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마잔산은 1885년 11월 30일 청나라 지린성 화이더현(현재의 지린성 궁주링시)에서 가난한 목양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부 서방 문헌에서는 그가 1887년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출처는 1885년을 그의 출생 연도로 지목한다. 그는 만주족 혈통이었으며, 그의 손자 마즈웨이도 가족의 만주족 혈통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마잔산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사격술과 승마술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화이더현의 보안원이 되었다.
1.2. 초기 군 경력
1908년, 마잔산은 그의 비범한 사격술과 승마술을 인정받아 우쥔성에 의해 톈허 도로 순찰 및 방어 대대 제4보안대대 감시관으로 승진했다. 1913년에는 중화민국 육군 중앙 기병대 제2여단 제3연대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그의 후원자였던 군벌 우쥔성을 따랐다. 그는 장쭤린의 동북군에서 군 경력을 시작하여 제17기병사단 제5기병여단 여단장을 거쳐 헤이룽장성 육군 제3보병여단 여단장이 되었다. 1928년 장쭤린 사망 후, 그는 헤이룽장성 토비 진압 사령관과 헤이룽장성 기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영국 외교 문서는 그를 정식 훈련이나 현대 군사 지식을 받지 못한 '도적' 출신의 군인으로 묘사했지만, 그는 명사수이자 승마의 달인이었다.
2. 만주 침공 시기 저항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일본 관동군이 랴오닝성과 지린성을 침공했을 때, 당시 헤이룽장성 성장 완푸린은 베이징에 머물고 있어 일본군에 맞설 권한 있는 인물이 부재했다. 이에 장쉐량은 난징 정부에 훈령을 요청한 후, 1931년 10월 10일 마잔산을 헤이룽장성 대리 성장 겸 군사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마잔산은 10월 19일 성도 치치하얼에 도착하여 다음 날 취임했다. 그는 군사 회의를 개최하고 방어 진지를 직접 시찰하며 항복을 주장하는 세력에 맞서 "나는 성 주석으로 임명되었으며, 성을 방어할 책임이 있고 결코 항복하는 장군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사건 이후 마잔산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2.1. 장하오 전투
일본군은 이전에 다른 중국 군벌의 진격을 막기 위해 폭파되었던 넌강 철교의 수리를 반복적으로 요구했으나, 마잔산은 이를 거부했다. 철교 수리를 결심한 일본군은 800명의 일본군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수리팀을 파견했다. 인근에는 2,500명의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넌강 철교 전투가 발발하며 장하오 전투가 시작되었다. 양측은 서로 상대방이 도발 없이 먼저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마잔산은 일본군의 전차와 포병에 맞서 결국 병력을 철수해야 했지만, 그의 일본군에 대한 저항은 중국 및 국제 언론에 보도되며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딩차오를 비롯한 다른 고위 지휘관들도 지린성의 공업 도시 하얼빈 등지에서 마잔산의 본보기를 따랐으며, 그의 성공은 지역 중국인들이 그의 부대에 지원하거나 입대하도록 고무했다. 11월 18일, 마잔산은 치치하얼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딩차오 장군이 하얼빈에서 쫓겨난 후, 마잔산의 부대는 심각한 사상자를 입고 곧 소련 국경 너머로 쫓겨났다. 마잔산은 국제 연맹에 일본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미국의 중국인들은 마잔산의 전투를 돕기 위해 2000 USD를 송금하기도 했다.

3. 만주국에서의 역할과 이후의 반란
만주 침공에 저항한 영웅적인 노력과 명성 때문에 도이하라 겐지 대령은 마잔산에게 신생 만주국군으로 전향하는 대가로 300.00 만 USD 상당의 금을 제안했다. 마잔산은 이를 수락하고, 새로운 정부에 지역 주민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1932년 1월 선양으로 비행하여 만주국 건국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그는 병중이어서 만주국 독립 선언서 서명은 피했다. 같은 해 3월, 그는 푸이의 만주국 섭정 취임식에 참석했으며, 새 정부에서 만주국 군정부장과 헤이룽장성 성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마잔산을 (다른 만주국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는 모든 성내 문제에 대해 일본인 고문의 승인을 받아야만 행동할 수 있었다.
3.1. 망명과 임명
1931년 12월 7일,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마잔산의 본거지로 직접 찾아가 새로운 만주국 헤이룽장성 성장직을 약속하며 설득 작업을 벌였다. 마잔산은 셰제스의 설득에 응하는 형태로 독립 정부 수립 움직임에 참여했다. (이후 마잔산이 만주국을 이탈한 후 헤이룽장성 성장이 된 한윈제도 마잔산 설득 작업에 관여했다.) 1932년 2월 5일 하얼빈 함락으로 만주국 수립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2월 7일 마잔산은 마침내 관동군에 귀순했다. 2월 16일, 마잔산이 일본군 비행기로 하얼빈에서 펑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려, 같은 날 저녁 야마토 호텔에서 장징후이 (헤이룽장성 성장), 짱스이 (펑톈성 성장), 시차 (지린성 성장), 마잔산 (직후 헤이룽장성 성장 취임) 등 4대 거두 회담(건국 회의)에 참석했다. 다음 날인 17일, 장징후이를 위원장으로 하고 마잔산도 위원으로 참여하는 동북 최고 행정 위원회가 발족했으며, 18일 이 위원회는 전문을 발송하여 동북 지방의 국민정부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했다. 3월 1일, 동북 최고 행정 위원회는 장징후이의 저택에서 '만주국' 건국 선언을 하고 만주국이 탄생했다. 마잔산은 헤이룽장성 성장과 함께 같은 해 3월 9일 만주국 군정부장을 겸임했다.
3.2. 만주국에 대한 반란 및 부대 재편
마잔산은 '전향' 직후부터 일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비밀리에 결정했으며, 일본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용군을 무장하고 재편성했다. 그는 비밀리에 병기고에서 무기와 탄약을 빼돌리고, 부대원들의 처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1932년 4월 1일, 그는 치치하얼에서 병력을 이끌고 '시찰'을 명목으로 떠났다. 그러나 4월 7일 헤이허시에서 헤이룽장성 정부의 재설립과 만주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마잔산은 5월 초 자신의 병력을 9개 여단으로 재편성했으며, 부시, 간난현, 커산현, 커둥현 등지에서 11개 자원군 부대를 추가로 창설했다. 이 부대는 '동북항일구국군'으로 명명되었다. 마잔산은 자신을 명목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지역 내 다른 항일 의용군들을 흡수하여, 전성기에는 약 3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지휘했다.

마잔산 휘하 부대들은 주요 도로를 따라 매복 공격을 감행하여 만주국군과 일본군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마잔산 토벌 작전'에서 관동군은 일본군과 만주국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혼성 병력을 투입하여 마잔산의 군대를 포위하고 섬멸하려 했다. 마잔산의 부대는 이전 전투로 인해 심각하게 병력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국군의 허술한 추격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 9월, 마잔산은 룽먼현에 도착하여 쑤빙원의 헤이룽장 구국군과 관계를 맺었다. '쑤빙원 토벌 작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30,000명은 12월에 마잔산과 쑤빙원을 소련 국경 너머로 후퇴시켰다. 이 병력의 대부분은 이후 러허성으로 이동되었다.
마잔산 장군은 3,500명의 게릴라 전사를 지휘하여 만주국 국고 습격, 수도 창춘 공격, 비행장에서 일본군 비행기 6대 탈취 등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마잔산이 일본군에게 너무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의 장비와 말이 포획되었을 때 일본군은 그가 죽었다고 가정하고 이를 도쿄의 천황에게 바쳤다. 그가 살아남아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일본군은 격분했다. 차이나 먼슬리 리뷰는 "일본 전보가 마잔산 장군이 죽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은 거의 우스꽝스럽다"고 보도했다. 일본군은 몇 달에 걸쳐 마잔산이 '사망'했다는 다양한 버전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마잔산 장군이 탈출한 후에도 그의 부하들은 일본 점령군에 맞서 싸움을 계속했다. 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 인질 350명을 붙잡아 몇 주 동안 억류했으며, 영국 장군의 아들과 미국인 임원의 아내 등 외국인들을 납치하기도 했다.
4. 중일 전쟁 및 지속적인 항전
마잔산 자신은 소련, 독일, 이탈리아 등 해외에 머물다가 1933년 6월에야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1937년 신장 전쟁 당시 소련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때 그는 동료 이슬람교도 장군인 마후산에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는 성스차이의 요청에 따라 중국군 복장을 위장한 러시아군과 폭격기를 이끌고 공격에 참여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다른 출처에서는 그가 1937년 중국 국민혁명군의 기병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이 전쟁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의심스럽게 본다.

그는 장제스에게 일본에 맞서 싸울 군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마잔산은 이후 1936년 10월 장제스가 갑자기 그를 중국 내전 전선으로 보낼 때까지 톈진에 머물렀다. 시안 사건 당시 시안에 있던 그는 장쉐량에게 국가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장제스를 죽이지 말 것을 제안했고, 장쉐량과 양후청이 발표한 '현 정치 상황 선언'에 서명했다. 장쉐량은 마잔산을 '항일 원쑤이위안 기병집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구금된 후 이 직책은 중단되었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마잔산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허성 등 동북 4개 성을 담당하는 동북 진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마잔산은 1937년 8월 다퉁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의 병력을 이끌고 차하얼성, 쑤이위안, 다퉁, 산시성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푸쭤이의 병력과 협력하여 쑤이위안 방어전과 인산 전투에 참여했다. 마잔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비저항 정책을 혐오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항일 정책에 동조했다. 그는 팔로군과의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1939년 옌안을 방문했다. 중국 공산당은 1940년 8월 마잔산을 헤이룽장성 임시 정부 주석으로 비밀리에 임명했으며, 그는 종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마잔산은 마적 시절의 경험을 살린 교묘한 게릴라 전술로 유명했으며, 일본군 장병들로부터 '동양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5. 전후 시기 및 국공 내전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마잔산을 동북 부보안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선양에서 취임했으나, 반년 후 병을 이유로 베이징 자택으로 은퇴했다. 1949년 1월, 그는 푸쭤이 장군을 설득하여 베이징이 평화적으로 공산당에 이양되도록 한 후 공산당으로 전향했다.
6. 사망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마오쩌둥 주석은 1950년 6월 그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초청했으나, 그는 병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같은 해 11월 29일 베이징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유산 및 평가
마잔산은 그의 복잡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만주사변 초기 일본군에 대한 그의 단호한 저항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각인시켰다.
7.1. 국민적 영웅으로서의 인정
마잔산의 장하오 전투에서의 저항은 중국 내에서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국제적으로도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의 행동은 지역 중국인들이 그의 부대에 합류하거나 지원하도록 고무했다. 헤이룽장성 TV에서는 그의 항일 투쟁을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7.2. 비판 및 논란
마잔산의 경력에서 만주국 정부에 일시적으로 협력하여 군정부장과 성장직을 수락했던 부분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직책을 비밀리에 항일 부대를 재정비하고 자금을 확보하는 데 활용했으며, 이는 그의 복잡한 충성심과 전략적 선택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
8. 수상 및 영예
- 청천백일훈장 (1946년 1월 1일)
9. 외부 링크
- [http://www.qqhr.gov.cn/EN/mzs.htm Ma Zhanshan]
- [https://web.archive.org/web/20120324090303/http://www.questia.com/PM.qst;jsessionid=G6yQxGynz1R7mnJgL5fJcPfbLTnRjLWgH21DMHpVJCNCpZYNBs4b!655935560!290617960?a=o&d=5000186948 The volunteer armies of northeast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