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르네 고시니는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아버지의 사망 후 생계를 위해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다 프랑스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만화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1. 출생과 가족
고시니는 1926년 8월 14일 프랑스 파리 42 페르아물랭 거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폴란드 출신 유대인 이민자였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출신의 화학 엔지니어인 스타니스와프 심카 고시니였고, 어머니는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키이우 근처의 작은 마을 호도르키우(Chodorków) 출신인 안나(한나) 베레시냐크-고시나였다. 고시니의 외할아버지인 아브라함 라자르 베레시냐크는 인쇄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의 성 '고시니'는 폴란드어로 '친절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르네에게는 1920년 12월 10일에 태어난 여섯 살 위 형 클로드 고시니가 있었다. 스타니스와프와 안나는 파리에서 만나 1919년에 결혼했다.
1.2. 유년 시절과 교육
르네가 두 살이 되던 1928년, 아버지가 화학 엔지니어로 취직하면서 고시니 가족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했다. 르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곳의 프랑스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을 보완하기 위해 종종 '학급의 광대'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읽었던 삽화가 있는 이야기들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3. 초기 경력 및 군 복무
1943년 12월, 르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그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했다. 17세의 르네는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듬해 그는 타이어 재생 공장에서 회계 보조원으로 첫 직업을 얻었다. 1년 후 해고된 뒤에는 광고 대행사에서 주니어 삽화가 견습생으로 일했다.
1945년, 고시니는 어머니와 함께 삼촌 보리스가 있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946년, 그는 미국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오바뉴의 제141 알프스 보병대대에서 복무했다. 선임 하사로 진급한 그는 연대의 공식 예술가가 되어 군을 위한 삽화와 포스터를 그렸다.
2. 경력 시작과 주요 협업
군 복무를 마친 고시니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여러 만화가들과 교류하며 경력을 쌓았다. 이후 프랑스로 복귀하여 알베르 우데르조 및 모리스 등과 운명적인 협업을 시작하며 프랑스 만화계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2.1. 뉴욕 시기 및 초기 작품 활동
1947년, 고시니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었다. 한동안 고시니는 실업 상태였고, 홀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1948년경, 그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훗날 《MAD 매거진》의 기여자가 될 윌 엘더, 잭 데이비스, 하비 커츠먼과 친구가 되었다. 고시니는 쿠넨 출판사의 아트 디렉터가 되어 어린이 책 네 권을 집필했다.
이 무렵 그는 두 명의 벨기에 만화가인 지제와 모리스를 만났다. 모리스는 이미 만화 시리즈 《럭키 루크》를 시작한 상태였고, 6년 동안 미국에 거주했다. 고시니는 1955년부터 사망한 1977년까지 《럭키 루크》의 스토리를 집필하며 이 시리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2. 프랑스 복귀와 협업
1951년, 월드 프레스 통신사의 대표인 조르주 트루아퐁텐은 고시니에게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지부장으로 일해달라고 설득했다. 그곳에서 그는 알베르 우데르조를 만나 오랜 협업 관계를 시작했다. 그들은 여성 잡지 《본 스와레》를 위해 고시니가 《실비》를 쓴 것을 시작으로 함께 작업했다. 고시니와 우데르조는 또한 잡지 《라 리브르 주니어》에 《제앙 피스톨레》와 《뤽 주니어》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55년, 고시니는 우데르조, 장 미셸 샤를리에, 장 에브라드와 함께 에디프레스/에디프랑스 신디케이트를 설립했다. 이 신디케이트는 공장 노조를 위한 《클레롱》과 초콜릿 회사를 위한 《피스톨린》 같은 출판물을 발행했다. 고시니와 우데르조는 《제아노》에 《빌 블랑샤르》 시리즈를, 《피스톨린》에 《피스톨레》를, 같은 이름의 잡지에 《벤자민과 벤자민》을 연재했다. 고시니는 '아고스티니'라는 필명으로 장 자크 상페를 위해 《꼬마 니콜라》를 《르 무스티크》에 썼는데, 이 작품은 나중에 《쉬드 우에스트》와 《필로트》 잡지에 재출판되었다.
1956년, 고시니는 《탱탱》 잡지와 협업을 시작했다. 그는 조 앙제노와 알베르 바인베르크를 위해 몇 편의 단편을 썼고, 디노 아타나시오와 《시뇨르 스파게티》를, 봅 드 무어와 《트릭 씨》를, 모리스 마레샬과 《프뤼당스 프티파스》를, 티베와 《글로불 르 마르시앙》과 《알퐁스》를, 베르크와 《스트라퐁탱》을, 앙드레 프랑캥과 《모데스트와 퐁퐁》을 작업했다. 우데르조와의 초기 공동 창작물인 《움파파》도 1958년부터 1962년까지 《탱탱》에 연재되었다. 또한 고시니는 《파리-플러트》에 《릴리 마네킨》(윌과 함께)을, 《바이양》에 《보니파스 에 아나톨》(조르돔과 함께)과 《핍시》(고다르와 함께)를 선보였다.
3. 주요 작품 및 창작 활동
르네 고시니는 《필로트》 잡지의 창간과 함께 《아스테릭스》를 탄생시키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 외에도 《럭키 루크》, 《꼬마 니콜라》, 《이즈노굿》 등 다수의 인기 만화 시리즈를 집필했으며, 《필로트》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프랑스 만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필로트' 잡지와 '아스테릭스'의 탄생
1959년, 에디프랑스/에디프레스 신디케이트는 프랑스-벨기에 만화 잡지 《필로트》를 창간했다. 고시니는 이 잡지의 가장 생산적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잡지의 첫 호에서 그는 우데르조와 함께 《아스테릭스》를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고시니는 또한 《꼬마 니콜라》와 《제앙 피스톨레》(현재는 《제앙 수폴레》로 불림) 시리즈를 재개했다. 고시니는 고다르와 함께 《자코 르 무스》와 《트롱블롱 에 보타클루》도 시작했다.
1960년, 이 잡지는 조르주 다르가우드에게 인수되었고, 고시니는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레 디바가시옹 드 무슈 사이-투》(마르시알과 함께), 《라 포타숄로지 일뤼스트레》(카뷔와 함께), 《레 딩고도시에》(고틀리브와 함께), 《라 포레 드 셰노보》(믹 들랭스와 함께)와 같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장 타바리와 함께 그는 《레코드》에 《칼리프 하룬 엘 푸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리즈는 나중에 《필로트》에서 《이즈노굿》으로 이어졌다. 레이몽 마셰로와 함께 그는 《스피루》를 위해 《팡투플》을 만들었다.
《아스테릭스》 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며 고시니와 우데르조를 스타로 만들었다. 《필로트》지에 연재되던 《아스테릭스》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초판 부수는 6,000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두 번째 단행본인 《황금 낫도끼》는 초판 20,000부 이상, 세 번째 단행본인 《아스테릭스와 고트족》은 40,000부 이상 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아스테릭스》 시리즈가 높은 판매고를 지속하자 1966년 9월 19일 《렉스프레스》지는 '프랑스인들의 새로운 영웅, 아스테릭스 현상'이라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내보내기도 했다.


3.2. 기타 주요 만화 시리즈
고시니는 《아스테릭스》 외에도 여러 주요 만화 시리즈의 스토리를 집필했다.
- 《럭키 루크》 (1955-1977, 그림: 모리스): 서부극 만화로, 고시니가 스토리를 맡은 기간은 시리즈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총 38권이 발행되었다.
- 《모데스트와 퐁퐁》 (1955-1958, 그림: 앙드레 프랑캥): 《탱탱》 잡지에 연재되었으며, 총 2권이 발행되었다.
- 《프뤼당스 프티파스》 (1957-1959, 그림: 모리스 마레샬): 《탱탱》 잡지에 연재되었다.
- 《시뇨르 스파게티》 (1957-1965, 그림: 디노 아타나시오): 《탱탱》 잡지에 연재되었으며, 총 15권이 발행되었다.
- 《움파파》 (1958-1962, 그림: 알베르 우데르조): 《탱탱》 잡지에 연재되었으며, 총 3권이 발행되었다.
- 《스트라퐁탱》 (1958-1964, 그림: 베르크): 《탱탱》 잡지에 연재되었으며, 총 4권이 발행되었다.
- 《꼬마 니콜라》 (1959-1965, 그림: 장 자크 상페): 어린이 소설 시리즈로, 총 5권이 발행되었다.
- 《이즈노굿》 (1962-1977, 그림: 장 타바리): 《레코드》와 《필로트》에 연재되었으며, 총 14권이 발행되었다.
- 《레 딩고도시에》 (1965-1967, 그림: 고틀리브): 《필로트》에 연재되었으며, 총 3권이 발행되었다.
3.3. '필로트' 잡지 편집장
1960년, 《필로트》 잡지가 조르주 다르가우드에게 인수된 후 르네 고시니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이 잡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편집장으로서 그는 잡지의 방향을 설정하고, 다양한 신인 작가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이는 등 프랑스 만화 산업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필로트》는 프랑스 만화계의 중요한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4. 애니메이션 및 영화 제작
1970년대에 들어 고시니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영화화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의 영화화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작품의 질을 높이려 노력했다.
4.1. 스튜디오 이데픽스와 영화 프로젝트
고시니와 우데르조는 자신들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했다. 특히 이전의 두 영화에 대해 "우리의 명예를 드높이는 작품이 아니었다"고 평가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단점을 보게 되면서 그것들이 엄청나게 커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에 1973년 가을, 고시니는 우데르조, 모리스, 그리고 그들의 출판사인 조르주 다르가우드와 힘을 합쳐 직접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이데픽스를 설립했다. 이 스튜디오는 1974년 4월 1일에 설립되었고, 1978년 4월 1일에 폐쇄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장편 만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었다. 프랑스에는 1952년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 프로젝트로 인해 파산한 레 제모 스튜디오가 폐쇄된 이후 주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없었다. 이데픽스 스튜디오 설립 이전에는 창립자들의 작품이 벨기에 브뤼셀에 기반을 둔 벨비시옹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고 영화로 각색되었다.
고시니는 스튜디오 설립이 "알베르 우데르조와 함께 가졌던 오래된 어린 시절의 꿈"이자 "10년간의 작업의 정점"이라고 설명하며, "우리의 스타인 아스테릭스 덕분에 이 꿈을 여러 면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르네 고시니는 앙리 그루엘을 불러 이데픽스 스튜디오의 기술 및 예술 팀을 구성했다. 그루엘은 여러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감독했으며, 《골족의 아스테릭스》와 《아스테릭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음향 효과를 담당했고, 고시니가 각본을 쓴 피에르 체르니아의 두 작품 《르 비아제》와 《레 가스파르》도 담당했다. 그루엘은 고시니가 스튜디오의 예술 감독직을 폴 그리모의 최고 애니메이터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피에르 와트랭과 공유하도록 했다. 몇 달 동안 그루엘과 와트랭은 옛 예술가와 애니메이터들뿐만 아니라 유망한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폴 그리모의 옛 애니메이터들 대부분은 당시 작은 만화 구조에서 일하고 있었고, 실제 스튜디오에서 다시 일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피에르 와트랭과 앙리 그루엘의 인력 탐색은 결국 어려움을 겪었는데, 레 제모 스튜디오의 옛 직원들 대부분이 삽화 및 광고 분야로 전향했기 때문이었다. 인재가 부족하자 고시니의 요청으로 앙리 그루엘은 그의 친구이자 실사 영화 제작 책임자인 세르주 카이에를 파리 상공회의소에 보내 애니메이션 영화 부문 개설을 요구하여 스튜디오에 젊은 예술가들을 공급하고,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그들은 할라스 앤 배첼러와 다르가우드와 함께 첫 장편 영화인 《아스테릭스의 12가지 임무》(1976년)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7년, 그들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인 《달통의 발라드》(1978년, 《럭키 루크》 장편 영화) 제작 중에 고시니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에 스튜디오는 두 번째 작품 개봉 후 운영을 중단하고 영구 폐쇄되었다.
스튜디오 이데픽스에서 제작한 장편 영화는 다음과 같다.
- 《아스테릭스의 12가지 임무》 (1976년)
- 《달통의 발라드》 (1978년)
고시니의 영화 관련 역할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68 | 《아스테릭스와 클레오파트라》 | 공동 감독 | 해설자 목소리 (크레딧 미표기) |
1976 | 《아스테릭스의 12가지 임무》 | 공동 감독, 공동 작가, 공동 제작자 | |
1978 | 《달통의 발라드》 | 럭키 루크의 말 졸리 점퍼 | 목소리 연기 (마지막 영화 역할) |
5. 개인적인 삶
고시니는 1967년 질베르트 폴라로-밀로와 결혼했다. 1968년에는 그들의 딸 안 고시니가 태어났는데, 그녀 또한 작가가 되었다. 안 고시니는 2022년 애니메이션 영화 《꼬마 니콜라: 행복할 수 있다면》의 각본을 미셸 페슬러 및 마수브르와 공동 집필했다.
6. 사망과 후속
르네 고시니는 1977년 11월 5일, 파리의 한 병원에서 정기적인 심장 스트레스 테스트 도중 심근경색으로 5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니스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대부분의 재산은 프랑스 수석 랍비에게 기부되었다.
고시니의 사망은 《벨기에의 아스테릭스》(1979년 출판) 집필 도중에 일어났다. 고시니를 추모하기 위해 알베르 우데르조는 만화에 어두워진 하늘과 비를 그렸다. 특히 32페이지의 마지막 칸과 33페이지의 마지막 칸을 제외한 모든 칸은 고시니가 사망한 시점을 나타내기 위해 회색 하늘과 비로 그려졌다. 책의 나머지 대부분의 칸도 납빛 회색 하늘로 그려졌지만 비는 없다. 책의 마지막에는 추가적인 추모가 담겨 있다. 마지막 칸의 왼쪽 아래 모서리 근처에 우데르조는 슬프게 어깨 너머로 고시니의 서명을 바라보는 토끼를 그렸다.
고시니의 사망 후, 우데르조는 직접 《아스테릭스》의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으며, 훨씬 느린 속도로 시리즈를 계속하다가 2011년 장 이브 페리와 디디에 콘라드에게 시리즈를 넘겼다. 장 타바리 또한 《이즈노굿》을 직접 쓰기 시작했으며, 모리스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럭키 루크》를 계속했다.
고시니를 추가로 추모하기 위해 우데르조는 1981년 앨범 《아스테릭스 오디세이》(《아스테릭스와 검은 황금》)에 나오는 유대인 캐릭터 사울 벤 에피슐(독일어판에서는 사울 니잘레)에게 고시니의 모습을 부여했다. 이 앨범은 고시니의 기억에 헌정되었다.
고시니의 죽음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 "르네 고시니는 만화계에서 파리의 에펠탑, 프랑스 문학의 발자크, 아스테릭스에 대한 오벨릭스의 한마디와 같은 존재였다." - 브뤼노 프라파, 《르 몽드》, 1977년 11월 8일
- "땡땡이 아스테릭스 앞에 고개를 숙였다." - 에르제, 《르 마탱》, 1977년 11월 7일
7. 유산과 평가
르네 고시니는 프랑스 만화계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서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상과 공공장소에 헌정되어 그의 문화적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7.1. 수상 및 영예
고시니는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도 여러 중요한 수상과 영예를 받았다.
- 1966년: 프랑스 알퐁스 알라스 어워드(Le Prix Alphones Allais) 유머 작품 부문 수상 (《꼬마 니콜라와 친구들》)
- 196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학 기사 작위 수여
- 1974년: 스웨덴 아담슨 어워드 최우수 만화가 부문 수상
- 2005년: 아이즈너상 명예의 전당에 심사위원 선정으로 헌액 (미국)
-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 수여
1996년부터는 매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젊은 만화 작가들을 격려하기 위한 르네 고시니상이 수여되고 있다.
7.2. 문화적 영향력과 인정
고시니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번역되고 인기를 얻었다. 유네스코의 인덱스 트랜슬라치오눔에 따르면, 2017년 8월 기준으로 고시니는 2,200건의 작품 번역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20번째로 많이 번역된 작가로 기록되었다. 그의 작품은 107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총 5억 부 이상이 유통되었다.
그의 문화적 위상은 프랑스 내에서도 매우 높다. 2020년 1월 23일, 그의 옛 파리 자택 근처에 실물 크기의 청동상이 공개되었다. 이는 파리에서 만화가에게 헌정된 최초의 공공 조각상이었다. 또한 파리의 르네 고시니 거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의 여러 학교와 도서관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폴란드에 있는 유일한 프랑스 고등학교도 르네 고시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3. 후대에 미친 영향
르네 고시니는 프랑스 만화계의 선구자로서 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만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라는 직업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절, 이를 전문화하고 그 중요성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등장 이전에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스토리까지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고시니는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만화 창작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의 명확하고 유머러스하며 독창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은 이후 많은 만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오락을 넘어 프랑스 문화와 정체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 만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시니의 유산은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과 이야기들을 통해 계속해서 살아 숨 쉬며, 새로운 세대의 작가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