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라파엘 제미니안(Raphaël Géminiani프랑스어, 1925년 6월 12일 ~ 2024년 7월 5일)은 프랑스의 도로 사이클 선수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에서 성장했으며, 사이클링계에서 '르 그랑 퓌지'(Le Grand Fusil프랑스어, '주포' 또는 '탑건'이라는 의미)라는 별명으로 알려질 만큼 강렬한 개성을 지녔던 인물이다.
제미니안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프로 선수로 활동하며 세 번의 그랜드 투어 포디움에 올랐다. 그는 1951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종합 2위를 차지하고 산악왕을 획득했으며, 1953년에는 프랑스 내셔널 로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55년에는 투르 드 프랑스, 지로 디탈리아, 부엘타 아 에스파냐 세 그랜드 투어 모두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1957년 가스토네 넨치니만이 재현했을 뿐 그 이후로는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이다.
선수 은퇴 후에는 디렉퇴르 스포르티프 (스포츠 디렉터)로서 자크 앙크틸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하며 생-라파엘 팀을 비롯한 여러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사이클링계의 도핑 문제와 현대 사이클링의 상업화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으며, 자신의 선수 시절 약물 사용 경험을 인정하기도 했다. 제미니안은 2024년 7월 5일 99세의 나이로 페리냐 쉬르 알리에에서 사망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라파엘 제미니안은 1925년 6월 12일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넷째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는 이탈리아 루고에서 자전거 공장을 운영했으나 공장이 불타버린 후, 1920년 이탈리아에서 확산되던 파시즘의 폭력을 피해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클레르몽페랑에 정착한 조반니는 자전거 가게를 열었고, 가족들에게는 그 이후로 프랑스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라파엘의 형인 안젤로는 뛰어난 아마추어 선수였다. 라파엘은 12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자전거 가게에서 바퀴를 만드는 일을 도왔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의 점령 하에 있었지만 사이클 경주는 계속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라파엘의 마른 다리를 보고 "네 다리처럼 마른 다리를 가진 선수를 본 적이 있니? 미안하지만 자전거 경주는 안젤로의 일이지 네 일이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16세가 되던 1943년, 라파엘은 청소년 챔피언십의 위상을 지닌 '프르미에 파 뒤늘롭'의 첫 라운드에서 우승했다. 그는 다음 예선에서 3위를 차지하며 1943년 6월 3일 몽뤼송에서 열린 결승에 진출했다. 그는 결승에서 결승선 15NaN 경 km 지점의 언덕에서 공격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랐고, 20초의 격차를 벌리며 우승했다. 그는 이때 6위를 차지한 선수가 훗날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루이종 보베였다고 회고했다. 전쟁 후 제미니안은 아마추어와 프로가 혼합된 경주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1946년 로맹 벨랑제가 이끄는 메트로폴 팀과 프로 계약을 맺고 1947년 첫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했다.
3. 선수 경력
라파엘 제미니안은 1946년 프로로 전향한 이래 1960년 은퇴할 때까지 약 15년간 프로 사이클 선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그랜드 투어와 여러 주요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3.1. 프로 데뷔 및 초기 투르 드 프랑스
제미니안의 첫 투르 드 프랑스 출전은 1947년이었다. 당시 수십 년 만에 가장 더운 여름이었고, 전쟁으로 인해 도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거나 자갈길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첫 스테이지에서 선두 그룹에 20분 뒤처졌고, 다음 날 브뤼셀로 향하는 스테이지에서는 100NaN 경 km를 선두 그룹과 함께 달렸지만 벨기에 수도에 도착했을 때는 30분 뒤처져 있었다. 더위로 인해 많은 선수가 기권했다.
브뤼셀에서 룩셈부르크까지의 스테이지는 365NaN 경 km로 광고되었지만 실제로는 400NaN 경 km가 넘었다. 선수들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길가의 카페를 약탈했고, 식수대에서는 서로 물을 마시려 싸우기도 했다. 룩셈부르크에 가까워지자 소방관들이 선수들에게 물을 뿌려주기도 했다. 제미니안은 50분 뒤처져 결승선을 통과했고, 룸메이트인 조 네리(Jo Néri)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기운조차 없었다. 다음 날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는 스테이지에서는 그의 얼굴이 너무 부어오르고 물집이 잡혀 시야가 흐려질 정도였다. 그는 당시의 고통을 "아스팔트가 녹을 정도로 더웠다. 완전히 탈수 상태였고, 결국 농가 옆에 멈춰서 소 여물통의 더러운 물을 마셨다. 그렇게 해서 구제역에 걸렸다. 보통 소만 걸리는 병인데!"라고 회상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열이 나고 거의 실명 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향했으며, 경주를 중단했다. 클레르몽페랑에 도착하는 데 이틀, 회복하는 데 6일이 걸렸다.
이 사건은 제미니안이 남서부-중부 팀에 선발되었을 때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고향인 오베르뉴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선발 위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1947년 경주에 출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1948년 투르 드 프랑스 국가대표팀에 그가 선발되었을 때는 모두가 놀랐다. 경주 시작 사흘 전 클레르몽페랑 근처에서 열린 경주에서 지역 인기 선수인 장 블랑을 이기자 그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제미니안은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되던 경주 전날 밤, 나는 모든 레이스 복장을 입고 잠들었다"고 말했다. 4일 후 그는 종합 6위에 올랐다. 산악 구간에서 뒤처지긴 했지만 장 로빅, 루이종 보베, 지노 바르탈리와 같은 강한 선수들과 함께했다. 칸에 도착했을 때는 14위였다. 브리앙송으로 향하는 스테이지에서 연이은 펑크로 시간을 잃었지만, 팀 동료인 기 라페비를 3위로 지원하며 종합 15위로 경주를 마쳤다. 클레르몽페랑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팬들은 역에서 그를 맞이했고, 프랑스 국기를 든 남자 뒤에서 오픈카에 태워 도시를 통과하며 환영했다.
3.2. 그랜드 투어 성적
제미니안은 세 차례의 그랜드 투어에서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 투르 드 프랑스:
- 1949년: 19 스테이지 우승.
- 1950년: 종합 4위, 17, 19 스테이지 우승.
- 1951년: 종합 2위, 산악왕 획득, 9 스테이지 우승.
- 1952년: 8, 17 스테이지 우승.
- 1953년: 종합 9위.
- 1955년: 종합 6위, 9 스테이지 우승.
- 1958년: 종합 3위.
그는 1949년부터 1955년 사이에 투르 드 프랑스에서 총 7개의 스테이지 우승을 차지했으며, 리더의 상징인 옐로 저지를 4일간 입기도 했다.
- 지로 디탈리아:
- 1952년: 종합 9위, 산악왕 획득.
- 1955년: 종합 4위.
- 1957년: 종합 5위, 산악왕 획득.
- 1958년: 종합 8위.
- 부엘타 아 에스파냐:
- 1955년: 종합 3위.
- 1957년: 종합 5위.
- 1959년: 1a (팀 타임 트라이얼) 및 13 (팀 타임 트라이얼) 스테이지 우승.
특히 1955년에는 투르 드 프랑스, 지로 디탈리아, 부엘타 아 에스파냐 세 그랜드 투어 모두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1957년 가스토네 넨치니만이 달성한 기록으로, 그 이후로는 아무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다.
3.3. 주요 대회 우승 및 수상
그랜드 투어 외에도 제미니안은 여러 중요한 레이스에서 우승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 1943년: 프랑스 주니어 로드 챔피언십 우승.
- 1946년: 앙베르(Ambert) 우승.
- 1949년: 오베르뉴 물의 도시 서킷(Circuit des villes d'eaux d'Auvergne) 우승, 투르 드 코레즈(Tour de Corrèze) 우승.
- 1950년: GP 드 마르미뇰(GP de Marmignolles) 우승, 폴리뮐티플리에(Polymultipliée) 우승.
- 1951년: 그랑프리 뒤 미디 리브르 종합 우승, 폴리뮐티플리에 우승.
- 1953년: 프랑스 내셔널 로드 챔피언십 로드 레이스 우승.
- 1956년: 아비장(Abidjan) 우승, 볼 도르 데 모네디에르 쇼메유(Bol d'Or des Monédières Chaumeil) 우승.
- 1957년: 볼 도르 데 모네디에르 쇼메유 우승, 퀼랑(Quilan) 우승, 튈(Tulle) 우승.
- 1958년: 볼 도르 데 모네디에르 쇼메유 우승, 티비에르(Thiviers) 우승, 튈(Tulle) 우승.
- 1959년: GP 달제(GP d'Alger) 우승.
3.4. 선수 시절의 성격 및 일화
라파엘 제미니안은 '르 그랑 퓌지'라는 별명처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레이스 중 동료 선수들과의 여러 충돌과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보베와의 충돌: 1953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제미니안과 루이종 보베는 다시 한번 충돌했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알비에서 베지에로 향하는 스테이지에서 경쟁자인 장 로빅을 공격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싸움은 사우클리에르의 자갈 트랙에서 스프린트로 끝났고, 넬로 로레디가 우승하고 제미니안이 2위를 차지했다. 이 결과로 보베는 스테이지 우승에 도움이 될 시간 보너스를 얻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팀 호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제미니안은 보베의 비난에 너무 화가 나서 접시를 보베의 머리에 쏟아부었다고 전해진다. 제미니안만큼이나 감정적이었던 보베는 눈물을 터뜨리며 식탁을 떠났다고 한다.
로빅과의 사건: 1952년 투르 드 프랑스 벨기에 나뮈르 스테이지 후에도 그의 불같은 성격이 드러났다. 로빅은 목욕 중에 즉흥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에게 "나는 오늘 교활했다.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죽은 척했다. 이제 나는 많은 기회를 얻었지만 제미니안은 투르를 위해 애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제미니안은 기자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로빅을 세 번이나 물속에 처박았다. 마르셀 비도가 소란을 듣고 보베의 소이뇌르(soigneur)인 레몽 르 베르와 함께 도착했다. 두 사람은 싸우는 그들을 떼어놓았고, 르 베르는 "그렇게 싸우면 상대방만 이득을 볼 것이다. 계속 싸우지 말고 함께 일해라. 에너지를 덜 쓰고 둘 다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20년 후 비도는 "르 베르의 합리적인 주장에 또 다른 결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루이종과 라파엘은 서로 마주보는 방을 썼는데, 동시에 문을 열었다. 그들은 서로를 축하할 계획이었고, 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제미니안은 보베에게 마음을 열고 경주에서 그를 이끌기 시작했다. 언론인 올리비에 다자트는 "그는 보베의 승리를 원격 조종하고 그의 전투 계획을 세웠다"며 "그는 보베의 세 번의 투르 드 프랑스 우승 내내 보베의 곁에 있었다"고 말했다.
관중과의 충돌: 1957년 지로 디탈리아에서는 관중들과의 충돌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누군가 당신을 (오르막에서) 밀어주는 동안, 다른 두 명은 실제로 내 등을 때렸다. 그래서 나는 펌프를 꺼내 '블랑, 블랑'하며 오른쪽 남자의 잇몸을 때렸다. 그는 이빨 다섯 개를 잃었다! 그는 피가 너무 많이 난다고 아기처럼 울었다"고 말했다.
쿠블러와의 몽 뱅투 일화: 1955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제미니안은 마르세유에서 아비뇽으로 가는 스테이지에서 몽 뱅투 전에 페르디 쿠블러와 함께 선두 그룹에서 벗어났다. 기온은 40 °C에 달했고, 길가에서는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관중들이 속출했다. 제미니안은 쿠블러에게 "진정해, 페르디! 뱅투는 다른 오르막과는 달라"라고 경고했지만, 쿠블러는 서투른 프랑스어로 "페르디도 다른 챔피언 같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결승선에서 쿠블러는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졌다. 쿠블러는 이 이야기를 부인하며 제미니안을 '전화기'(소문꾼)라고 불렀지만, 둘은 좋은 친구였다고 덧붙였다.
'유다' 투르 (1958년): 1958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는 제미니안과 보베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제미니안이 선두를 달리고 있을 때, 그의 세대에서 가장 재능 있는 클라이머였던 룩셈부르크의 샤를리 골이 21 스테이지에서 폭우 속에서 공격했다. 그는 샤르트뢰즈 산맥의 세 고개를 홀로 넘으며 제미니안에게 15분 뒤처져 있던 격차를 뒤집고 엑스레뱅에서 경주를 마쳤을 때 선두를 차지했다. 제미니안은 프랑스 국가대표팀 전체, 특히 보베를 향해 성경에 나오는 배신자 유다에 비유하며 비난했다. 보베는 그를 지원할 수 없었다. 이 갈등은 보베와 제미니안이 각각 프랑스 국가대표팀과 중부-미디 팀이라는 다른 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제미니안은 한 프랑스인이 외국인의 승리를 지켜보는 대신 다른 프랑스인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보베 또한 기자들에게 자신의 "친구"가 투르에서 우승하는 것을 기꺼이 돕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제미니안은 선발 정책으로 인해 보베의 팀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더욱 분개했다. 그는 "프랑스 유니폼을 입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투르 드 프랑스에서 9번, 지로에서 3번, 부엘타에서 2번이나 그랬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렇게 내팽개쳐졌다"고 말했다. 경주 시작 전, 브뤼셀의 한 팬이 그에게 애완동물로 당나귀를 선물했는데, 제미니안은 기자들에게 프랑스 선발 위원인 마르셀 비도의 이름을 따서 '마르셀'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자크 앙크틸은 전년도 우승자였고 유망한 미래가 있었다. 루이종 보베도 있었고, 그는 이미 투르에서 세 번 우승한 루이종과 나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마르셀 비도는 나를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58년 투르에서 우승하지 못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 팀도 우승하지 못했다. 나는 프랑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것을 막으려 했던 모든 이들과 정산했다"고 덧붙였다.
4.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라파엘 제미니안은 사이클링계에서 '디렉퇴르 스포르티프'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여러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4.1. 팀 매니지먼트 및 후원
제미니안의 매니지먼트 경력은 자크 앙크틸과 함께한 생-라파엘 팀과 포드-프랑스 팀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전거를 홍보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선수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크 앙크틸을 영입하면서 그는 자전거 산업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전에도 외부 스폰서가 있었지만, 그들은 규모가 작았고 국제 사이클 연맹(UCI)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피오렌초 마니가 이탈리아에서 니베아 페이스 크림 회사로부터 후원을 받았을 때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러나 투르 드 프랑스의 주최자인 자크 고데와 펠릭스 레비탕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프랑스에서 외부 스폰서는 달랐다.
제미니안은 1962년 투르 드 프랑스가 상업 팀에게 개방되는 시점에 자신의 팀을 생-라파엘 주류 회사에 팔았다. 고데와 레비탕은 '스포츠 외' 스폰서에 반대했다. 그들은 강력한 경쟁자를 두려워했고, 저지에 광고가 실리면 신문 광고 판매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제미니안은 출전 정지 위협을 받았다. 그는 '라파엘'이 회사가 아닌 자신을 지칭한다고 주장하려 했다. 이 논쟁은 겨울 내내 계속되었고 UCI에까지 이르렀다. 밀라노-산레모까지 이어졌고, 그때쯤에는 결정이 필수적이었다. UCI는 외부 후원에 반대했지만, 당시 회장이었던 아킬 조이나르는 찬성했다. 제미니안에 따르면, 조이나르는 그에게 "평범한 저지를 입고 출발선에 서라. 출발 직전에 저지를 벗고 생-라파엘 셔츠를 입어라. 내가 스포츠 외 스폰서를 대표하면 출발을 금지하는 전보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전보가 경주가 시작된 후에 도착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이나르는 상업 후원을 미래로 보았으며, 특히 레비탕과 사이클링에서 누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에 대해 오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생-라파엘이 1964년 말 후원을 철회하자, 제미니안은 자신의 팀을 포드의 프랑스 지부에 팔았고, 1969년에는 라이터 및 볼펜 회사인 비크에 팔았다. 투르에서 오랫동안 경기 관계자 차량을 운전해 온 도미니크 페자르는 "내 아버지는 25세였고, 어느 날 남작(비크의 설립자 마르셀 비슈)의 사무실로 불려갔을 때 그의 차를 세차하고 있었다. 남작은 그에게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비크의 인사 담당 이사가 되었다. 라파엘 제미니안이 팀을 중단한다고 발표했을 때, 비크의 홍보 책임자인 크리스티앙 다라스는 즉시 내 아버지에게 갔다. 남작과 함께 그들은 비크 사이클 팀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1967년에는 앙크틸, 뤼시앵 에마르, 훌리오 히메네스, 장 스타블린스키, 롤프 볼프숄, 조아킴 아고스티뉴, 그리고 나중에 루이스 오카냐와 같은 선수들이 비크 팀에 합류했다. 오카냐는 1973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비크 유니폼을 입고 우승했다. 그러나 다음 해, 비슈 남작은 오카냐가 팀으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기사를 읽었다. 페자르는 "돈은 제미니안이 운영하는 회사 계좌에 예치되어 있었다. 남작은 오카냐가 급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읽었을 때 '중단하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원칙에 매우 엄격했다"고 말했다. 비크 팀은 7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비크는 발두아즈에서 아마추어 팀을 계속 후원했다.
1985년, 제미니안은 라 레두트 팀의 디렉퇴르 스포르티프가 되었고, 스티븐 로슈가 1985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그 해 투르의 경로를 처음 보았을 때 로슈에게 18 스테이지에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 해 말 라 레두트는 스포츠에서 은퇴했다. 로슈는 제미니안을 그의 새로운 팀인 카레라로 데려갔다. 1986년 제미니안은 카페 드 콜롬비아의 매니저였다.
4.2. 주요 선수 지도
제미니안은 선수 은퇴 후 디렉퇴르 스포르티프(스포츠 디렉터)로서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하며 그들의 성공을 이끌었다.
자크 앙크틸
제미니안의 매니지먼트 경력은 자크 앙크틸과 함께한 생-라파엘 및 포드-프랑스 팀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들은 파트너십을 통해 투르 드 프랑스 4회, 지로 디탈리아 2회, 도피네 리베레 및 그 다음 날의 보르도-파리 경주를 우승했다.
제미니안은 앙크틸에 대해 "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나는 거의 폭발할 지경이다. 나는 여전히 그가 경주할 때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투르 주최자들이 그를 패배시키기 위해 타임 트라이얼을 단축했던 것을 생각한다. 그의 고향인 루앙은 추모 행사를 조직하지만, 나는 그가 안트베르펜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였던 것을 잊지 않았다. 여러 번, 나는 그가 관중들의 침 뱉기와 모욕을 당한 후 호텔 방에서 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차갑고, 계산적이며, 아마추어 같다고 말했다. 진실은 자크가 엄청난 용기의 괴물이었다는 것이다. 산악 구간에서 그는 지옥처럼 고통받았다. 그는 클라이머가 아니었다. 하지만 허세와 용기로 그는 그들을 모두 찢어발겼다."고 말했다.
제미니안은 앙크틸이 그의 라이벌인 레몽 풀리도르가 투르 드 프랑스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따뜻한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고 말했다. 1965년, 풀리도르가 전년도 퓌 드 돔에서 앙크틸을 제친 것에 대해 앙크틸이 투르 전체를 우승한 것보다 더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여겨지자, 제미니안은 앙크틸에게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리베레와 다음 날 557NaN 경 km 거리의 보르도-파리 경주에 참가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이것이 누가 더 위대한 선수인지에 대한 모든 논쟁을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앙크틸은 그가 싫어하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에 도피네에서 우승했다. 두 시간의 인터뷰와 환영회 후, 그는 오후 6시 30분에 님에서 보르도로 전용기를 타고 날아갔다. 자정에 그는 경주 전 식사를 하고 도시 북부 교외의 출발선으로 향했다.
앙크틸은 밤새 위경련으로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고 은퇴 직전이었다. 제미니안은 앙크틸에게 욕설을 퍼붓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계속 달리게 하기 위해 그를 "대단한 게이"라고 불렀다. 아침이 되자 앙크틸은 기분이 나아졌고 선수들은 경주의 특징이었던 더니 페이싱 오토바이 뒤로 들어갔다. 그는 톰 심슨의 공격에 반응했고, 이어서 그의 팀 동료인 장 스타블린스키가 공격했다. 앙크틸과 스타블린스키는 심슨을 번갈아 공격하여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앙크틸은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우승했다. 스타블린스키는 57초 뒤에 심슨 바로 앞에 도착했다.
앙크틸을 보르도로 데려가기 위해 마련된 제트기가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고에서 지원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제미니안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부인하지 않고 프랑스 국가 기록이 공개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스티븐 로슈
1985년, 제미니안은 라 레두트 팀의 디렉퇴르 스포르티프가 되어 스티븐 로슈가 1985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그 해 투르의 경로를 처음 보았을 때 로슈에게 18 스테이지에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5. 사상 및 견해
라파엘 제미니안은 사이클링계의 주요 이슈에 대해 비판적이고 솔직한 견해를 피력했다.
5.1. 도핑에 대한 입장
제미니안은 사이클링계의 도핑 문제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했다. 그는 1977년에 도핑 검사를 "사이클링의 암"이라고 불렀다. 1962년에는 "나는 '도핑'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극제에 대해 이야기하자. 선수가 자극제를 복용하는 것은 정상이다. 의사들이 그것을 권장한다. 위험하기는커녕 신체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제품들이 있다. 나는 12번의 투르 드 프랑스와 수많은 다른 경주를 뛰었다. 나는 자극제를 복용했다. 물론 의사의 지도를 받아서... 우리 세대의 모든 선수들은 도핑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력 동안 약물을 사용했음을 인정했다.
1967년 투르 드 프랑스 도중 톰 심슨이 사망하고 그의 몸과 레이스 저지 주머니에서 약물이 발견된 후, 제미니안은 당시 주치의였던 피에르 뒤마를 비판했다. 그는 "뒤마가 심슨을 죽였다... 심슨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이는 우리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자를 고정시키고,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머리를 낮추고,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해 아드레날린이나 맥시트론을 주사해야 한다. 그런데 뒤마는 무엇을 했는가? 그 비극의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심슨을 머리를 든 채 바위에 눕혔다. 산소 마스크를 꺼냈지만 왜 그랬는지 의문이고, 그를 고정시키는 대신 헬리콥터로 병원에 이송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뒤마의 후임자인 미제레즈 박사는 제미니안의 주장에 반박하며 "그가 심슨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그렇지만, 이 심장마비는 도핑 제품에 의해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5.2. 현대 사이클링에 대한 비판
제미니안은 현대 프로 사이클링의 상업화와 선수들의 동기 부여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투르 드 프랑스가 국가대표팀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오늘날 선수들은 세탁 세제 이름이 새겨진 저지를 입고 도핑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6개월 후면 팀을 바꿀 것이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언론과 여론이 그들을 쫓을 것이다. 스폰서들은 변화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팀에 선수들을 보유하게 될 것이고, 경주의 상업적 이익은 증가할 것이다. 프랑스 팀이 사실상 반비밀 스포츠에서 미디어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된다. 투르 드 프랑스 산악 스테이지보다 여자 핸드볼 경기를 보는 TV 시청자가 세 배나 많다"고 말했다.
현대 선수들이 경쟁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적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수들은 텔레비전에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유일한 야망을 가지고 출발선에 선다. 차라리 스타 아카데미에 출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무리 속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을 듣는다. '어제 나는 계약을 이행했다. 제라르 홀츠와 함께 TV에 10분 동안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투르 드 프랑스가 아니다! 계약을 이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한 번은 피레네 산맥의 고개를 홀로 선두에서 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몽 뱅투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6. 개인적인 삶과 관계
라파엘 제미니안은 사이클링계 동료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파우스토 코피와의 교류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동료애를 잘 보여준다.
1959년 12월, 부르키나파소는 독립 1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오트볼타의 대통령 모리스 야메오고는 파우스토 코피, 제미니안, 앙크틸, 보베, 로저 하센포르더, 앙리 앙글라드를 초청하여 현지 선수들과 경주한 후 사냥을 가도록 했다. 제미니안은 "나는 모기가 들끓는 집에서 코피와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 나는 모기에 익숙했지만 코피는 그렇지 않았다. 글쎄, 우리가 '잠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사파리가 몇 시간 앞당겨진 것 같았는데, 그 순간 우리는 모기를 사냥하고 있었다. 코피는 수건으로 모기를 휘둘렀다. 그때는 물론, 그날 밤의 비극적인 결과가 무엇일지 전혀 몰랐다. 열 번, 스무 번 나는 파우스토에게 '내가 하는 대로 하고 이불 아래로 머리를 넣어. 거기서는 물릴 수 없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둘 다 말라리아에 걸려 귀국 후 병에 걸렸다. 제미니안은 "내 체온이 41.6 °C까지 올랐다... 나는 헛소리를 했고 계속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고 상상하거나 어쩌면 보았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의사는 나를 간염, 황열병, 마지막으로 장티푸스로 치료했다"고 말했다. 제미니안은 샤말리에르의 신부가 자신에게 종부성사를 주었고, 그의 사망 기사가 신문사에 배포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치명적인 형태의 말라리아인 열대열원충에 감염된 것으로 진단받았다. 제미니안은 회복했지만 코피는 사망했고, 그의 의사들은 그가 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다고 확신했다. 1953년 비앙키 팀에서 코피를 위해 뛰었던 제미니안은 "코피를 생각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다... '나의 스승' - 그는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발명했다. 식단, 훈련, 기술,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15년 앞서 있었다'"고 말했다.
7. 자전거 브랜드 'R. 제미니안'
라파엘 제미니안은 다른 유명 선수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자전거 브랜드를 출시했다. 그는 자신의 팀의 스폰서가 되기도 했다. 이 자전거의 프레임이 메르시에에서 만들어졌는지 또는 생테티엔의 다른 회사인 시제롱(Cizeron)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있다. 둘 다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자전거 정비사 셸던 브라운은 이 자전거들에 대해 "프랑스 영광의 시대의 주요 자전거였다. 많은 자전거가 다소 평범했지만, 60년대 초반의 고급 모델 중 프랑스 부품 이국주의가 있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 좋은 상태의 최고급 모델 중 57 사이즈 미만의 프레임은 1,500NaN 경 USD 이상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평범한 모델은 기껏해야 몇 백 달러 정도이다. 50년대와 60년대의 프랑스 자전거는 이해하고 가격을 매기기 까다로운 물건이다"라고 말했다.
8. 주요 경력 성과
연도 | 성과 |
---|---|
1943 | 프랑스 주니어 로드 챔피언십 우승 |
1946 | 앙베르 우승 |
1949 | 오베르뉴 물의 도시 서킷 우승, 투르 드 코레즈 우승, 투르 드 프랑스 19 스테이지 우승 |
1950 | GP 드 마르미뇰 우승, 폴리뮐티플리에 우승, 투르 드 프랑스 종합 4위 및 17, 19 스테이지 우승 |
1951 | 그랑프리 뒤 미디 리브르 종합 우승, 폴리뮐티플리에 우승, 투르 드 프랑스 종합 2위 및 산악왕, 9 스테이지 우승 |
1952 | 투르 드 프랑스 8, 17 스테이지 우승, 지로 디탈리아 종합 9위 및 산악왕 |
1953 | 프랑스 내셔널 로드 챔피언십 로드 레이스 우승, 투르 드 프랑스 종합 9위 |
1955 | 부엘타 아 에스파냐 종합 3위, 지로 디탈리아 종합 4위, 투르 드 프랑스 종합 6위 및 9 스테이지 우승 |
1956 | 아비장 우승, 볼 도르 데 모네디에르 쇼메유 우승 |
1957 | 볼 도르 데 모네디에르 쇼메유 우승, 퀼랑 우승, 튈 우승, 지로 디탈리아 종합 5위 및 산악왕, 부엘타 아 에스파냐 종합 5위 |
1958 | 볼 도르 데 모네디에르 쇼메유 우승, 티비에르 우승, 튈 우승, 투르 드 프랑스 종합 3위, 지로 디탈리아 종합 8위 |
1959 | GP 달제 우승, 부엘타 아 에스파냐 1a (팀 타임 트라이얼) 및 13 (팀 타임 트라이얼) 스테이지 우승 |
9. 사망
라파엘 제미니안은 2024년 7월 5일 99세의 나이로 그의 고향인 클레르몽페랑 근처 페리냐 쉬르 알리에에 위치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10. 유산 및 평가
라파엘 제미니안은 '르 그랑 퓌지'라는 별명처럼 사이클링계에 강렬한 인상과 유산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선수로서 그랜드 투어에서 여러 차례 포디움에 오르고 산악왕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특히 1955년 세 그랜드 투어 모두에서 10위권 안에 든 기록은 그의 뛰어난 체력과 꾸준함을 증명하는 전설적인 업적으로 남아 있다.
선수 은퇴 후에는 디렉퇴르 스포르티프(스포츠 디렉터)로서 자크 앙크틸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하며 그들의 성공을 이끌었다. 그의 지도력은 앙크틸이 여러 차례 투르 드 프랑스와 지로 디탈리아에서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미니안은 단순한 지도자를 넘어 선수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의 강렬하고 솔직한 성격은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이는 사이클링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억된다. 동료 선수들과의 충돌과 화해, 그리고 도핑 문제와 현대 사이클링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그가 단순히 경주만을 생각하는 선수가 아니라 사이클링 스포츠 전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약물 사용 경험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도핑 검사의 문제점과 선수들의 책임감 부족을 동시에 지적하며 복합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제미니안은 사이클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투쟁적인 정신과 사이클링에 대한 열정은 후대 선수들과 팬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이클링의 문화와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