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마티 칼레르보 시팔라는 1908년 핀란드 홀로라에서 태어나 초기부터 육상 선수로서의 잠재력을 보였다. 그는 라흐티의 라흐덴 우르헤일리야트 클럽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며 창던지기와 복합 종목에서 기량을 발전시켰다.
1.1. 출생 및 초기 생애
마티 칼레르보 시팔라는 1908년 3월 11일 핀란드 홀로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장은 1.83 m였고, 체중은 84 kg이었다.
1.2. 초기 경력 개발
시팔라는 라흐티에 위치한 라흐덴 우르헤일리야트(Lahden Urheilijat) 클럽 소속으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주종목은 창던지기였지만, 복합 종목에서도 재능을 보이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2. 주요 활동 및 성과
마티 시팔라는 창던지기와 복합 종목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핀란드 육상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올림픽과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1. 창던지기
마티 시팔라는 창던지기에서 두 번의 주요 국제 대회 은메달을 포함하여 여러 인상적인 기록을 세웠다.
2.1.1. 1932년 하계 올림픽

193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1932년 하계 올림픽 창던지기 경기는 8월 4일에 예선 없이 결승전으로만 진행되었으며, 7개국에서 13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시팔라는 훈련 중 등에 통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시도에서 68.14 m를 던져 잠정 3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네 번의 시도에서는 기록을 향상시키지 못했고, 독일의 고트프리트 바이만보다 4 cm 적은 기록에 머물렀다. 5차 시기에서는 같은 핀란드 선수인 에이노 펜틸라가 68.7 m를 기록하며 시팔라를 제치고 3위로 올라섰고, 시팔라는 4위로 밀려났다.
마지막 6차 시기에서 시팔라는 69.8 m를 던지는 데 성공하며 4위에서 2위로 순위를 끌어올려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서는 마티 야르비넨이 72.71 m의 최고 기록을 포함하여 다섯 번이나 70 m를 넘는 압도적인 투척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결국 시팔라의 은메달과 펜틸라의 동메달로 핀란드는 올림픽 창던지기 시상대를 휩쓰는 쾌거를 달성했다.
2.1.2. 1934년 유럽 선수권 대회
1934년 토리노에서 열린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 창던지기 종목에서 시팔라는 또다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69.97 m를 던졌으나, 당시 자신의 세계 기록을 경신한 마티 야르비넨에게 다시 밀려 2위에 머물렀다.
2.1.3. 개인 최고 기록 및 주요 경기
시팔라의 개인 최고 기록은 1934년 리가에서 세운 70.54 m이다. 그는 1932년 핀란드 올림픽 선발전에서 당시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마티 야르비넨을 70.02 m의 기록으로 꺾으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2.2. 복합 종목
창던지기 외에도 시팔라는 복합 종목에서 뛰어난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2.2.1. 5종 경기
시팔라는 비올림픽 종목인 5종 경기에서 여러 차례 국내 타이틀을 획득했다. 특히 1931년 핀란드 선수권 대회에서는 4083점을 기록하며 올림픽 10종 경기 챔피언인 파보 이리욜라를 근소한 차이로 꺾었다. 이 경기에서 시팔라와 이리욜라 모두 마르티 톨라모의 비공식 세계 기록인 4011점을 넘어섰으며, 시팔라는 이로써 1931년에 비공식 세계 기록을 경신하는 경험을 했다.
2.2.2. 10종 경기
시팔라는 1930년 칼레반 키사트(Kalevan kisat)으로 알려진 핀란드 선수권 대회 10종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는 이 종목에서 국제적인 최정상급 선수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3. 사망
마티 시팔라는 1997년 8월 22일 핀란드 코트카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평가 및 영향
4.1. 업적의 의의
마티 시팔라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34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창던지기 은메달을 획득하며 핀란드 육상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1932년 올림픽에서 핀란드 선수들이 창던지기 메달을 휩쓰는 데 일조하며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창던지기뿐만 아니라 5종 경기에서의 비공식 세계 기록 경신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며 핀란드 육상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