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토르발스는 1969년 12월 28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언론인 안나와 닐스 토르발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모는 통계학자 레오 퇴른크비스트와 시인 올레 토르발스이며, 증조부는 언론인이자 군인인 토이보 카랑코이다. 그의 부모는 1960년대 헬싱키 대학교의 급진적인 운동가였으며, 특히 그의 아버지는 1970년대 중반 1년간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였다. 토르발스 가족은 핀란드 인구의 약 6%를 차지하는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에 속한다.
그의 이름은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지만, 토르발스는 자신의 저서 《Rebel Code: Linux and the Open Source Revolution》에서 "내 이름은 피너츠 만화 캐릭터 라이너스 반 펠트의 이름을 절반 정도 따온 것 같다"고 말하며, 자신이 "노벨상 수상 화학자와 담요를 들고 다니는 만화 캐릭터의 절반"이라고 언급했다.
컴퓨터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81년 11세 때 코모도어 VIC-20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컴퓨터에서 베이직으로 프로그래밍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6502 CPU에 직접 기계어로 접근하여 프로그래밍했다. 이후 싱클레어 QL을 구입하여 운영 체제를 광범위하게 수정했다. 그는 핀란드에서 소프트웨어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QL용 어셈블러와 텍스트 편집기를 직접 작성했으며, 몇 가지 게임도 만들었다. 특히 팩맨 클론인 '쿨 맨'(Cool Man)을 만들기도 했다.
2. 교육 및 군 복무
토르발스는 1988년부터 1996년까지 헬싱키 대학교에 재학했으며, NODES 연구 그룹에서 컴퓨터 과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석사 논문 제목은 '리눅스: 이식 가능한 운영 체제'(Linux: A Portable Operating System)였다. 대학 재학 중 그의 교재로는 존 H. 크로포드와 패트릭 P. 겔싱어 교수가 쓴 《Programming the 80386》(SYBEX, 1987)과 모리스 J. 바흐가 쓴 《The Design of the UNIX Operating System》(Prentice-Hall, 1986)이 있었다.
1990년, 토르발스는 컴퓨터 과학 교수 앤드루 타넨바움의 저서 《Operating Systems: Design and Implementation》을 구입했는데, 이 책에는 유닉스의 교육용 간소화 버전인 MINIX가 설명되어 있었다. 같은 해, 그는 대학 공부를 재개하면서 DEC의 MicroVAX에서 실행되는 ULTRIX 형태의 유닉스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의 학업 경력은 1학년을 마친 후 잠시 중단되었다. 1989년 여름, 그는 핀란드 해군의 뉘란드 여단에 입대하여 핀란드의 의무 군 복무를 이행하기 위해 11개월 장교 훈련 과정을 선택했다. 그는 소위 계급을 받았으며, 포병 관측병 역할을 수행했다.
1991년 1월 5일, 토르발스는 MINIX 사본을 받기 전에 인텔 80386 기반의 IBM PC 호환기종을 구입했으며, 이는 그가 리눅스 개발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3. 리눅스 커널 개발
토르발스는 MINIX에 영감을 받아 PC에서 실행될 수 있는 유닉스와 유사한 운영 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리눅스 커널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1991년 1월 5일 인텔 80386 기반의 IBM PC 호환기종을 구입한 후 리눅스 커널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개발한 커널을 '프릭스'(Freax)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이는 '자유'(free)와 '괴짜'(freak)를 조합하고 유닉스와 유사한 시스템임을 나타내는 'X'를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커널이 처음 호스팅된 FTP 서버를 관리하던 그의 친구 아리 렘케는 '프릭스'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토르발스의 디렉터리를 '리눅스'(linux)라고 명명했다.
리눅스 커널의 첫 프로토타입은 1991년 말 그의 대학 FTP 서버를 통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1991년 8월 25일, 그는 유즈넷 뉴스그룹 `comp.os.minix`에 "minix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영 체제에 대한 설문 조사를 게시하며 리눅스 개발 소식을 알렸다. 리눅스 버전 1.0은 1994년 3월 14일에 출시되었다.
토르발스는 1991년 가을, 다른 스웨덴어 사용 컴퓨터 과학 학생인 라스 비르제니우스와 함께 기술 대학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전문가 리처드 스톨먼의 강연을 들으면서 GNU 프로젝트를 처음 접했다. 이 강연과 다른 기여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토르발스는 상업적 사용을 금지했던 자신의 초기 라이선스를 스톨먼의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버전 2(GPLv2)로 변경하여 리눅스 커널에 적용했다.
2006년 기준으로 리눅스 커널의 약 2%만이 토르발스에 의해 작성되었지만, 수천 명의 기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여 비율은 여전히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2012년에 자신의 개인적인 기여는 이제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코드를 병합하는 것이며, 실제 프로그래밍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표준 리눅스 커널에 어떤 새로운 코드를 통합할지 결정하는 최고 권한을 유지하고 있다.
토르발스는 '리눅스' 상표를 소유하고 있으며, 주로 리눅스 마크 협회를 통해 그 사용을 감독한다. 그는 상표 등록 자체를 꺼렸지만, 1995년 다른 사람이 리눅스를 상표 등록하거나 위협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상표를 등록했다. 그의 개인적인 마스코트는 '턱스'(Tux)라는 이름의 펭귄으로, 리눅스 커뮤니티에서 리눅스 커널의 마스코트로 널리 채택되었다.
4. 깃(Git) 및 기타 소프트웨어 개발
토르발스는 분산 버전 관리 시스템인 깃을 개발했다. 깃 개발은 2005년 4월 3일에 시작되었으며, 이후 널리 사용되는 버전 관리 소프트웨어가 되었다. 그는 2005년 7월 26일에 깃의 유지보수 권한을 주요 프로젝트 기여자 중 한 명인 주니오 하마노에게 넘겼다. 깃은 그가 리눅스 커널 개발에 사용하던 독점 소프트웨어인 비트키퍼에 대한 자유 소프트웨어 대체재로 개발되었다.
또한 토르발스는 스쿠버 다이빙 로깅 및 계획 소프트웨어인 '서브서피스'(Subsurface) 개발을 2011년 말에 시작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버전 2에 따라 배포되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2012년 말에는 더크 호흔델이 서브서피스의 수석 유지보수자가 되었다.
5. 경력 및 소속
1996년 말 트랜스메타를 방문한 후, 토르발스는 1997년 2월부터 2003년 6월까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이 기업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Open Source Development Labs(OSDL)로 이직했으며, OSDL은 이후 자유 표준 그룹과 합병하여 리눅스 재단이 되었다. 그는 현재 리눅스 재단의 후원 아래 리눅스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6월, 토르발스와 그의 가족은 OSDL 본부가 위치한 오리건주 비버턴에 더 가까이 있기 위해 오리건주 던소프(Dunthorpe)로 이주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그는 86open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리눅스와 유닉스의 표준 이진 형식을 선택하는 데 기여했다. 1999년, 그는 《MIT 기술 리뷰》의 'TR100'에 35세 미만 세계 100대 혁신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99년, 리눅스 기반 소프트웨어의 주요 개발사인 레드햇과 VA 리눅스는 토르발스의 업적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스톡 옵션을 제공했다. 그 해 두 회사가 주식 공개되면서 토르발스의 주식 가치는 한때 약 2000.00 만 USD까지 치솟기도 했다.
리눅스 재단은 현재 토르발스를 후원하여 그가 리눅스 개선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6. 철학 및 사상
토르발스는 "오픈 소스만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지만, 때로는 독점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더라도 "최고의 도구"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는 리눅스 커널의 버전 관리를 위해 독점 소프트웨어인 비트키퍼를 사용하고 옹호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이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인 깃을 직접 개발했다.
그는 에릭 S. 레이먼드가 자신의 논문 《성당과 시장》에서 언급하여 유명해진 '리누스의 법칙'("충분한 눈알이 있다면, 모든 버그는 얕다" 즉, '많은 사람이 코드를 검토하면 어떤 버그도 심각하지 않다')이라는 오픈 소스 개발 철학을 공유한다.
토르발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나 애플 macOS와 같은 경쟁 운영 체제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을 해왔다. 그는 2012년 알토 대학교 강연에서 엔비디아를 자신이 커널 개발 과정에서 다룬 최악의 회사라고 비판하며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2004년 선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자사 솔라리스 OS를 오픈 소스화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도 "아무도 솔라리스의 실패작 같은 OS를 가지고 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고위 부사장 크레이그 먼디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가 혁신적이지 않고 지적 재산권을 파괴한다고 비판했을 때, 아이작 뉴턴의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반박하기도 했다.
그는 2008년 당시 자신이 선호했던 파워PC 프로세서 아키텍처를 잘 지원하는 페도라 리눅스 리눅스 배포판을 사용한다고 밝혔으며, 2012년 인터뷰에서도 이를 재확인했다. 그놈 3.0 출시 후 한동안 그놈을 사용하지 않고 Xfce로 전환하기도 했는데, 그놈 개발자들이 "데스크톱에서 실제 작업을 하는 것이 '너무 복잡하다'고 결정하고 정말 짜증 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2013년에는 "아직 찾기 어렵지만 확장 기능을 통해 데스크톱을 2년 전처럼 좋게 만들 수 있다"며 다시 그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토르발스는 자신을 "완전히 무종교적이고 무신론자"라고 묘사하며, "사람들은 종교가 도덕과 자연에 대한 감사함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오히려 둘 다를 깎아내린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아, 자연은 그냥 창조된 거야'라고 말할 변명을 제공하고, 그래서 창조 행위가 기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와, 이런 일이 애초에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유럽에서는 종교가 대부분 개인적인 문제인 반면, 미국에서는 매우 정치화되었다고 지적하며 정교분리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인생의 두 가지 황금률로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라"를 꼽았다.
7. 개인적인 삶

리누스 토르발스는 1993년 말에 만난 토베 토르발스(결혼 전 성은 몬니)와 결혼했다. 토베는 핀란드 가라테 챔피언십에서 6차례 우승한 경력이 있다. 토르발스는 당시 학생들을 위한 컴퓨터 실습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수강생들에게 시험 삼아 이메일을 보내라고 지시했고, 토베는 그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이메일로 답장했다.
그들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으며, 그 중 두 딸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딸들의 이름은 파트리시아 미란다(1996년 12월 5일생), 다니엘라 욜란다(1998년 4월 16일생), 셀레스트 아만다(2000년 11월 20일생)이다. 리눅스 커널의 '재부팅'(reboot) 시스템 호출은 그들의 생년월일(16진수 표기)을 '마법 값'으로 받아들인다.
2004년, 토르발스는 가족과 함께 실리콘 밸리에서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201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국에서 유권자 등록을 마쳤다. 그 해 기준으로 그는 어떠한 미국 정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밝히며, "솔직히 말해서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연관되고 싶지 않을 만큼 자부심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토르발스는 2000년대 초반 스쿠버 다이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수많은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이는 서브서피스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8. 수상 및 업적

토르발스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명예를 받았다.
연도 | 수상/업적 | 비고 |
---|---|---|
1996 | 소행성 9793 토르발스 | 소행성 '9793 토르발스'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97 | 학술 명예 | 헬싱키 대학교 컴퓨터 과학부에서 석사 학위(라우다투르 등급)를 받았다. 2년 후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2000년에는 모교인 헬싱키 대학교에서 같은 영예를 받았다. 헬싱키 대학교는 토르발스의 이름을 딴 강당을 명명했으며, 그의 컴퓨터는 컴퓨터 과학부에 전시되어 있다. |
1998 | EFF 파이오니어상 | EFF 파이오니어상을 수상했다. |
2000 | 러브레이스 메달 | 영국 컴퓨터 학회로부터 러브레이스 메달을 받았다. |
2001 | 다케다상 | 리처드 스톨먼 및 사카무라 켄과 함께 사회/경제적 복지 부문 다케다상을 공동 수상했다. |
2003 | 리누스 (달) | 소행성 칼리오페의 위성인 '리누스'의 명명은 발견자가 열렬한 리눅스 사용자였던 것이 부분적으로 동기가 되었다. 비록 명명 제안은 신화 속 인물인 리누스를 언급했지만, 이 이름은 리누스 토르발스와 피너츠 만화의 라이너스 반 펠트를 기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
2005 | 볼룸상 | 2005년 8월 리드 칼리지로부터 볼룸상을 받았다. |
2008 | 컴퓨터 역사 박물관 명예의 전당 |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위치한 컴퓨터 역사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리눅스 커널의 창조와 널리 사용되는 리눅스 운영 체제의 오픈 소스 개발 관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
2010 | C&C상 | NEC로부터 "정보 기술 산업의 개발, 교육, 연구 및 삶의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C&C상을 수상했다. |
2012 | 밀레니엄 기술상 | 2012년 4월 20일, 신야 야마나카와 함께 밀레니엄 기술상의 공동 수상자로 발표되었다. 이 상은 기술 분야의 노벨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2012 | 인터넷 명예의 전당 | 2012년 4월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인터넷 학회의 글로벌 이넷(INET) 컨퍼런스에서 인터넷 명예의 전당의 첫 헌액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혁신가 부문 10명 중 한 명이자 전체 33명의 헌액자 중 한 명이었다. |
2014 | IEEE 컴퓨터 개척자상 | 2014년 4월 23일, IEEE는 토르발스를 2014년 IEEE 컴퓨터 학회 컴퓨터 개척자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상은 컴퓨터 분야의 개념과 개발에 주요 기여를 한 인물에게 수여된다. |
2018 | IEEE 이부카 마사루 소비자 전자제품상 | "리눅스 개발 및 확산에 대한 리더십"으로 IEEE 이부카 마사루 소비자 전자제품상을 수상했다. |
2019 | 위대한 이민자상 | 카네기 재단이 토르발스를 기렸다. |
언론에서도 토르발스는 여러 차례 주목을 받았다.
- 2000년, 《타임》지 '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설문 조사에서 17위에 올랐다.
- 2004년,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 2006년, 《타임》지 유럽판은 그를 지난 60년간의 혁명적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 2000년, 《인포월드》는 그에게 '산업 공로상'을 수여했다.
- 2005년, 《비즈니스위크》의 설문 조사에서 "최고의 경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 2006년, 《비즈니스 2.0》지는 리눅스의 성장이 토르발스 개인의 영향력을 줄였다는 이유로 그를 "중요하지 않은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 2004년 여름, 핀란드 방송사 YLE 시청자들은 토르발스를 '위대한 핀란드인 100인' 중 16위에 올렸다.
- 2010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이드' 시리즈의 일환으로, 그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 2017년 10월 11일, 리눅스 기업 SUSE는 "Linus Said"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2000년, 그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로부터 macOS 개발을 이끌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잡스는 Mac OS X가 가장 많은 사용자를 가진 유닉스라고 설득했지만, 토르발스는 리눅스 개발을 개발 중단해야 한다는 조건과 Mac OS X에 사용된 Mach 커널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회고했다.
9. 영향 및 평가
리누스 토르발스의 작업은 기술 산업 전반과 오픈 소스 운동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1991년 리눅스 커널의 소스 코드를 인터넷에 공개했을 때, 그는 자신이 시작한 일이 훗날 수십억 달러 규모의 비즈니스를 탄생시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리눅스는 전 세계 데스크톱 시장의 약 2.32%를 차지하며, 스마트폰 운영 체제에서는 안드로이드를 통해 68.71%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 세계 서버의 35.9%가 리눅스를 사용하며, 이는 윈도우의 32.3%를 넘어선 수치이다.
토르발스는 BSD, 솔라리스, SUSE, 자바, 어도비 등 많은 개발자들이 자신의 프로그램 소스 코드를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표준을 성공적으로 확립했다. 그는 비록 연간 수십만 달러의 급여를 받지만, 레드햇, SUSE, 데비안, 만드리바, 우분투 등 수많은 컴퓨터 산업의 거물들을 탄생시켰다.
리눅스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모든 말이 거의 '신탁'처럼 받아들여지며, 그의 모든 출판물, 연설, 이메일, 보도 자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다린다. 그의 "반(反) 유명인사"적인 태도와 명성에 대한 양가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 세계 개발자 커뮤니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0. 비판 및 논란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 메일링 리스트에서 다른 개발자들과 격렬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을 "정말 불쾌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욕을 덜 하며 사람들이 성장하도록 격려하고 싶지만, 그들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태도가 요점을 명확히 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텔 프로그래머 세이지 샤프(Sage Sharp)와 systemd 개발자 레나르트 포터링(Lennart Poettering)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018년 9월 16일 일요일, 리눅스 커널의 '충돌 규정'(Code of Conflict)이 갑자기 기여자 규약에 기반한 새로운 '행동 강령'(Code of Conduct)으로 대체되었다. 직후 리눅스 4.19-rc4 릴리스 노트에서 토르발스는 자신의 과거 행동에 대해 사과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공격이 "비전문적이고 부적절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방법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들은 《더 뉴요커》가 그의 행동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한 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10월 22일 리눅스 4.19 출시 이후, 토르발스는 커널 유지보수 작업에 복귀했다.
2024년, 러시아 개발자들이 리눅스 커널 유지보수자 목록에서 제외되자 토르발스는 "나는 핀란드인이다. 내가 러시아의 침략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나?"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11. 저술 및 관련 서적
리누스 토르발스의 삶과 사상을 다룬 주요 저서 및 관련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 《Just for Fun: The Story of an Accidental Revolutionary》 (2001년): 데이비드 다이아몬드와 공동 저술한 자서전으로, 리눅스 개발 과정과 그의 철학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한국어 번역판은 《리눅스 그냥 재미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 《The Hacker Ethic and the Spirit of the Information Age》 (2001년): 페카 히마넨이 저술하고 토르발스가 서문을 쓴 책으로, 해커 윤리와 정보 시대의 정신을 탐구한다.
- 《Rebel Code: Linux and the Open Source Revolution》 (2002년): 글린 무디가 저술한 책으로, 리눅스와 오픈 소스 혁명의 역사를 다룬다.
- 《The Linux story》 (2000년): 투울라 니카넨이 저술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