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막스 아이팅곤의 초기 생애는 그의 가족 배경과 교육 과정,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형성했다.
1.1. 출생 및 가족
아이팅곤은 1881년 6월 26일 러시아 제국 모길료프에서 부유한 리투아니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하임 아이팅곤은 독실한 유대교도이자 시오니스트였으며, 모피 무역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임 아이팅곤은 뉴욕, 파리, 런던, 우치, 스톡홀름 등지에 사업을 확장하며 국제적인 사업망을 구축했다. 1893년, 그의 나이 12세 때 가족의 사업 본거지가 라이프치히로 이전하면서 가족 전체가 독일로 이주했다.
1.2. 교육 및 초기 영향
아이팅곤은 독일에서 사립학교와 김나지움을 다녔으나 중퇴했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할레 대학교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했으며, 1902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했다. 그는 또한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칸트주의 철학자 헤르만 코헨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의학 학위를 마치기 전인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취리히에서 의학 유학을 했으며,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오이겐 블로일러가 1898년부터 이끌던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당시 카를 융 또한 1900년부터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1907년, 블로일러의 권유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처음 만났고, 1908년부터 1909년까지 프로이트에게 5주에서 6주간의 분석을 받았다. 이는 어니스트 존스에 의해 "정신분석학 역사상 최초의 훈련 분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분석은 프로이트와 아이팅곤이 빈 거리를 저녁에 산책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아이팅곤은 융의 도움을 받아 "간질 발작이 정신 연상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하고 베를린에 정착했다. 1913년에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배우 미라 야코블레프나 라이고로츠키와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이팅곤은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취득하고 의사로 군에 입대하여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병사들을 최면으로 치료했다. 전쟁 후 베를린에 정착한 그는 프로이트의 초청으로 비밀 정신분석 위원회에 합류했다.
2. 정신분석학 경력 및 기여
막스 아이팅곤은 정신분석학 분야에서 활발한 실무 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조직 운영 및 교육 시스템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1. 정신분석 실무 및 조직 활동
1911년, 아이팅곤은 베를린에서 정신분석 개업을 시작했으며, 이 시기부터 베를린 정신분석가 협회에서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공헌은 학문적 성격보다는 조직 운영자로서의 역할이 컸다. 그는 프로이트의 학설에 대한 충성심이 제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고 전해진다.
카를 융이 국제 정신분석 협회(IPA)를 탈퇴한 후, 아이팅곤은 IPA의 비서 역할을 이어받았다. 1920년에는 카를 아브라함과 함께 베를린에 세계 최초의 정신분석 종합 클리닉인 베를린 정신분석 클리닉을 설립했다. 이는 1918년 부다페스트 회의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한 "모든 사람에게 열린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념을 현실화한 것이었다. 아이팅곤은 클리닉 건물 건축 비용을 지원했으며, 프로이트의 아들 에른스트 프로이트가 건축을 맡았다. 그는 아브라함, 에른스트 지멜과 함께 1933년 나치즘이 부상하기 전까지 이 클리닉을 운영했다.
1920년 국제 정신분석 출판사(Internationaler Psychoanalytischer Verlag)가 설립되자, 아이팅곤은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경영에 관여하며 사재를 털어 회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프로이트의 아들 마르틴 프로이트가 출판사를 이끌게 되었고, 정신분석학 국제 잡지의 편집부가 베를린에서 빈으로 이전되었다. 1924년 여름에는 프로이트와 결별한 오토 랑크의 후임으로 샨도르 라도, 샨도르 페렌치와 함께 정신분석학 국제 잡지(Internationalen Zeitschrift für Psychoanalyse)의 편집자로 임명되었다. 1925년 아브라함이 요절한 후에는 IPA와 베를린 정신분석가 협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27년부터 1933년까지 IPA 회장을 역임했다.
2.2. 정신분석 교육의 발전
아이팅곤은 정신분석가 양성을 위한 제도적 틀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8년 헤르만 눈베르크는 부다페스트 의회에서 "자신이 분석을 받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정신분석을 실천하는 것을 배울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이팅곤의 1922년 보고서는 이 규칙이 베를린 정신분석 클리닉의 실무에서 공식화되었음을 명확히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는 앞으로 분석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실천하는 분석가의 지위를 열망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확신한다. 따라서 학생 자신의 분석은 교육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강의와 교육 과정을 통한 집중적인 이론 준비 기간 이후 훈련 기간의 후반부에 폴리클리닉에서 이루어진다."
1925년 바트 홈부르크 회의에서 아이팅곤은 베를린의 정신분석 훈련 시스템을 국제 훈련 위원회(International Training Commission, ITC) 산하의 국제 표준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아이팅곤은 ITC의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IPA 내에서 베를린 학파의 패권을 확립하려 했으나, 뉴욕 정신분석가 협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3. 이주 및 후기 생애
아이팅곤은 나치즘의 대두로 인해 독일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도 정신분석학 활동을 이어갔다.
3.1. 팔레스타인에서의 활동
대공황으로 인해 가족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이팅곤은 생계를 위해 처음으로 환자를 받아야 했다. 1932년에는 뇌혈전증을 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언에 따라 아이팅곤은 1933년 9월 독일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34년 그는 예루살렘에 팔레스타인 정신분석 협회를 설립했으며, 이스라엘 정신분석 연구소의 설립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 교수로 임용되지는 못했다.
4. 논란 및 역사적 평가
막스 아이팅곤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그가 소련의 비밀 공작원 활동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다.
4.1. 소련 관련 의혹
막스 아이팅곤은 여러 서적에서 이그나스 라이스, 예브게니 밀러 장군, 레프 세도프의 암살을 포함하여 유럽과 멕시코에서 암살을 수행한 소련 요원 그룹의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 주장은 스티븐 술레이만 슈워츠의 뉴욕 타임스 북 리뷰를 통해 다시 제기되었고, 이는 슈워츠와 해당 서적을 쓴 역사가들, 그리고 시어도어 드레이퍼, 발터 라케르 등 아이팅곤의 연루를 부인하는 이들 사이의 오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 논쟁은 로버트 콘퀘스트에 의해 종결되었는데, 그는 막스 아이팅곤이 암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의 소련 내 재정적 이해관계와 그의 형 레오니트 아이팅곤을 포함한 핵심 팀원들(레오니트 아이팅곤은 NKVD와 게슈타포 사이에서 투하쳅스키 사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나데즈다 플레비츠카야, 니콜라이 스코블린 등)과의 관계가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고 언급했다.
5. 사망
막스 아이팅곤은 1938년 여름 파리를 방문했을 때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었으며,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1943년 7월 30일 예루살렘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스코푸스 산에 묻혔다.
6. 저술
- 'Genie, Talent und Psychoanalyse', Zentralblatt für Psychoanalyse 2 (1912) 539-540.
- 'Gott und Vater', Imago 3 (1914), 90-93
- 'Ein Fall von Verlesen', Internationale Zeitschrift für Psychoanalyse 3 (1915), 349-350.
- 'Zur psychoanalytischen Bewegung', Internationale Zeitschrift für Psychoanalyse 8 (1922), 103-106.
- 'Report of the Berlin Psychoanalytical Polyclinic',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Psychoanalytical Association 4 (1923), 254.
- 'Concluding remarks on the question of lay analysis',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8 (1927), p. 399-401
- 'Report of Marienbad Congress',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18 (1937), p. 351
- 'In the Dawn of Psychoanalysis', in M. Wulff (ed.) Max Eitingon: in memoriam, Jerusalem: Israel Psychoanalytic Society, 1950
7. 관련 항목
- 레오니트 아이팅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