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마리 앙리에트는 요제프 안톤 대공과 뷔르템베르크 공녀 마리아 도로테아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아버지 쪽으로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사촌이자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황제의 손녀였다. 어머니 쪽으로는 미래의 영국 메리 왕비와 육촌 관계였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마리 앙리에트는 헝가리 부왕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부다 성에서 보냈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그녀는 요한 대공의 후견을 받으며 빈의 아우가르텐 궁전에서 지냈다. 그녀는 어머니에 의해 "소년처럼" 길러졌다고 전해진다. 마리 앙리에트는 강한 의지와 불같은 기질을 가진 활기차고 정력적인 사람이었으며, 특히 승마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또한 예술가이자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2. 가족 및 성장 환경
마리 앙리에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서, 유럽 왕실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 배경은 벨기에 왕실과의 정략결혼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이는 엄격한 궁정 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2. 레오폴 2세와의 결혼
마리 앙리에트의 결혼은 벨기에 왕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정략적 목적이 강했다.
2.1. 결혼의 배경과 과정

마리 앙리에트는 17세 생일을 하루 앞둔 1853년 8월 22일, 18세의 벨기에 왕위 계승자 레오폴 왕자와 결혼했다. 레오폴은 레오폴 1세와 그의 프랑스인 왕비 루이즈 도를레앙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 결혼으로 마리 앙리에트는 훗날 멕시코 황후가 되는 샤를로트의 올케가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과 마리아 2세의 사촌이 되었다.
이 결혼은 벨기에 군주국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신생 군주국의 전직 개신교 군주였던 벨기에 국왕은 자신의 아들이 로마 가톨릭 명문 왕조의 일원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름은 마리 앙리에트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였다. 이 결혼은 또한 신생 벨기에 왕국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에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결혼은 벨기에 국왕인 그녀의 미래 시아버지에 의해 그녀의 후견인인 요한 대공에게 제안되었고, 두 남자에 의해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추진되었다. 1853년 5월 호프부르크 궁전의 황실 무도회에서 레오폴에게 소개되었고, 그와 결혼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녀도 레오폴도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결혼 계획에 반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어머니의 설득으로 결국 결혼에 동의했다. 레오폴 자신도 아버지 때문에 결혼에 동의했다고 언급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1853년 8월 8일 빈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결혼 계약서에 서명했다. 8월 10일 쇤브룬 궁전에서 대리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그녀는 브뤼셀로 여행하여 8월 22일 레오폴과 직접 최종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벨기에 지방을 순회하고 10월에는 영국으로 여행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레오폴 1세에게 두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총명하고 교양 있으며 세련된 사람으로 묘사되었고, 레오폴은 말을 잘하고 군사 문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 관심사가 전혀 없었다. 이 결혼은 마리 앙리에트와 레오폴 모두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으며, 처음부터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2.2. 불행한 결혼 생활과 별거

1854년 4월, 레오폴과 마리 앙리에트는 라켄 궁전에 브라반트 공작 부부로 정착했다. 그들은 레오폴 1세와 그의 어린 자녀들인 필리프, 샤를로트와 함께 살았다. 마리 앙리에트는 시아버지인 레오폴 1세와는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지만, 샤를로트와는 개인적인 친구가 되었다. 마리 앙리에트는 자신만의 가정을 꾸렸고, 시어머니의 전임 시녀장이었던 메로드 백작 부인이 그녀를 보좌했다.
그녀는 동물에 대한 관심에 몰두했다. 그녀는 말과 승마에 관심이 많아 약 50마리의 말을 소유했으며, 다른 동물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원숭이와 개의 번식을 시도했고, 앵무새와 물고기도 길렀다. 또한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 노래, 피아노, 하프 레슨을 받았다.
레오폴은 건강상의 이유로 따뜻한 기후로의 여행을 권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1855년 빈, 트리에스테, 코르푸를 거쳐 이집트로, 그리고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여행에 동행했다. 마리 앙리에트와 그녀의 배우자는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다. 이 방문 중에도 그들의 차이점은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마리 앙리에트는 강하고 활기차며 정력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었고, 레오폴은 진지하고 건조하며 육체적으로 약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마리 앙리에트는 외향적이었고, 레오폴은 내향적이었다.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는 그들의 결혼을 "마부와 수녀 사이의 결혼이며, 수녀는 브라반트 공작을 의미한다"고 썼다.
1856년, 마리 앙리에트의 사촌인 막시밀리아노 대공은 미래의 아내인 마리 앙리에트의 시누이 샤를로트를 만나기 위해 벨기에 궁정을 방문했다. 그는 마리 앙리에트가 그녀의 활기찬 지성 덕분에 많은 민감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고, 벨기에 왕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1858년, 마리 앙리에트는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은 실망의 원인이 되었다. 미래의 왕위 계승자는 마침내 1859년에 태어났다. 1860년과 1864년에 레오폴은 두 번 더 긴 건강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마리 앙리에트 없이 마지막 여행은 이집트, 스리랑카, 인도, 중국으로 향했다. 두 여행 모두 마리 앙리에트가 임신 중일 때 이루어졌고, 그녀는 그가 먼 나라로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자신은 아이들과 함께 집에 남겨진 것에 대한 실망감을 표했다.
1869년, 왕실 부부의 유일한 아들이 사망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레오폴처럼 슬픔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레오폴 없이 스위스와 헝가리로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나 애도했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레오폴 2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마리 앙리에트를 비난했고, 그녀는 이 비난을 용서할 수 없었다. 또한 레오폴의 노골적인 외도에 의해 굴욕감을 느꼈다. 왕과 왕비는 또 다른 아들을 낳기를 바라며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1872년에 또 다른 딸 클레망틴이 태어나자,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결혼 상태였지만 남은 생애 동안 별거하며 살았다. 1872년 이후 그들은 더 이상 개인적으로 교류하지 않았지만, 왕과 왕비로서 공식 석상에는 계속 함께 나타났다.
1878년 8월 왕과 왕비의 결혼 기념일은 벨기에 전역에서 국가적인 축하 행사의 대상이 되었다. 축제가 열리고 공공건물이 장식되었으며 4일간의 공휴일이 선포되었다. 마리 앙리에트는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위원회를 통해 티아라를 받았고, 왕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애국적인 연설을 했다.
3. 왕비로서의 삶
마리 앙리에트는 왕비로서 공식적인 의무를 수행하면서도 개인적인 관심사와 사회적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3.1. 왕실 의무와 개인적 관심사

1865년 12월 10일, 레오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레오폴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마리 앙리에트는 왕비가 되었다. 레오폴 2세가 즉위할 때 마리 앙리에트의 참여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왕은 이를 거부했고 왕비는 대신 즉위식의 관중으로 전락했다.
마리 앙리에트와 레오폴은 왕과 왕비로서 처음 7년 동안은 함께 살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소원했고 레오폴은 정중하지만 권위적인 남편으로 묘사되었다. 마리 앙리에트는 오페라와 연극에 관심이 많았고 종종 라 모네 왕립극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의 왕실 전용석은 왕비가 수년에 걸쳐 모은 사적인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는 개인실로 확장되었다.
마리 앙리에트는 음악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헝가리산 말이었다. 그녀는 승마를 위해서만 말을 기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 번식에 참여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말의 필요를 돌보았는데, 이는 당시 왕실 여성이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기이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왕비는 군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종종 벨기에 동부의 베베를루에서 열리는 군사 훈련에 그녀가 베베를루라고 이름 붙인 헝가리 말을 타고 참석했다.
3.2. 사회적 기여와 자선 활동
1867년, 그녀의 시누이인 멕시코 황후 샤를로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정신 불안정으로 투옥되었다. 레오폴은 마리 앙리에트에게 샤를로트를 벨기에로 석방시키는 협상을 맡겼다. 그녀는 고문인 아드리앙 고피네 남작과 함께 빈으로 가서 2주간의 협상 끝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샤를로트는 처음에는 라켄에서 왕실 부부와 함께 지냈는데, 마리 앙리에트는 거의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샤를로트는 약간의 호전 기미를 보였지만, 다시 악화되자 마리 앙리에트는 인내심을 잃었고 1869년에 샤를로트는 라켄에서 영구적으로 이송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년) 동안, 그녀는 의료 활동에 참여했다. 벨기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왕비는 국경을 넘어온 전쟁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그녀는 스당 전투 이후 부상병들을 위한 병원으로 브뤼셀의 왕궁을 개방하도록 왕을 설득했고, 그곳에서 직접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그녀의 노력은 인정받았고, 작센의 요한 1세는 그녀에게 시도니 훈장을 수여하여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또한 1871년 브뤼셀에서 발생한 천연두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데도 참여했다.
4. 자녀
마리 앙리에트와 레오폴 2세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 루이즈 공주 (1858~1924):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필립과 결혼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루이즈의 결혼이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헝가리를 자주 방문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기뻐했다.
- 레오폴 왕자, 브라반트 공작 (1859~1869):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익사로 사망)
- 스테파니 공주 (1864~1945):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와 결혼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1881년 딸 스테파니가 오스트리아 황태자와 명망 있는 결혼을 한 것에 대해 기뻐했다. 1889년 마이얼링 사건으로 사위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자살했을 때, 마리 앙리에트와 레오폴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장례식 참석 금지령을 무시하고 참석했다.
- 클레망틴 공주 (1872~1955): 나폴레옹 빅토르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막내딸 클레망틴과 남편의 조카인 벨기에 왕세자(레오폴 2세의 조카)의 결혼을 지지했지만, 1891년 왕세자가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들이 사망한 후, 마리 앙리에트는 자녀 양육을 거의 전적으로 가정교사와 개인 교사에게 맡겼는데, 이들은 권한을 남용하고 아이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었고, 교사들의 엄격한 훈육 방식을 승인했다. 그녀는 딸들이 명문가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5. 스파에서의 은퇴와 말년
마리 앙리에트 왕비는 왕비로서의 대표적인 의무와 브뤼셀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스파를 장기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의례적인 의무는 딸 클레망틴에게 맡겼다. 스파와 아르덴 지역은 그녀에게 어린 시절 헝가리를 떠올리게 했고, 그녀는 산책과 승마를 즐겼다. 1895년, 이러한 상황은 영구적으로 변했다. 1895년에 그녀는 스파로 은퇴했고, 막내딸 클레망틴이 남편의 남은 생애 동안 브뤼셀 궁정에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신했다.
마리 앙리에트는 스파에 있는 오텔 뒤 미디(Hôtel du Midi)를 구입하여 남편과 사실상 분리되었다. 그녀는 조수 오귀스트 고피네와 함께 자신의 빌라 옆에 18마리의 말을 들여왔고, 경마에 참석하고 외국 귀빈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스파 시에 한정하여 왕비로서의 의무를 계속 수행했는데, 학교를 방문하고 자선 활동을 하며 예술가들을 보호했고, "스파의 왕비"로 불렸다.
6. 사망
마리 앙리에트는 스파의 오텔 뒤 미디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브뤼셀의 라켄 성모 성당에 있는 왕실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남편 레오폴 2세는 나중에 그의 정부인 카롤린 들라크루아와 재혼했는데, 이는 벨기에 법률상 불법적인 결혼이었다.
7. 유산 및 평가
마리 앙리에트의 삶은 개인적인 불행과 왕실의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던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7.1. 긍정적 평가
마리 앙리에트는 활기차고 총명한 인물로, 특히 승마와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왕실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열정을 가지고 말 번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직접 돌보는 등 당시 왕실 여성에게는 드물었던 독특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벨기에 국경을 넘어온 부상병들을 위해 왕궁을 병원으로 개방하도록 레오폴 2세를 설득하고 직접 간호하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헌신했다. 또한 1871년 브뤼셀에서 발생한 천연두 전염병 당시에도 환자들을 돌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노력은 작센의 요한 1세로부터 시도니 훈장을 수여받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사촌인 막시밀리아노 대공은 그녀가 벨기에 왕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재능 있는 예술가, 음악가, 그리고 뛰어난 기수였다.
7.2. 비판 및 논란
마리 앙리에트의 삶은 남편 레오폴 2세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레오폴의 노골적인 외도는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특히 유일한 아들 레오폴 왕자의 죽음 이후 레오폴 2세가 그녀를 비난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녀가 자녀 양육을 가정교사에게 거의 전적으로 맡겼고, 이들이 아이들을 학대했음에도 어머니가 멀리 떨어진 존재로 엄격한 훈육 방식을 승인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그녀는 콩고에 대한 레오폴 2세의 식민지 개척 사업에 대해 멕시코 제국의 실패한 프로젝트와 비교하며 비현실적인 모험으로 보았고,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년은 공무에서 물러나 스파에 은둔하며 남편과 사실상 별거 상태로 지내는 등 불만족스럽고 불행한 삶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8. 칭호, 스타일, 영예 및 문장
마리 앙리에트에게 부여된 공식 칭호와 영예는 다음과 같다.
8.1. 칭호와 스타일
- 1836년 8월 23일 ~ 1853년 8월 22일: 폐하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 앙리에트
- 1853년 8월 22일 ~ 1865년 12월 17일: 폐하 브라반트 공작 부인
- 1865년 12월 17일 ~ 1902년 9월 19일: 폐하 벨기에 왕비
8.2. 영예
그녀는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
8.3. 문장
9. 가계
-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안톤 요한 (1776~1847)
- 친할아버지**: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황제 (1747~1792)
- 증조할아버지**: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황제 (1708~1765)
- 증조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1717~1770)
- 친할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1745~1792)
- 증조할아버지**: 카를로스 3세 (1716~1788)
- 증조할머니**: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1724~1760)
- 친할아버지**: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황제 (1747~1792)
- 어머니**: 뷔르템베르크 공녀 마리아 도로테아 (1797~1855)
- 외할아버지**: 뷔르템베르크 공작 루트비히 (1756~1817)
- 증조할아버지**: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1732~1797)
- 증조할머니**: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1736~1798)
- 외할머니**: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테 (1780~1857)
- 증조할아버지**: 나사우바일부르크 공작 카를 크리스티안 (1735~1788)
- 증조할머니**: 오라녜나사우의 카롤리나 (1743~1787)
- 외할아버지**: 뷔르템베르크 공작 루트비히 (1756~1817)
10.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