorance is the Enemy of Love영어)에는 아프리카의 뿔에서 영국, 이탈리아, 에티오피아에 맞서 싸우는 다라위시 주인공 칼리마흐가 등장합니다.
1983년에는 압둘카디르 아흐메드 사이드 감독의 '소말리 다라위시'(A Somali Dervish영어)라는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로 앤 오더: 성범죄 전담반' 에피소드 '충성'(Loyalty (Law & Order: Criminal Intent episode)Loyalty영어)에서는 다라위시와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1985년에는 영화 제작자 살라 아흐메드가 제작한 4시간 40분 분량의 인도산 서사 영화 '소말리아 다라위시'(Somalia Dervishes영어)가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180.00 만 USD의 예산이 투입된 이 영화는 하산의 후손이 주연을 맡았으며, 수백 명의 배우와 엑스트라가 출연했습니다. 만화책 시리즈 '코르토 말테제'에서는 주인공이 다라위시가 영국에 맞서 싸우는 동안 아프리카의 뿔로 여행하여, 다라위시가 영국 요새를 습격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 여행 중에 그는 다라위시 전사 쿠시와 오랜 우정을 쌓게 되며, 쿠시는 이후 코르토의 다른 세계 모험에도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6. 기념물 및 추모

1970년대 또는 1980년대에 모가디슈 중앙 모스크 근처 모가디슈 중심부에 그의 말 '힌-파니인'(Hiin-Faniin소말리어)을 탄 하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동상(때로는 '사이드카'(Sayidka소말리어) 또는 '시야드카'(Siyadka소말리어)로 불림)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동상은 1991년에서 1993년 사이에 철거되어 고철로 팔렸습니다. 손상된 기념물의 기초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2019년 10월 18일, 소말리아 대통령 모하메드 압둘라히 모하메드는 다른 복원된 기념물들과 함께 이 기념물을 복원하여 공개했습니다. 2013년에는 에티오피아 도시 지지가에도 유사한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하우드 지역에는 그의 탄생지를 기념하는 사크마디카(Sacmadeeqa소말리어)라는 기념물이 있습니다.
7. 관련 인물 및 사건
- 하지 수디: 다라위시 운동의 창립 멤버이자 최고 군사 지휘관.
- 압둘라히 사디크: 오가덴의 총독.
- 누르 아흐메드 아만: 하브르 유니스 씨족의 술탄이자 다라위시 운동의 창립 멤버이자 다라위시 술탄.
- 하스나 도레: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의 아내.
- 이스마일 미레: 병사이자 시인.
- 우와이스 알-바라위: 사예드의 종교적 라이벌이자 베나디르 반란의 지도자.
- 바시르 유수프: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과 함께 영국에 맞서 싸운 소말리 종교 지도자.
-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가지: 아달 술탄국의 소말리 이맘이자 장군.
- 셰이크 마다르: 카디리야파 타리카의 지도자이자 살리히야와 다라위시의 학문적 라이벌/반대자.
- 존 고프: 하산에 대한 제3차 소말릴랜드 원정 중 그의 행동으로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받은 영국군 장교.
- 알렉산더 스탠호프 코브: 1902년 에레고에서의 행동으로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받은 영국군 장교.
- 에이드리언 카튼 드 위아르트: 1914년 심비리스 요새 공격 중 한쪽 눈을 잃은 영국군 장교.
- 헤이스팅스 이스메이: 윈스턴 처칠의 수석 군사 고문이 된 참모 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