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1915년 9월 11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1.1. 가족 및 출신
그의 아버지 호세 마리아 라스티리(José María Lastiri스페인어)는 스페인 북부 나바라주의 알만도스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 마리아 페라리(María Ferrari이탈리아어)는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주의 로마에서 태어났다. 라스티리에게는 아홉 명의 형제가 있었다.
2. 정치 경력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으로서 임시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부터 정치적 활동을 이어왔다.
2.1. 하원의장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1973년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아르헨티나 하원의 하원의장을 맡았다. 그는 1973년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후에도 1975년 7월 17일까지 하원의장직을 유지했으며, 이후 니카시오 산체스 소론도가 그의 뒤를 이었다.
2.2. 임시 대통령 재임
1973년 7월 13일부터 10월 12일까지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아르헨티나의 임시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격동의 시기를 이끌었다.
2.2.1. 취임 배경 및 정치적 맥락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 배경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973년 7월 13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엑토르 캄포라와 부통령 비센테 솔라노 리마가 갑작스럽게 사임하면서, 하원의장이었던 라스티리가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은 페론주의 정당 내에서 우익 정책과 분파로의 회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장인인 호세 로페스 레가가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재확인되면서 정부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외무부 장관에는 알베르토 후안 비녜스가, 내무부 장관에는 베니토 얌비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인사는 당시 페론주의 운동 내부의 권력 균형이 우익으로 기울고 있음을 시사했다.
2.2.2. 주요 정책 및 외교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경제부 장관으로 유임된 호세 베르 헬바르드는 기존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은행 예금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또한 그는 국가 개발을 위한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경제 성장을 도모했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제3세계 지향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예로 1973년 8월, 아르헨티나는 쿠바에 기계와 자동차 구매를 위한 2.00 억 USD 규모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당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2.2.3.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불안
라스티리 임기 말에는 아르헨티나 내에서 반정부 좌익 폭력이 급증하며 사회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1973년 9월 25일, 몬토네로스 소속의 특공대가 CGT의 사무총장이자 후안 페론의 가까운 친구였던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달, 인민혁명군(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스페인어, ERP)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파르케 파트리시오에 위치한 육군 의무 부대를 공격하여 장교 한 명을 사살했다. 이러한 폭력 사태는 인민혁명군을 불법화하고, 좌익 성향의 신문인 엘 문도(El Mundo스페인어)를 폐간하는 조치를 정당화하는 빌미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폭력 증가는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혼란과 국가 테러리즘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2.2.4. 후안 페론에게 정권 이양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후안 페론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3년 10월 12일, 라스티리는 압도적인 득표율(60% 이상)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안 페론에게 공식적으로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페론주의의 복귀를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3. 대통령직 이후 및 말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의 삶은 정치적 논란과 군사 정권의 탄압 속에서 이어졌다.
3.1. 프로파간다 두에(P2) 연루
1980년에 리치오 젤리의 비밀 결사 단체인 프로파간다 두에(Propaganda Due이탈리아어, P2)의 회원 명단이 공개되면서,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가 이 프리메이슨 로지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그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하여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2. 정치 경력의 종말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의 정치 경력은 그의 장인인 호세 로페스 레가의 몰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종말을 맞았다. 로페스 레가는 권력 남용과 부패 혐의로 기소된 후 망명길에 올랐으며, 라스티리와의 관계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라스티리는 더 이상 아르헨티나 정치의 주요 인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3.3. 가택 연금 및 사망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그는 1978년 12월 11일 사망할 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냈다.
4. 수상 및 영예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재임 기간 중 여러 해외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4.1. 해외 훈장
스페인으로부터 1973년에 수여받은 이사벨 라 카톨리카 훈장 대십자장 1974년에 수여받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백사자 훈장 2등급
5. 평가 및 논란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의 정치적 행보와 역할은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낳았다.
5.1. 비판 및 논란
라스티리를 둘러싼 가장 큰 비판과 논란은 그의 장인인 호세 로페스 레가와의 연관성에서 비롯된다. 로페스 레가는 트리플 A라는 준군사 조직을 창설하여 국가 테러리즘을 자행하고 좌익 세력을 탄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라스티리가 로페스 레가를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임시 대통령직이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다.
또한, 그가 비밀 결사 단체인 프로파간다 두에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이 1980년 공개되면서 그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연루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정치적 폭력과 사회 불안에 대한 책임론으로 이어졌다.
5.2. 사회적 영향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의 짧은 재임 기간은 아르헨티나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임기는 페론주의 내에서 우익 세력의 부상과 권력 강화를 상징하는 시기였다. 이는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 지형을 극우 세력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과 폭력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발생한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 암살 사건과 인민혁명군의 군부대 공격은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가 겪고 있던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폭력 사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건들은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인권 침해와 사회 정의의 훼손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