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이제 라이너(Luise Rainer루이제 라이너독일어, 1910년 1월 12일 ~ 2014년 12월 30일)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연극 감독 막스 라인하르트의 지도를 받아 16세에 독일에서 연기 경력을 시작한 독일 태생의 영화 배우이다. 수년 내에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빈 극단에서 저명한 베를린 무대 배우로 성장했으며,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연극과 영화에 출연한 후, 1935년 MGM의 인재 스카우트에게 발굴되어 할리우드에서 3년 계약을 맺었다. 당시 MGM의 주요 여배우였던 그레타 가르보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녀는 1936년 뮤지컬 전기 영화 《위대한 지그펠드》에서 조연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인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1937년에는 펄 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지》에서 가난하고 평범한 중국 농부 아내 역을 맡아 이전의 활기찬 캐릭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연기 변신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라이너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으로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이자, 다수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최초의 연기자가 되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또한 조디 포스터와 힐러리 스왱크와 함께 30세 이전에 두 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한 유일한 여배우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라이너는 나중에 두 번의 연속적인 오스카상 수상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었다고 회고하며, 이후 관객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 충족시키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후 그녀는 할리우드를 떠나 유럽으로 돌아갔으며, 일부 영화사학자들은 그녀를 할리우드 신화 속에서 "오스카 희생자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꼽기도 한다. 104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당시, 그녀는 가장 오래 생존한 오스카 수상자이자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여성 스타였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루이제 라이너는 배우로 성장하기까지의 유년기와 교육, 그리고 독일에서의 연극 및 영화 경력을 거쳐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2.1. 유년기와 교육
라이너는 1910년 1월 1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하인리히 라이너와 에밀리 쾨니히스베르거 라이너(애칭 하인츠와 에미)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그녀의 출생지를 오스트리아 빈으로 기재하기도 한다. 그녀는 함부르크에서 성장한 후 빈으로 이주했다. 라이너의 가족은 상류층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 대부분을 텍사스에서 고아로 보낸 후 유럽에 정착한 사업가라고 언급하며, 아버지로 인해 자신이 "태생적으로" 미국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라이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파괴의 세상에서 태어났다. 내 어린 시절의 빈은 굶주림과 빈곤, 혁명의 세상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녀는 두 명의 오빠가 있었고, 예정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미숙아였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소유욕이 강하고' '성급한' 사람이었지만, 애정과 관심은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루이제를 "영원히 멍하고" "매우 다른" 아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아버지의 '독재적인 소유욕'을 기억하며,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이자 따뜻하고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남편을 깊이 사랑했지만, 자신과 비슷하게 고통받는" 어머니를 보며 슬퍼했다.
집에서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학교에서는 매우 운동에 능하여 달리기 챔피언이자 두려움 없는 산악인이 되었다. 라이너는 자신의 과도한 육체적, 감정적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배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좋은 예의범절 학교를 졸업하고 "적절한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라이너의 반항적인 성격은 그녀를 '말괄량이'처럼 보이게 했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또한 어머니의 '열등감'과 같은 것을 키울까 봐 두려워했다.
그녀는 6세 때 서커스 공연을 보고 연예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철사 위에서 번쩍이는 옷과 타이츠를 입은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망쳐서 그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그 경험이 나에게 연예계를 처음 보여주었다고 확신한다. 수년 동안 나도 줄타기를 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고 말했다.
2.2. 초기 연극 및 독일 영화 경력
16세에 라이너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어머니를 방문한다는 핑계로 뒤셀도르프로 가서 뒤몽 극장(Dumont Theater)에서 미리 정해진 오디션을 보았다. 1928년 뒤몽 극장에서 첫 무대 연기를 선보였으며, 이후 자크 드발의 희곡 《마드모아젤》(Mademoiselle), 킹슬리의 《화이트의 남자들》(Men in White), 조지 버나드 쇼의 《성녀 잔》(Saint Joan),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 그리고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가 지망생의 6인》(Six Characters in Search of an Author)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그녀는 막스 라인하르트에게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수많은 비평가들'이 그녀가 어린 여배우로서 비범한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곧 라인하르트의 빈 극단 단원으로 저명한 베를린 무대 배우가 되었다.
2.3. 할리우드 진출과 MGM 계약
1934년, 여러 독일어 영화에 출연한 후, 그녀는 연극 《작가 지망생의 6인》에서 연기하는 모습이 MGM의 인재 스카우트 필 버그(Phil Berg)의 눈에 띄어 할리우드에서 3년 계약을 제안받았다. 그는 그녀가 스웨덴 MGM 스타 그레타 가르보와 같은 관객에게 어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라이너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1935년 인터뷰에서 "나는 영화를 찍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직 연극만을 원했다. 그러다가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를 보았고 즉시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라이너는 1935년 새로운 스타의 희망을 안고 할리우드로 이주했다. 전기 작가 찰스 하이엄은 MGM 스튜디오 대표인 루이스 B. 메이어와 스토리 편집자 새뮤얼 마르크스가 라이너가 할리우드에 오기 전에 그녀의 모습을 보았고, 둘 다 그녀에게 메이어가 여성 스타들에게서 높이 평가했던 외모, 매력, 그리고 특히 "어떤 부드러운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고 언급한다.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어는 여배우 콘스턴스 콜리어를 배정하여 그녀의 정확한 발음과 극적인 억양을 훈련시켰고, 라이너의 영어는 빠르게 향상되었다.
그녀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역할은 1935년 그녀의 오스트리아 영화 중 하나를 리메이크한 《탈출》(Escapade)으로, 윌리엄 파월과 공동 주연이었다. 그녀는 미르나 로이가 촬영 중반에 역할을 포기한 후 그 역할을 맡았다. 시사회 후 라이너는 자신의 모습에 불만을 품고 영화관을 뛰쳐나왔다. 그녀는 "스크린에서 내가 너무 크고 얼굴이 가득 찬 모습이어서 끔찍했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다음 센세이션"으로 환영받으며 라이너에게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인터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타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작업의 일부로 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예술가들은 성장하기 위한 고요함이 필요하다. 할리우드는 그들에게 이 고요함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스타덤은 나쁘다. 할리우드가 너무 지나치게 만들고, 스타들 앞에서 너무 많이 '절을 한다'. 스타덤은 머리 위로 압력을 가하는 무게와 같아서, 위로 성장하거나 아예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3. 할리우드 경력 및 주요 성과
루이제 라이너는 할리우드에서 급속한 성공을 거두며 역사적인 두 차례의 아카데미상 수상과 이후 스튜디오와의 갈등, 그리고 할리우드 활동 중단이라는 변화를 겪게 된다.
3.1. 《위대한 지그펠드》(1936)
라이너의 다음 출연작은 윌리엄 파월과 다시 공동 주연을 맡은 뮤지컬 전기 영화 《위대한 지그펠드》(1936)에서 실존 인물인 안나 헬드 역이었다. 파월은 라이너의 연기력에 감명받아 《탈출》에서 그녀에게 동등한 크레딧을 부여했다.

어빙 솔버그는 스튜디오의 다른 모든 스타들 중에서 라이너만이 자신이 생각하는 역할을 연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라이너는 스튜디오 대표 메이어가 그 역할을 너무 작다고 보고 그녀가 맡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신은 이제 스타이고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35년 후반 촬영이 시작된 직후, 라이너가 이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언론에 제기되었다. 그녀는 폴란드 태생의 무대 공연자를 닮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감독은 라이너가 캐스팅된 주요 이유가 그녀의 눈이었으며, 그 눈이 역할에 필요한 "거짓된 장난기의 유혹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솔버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필요한 "교만함, 활짝 뜬 눈의 매력, 그리고 취약성"을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전기 작가 찰스 애프론은 라이너가 "매우 감동적인 한 장면으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썼다. 예를 들어, 한 장면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전 남편 플로렌즈 지그펠드에게 전화로 그의 새 결혼을 축하하려 한다. "카메라는 그녀의 동요를 기록한다. 지그펠드는 거짓된 쾌활함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가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눈물을 터뜨린다." 그녀는 영화 속 드라마틱한 전화 장면으로 "빈의 눈물방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두 편의 영화에서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파월은 그녀의 연기 스타일과 품질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게다가 관대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훌륭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극도로 민감한 존재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판단력과 변함없는 이해심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감정을 통렬하고 진실하게 묘사할 수 있게 합니다. 분명히 창조적인 예술가인 그녀는 삶과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철저한 분석을 거칩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신중히 생각하여 진실하게 울려 퍼지게 합니다. 유럽에서는 그녀는 위대한 무대 스타입니다. 그녀는 스타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녀는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날 저녁, 라이너는 수상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메이어는 그녀가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MGM 홍보 책임자 하워드 스트릭링을 그녀의 집으로 급히 보냈다. 그녀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 사회자 조지 제시는 소란 중에 라이너를 소개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원래 베티 데이비스가 소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또한 이 역할로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3.2. 《대지》(1937)
라이너의 다음 영화는 1937년 폴 무니와 공동 주연을 맡은 《대지》였다. 그녀는 1935년 9월에 여성 주연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역할은 그녀의 안나 헬드 캐릭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겸손한 한족 농민을 연기해야 했다. 역사가 앤드루 새리스는 그녀의 비교적 말이 없는 연기가 "《위대한 지그펠드》에서 그녀의 히스테리컬하게 수다스러운 전화 장면 이후 놀라운 대단한 연기였다"고 평가했으며, 이는 그녀가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 기여했다.

이 수상으로 그녀는 30년 후 캐서린 헵번이 두 번의 수상을 하기 전까지 두 개의 오스카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후년에는 라이너가 너무 일찍 두 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한 것이 자신의 경력에 "최악의 일"이었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아카데미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제 훨씬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라이너는 심지어 제작 전부터 초기의 갈등을 회상했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 대표 루이스 B. 메이어는 영화 제작이나 그녀의 역할에 대해 승인하지 않았고, 그녀가 화려한 영화 스타로 남기를 원했다. 그녀는 "메이어는 어빙 솔버그가 저에게 볼품없고 불쾌해 보이는 작은 중국 농민인 오-란을 연기하도록 고집하는 것에 경악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주어진 미미한 대사로는 제가 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라이너는 메이어가 제작자 솔버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녀는 비참해 보이는 노예가 되어야 하고 늙어야 하는데, 루이제는 젊은 여자이고, 우리는 방금 그녀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는데, 당신은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그녀는 이 역할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 여겼고, 메이크업 부서에서 제안한 "고무 마스크 '중국인 모습'"을 거부하며 "리얼리즘"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진정하고, 정직하며, 현실적인"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제작 중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중국에서 여러 달 동안 배경과 분위기 있는 장면을 촬영했던 감독 조지 W. 힐은 할리우드로 돌아온 직후 자살했다. 촬영은 시드니 프랭클린이 인계받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몇 달 후, 영화가 완성되기 전, 어빙 솔버그는 37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라이너는 몇 년 후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끔찍한 충격이었다. 그는 젊고 매우 유능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저는 영화계에 훨씬 더 오래 머물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영화의 시작 크레딧에는 솔버그에게 바치는 헌사가 포함되어 있다. "어빙 그랜트 솔버그의 기억을 기리며 - 그의 마지막 가장 위대한 업적 - 우리는 이 영화를 바칩니다."
3.3. 후속작과 할리우드와의 갈등
1936년 후반, MGM은 라이너를 위해 특별히 《처녀 항해》(Maiden Voyage)라는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이 프로젝트는 보류되었고, 결국 1939년 《신혼 스위트》(Bridal Suite)라는 제목으로 아나벨라가 '루이제' 역으로 주연을 맡아 개봉되었다. 1936년 라이너가 참여했던 또 다른 미완성 영화 프로젝트는 윌리엄 파월과 공동 주연을 맡을 예정이었던 《셋을 위한 모험》(Adventure for Three)이었다. 1938년, 그녀는 성공적인 오스카 수상작인 MGM 뮤지컬 전기 영화 《그레이트 왈츠》(The Great Waltz)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랜 아내 폴디 역을 맡았는데,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큰 성공작이었다.

MGM에서 그녀가 출연한 나머지 네 편의 영화인 《황제의 촛대》(The Emperor's Candlesticks, 1937),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출연한 《빅 시티》(Big City, 1937), 《장난감 아내》(The Toy Wife, 1938), 그리고 《드라마틱 스쿨》(Dramatic School, 1938)은 잘 기획되지 않았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라이너는 계속해서 찬사를 받았다. 1936년 11월에 라이너가 캐스팅된 《황제의 촛대》는 라이너와 파월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위해 그녀는 빨간 가발을 착용했고, 에이드리언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었다. 에이드리언은 1937년 말까지 라이너가 할리우드에서 패션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촬영장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분장실, 발음 교사, 비서, 의상 담당자, 헤어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두는 등 특급 대우를 받았다. 《황제의 촛대》는 라이너가 연기 기법이 향상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첫 영화였다.
라이너의 《빅 시티》에서의 연기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평론가들은 그녀가 '현대적인 역할'에 부적합하며 트레이시의 아내로서 "너무 이국적"으로 보인다는 데 동의했다. 이러한 비판과 할리우드를 떠나겠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라이너는 영화 개봉 직후 7년 계약을 갱신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라이너가 《장난감 아내》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다는 데 동의했다. 라이너가 제작한 마지막 MGM 영화는 《드라마틱 스쿨》이었다. 그녀가 이 영화에 캐스팅될 당시 그녀의 박스 오피스 인기는 상당히 떨어졌고, 그녀는 MGM 동료인 그레타 가르보, 조안 크로퍼드, 노마 시어러와 캐서린 헵번, 메이 웨스트, 프레드 아스테어, 케이 프랜시스 등과 함께 미국 독립 극장주 협회로부터 "박스 오피스 독"으로 불리는 유명 스타들 중 한 명이었다.
라이너는 정형화되거나 스튜디오 시스템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고, 스튜디오 대표 메이어는 그녀의 진지한 역할 요구에 비협조적이었다. 또한 그녀는 더 높은 급여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까다롭고 변덕스럽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결과 그녀는 에드워드 G. 로빈슨 주연의 갱스터 영화 《마지막 갱스터》(The Last Gangster, 1937)의 여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역할을 놓쳤고, 그 역할은 또 다른 빈 출신 여배우인 로즈 스트래드너에게 돌아갔다. 수십 년 후 메이어에 대해 언급하며 라이너는 "그는 '우리가 너를 만들었고 너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쎄, 그는 최선을 다했다"고 회상했다.
3.4. 할리우드 활동 중단 및 뉴욕 이주
라이너는 1938년 MGM에서 마지막 영화에 출연한 후 영화 산업을 떠났다. 1983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루이스 B. 메이어의 사무실로 가서 "메이어 씨, 저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제 영감의 원천이 말라버렸습니다. 저는 내면에서부터 연기를 하는데, 더 이상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다툼 이후 그녀는 유럽으로 가서 스페인 내전의 피해를 입은 아이들을 돕는 데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약에서 풀려나지 않았고, 1940년까지도 스튜디오를 위해 한 편의 영화를 더 만들어야 했다.

할리우드에 환멸을 느낀 그녀는 나중에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하며, 1940년 극작가 클리퍼드 오데츠와 함께 살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1937년에 오데츠와 결혼했다. 라이너는 오데츠의 아내로서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1938년 인터뷰에서 "무대나 스크린에서 제가 했던 모든 연기는 뉴욕에서 제가 행복한 척 모든 사람들을 속이려 노력할 때 했던 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은 산산조각 나고 있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1938년 중반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지만, 오데츠가 영국으로 가면서 절차가 "다음 10월까지" 연기되었다. 이혼은 1940년 5월 14일에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라이너와 오데츠는 1936년 여름 동안 코네티컷 니컬스 팜스 역사 지구에 있는 파인 브룩 컨트리 클럽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이곳에는 그룹 시어터 (뉴욕)의 다른 많은 회원들도 연기와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라이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고려되었던 여배우 중 한 명이었지만, 그 아이디어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녀는 스크린 테스트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또한 1940년 청각 장애인 강간 피해자에 대한 연극을 원작으로 한 《조니 벨린다》(Johnny Belinda)에 자신을 캐스팅하도록 MGM 경영진을 설득하지 못했다.
후속 인터뷰에서 라이너는 자신의 영화계 사라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솔직했고, 속눈썹으로 말하는 대신 진지하게 말했고 할리우드는 저를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일곱 편의 대작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영감이 필요합니다. 저는 스튜디오 간부에게 영감의 원천이 말라버렸다고 불평했습니다. 간부는 저에게 '원천에 대해 왜 걱정하냐. 감독에게 맡겨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할리우드에서 누구에게서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4. 후기 생애 및 활동
할리우드를 떠난 후 루이제 라이너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삶을 이어갔으며, 만년에는 여러 명예를 얻었다.
4.1. 연극 및 간헐적 영화/텔레비전 출연
유럽에 있는 동안 라이너는 의학을 공부했고, 스크린 여배우가 아닌 "그저 또 다른 학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다시 무대로 돌아와 1939년 5월 1일 맨체스터의 팰리스 극장에서 자크 드발의 연극 《신부를 보라》(Behold the Bride)에서 프랑수아즈 역으로 첫 무대를 선보였다. 그녀는 5월 23일 샤프츠베리 극장에서 열린 런던 데뷔에서도 같은 역할을 연기했다. 미국으로 돌아와 1940년 3월 10일 워싱턴 D.C.의 벨라스코 극장에서 독일 이민자 감독 에르빈 피스카토르의 연출로 조지 버나드 쇼의 《성녀 잔》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1942년 5월 뮤직 박스 극장에서 J. M. 배리의 《신데렐라를 위한 키스》(A Kiss for Cinderella)에서 미스 띵(Miss Thing) 역으로 뉴욕 무대에 첫 출연했다.
그녀는 1943년 《인질》(Hostages)에 출연한 후 1944년 출판업자 로버트 크니텔(Robert Knittel)과 결혼한 뒤 영화 제작을 중단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스크린으로 돌아올 계획이 없었지만, 1943년의 복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은 제가 질문에 답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제가 화려한 모습으로 수업에 올 수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대로 잠시 돌아간 후, 저는 유럽에서 저에게 열렸던 모든 문들과 제가 난민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이 사람들이 저를 영화 작업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시작했지만 결코 끝내지 못했던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데니스에서의 경험 후, 제가 결국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리고 저의 너무 갑작스러운 스타덤이 단지 행복한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 저는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라이너가 할리우드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MGM 계약은 오래전에 만료되었고 그녀에게는 에이전트가 없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책임자 데이비드 로즈는 그녀에게 현지에서 촬영될 영어 영화의 주연 역할을 제안했지만, 전시 상황으로 인해 그녀는 그 역할을 수락할 수 없었다. 대신 로즈는 1942년에 그녀에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3)의 주연 역할을 위한 스크린 테스트를 제안했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이 캐스팅되었다. 라이너는 결국 《인질》(1943)에서 역할을 맡았고, 언론에 그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아카데미상 역할이 아닙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제 상사들은 제가 이 작품으로 상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 아니요, 이것은 특별할 것 없는 역할이지만, 저는 이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이너는 1940년대에 미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지만, 그녀와 크니텔은 결혼 생활 대부분을 영국과 스위스에서 보냈다. 로버트 크니텔은 1989년에 사망했다. 부부에게는 딸 프란체스카 크니텔(현 프란체스카 크니텔-보이어)이 있었고, 라이너에게는 두 명의 손녀(루이사, 니콜)와 두 명의 증손자(루카, 헌터)가 있었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1960년 오스카 수상작인 자신의 고전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에서 돌로레스 역으로 카메오 출연을 제안했고, 그녀가 로마 촬영지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촬영 전에 제작을 중단했다. 이는 그녀가 원치 않는 섹스 장면에 저항했거나 자신의 대본 감독을 주장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역할은 결국 시나리오에서 잘려나갔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 후 간헐적으로 텔레비전과 무대에 출연했으며, 1965년 제2차 세계 대전 텔레비전 시리즈 《컴뱃!》(Combat!)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그녀는 1984년 《사랑의 유람선》(The Love Boat) 에피소드에서 이중 역할을 맡았다. 후자의 역할로 그녀는 제작진으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녀는 86세의 나이로 1997년 영화 《갬블러》(The Gambler)에 작은 역할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복귀했다. 그녀는 1998년과 2003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과거 오스카 수상자들을 위한 특별 회고 헌정의 일환으로 참석했다.
4.2. 명예와 기념 활동
2010년 1월 12일, 라이너는 런던에서 자신의 100세 생일 축하 행사를 가졌다. 배우 이안 맥켈런 경이 그녀의 손님 중 한 명이었다. 그 달 동안 그녀는 영국 영화 협회가 내셔널 필름 시어터에서 그녀를 위해 마련한 헌정 행사에 참석했으며, 《대지》와 《그레이트 왈츠》 상영 전에 리처드 스털링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녀는 또한 내셔널 시어터 무대에 올라 크리스토퍼 프레이링 경과 인터뷰를 했다. 2010년 4월, 그녀는 터너 클래식 무비 축제에서 《대지》 상영회를 주최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돌아왔고, 진행자 로버트 오스본과의 인터뷰가 동반되었다.
라이너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할리우드 대로 6300번지에 별을 가지고 있다.
2011년 9월 5일, 당시 101세였던 라이너는 베를린으로 가서 스타 거리(Boulevard der Stars)에 자신의 별을 받았다. 그녀의 별은 2011년에 주어진 21개 별 중 하나였으며 2010년에 주어진 20개 별에 이은 것이었다. 이 별은 예외적으로 주어졌으며 논란이 없지 않았다. 라이너는 2010년에 스타 거리가 개장했을 때 독일에 단 하나뿐인 아카데미상 수상 여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졌다. 2011년에는 지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단(젠타 베르거, 게로 간데르트, 우베 캄만, 디터 코슬릭, 한스 헬무트 프린츨러)에 의해 처음에는 거부되었다. 음악 경영자 폴 베이레이(Paul Baylay)가 2010년 10월에 라이너의 누락을 발견하고 시작한 장기 캠페인이 있었다. 베이레이는 독일에서 언론과 정치인들에게 여배우와 그녀의 업적을 인정하는 캠페인을 지지하도록 로비를 펼쳤다. 이 캠페인은 독일 유대인 중앙 평의회의 지지를 받았다. 2011년 8월, 스타 거리는 마침내 베이레이가 이끈 페이스북, 이메일, 서신 캠페인이 라이너에게 추가 별을 수여하기로 한 결정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양보했다.
5. 개인 생활
루이제 라이너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37년 극작가 클리퍼드 오데츠와 이루어졌지만, 1940년 5월 14일에 이혼이 확정되었다. 두 번째 결혼은 1944년 또는 1945년에 출판업자 로버트 크니텔과 이루어졌으며, 그는 1989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크니텔과의 사이에서 딸 프란체스카 크니텔(현 프란체스카 크니텔-보이어)을 낳았다. 라이너에게는 루이사와 니콜이라는 두 명의 손녀와 루카와 헌터라는 두 명의 증손자가 있었다.
그녀는 말년에 런던 벨그라비아 이튼 스퀘어 54번지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거주했는데, 이 아파트는 이전에 여배우 비비안 리가 소유했던 곳이었다.
6. 사망
라이너는 2014년 12월 30일 104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인해 런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105세 생일에서 불과 13일 전이었다.
그녀의 기념품들은 2015년에 경매에 부쳐졌다. 이 경매로 그녀의 상속인들은 48.91 만 USD를 벌어들였다.
7. 평가와 유산
루이제 라이너의 경력은 전례 없는 성공과 급격한 쇠퇴가 교차하는 독특한 궤적을 그렸으며, 이는 그녀의 연기 스타일과 할리우드 내에서의 위치에 대한 다양한 평가로 이어졌다.
7.1. 연기 스타일
라이너는 두 번의 연속적인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과장된 여배우이며, 실제보다 더 큰, 아마도 그녀의 젊은 시절 빈과 독일 무대에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적합했던" 배우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존재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판단력과 변함없는 이해심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감정을 통렬하고 진실하게 묘사할 수 있게 한다. 분명히 창조적인 예술가인 그녀는 삶과 그 의미를 이해한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철저한 분석을 거친다. 모든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신중히 생각하여 진실하게 울려 퍼지게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7.2. "오스카의 저주"
라이너의 두 번 연속적인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경력이 급격히 쇠퇴한 현상은 종종 "오스카의 저주"라는 비유로 설명된다. 라이너 본인도 두 번의 오스카상 수상이 자신의 경력에 "최악의 일"이었을 수 있다고 언급하며, 이후 관객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 충족시키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당시 남편이었던 극작가 클리퍼드 오데츠로부터 받은 좋지 않은 경력 조언과, 그녀가 깊이 존경했던 제작자 어빙 솔버그의 37세의 나이에 예상치 못한 사망이 그녀의 급격한 쇠퇴에 기여했다고 보기도 한다.
영화사학자들은 그녀를 할리우드 신화 속에서 "오스카 희생자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간주하기도 한다. 당시 연예 칼럼니스트인 루엘라 파슨스는 이러한 현상을 "오스카 카스"(Oscar Curse)라고 부르며 대중화시켰다. 두 번의 연속 수상이라는 영광이 오히려 배우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어 이후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라이너의 사례를 통해 확산된 것이다.
8. 출연 작품
루이제 라이너가 출연한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8.1. 영화
연도 | 제목 | 역할 | |
---|---|---|---|
1932 | 《그리움 202》(Sehnsucht 202젠주흐트 202독일어) | 키티 | |
1932 | 《마담 해트 베주흐》(Madame hat Besuch마담 하트 베주흐독일어) | ||
1933 | 《오늘이 결정적인 날이다》(Heut' kommt's drauf an호이트 콤츠 드라프 안독일어 또는 Today Is the Day투데이 이즈 더 데이영어) | 마리타 코스타 | |
1935 | 《탈출》(Escapade) | 레오폴딘 두르 | |
1936 | 《위대한 지그펠드》(The Great Ziegfeld) | 안나 헬드 | |
1937 | 《대지》(The Good Earth) | 오-란 | |
1937 | 《황제의 촛대》(The Emperor's Candlesticks) | 올가 미로노바 백작부인 | |
1937 | 《빅 시티》(Big City) | 안나 벤튼 | |
1938 | 《장난감 아내》(The Toy Wife) | 질베르트 '프루프루' 브리가르 | |
1938 | 《그레이트 왈츠》(The Great Waltz) | 폴디 보겔후버 | |
1938 | 《드라마틱 스쿨》(Dramatic School) | 루이즈 모방 | |
1943 | 《인질》(Hostages) | 밀라다 프레신저 | |
1997 | 《갬블러》(The Gambler) | 할머니 | |
2003 | 《시 - 나는 발을 허공에 두었으니 그가 나를 실어다 주리라》(Poem - Ich setzte den Fuß in die Luft und sie trug포엠 - 이히 제츠테 덴 푸스 인 디 루프트 운트 지 트룩독일어) | 본인 | (마지막 영화 역할) |
8.2. 텔레비전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49 | 《쉐보레 텔레-시어터》(The Chevrolet Tele-Theatre) | 에피소드: "트라페제" | |
1950-1953 | 《럭스 비디오 시어터》(Lux Video Theatre) | 캐롤라인 / 페이지 부인 | 2 에피소드 |
1950-1957 | 《BBC 선데이 나이트 시어터》(BBC Sunday Night Theatre) | 인그라 알베르그 / 니나 | 2 에피소드 |
1951 | 《슐리츠 스타들의 극장》(Schlitz Playhouse of Stars) | 객실 담당자 | 에피소드: "사랑은 늦게 왔다" |
1951 | 《페이스 볼드윈 로맨스 시어터》(Faith Baldwin Romance Theatre) | 에피소드: "여성들 바다에 빠지다" | |
1954 | 《서스펜스》(Suspense) | 에피소드: "고통" | |
1963 | 《작은 여우들》(Die kleinen Füchse디 클라이넨 퓌히세독일어) | 버디 허바드 | TV 영화 |
1965 | 《컴뱃!》(Combat!) | 드 로이 백작부인 | 에피소드: "최고의 시간" |
1984 | 《사랑의 유람선》(The Love Boat) | 쌍둥이 자매 도로시 필딩 / 매기 코너 | 1 에피소드 |
1991 | 《댄서》(A Dancer) | 안나 | TV 영화 |
9. 수상 경력
루이제 라이너가 생전에 받은 주요 영화상 및 비평가상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 1936년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여우주연상 (《위대한 지그펠드》)
- 193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위대한 지그펠드》)
- 193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대지》)
10. 외부 링크
- [https://www.tcm.com/tcmdb/person/157225/Luise-Rainer#overview 터너 클래식 무비의 루이제 라이너 페이지]
- [http://film.virtual-history.com/person.php?personid=4999 루이제 라이너 사진]
- [http://www.cineartistes.com/fiche-Luise+Rainer.html 루이제 라이너 (프랑스어)]
- [https://luiserainer.wordpress.com/ 루이제 라이너의 삶과 업적을 기리며 (1910 - 2014)]
- [http://www.luiserainer.net/Home.php 루이제 라이너 공식 웹사이트]
- [http://www.gettyimages.com/Search/Search.aspx?contractUrl=1&language=en-US&family=editorial&p=Luise%20Rainer&src=standard#1 루이제 라이너 사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