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래리 버드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베이든스프링스에서 태어나 인근의 프렌치릭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빈곤과 가정 문제로 점철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평생의 동기 부여가 되었다.
1.1. 출생 및 가족
버드는 1956년 12월 7일, 조지아 마리(1930-1996)와 클로드 조셉 "조" 버드(1926-1975)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계,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버드에게는 네 명의 형제와 한 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조 버드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
1.2. 어린 시절과 빈곤
버드는 인디애나주 프렌치릭에서 자랐으며, 그의 어머니는 래리와 다섯 형제자매를 부양하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했다. 버드는 어린 시절의 가난이 "오늘날까지도"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래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혼했고, 그의 아버지 조는 1975년 2월에 자살했다. 버드는 가족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구를 활용했으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농구 실력을 보였다.
2. 대학 경력
래리 버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대학 선택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특히 매직 존슨과의 대학 시절 라이벌리는 그의 프로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고등학교 시절
버드는 스프링스 밸리 고등학교에서 농구 선수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4학년 때 평균 31득점, 21리바운드, 4.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학교 역사상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등번호 33번을 사용했으며, 이는 이후 대학과 프로 경력 내내 그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ABA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6피트 9인치(약 206 cm)의 센터 멜 다니엘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이는 그가 처음 접한 프로 농구였다.
2.2. 대학 선택과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1974년, 버드는 밥 나이트 감독이 이끄는 농구 명문 인디애애나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농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작은 고향 마을과 블루밍턴의 큰 학생 인구 사이의 적응이 너무나 압도적이라고 느낀 버드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고 프렌치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인근의 노스우드 인스티튜트(현재 노스우드 대학교)에 등록하고 1년 동안 시청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다. 1975년, 그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성공적인 대학 농구 경력을 쌓았다.
2.3. 매직 존슨과의 라이벌리 시작
버드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시카모어스 농구팀을 이끌고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33승 0패의 무패 기록을 세웠다. 1979년 NCAA 디비전 I 농구 챔피언십 경기에서 미시간 주립대학교와 맞붙었으며, 이 경기에서 버드는 미시간 주립대의 어빈 "매직" 존슨과 처음으로 대결했다. 이 경기는 대학 농구 경기 중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두 선수의 라이벌 관계는 이후 10년 이상 프로 경력 내내 이어졌다. 인디애나 주립대는 75대 64로 패배하며 무패 행진을 마감했다. 버드는 이 경기에서 19득점을 기록했지만 21개의 슛 중 7개만을 성공시켰다.
2.4. 대학 시절 수상 및 평가
챔피언십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버드는 뛰어난 활약으로 네이스미스 올해의 선수상을 포함한 수많은 연말 상과 영예를 얻었다. 그는 또한 존 우든 상, 오스카 로버트슨 트로피, 아돌프 럽 트로피, NABC 올해의 선수상, AP 통신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상을 수상했다. 대학 경력 동안 버드는 경기당 평균 30.3득점, 13.3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시카모어스를 81승 13패의 기록으로 이끌었다. 그는 1979년 체육 교육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 버드는 소프트볼을 하다가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검지손가락에 복합 골절을 입었다. 기본적인 것에 충실한 버드가 땅볼을 양손으로 잡으려다 생긴 일이라고 한다. 보스턴의 트레이너에 따르면 버드의 검지손가락은 "망치로 부서진 것처럼 엉망"이었다고 한다. 버드는 이 부상으로 인해 슈팅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연습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 이 일화는 버드의 성격을 잘 보여주며, 그의 아름다운 포물선 슛도 이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버드 본인은 골절 이후 슈팅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3. 프로 경력 (선수)
래리 버드는 보스턴 셀틱스에 입단하여 NBA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다. 그의 전성기는 MVP 3연패와 여러 차례의 우승으로 빛났지만,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 후반기는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3.1. 보스턴 셀틱스 입단 및 초기 경력
버드는 1978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전체 6순위로 지명되었다. 그는 즉시 셀틱스와 계약하지 않고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마지막 시즌을 뛰며 NCAA 챔피언십 경기에 팀을 이끌었다. 셀틱스의 단장 레드 아워백은 버드에게 현재 로스터에 있는 어떤 셀틱스 선수보다도 많은 돈을 주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버드의 에이전트 밥 울프는 버드가 시장 가격보다 낮은 제안을 거부하고 1979년 드래프트에 다시 참여할 것이라고 아워백에게 통보했다. 1979년 6월 25일 드래프트가 시작되면 보스턴의 지명권이 만료될 예정이었고, 버드는 유력한 1순위 지명 후보였다. 오랜 협상 끝에 버드는 6월 8일 셀틱스와 5년 325.00 만 USD 계약을 체결하며, 당시 스포츠 역사상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신인 선수가 되었다. 이 계약 직후 NBA 드래프트 자격 규정이 변경되어 팀이 선수가 계약할 준비가 되기 전에 드래프트하는 것을 막는 '버드 대학 규정(Bird Collegiate Rule)'이 생겼다. 이 샐러리 캡에 대한 예외는 1990년대 이후 선수 연봉이 고騰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루키 시즌인 1979-80 시즌에 버드는 즉시 셀틱스를 우승 경쟁팀으로 탈바꿈시켰다. 팀은 그가 드래프트되기 전 시즌보다 32승을 더 기록하며 동부 콘퍼런스 1위를 차지했다. 데뷔전에서 버드는 휴스턴 로키츠를 상대로 114대 106 승리에서 14득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79년 11월 14일, 그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상대로 115대 111 승리에서 23득점, 19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첫 트리플더블을 달성했다. 9일 후, 버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 118대 103 승리에서 30득점(11리바운드, 3어시스트 포함)을 기록하며 첫 30득점 경기를 펼쳤다. 시즌 평균 21.3득점, 10.4리바운드, 4.5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올스타팀에 선정되었고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보스턴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1980-81 NBA 시즌을 앞두고 셀틱스는 드래프트에서 케빈 맥헤일을 지명하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부터 로버트 패리시를 영입하며, 향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트리오를 결성했다. 버드, 맥헤일, 패리시로 구성된 프런트코트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런트코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버드의 리더십과 강화된 로스터를 바탕으로 셀틱스는 다시 한번 콘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여 세븐티식서스와 재대결했다. 보스턴은 시리즈 초반 3대 1로 뒤졌지만, 이후 세 경기를 내리 승리하며 휴스턴 로키츠와의 파이널에 진출했다. 셀틱스는 6경기 만에 승리하며 버드의 첫 NBA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버드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1.9득점, 14리바운드, 6.1어시스트, 2.3스틸을 기록했으며, 파이널에서는 평균 15.3득점, 15.3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82 NBA 올스타전에서 버드는 19득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 1981-82 NBA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첫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되었다. 버드는 결국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모제스 말론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셀틱스는 3년 연속으로 세븐티식서스를 만났고, 7경기 만에 패배했다. 보스턴의 불운은 다음 시즌에도 이어졌으며, 버드는 다시 MVP 투표에서 말론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팀은 밀워키 벅스에게 콘퍼런스 준결승에서 패배했다.
3.2. 전성기: MVP 3연패와 우승

버드는 1983-84 NBA 시즌에 경기당 평균 24.2득점, 10.1리바운드, 6.6어시스트, 1.8스틸을 기록하며 MVP에 선정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셀틱스는 지난 해 벅스에게 당한 패배를 5경기 만에 설욕하고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승리하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파이널에 진출했다. 4차전에서 버드의 대학 라이벌 매직 존슨이 이끄는 레이커스는 3대 1로 앞설 위기에 처했지만, 커트 램비스에게 파울이 선언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레이커스는 평정심을 잃었다. 보스턴은 이 경기를 역전승했고, 결국 7경기 만에 시리즈를 승리했다. 버드는 경기당 평균 27.4득점, 14리바운드, 3.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1984년 12월 9일, 버드는 애틀랜타 호크스를 상대로 128대 127로 근소하게 승리한 경기에서 48득점, 14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84-85 NBA 시즌의 3월 12일, 버드는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최고이자 프랜차이즈 기록인 60득점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케빈 맥헤일이 56득점으로 셀틱스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운 지 불과 9일 만에 나온 것이었다. 그해 말, 버드는 경기당 평균 28.7득점, 10.5리바운드, 6.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2년 연속 MVP에 선정되었다. 보스턴은 플레이오프를 통과하여 레이커스와 재대결했지만, 이번에는 6경기 만에 패배했다.
1985년 오프시즌 동안 버드는 어머니 집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 자갈을 삽으로 퍼 나르다가 허리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버드는 선수 생활 내내 허리 문제를 겪게 되었다.

1985-86 NBA 시즌이 시작되기 전, 셀틱스는 부상 경력이 있는 올스타 센터 빌 월튼을 과감하게 트레이드했다. 이 위험은 성공적이었다. 월튼의 영입은 보스턴이 리그 최고 기록인 67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버드의 경력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1986 NBA 올스타 주말에 열린 첫 NBA 3점슛 콘테스트에서 그가 라커룸에 들어서며 누가 2위를 할 것인지 물어본 뒤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1985년 11월 27일, 버드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상대로 132대 124 승리에서 47득점, 12리바운드, 2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했다. 1986년 3월 10일, 그는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116대 115로 아깝게 패배한 경기에서 50득점, 11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경기당 평균 25.8득점, 9.8리바운드, 6.8어시스트, 2.0스틸을 기록하며 버드는 NBA 역사상 세 번째로 3년 연속 MVP를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셀틱스는 첫 세 라운드를 통틀어 단 한 경기만 패배하며 파이널에서 휴스턴 로키츠와 맞붙었다. 로키츠와의 파이널 6차전에서 버드는 29득점, 11리바운드, 12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셀틱스가 6경기 만에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챔피언십 라운드에서 평균 24득점, 9.7리바운드, 9.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85-86 시즌의 셀틱스는 종종 역대 최고의 농구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보스턴 글로브의 피터 메이와 그랜틀랜드의 빌 시몬스는 이 팀을 1위로 꼽았다.
3.3. 후기 경력과 부상
1987년, 셀틱스는 버드의 경력 중 마지막 파이널 진출을 이뤄냈으며, 밀워키 벅스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힘든 시리즈를 거쳤다. 피스톤스와의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 5차전에서, 경기 종료 5초를 남기고 보스턴이 107대 106으로 뒤지고 있을 때, 버드는 인바운드 패스를 가로챘다. 코트 밖으로 넘어지면서 버드는 몸을 돌려 팀 동료 데니스 존슨에게 패스했고, 존슨은 1초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역전 레이업을 성공시켰다. 이 극적인 플레이는 셀틱스의 시리즈를 살려냈다. NBA 파이널에 진출한 셀틱스는 시즌 동안 65승을 기록한 압도적인 레이커스 팀에게 패배했다. 셀틱스는 6경기 만에 레이커스에게 패했고, 버드는 평균 24.2득점(야투 성공률 0.445), 10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셀틱스는 1988년에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게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6경기 만에 패배하며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1980년대에 버드와 존슨은 총 8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으며, 매직이 5번, 버드가 3번 우승했다. 1980년대에는 보스턴이나 로스앤젤레스가 매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1987-88 NBA 시즌은 버드의 경력 중 가장 높은 득점을 기록한 시즌이었다. 1988년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7차전에서 버드는 4쿼터에 10개의 슛 중 9개를 성공시키며 20득점을 기록, 셀틱스를 시리즈 승리로 이끌었다. 버드는 총 34득점을 기록했으며, 애틀랜타의 도미니크 윌킨스의 47득점 활약을 극복했다. 윌킨스는 "골대가 우물 같았다. 나는 놓칠 수 없었다. 그도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경기는 마지막 슛까지 갔다. 누가 마지막 슛을 넣을 것인가? 그것은 내가 뛰었거나 본 경기 중 가장 위대한 경기였다"라고 말했다. 셀틱스는 5년 만에 처음으로 NBA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으며,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피스톤스에게 6경기 만에 패배했다.
1988-89 NBA 시즌은 버드가 양쪽 발뒤꿈치에서 뼈 돌기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6경기 만에 끝났다. 버드는 1989년 셀틱스로 복귀했지만, 허리 통증과 노쇠한 셀틱스 로스터로 인해 전성기 기량을 되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버드는 여전히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셀틱스에서의 마지막 세 시즌 동안 버드는 경기당 평균 20득점 이상, 9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야투 성공률 45% 이상을 기록하며 셀틱스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1990-91 NBA 시즌에 셀틱스를 29승 5패로 이끌던 버드는 허리 신경근 압박으로 인해 22경기에 결장했으며, 이 상태는 결국 그의 은퇴로 이어졌다. 버드는 오프시즌에 허리 디스크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허리 문제는 계속되었고 1991-92 NBA 시즌 동안 37경기에 결장했다. 1992년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버드는 재발하는 허리 문제로 인해 7경기 중 4경기에 결장했다.
버드의 마지막 두 시즌 동안 심각한 허리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출전했을 때 셀틱스는 71승 28패를 기록했다. 버드 없이 팀은 30승 29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그가 코트에 있을 때의 중요성과 경기 변화 능력을 더욱 보여주는 것이었다.
1992년 8월 18일, 버드는 NBA 은퇴를 발표했다. 버드의 은퇴 후, 셀틱스는 즉시 그의 등번호 3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3.4. 선수로서의 특징과 플레이 스타일

NBA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한 세대에 한 명 정도, 정말 슈퍼스타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가 나타난다. 래리 버드가 그런 선수였다"고 평가된다. 버드는 다른 일반적인 NBA 선수들에 비해 신체 능력과 운동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확한 기술과 경기의 흐름을 읽는 능력에 탁월했다. 특히 중거리 및 장거리 슛, 리바운드, 패스(어시스트) 기술이 뛰어났다. 그는 리그 최고의 3점 슈터 중 한 명이었고, 어깨에 공을 짊어지는 듯한 독특한 폼으로 많은 슛을 성공시켰다. 버드만큼 키가 크면서도 이렇게 다재다능한 선수는 매직 존슨 정도밖에 없었다. 경기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에, 셀틱스의 감독이었던 빌 피치는 버드를 "코다크"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는 경기 중 모든 장면을 카메라처럼 뇌에 기록한다는 의미였다.
스몰 포워드치고는 큰 206 cm의 키에도 불구하고 점프력이 현저히 낮아, 도움닫기 없이는 덩크슛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했다. 뛰는 것도 잘하지 못했고, 발도 느렸다. 루키 시절에는 드리블도 주로 쓰는 오른손으로만 부드럽게 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손바닥으로 때리는 듯한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버드는 NBA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농구 자체를 잘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버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열정과 투지,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점차 잠재된 재능을 일깨웠다. 낮은 신체 능력을 보완하고도 남을 만큼 농구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익혔다. 느린 발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슛 기회를 만들었고, 결정적인 슛을 여러 번 성공시켰다. 버드는 아웃사이드 플레이를 주로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감하게 리바운드 싸움에 참여하여 최고의 위치에서 리바운드를 따냈다. 루즈볼에도 부상을 개의치 않고 몸을 던져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러한 격렬한 열정을 보여주는 버드의 강렬한 플레이는 모든 관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놀라운 승부 근성을 자랑했으며, 막판에 팀을 구하는 플레이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명장으로 알려진 라이벌 레이커스의 감독 팻 라일리는 "경기를 결정짓는 순간에 슛을 맡긴다면 마이클 조던을 선택하겠지만, 내 생사가 걸린 순간에 슛을 맡긴다면 버드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틸 기술과 수비 리바운드에도 능하여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세 번이나 선정되었다. 반면, 찰스 바클리처럼 "버드는 수비에 약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버드의 기술은 해마다 향상되었다. 주로 쓰는 오른손 못지않게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왼손 슛은 프로 입단 후에 향상시킨 기술 중 하나이다. 1986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는 경기 전에 "적어도 3쿼터까지는 왼손으로 슛을 하겠다"고 팀 동료들에게 선언했고, 왼손 슛만으로 20득점을 기록했다(총 47득점). 오프시즌에는 주로 본가에서 훈련했다. 루키 시절에는 혹평을 받았던 드리블 기술도 향상되었고, 버드는 스몰 포워드 포지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리블 기술과 패스 기술이 뛰어나 실질적으로 팀의 포인트 가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하는 포워드, 즉 포인트 포워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패리시, 케빈 맥헤일, 그리고 버드로 구성된 셀틱스의 센터와 두 포워드는 NBA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 라인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도 많다.
1970년대까지 NBA는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자바와 같은 강력한 센터 플레이어가 경기의 승패와 팀의 우열을 결정했다. 그러나 버드,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등의 등장으로 가드나 포워드 선수가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버드는 NBA 나아가 농구에 변혁을 가져온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경기 중 강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대 선수를 도발하는 트래시 토크의 달인으로도 유명했다. 동시대 최고의 트래시 토커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 1984년 세븐티식서스와의 경기에서 부진했던 줄리어스 어빙에게 자신이 득점할 때마다 자신의 득점과 어빙의 득점을 말하여 평소 온화한 어빙을 격분시켰다. 이를 계기로 난투극이 벌어졌고, 버드와 어빙은 1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다만, 버드는 자서전에서 양 팀의 득점을 계속 말한 것은 팀 동료 M.L. 카였다고 언급했다. (당시 옆에 있던 찰스 바클리가 버드를 가로막아 주먹질은 하지 못했다.)
- 1986년 4월 20일, 버드의 셀틱스와 조던의 시카고 불스는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렀다. 당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보스턴이 승리했지만, 마이클 조던은 플레이오프 최고 득점 기록인 63득점을 세웠다. 이에 대해 버드는 조던의 활약에 "농구의 신이 조던으로 가장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조던을 비꼬는 내용이기도 하다. 즉, 조던의 실력이 아니라 농구의 신이 우연히 조던의 몸에 들어와 그 정도 활약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버드다운 발언이었다.
- 첫 3점슛 콘테스트가 열린 1986년, 버드는 대기실에 모인 참가자들을 잠시 바라본 후 "누가 2등을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코트에 나가 우승했다. 이듬해 콘테스트에서도 참가자들에게 "너희들은 준우승하러 온 것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승은 나니까"라고 말하며 실제로 우승했다. 3년째에는 "이번에는 아무 말 할 필요가 없다. 모두 누가 우승할지 아니까"라고 말하며 또다시 우승했다. 1988년 3년 연속 우승을 확정 짓는 마지막 슛을 던진 직후, 버드는 검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드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는 경기 전에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는 매직 존슨에게 찾아가 "네가 뛰지 못해 유감이다. 하지만 너는 여기 있으니, 널 위해 쇼를 보여주겠다"고 쇼타임 농구를 하는 매직에게 말했고, 득점할 때마다 매직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 슈퍼소닉스와의 경기에서 동점으로 경기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자신을 수비하던 재비어 맥다니엘에게 "나는 여기서 패스를 받아 네 정면에서 슛을 넣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선언한 대로 슛을 성공시킨 후 "2초나 남길 생각은 없었다(버저비터를 노렸다)"고 말했다.
- 크리스마스에 열린 페이서스와의 경기에서는 경기 전에 척 퍼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다"고 말한 뒤, 경기 중 벤치에 앉아 있던 퍼슨 앞에서 3점슛을 던지고는 곧바로 "메리 Fxxking 크리스마스"라고 말했고, 공은 골대에 빨려 들어갔다.
- 피스톤스와의 경기에서 데니스 로드맨이 버드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버드는 팀 동료들에게 "나는 오픈이다. 서둘러라, 그들이 나에게 아무도 수비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라고 계속 말했고, 4번 연속 슛을 성공시킨 후 피스톤스의 감독 척 데일리에게 "누가 나를 수비하고 있나? 누가 수비를 붙였나? 나에게 수비를 붙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60득점을 기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1986년 매버릭스와의 경기에서는 타임아웃 후 코트로 돌아와 매버릭스 벤치에게 앞으로의 작전을 알려주었다. "에인지가 DJ에게 패스하고, DJ가 나에게 패스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공을 받아 3점슛을 던질 것이다. 알겠나? 나는 여기 서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패스를 받고, 다음 순간 너희가 들을 것은 공이 네트를 통과하는 소리다." 실제로 그 말대로 된 후, 버드는 수비로 돌아가기 전에 매버릭스 벤치에게 윙크했다.
- 1977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픽으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돼 뛰었던 켄트 벤슨은 버드가 가장 싫어하는 선수였다. 이 선수는 버드와 같은 인디애나주 출신으로 버드가 인디애나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2학년으로 1년 선배였는데 그렇게 버드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버드는 NBA에서 벤슨을 만날 때마다 평소보다 더 전투적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하는데 보스턴 셀틱스 팀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벤슨을 아주 많이 경기 중에 괴롭혔다고 한다. 결국 벤슨과 대결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한다.
버드는 경력 동안 평균 24.3득점, 야투 성공률 0.496, 자유투 성공률 0.886, 3점슛 성공률 0.376을 기록했다. 경력 평균 10.0리바운드와 6.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버드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야투 성공률 50% 이상, 3점슛 성공률 40% 이상, 자유투 성공률 90% 이상을 기록한 선수이며, 이를 두 번 달성했다. 그는 NBA 3점슛 콘테스트에서 3년 연속 우승했다. 그는 가끔 눈을 감고 3점슛 연습을 하기도 했다.
버드는 또한 뛰어난 패서이자 수비수로 기억된다. 그는 상대적으로 느렸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재능을 보여주어 강력한 팀 수비수가 되었다. 그는 통산 1,556개의 스틸을 기록했다. 그의 수비 능력을 인정받아 세 번의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레드 아워백은 버드를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간주되었다. 버드의 겸손한 뿌리는 그의 가장 자주 사용되는 별명인 "프렌치릭에서 온 시골뜨기"의 원천이었다. 버드는 또한 "래리 레전드"라고도 불렸다.
4. 매직 존슨과의 라이벌리

래리 버드와 매직 존슨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관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라이벌리는 대학 시절, 버드의 인디애나 주립대가 존슨의 미시간 주립대에게 NCAA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라이벌리는 NBA에서 부활한 셀틱스-레이커스 라이벌리에서도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버드가 이끄는 셀틱스나 매직이 이끄는 레이커스 중 한 팀이 매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버드와 매직은 세 번 맞붙었다. 매직은 1985년과 1987년에 버드를 상대로 우위를 점했고, 버드는 1984년에 매직을 이겼다.
언론인들은 버드와 매직이 셀틱스와 레이커스, 동부와 서부, 흑인과 백인 사이의 대립과 같은 다양한 대조를 대표한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한 언론인은 "그들은 다르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을 전기톱으로 잘라보면 형제 같은, 아니면 동일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버드의 플레이를 보는 것은 매직의 플레이를 보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둘 다 리그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재능을 공유했다. 그들은 각각 카리스마, 능숙한 슈팅 터치, 뛰어난 패스 기술, 그리고 팀 지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팀과 관중을 열광시켰다.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은 새로운 팬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앉아서 "버드와 매직이 할 수 있는 일에 경탄"했고, 어린 아이들에게 "경기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했다.
버드와 매직의 코트 위 존재감은 농구에 대한 그들의 기여 중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그들의 라이벌리는 NBA의 지형을 바꾸어, "고군분투하고 거의 수익을 내지 못하던 리그"를 "팀과 선수 모두에게 매우 눈에 띄는 재정적 및 마케팅적 꿈"으로 변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스타의 등장이 NBA 인기 상승과 관련이 있다고 인식했으며, NBA는 이 두 스타를 중심으로 마케팅을 시작했다.
강렬한 라이벌 관계에도 불구하고 버드와 존슨은 코트 밖에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우정은 두 선수가 서로를 숙적으로 묘사하는 컨버스 광고를 촬영하면서 꽃피웠다. 존슨은 1993년 2월 4일 버드의 은퇴식에 참석하여 감격적으로 버드를 "영원한 친구"라고 묘사했다.
2019년 NBA 시상식에서 버드는 매직 존슨과 함께 NBA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2022년부터 NBA는 콘퍼런스 파이널 MVP를 시상할 예정이며,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 MVP 트로피는 버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서부 콘퍼런스 트로피는 존슨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국가대표 경력
래리 버드는 1992년 드림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5.1. 드림팀 합류
1992년 여름, 버드는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및 다른 NBA 스타들과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992년 하계 올림픽에 미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했다. 이는 미국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NBA 선수들이 참가한 것이었다. '드림팀'으로 알려진 이 팀은 남자 농구 금메달을 획득했다. 버드는 8경기에서 평균 8.4득점을 기록했다.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은 이 팀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농구 재능의 집합체"라고 불렀다.
버드는 시즌 내내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아 참가에 난색을 표했지만,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매직 존슨을 비롯한 셀틱스 관계자들의 열렬한 설득을 받아 올림픽 출전을 결심했다. 버드는 만족스러운 상태로 경기를 뛸 수 없었기 때문에 연습과 올림픽 본선에서도 출전 시간이 제한되었다. 경기 중에는 벤치 옆에서 허리 마사지를 받는 모습도 보였지만, 중요한 순간에 출전하여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대륙 예선에서 처음과 마지막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버드였다.
6. 지도자 및 경영자 경력
래리 버드는 선수 은퇴 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과 경영진으로 활동하며 농구계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버드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셀틱스 프런트 오피스의 특별 보좌관으로 일했다. 1997년, 그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버드는 자신이 3년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6.1.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이전에는 감독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드는 1997-98 NBA 시즌에 페이서스를 58승 24패의 기록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당시 NBA 팀으로서 프랜차이즈 최고 기록이었다. 그는 시카고 불스를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7차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이러한 노력으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버드는 이후 1999년과 2000년에 페이서스를 2년 연속 중부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00 NBA 파이널에 진출시켰다. 버드는 2000 시즌이 끝난 직후 감독직에서 사임하며, 3년만 감독을 맡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후임으로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친구였던 릭 칼라일을 추천했지만, 아이재아 토마스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6.2. 인디애나 페이서스 경영진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버드는 샬럿에 설립될 예정이던 신생 팀(현재의 샬럿 호니츠)의 구단주 그룹에 합류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2003년, 버드는 다시 페이서스에 합류했다. 이번에는 팀의 농구 운영 사장으로 취임하여 팀의 인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버드가 처음으로 한 큰 일은 감독 아이재아 토마스를 해고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감독 체제에서 페이서스는 정규 시즌 승수를 점차 늘려가고 있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토마스의 후임으로 버드는 릭 칼라일을 고용했다.
2011-12 NBA 시즌 이후, 그는 올해의 경영인상을 수상하며 NBA 역사상 MVP, 올해의 감독상, 올해의 경영인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2012년 NBA 드래프트 전날, 버드와 페이서스는 결별을 발표했으며, 버드는 건강 문제를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버드는 2013년 농구 운영 사장으로 페이서스에 복귀했으며, 2017년까지 그 역할을 유지했다. 버드는 2017년에 다시 사임했지만, 고문 자격으로 팀에 남았다. 버드는 2022년 7월까지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약 1년 후인 2023년 6월에는 페이서스에 고문으로 다시 고용되었다.
7. 수상 및 영예
래리 버드는 선수, 감독, 경영자로서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상훈과 영예를 얻었다.
7.1. NBA 주요 수상
- 3회 NBA 챔피언 (1981, 1984, 1986)
- 2회 NBA 파이널 MVP (1984, 1986)
- 3회 NBA 최우수 선수 (1984-1986)
- 12회 NBA 올스타 (1980-1988, 1990-1992)
- NBA 올스타전 MVP (1982)
- 9회 올-NBA 퍼스트 팀 (1980-1988)
- 1회 올-NBA 세컨드 팀 (1990)
- 3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1982-1984)
- NBA 올해의 신인 (1980)
-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0)
- 3회 NBA 3점슛 콘테스트 챔피언 (1986-1988)
- 2회 NBA 3점슛 성공률 리더 (1985, 1986)
- 2회 50-40-90 클럽 (1987, 1988)
- AP 통신 올해의 운동선수 (1986)
- NBA 50주년 기념 올-타임 팀 선정 (1996)
- NBA 75주년 기념 팀 선정 (2021)
- 보스턴 셀틱스에 의해 등번호 33번 영구 결번
-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 MVP 트로피 (래리 버드 트로피) 명명 (2022년 제정)
- NBA 올스타전 헤드 코치 (1998)
- NBA 올해의 감독 (1998)
- NBA 올해의 경영인 (2012)
- NBA 평생 공로상 (2019)
7.2. 대학 및 기타 수상
- 존 우든 상 (1979)
-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 선수상 (1979)
- 오스카 로버트슨 트로피 (1979)
- 아돌프 럽 트로피 (1979)
- NABC 올해의 선수상 (1979)
- 2회 MVC 올해의 선수 (1978-1979)
- 2회 컨센서스 퍼스트 팀 NCAA 남자 농구 올-아메리칸 (1978-1979)
- 인디애나 주립대 시카모어스에 의해 등번호 33번 영구 결번
- 1992년 올림픽 금메달 (미국 국가대표팀)
- 1992년 FIBA 아메리카 챔피언십 금메달
- 1977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7.3. 명예의 전당 헌액
- 두 차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 1998년 - 선수 개인 자격
- 2010년 - "드림팀" 멤버 자격
-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2006년)
-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 (2009년, "드림팀" 멤버 자격)
- FIBA 명예의 전당 (2017년, "드림팀" 멤버 자격)
8. 통계
이 섹션에서는 래리 버드의 NBA 정규 시즌, 플레이오프, 대학 통계를 상세히 다룹니다.
8.1. NBA 정규 시즌 통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평균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평균 리바운드 | 평균 어시스트 | 평균 스틸 | 평균 블록 | 평균 득점 |
---|---|---|---|---|---|---|---|---|---|---|---|---|
1979-80 | 보스턴 셀틱스 | 82 | 82 | 36.0 | .474 | .406 | .836 | 10.4 | 4.5 | 1.7 | .6 | 21.3 |
1980-81† | 보스턴 셀틱스 | 82 | 82 | 39.5 | .478 | .270 | .863 | 10.9 | 5.5 | 2.0 | .8 | 21.2 |
1981-82 | 보스턴 셀틱스 | 77 | 58 | 38.0 | .503 | .212 | .863 | 10.9 | 5.8 | 1.9 | .9 | 22.9 |
1982-83 | 보스턴 셀틱스 | 79 | 79 | 37.7 | .504 | .286 | .840 | 11.0 | 5.8 | 1.9 | .9 | 23.6 |
1983-84† | 보스턴 셀틱스 | 79 | 77 | 38.3 | .492 | .247 | .888 | 10.1 | 6.6 | 1.8 | .9 | 24.2 |
1984-85 | 보스턴 셀틱스 | 80 | 77 | 39.5 | .522 | .427 | .882 | 10.5 | 6.6 | 1.6 | 1.2 | 28.7 |
1985-86† | 보스턴 셀틱스 | 82 | 81 | 38.0 | .496 | .423 | .896 | 9.8 | 6.8 | 2.0 | .6 | 25.8 |
1986-87 | 보스턴 셀틱스 | 74 | 73 | 40.6 | .525 | .400 | .910 | 9.2 | 7.6 | 1.8 | .9 | 28.1 |
1987-88 | 보스턴 셀틱스 | 76 | 75 | 39.0 | .527 | .414 | .916 | 9.3 | 6.1 | 1.6 | .8 | 29.9 |
1988-89 | 보스턴 셀틱스 | 6 | 6 | 31.5 | .471 | ... | .947 | 6.2 | 4.8 | 1.0 | .8 | 19.3 |
1989-90 | 보스턴 셀틱스 | 75 | 75 | 39.3 | .473 | .333 | .930 | 9.5 | 7.5 | 1.4 | .8 | 24.3 |
1990-91 | 보스턴 셀틱스 | 60 | 60 | 38.0 | .454 | .389 | .891 | 8.5 | 7.2 | 1.8 | 1.0 | 19.4 |
1991-92 | 보스턴 셀틱스 | 45 | 45 | 36.9 | .466 | .406 | .926 | 9.6 | 6.8 | .9 | .7 | 20.2 |
통산 | 897 | 870 | 38.4 | .496 | .376 | .886 | 10.0 | 6.3 | 1.7 | 0.8 | 24.3 | |
올스타 | 10 | 9 | 28.7 | .423 | .231 | .844 | 7.9 | 4.1 | 2.3 | 0.3 | 13.4 | |
8.2. NBA 플레이오프 통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평균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평균 리바운드 | 평균 어시스트 | 평균 스틸 | 평균 블록 | 평균 득점 |
---|---|---|---|---|---|---|---|---|---|---|---|---|
1980 | 보스턴 셀틱스 | 9 | 9 | 41.3 | .469 | .267 | .880 | 11.2 | 4.7 | 1.6 | 0.9 | 21.3 |
1981† | 보스턴 셀틱스 | 17 | 17 | 44.1 | .470 | .375 | .894 | 14.0 | 6.1 | 2.3 | 1.0 | 21.9 |
1982 | 보스턴 셀틱스 | 12 | 12 | 40.8 | .427 | .167 | .822 | 12.5 | 5.6 | 1.9 | 1.4 | 17.8 |
1983 | 보스턴 셀틱스 | 6 | 6 | 40.0 | .422 | .250 | .828 | 12.5 | 6.8 | 2.2 | 0.5 | 20.5 |
1984† | 보스턴 셀틱스 | 23 | 23 | 41.8 | .524 | .412 | .879 | 11.0 | 5.9 | 2.3 | 1.2 | 27.5 |
1985 | 보스턴 셀틱스 | 20 | 20 | 40.8 | .461 | .280 | .890 | 9.1 | 5.8 | 1.7 | 1.0 | 26.0 |
1986† | 보스턴 셀틱스 | 18 | 18 | 42.8 | .517 | .411 | .927 | 9.3 | 8.2 | 2.1 | .6 | 25.9 |
1987 | 보스턴 셀틱스 | 23 | 23 | 44.1 | .476 | .341 | .912 | 10.0 | 7.2 | 1.2 | 0.8 | 27.0 |
1988 | 보스턴 셀틱스 | 17 | 17 | 44.9 | .450 | .375 | .894 | 8.8 | 6.8 | 2.1 | 0.8 | 24.5 |
1990 | 보스턴 셀틱스 | 5 | 5 | 41.4 | .444 | .263 | .906 | 9.2 | 8.8 | 1.0 | 1.0 | 24.4 |
1991 | 보스턴 셀틱스 | 10 | 10 | 39.6 | .408 | .143 | .863 | 7.2 | 6.5 | 1.3 | 0.3 | 17.1 |
1992 | 보스턴 셀틱스 | 4 | 2 | 26.8 | .500 | .000 | .750 | 4.5 | 5.3 | 0.3 | 0.5 | 11.3 |
통산 | 164 | 162 | 42.0 | .472 | .321 | .890 | 10.3 | 6.5 | 1.8 | 0.9 | 23.8 | |
8.3. 대학 통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평균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평균 리바운드 | 평균 어시스트 | 평균 스틸 | 평균 블록 | 평균 득점 |
---|---|---|---|---|---|---|---|---|---|---|---|---|
1976-77 |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 28 | - | 36.9 | .544 | - | .840 | 13.3 | 4.4 | - | - | 32.8 |
1977-78 |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 32 | - | - | .524 | - | .793 | 11.5 | 3.9 | - | - | 30.0 |
1978-79 |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 34 | - | - | .532 | - | .831 | 14.9 | 5.5 | - | - | 28.6 |
통산 | 94 | - | - | .533 | - | .822 | 13.3 | 4.6 | - | - | 30.3 | |
9. 개인사
1975년, 버드는 재닛 콘드라와 결혼했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했다. 화해 시도 끝에 버드와 콘드라 사이에서 1977년 딸 코리가 태어났다.
버드는 1989년 디나 매팅리와 재혼했다. 그들에게는 코너와 머라이어라는 두 명의 입양 자녀가 있다.
셀틱스에서 프로 경력을 쌓는 동안, 버드는 보스턴 교외의 브루클라인에 살았다.
10. 대중문화 속에서의 래리 버드
래리 버드는 영화, 비디오 게임, 광고 등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묘사되고 활용되었다.
- 버드는 세 편의 영화에 자신으로 출연했다. 1994년 파라마운트에서 개봉한 닉 놀테 주연의 블루 칩스, 1996년 마이클 조던과 빌 머레이 주연의 워너 브라더스 영화 스페이스 잼, 그리고 역시 1996년에 개봉한 댄 애크로이드, 대니얼 스턴, 데이먼 웨이언스 주연의 셀틱 프라이드가 있다.
- 버드의 모습은 여러 비디오 게임에 등장했다. 원 온 원: 닥터 J vs. 래리 버드에서는 버드가 줄리어스 어빙과 1대1 경기를 펼친다. 속편인 조던 vs. 버드: 원 온 원은 1988년 농구 비디오 게임이었다. 2011년, 버드는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과 함께 NBA 2K12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버드는 또한 재탄생한 NBA 잼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
- 1991년 맥도날드 광고(첫 방영은 슈퍼볼 중)에서 버드와 마이클 조던은 트릭 샷 대결을 펼쳤고, 승자는 조던의 점심을 얻고 패자는 승자가 먹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슈퍼볼 XLIV 중 방영된 광고에서는 드와이트 하워드와 르브론 제임스가 맥도날드 점심을 걸고 트릭 샷 대결을 펼쳤다. 그들이 대결을 마친 후 박수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가 관중석으로 향하자 버드가 "잘했어, 얘들아. 점심 고마워"라고 말한다. 하워드와 제임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주고받는다. 하워드가 "누구였지?"라고 묻자 제임스는 "전혀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 2023년 7월까지 트위터의 로고는 래리 버드를 기리기 위해 래리(Lar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버드는 HBO 시리즈 위닝 타임: 레이커스 왕조의 부흥에서 숀 패트릭 스몰이 연기했다.
11. 유산과 영향력
래리 버드는 농구 역사에 지대한 업적과 영향력을 남겼으며, 동시대 및 후대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버드는 1996년 NBA 50주년 기념 올-타임 팀에 선정되었고, 1998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2010년에 '드림팀'의 일원으로 다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9년, 버드는 ESPN 스포츠센추리 선정 '20세기 위대한 미국 운동선수 50인' 목록에서 30위에 올랐다. 그는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했다. 역대 최고의 선수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버드는 2020년 매직 존슨(포인트 가드), 마이클 조던(슈팅 가드), 르브론 제임스(스몰 포워드), 카림 압둘-자바(센터)와 함께 NBA 역대 올스타 선발 5인 로스터에 파워 포워드 포지션으로 포함되었다.
매직 존슨은 버드의 은퇴식에서 "래리, 당신은 내게 한 가지 거짓말만 했습니다. 또 다른 래리 버드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죠. 래리, 또 다른 래리 버드는 결코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버드는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이자 최고의 슈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2번의 NBA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버드는 셀틱스에서 세 번의 NBA 챔피언십(1981, 1984, 1986)을 우승했고, 두 번의 NBA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그는 3년 연속 정규 시즌 MVP를 수상했으며, 2020년 기준으로 이 업적을 달성한 다른 선수는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뿐이다. 버드는 또한 1981년, 1982년, 1983년, 1988년에 4번의 정규 시즌 MVP 2위를 차지했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클러치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버드는 중요한 상황, 높은 압박 상황에서 뛰어난 플레이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2021년 10월, NBA 75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버드는 NBA 75주년 기념 올-타임 팀에 선정되며 역대 가장 위대한 75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영예를 안았다. 디 애슬레틱은 NBA 75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최고 선수 75명을 선정했고, 버드를 NBA 역사상 7번째로 위대한 선수로 꼽았다.
버드가 NBA에 입단할 무렵에는 리그의 대다수가 흑인 선수였고, 신인 버드는 "백인의 희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팀 동료들이 이 점을 놀리기도 했고, 버드에게는 달갑지 않은 칭호였다. 라이벌이었던 매직 존슨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버드가 백인이라는 점은 언론에게 다루기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버드의 운동 능력은 리그에서 높은 편이 아니었고, 흔히 말하는 "백인은 점프를 못한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1987년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셀틱스에게 아깝게 패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아이재아 토마스와 데니스 로드맨은 "버드가 흑인이었다면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문제가 되었다. 토마스와 로드맨은 사과했고, 버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버드 자신은 백인이면서도 백인에게 수비당하는 것을 굴욕으로 여긴 적이 있었고, 상대 팀에게 불평을 하기도 했다.
슈퍼컴퓨터가 뽑은 최고의 농구 선수도 마이클 조던이 아니라 '흑인으로 태어난' 래리 버드였다. 버드의 명장면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휴스턴 로키츠와의 파이널에서 나온 '자기가 던진 슛이 안 들어가고 림을 맞고 나오자 본인이 다시 잡아서 넣기'는 그의 농구 지능(BQ)을 볼 수 있는 최고의 명장면이다. 버드는 평소에도 자신의 슛이 안 들어가는 것을 감지하고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골밑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는 정말 뛰어난 감각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플레이일 것이다. 이 장면을 본 레드 아워백은 '내 농구 인생에서 내가 본 가장 뛰어난 플레이였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