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라우리 알란 퇴르니(Lauri Allan Törni핀란드어, 1919년 5월 28일 ~ 1965년 10월 18일)는 핀란드 태생의 군인으로, 생애 동안 세 개의 다른 국적과 군대에서 복무하며 "세 개의 깃발 아래 싸운 병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에서 핀란드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뛰어난 전공을 세워 만네르헤임 십자장을 수훈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하여 독일군으로 복무했으며, 종전 후 핀란드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탈옥하여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54년 래리 앨런 손(Larry Alan Thorne영어)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에서 활동하며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65년 10월 18일 작전 중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9년에 발견되어 2003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퇴르니는 핀란드, 독일, 미국으로부터 여러 군사 훈장과 표창을 받았으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서적과 기념 활동의 주제가 되었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라우리 알란 퇴르니는 1919년 5월 28일 핀란드 비푸리(Viipuri핀란드어, 현재 러시아의 비보르크)에서 선장인 얄마리 퇴르니(Jalmari Törni핀란드어)와 로사 마리아 퇴르니(Rosa Maria Törni핀란드어, 결혼 전 성씨는 코소넨)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1920년에 태어난 살메 퀼리키 라얄라(Salme Kyllikki Rajala핀란드어)와 1922년에 태어난 카이야 이리스 미콜라(Kaija Iris Mikkola핀란드어)라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퇴르니가 태어나기 전, 그의 형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으며, 훗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스텐 수비오(Sten Suvio핀란드어)와 친구였다. 퇴르니는 상업 학교를 다녔고, 시민위병(Suojeluskunta핀란드어)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다. 군 입대 전에는 아버지의 화물선에서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8년 9월 3일, 그는 핀란드 육군에 입대하며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10월 8일에는 기관총 중대에 배속되었고, 12월에는 하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1939년 3월 1일 하사로 진급했다.
3. 군 경력
라우리 퇴르니는 핀란드, 독일, 미국 세 국가의 군대에서 복무하며 다양한 전장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군 경력은 크게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핀란드 육군과 독일 무장친위대 복무, 그리고 전후 미국 육군 특수부대 복무로 나뉜다.
3.1. 핀란드 육군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핀란드 육군에 입대한 퇴르니는 키비니에미(Kiviniemi핀란드어)에 주둔한 제4 엽병 대대에 배속되었다. 이 대대는 제13사단 지휘 하에 라도가 호수 북부에 배치되었다. 1940년 1월, 대대장 마르티 누르미 중령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티 아르니오 소령이 새로운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1939년 11월 겨울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복무 기간은 연장되었고, 그의 부대는 라우투(Rautu핀란드어)에서 침공하는 소련군과 맞섰다.
라도가 호수 전투 중 퇴르니는 레메티(Lemetti핀란드어)에서 포위된 소련군 사단을 섬멸하는 데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의 뛰어난 활약은 그의 지휘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장교 훈련 과정에 배정되어 예비역 소위(Vänrikki핀란드어)로 임관했다.
퇴르니의 명성은 주로 소련과 핀란드 간의 계속 전쟁(1941년~1944년)에서의 성공적인 작전들로 인해 확고해졌다. 1943년에는 그의 지휘 아래 비공식적으로 '퇴르니 부대'(Detachment Törni핀란드어)라는 이름의 보병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 그 전투 효율성으로 인해 전선 양측에서 명성을 얻었다. 퇴르니의 부하 중 한 명은 훗날 핀란드 대통령이 되는 마우노 코이비스토(Mauno Koivisto핀란드어)였다. 코이비스토는 계속 전쟁의 마지막 핀란드-소련 교전인 1944년 7월과 8월의 이로만치 전투(Battle of Ilomantsi핀란드어)에서 퇴르니 지휘 아래의 정찰 중대에서 복무했다.
퇴르니 부대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소련군은 퇴르니의 목에 300.00 만 FIM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소련군이 현상금을 건 유일한 핀란드 장교였다. 1944년 7월 9일, 그는 만네르헤임 십자장 2급을 수훈받았다.
3.2. 무장친위대 및 친독일 레지스탕스 운동

1941년 6월, 겨울 전쟁이 끝난 후 퇴르니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7주간의 무장친위대(Waffen-SS독일어) 훈련을 받았다. 그는 제5SS기갑사단 소속의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Finnisches Freiwilligen-Bataillon der Waffen-SS독일어)에 입대했으나, 핀란드 육군의 장교 부족으로 인해 7월 10일 핀란드로 다시 소환되었다. 핀란드로 돌아왔을 때, 독일군은 그를 운터슈투름퓌러(Untersturmführer독일어, 무장친위대 소위)로 인정했다.
1944년 9월 모스크바 휴전 협정은 핀란드 정부가 자국 영토에서 독일군을 철수하도록 요구했고, 이는 라플란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핀란드 육군의 상당 부분이 해체되었고, 1944년 11월 퇴르니도 실업 상태가 되었다. 1945년 1월, 그는 핀란드의 친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에 의해 모집되어 독일에 가서 사보타주 훈련을 받았다. 이는 핀란드가 소련에 점령될 경우 저항을 조직하려는 의도였다. 이 시기 많은 핀란드 육군 장교들이 비밀리에 친독일 레지스탕스에 협력하며 군사 훈련을 받았다. 곧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이 저항 운동은 독일군과 협력하여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기도 했다. 훈련은 3월에 조기에 종료되었지만, 퇴르니는 핀란드로 돌아갈 교통편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 부대에 합류하여 슈베린(Schwerin독일어) 근처에서 소련군과 싸웠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영국군에 항복했으며, 뤼베크(Lübeck독일어)의 영국군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후 1945년 6월에 핀란드로 돌아왔다.
3.3. 전후 핀란드 및 미국 이주

가족이 카렐리야(Karelia핀란드어)에서 피난했기 때문에 퇴르니는 헬싱키에서 가족과 재회하려 했으나, 핀란드 국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1946년 4월 두 번째로 체포되었고, 라플란드 전쟁 중 독일군에서 계속 복무한 혐의로 반역죄 재판을 받았다. 10월과 11월에 진행된 재판 결과, 1947년 1월에 6년형을 선고받고 4년간 시민권이 박탈되었다. 투르쿠(Turku핀란드어) 주립 교도소에 수감된 퇴르니는 6월에 탈옥했으나 다시 붙잡혀 리히매키(Riihimäki핀란드어) 주립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1948년 12월, 유호 파시키비(Juho Kusti Paasikivi핀란드어) 대통령이 그에게 사면을 내렸다.
1949년, 퇴르니는 전시 동료 장교였던 홀게르 피트캐넨(Holger Pitkänen핀란드어)과 함께 위조 여권과 옛 선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핀란드계 주민이 많은 스웨덴 하파란다(Haparanda스웨덴어)로 국경을 넘어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하파란다에서 퇴르니는 철도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전쟁 후 많은 핀란드 도피 장교들을 숨겨주었던 폰 에센 남작 부인(Baroness von Essen스웨덴어)과 함께 지냈다. 피트캐넨은 체포되어 핀란드로 송환되었다. 스웨덴에서 퇴르니는 핀란드계 스웨덴인인 마리아 콥스(Marja Kops스웨덴어)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퇴르니는 1950년 스웨덴 선원이라는 가명으로 SS 볼리비아호(SS Bolivia영어)를 타고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겨울 전쟁 당시 그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핀란드인 마티 아르니오(Matti Aarnio핀란드어) 대령을 만났다. 아르니오 대령은 전쟁 후 베네수엘라에 망명 중이었다. 퇴르니는 1950년 카라카스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스웨덴 화물선 MS 스카겐호(MS Skagen영어)에 숨어들었다.
멕시코만의 앨라배마주 모빌 근처에서 퇴르니는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상륙했다. 정치적 난민이 된 퇴르니는 뉴욕으로 가서 브루클린 선셋 파크의 "핀타운"에 거주하는 핀란드계 미국인 공동체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목수와 청소부로 일했다. 1953년, 그는 전 전략사무국(OSS) 국장이었던 윌리엄 J. 도노반(William J. Donovan영어)의 법률 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의회 법을 통해 거주 허가를 받았다.
3.4. 미국 육군


1954년, 퇴르니는 로지-필빈 법(Lodge-Philbin Act영어)에 따라 미국 육군에 입대했으며, 래리 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미국 육군에서 그는 "마르티넨의 사람들"(Marttisen miehet핀란드어)로 알려진 핀란드계 미국인 장교 그룹과 친해졌다. 이들은 알포 K. 마르티넨(Alpo K. Marttinen핀란드어) 대령의 이름을 딴 그룹으로, 핀란드 전시 장교들이 미국으로 이민 와서 로지 법에 따라 미군에 입대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특수부대 창설에 참여했다. 손은 제7특전단 (공수)과 제11공수사단 (미국)에서도 복무했다.
그들의 지원으로 손은 미국 육군 특수부대(United States Army Special Forces영어)에 합류했다. 특수부대에서 그는 스키, 생존술, 산악 훈련, 게릴라 전술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미국 육군 공수학교를 수료하고 병장으로 진급했다. 1957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손은 장교 후보생 학교(Officer Candidate School영어)에 입학하여 통신병과(Signal Corps영어)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60년에 정규군으로 임관하고 대위로 진급했다.
3.4.1. 특수부대 복무
1958년부터 1962년까지 그는 서독 바트 퇼츠(Bad Tölz독일어)에 주둔한 제10특전단(10th Special Forces Group영어)에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이란 자그로스산맥 고지대에서의 수색 및 구조 임무의 부지휘관을 맡아 명성을 얻었다. 독일 근무 중 그는 잠시 핀란드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1962년에 공개된 TV 시리즈 '더 빅 픽처'(The Big Picture영어)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1959년에 촬영된 영상에서 손이 미 육군 제10특전단 소위로 등장한다.
3.4.2. 베트남 전쟁 참전

1963년 11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공화국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남베트남에 파견된 손과 특수부대 A-734 분견대는 떤비엔현(Tịnh Biên District베트남어)에 주둔하며 민간 비정규 방어 그룹(CIDG) 캠프를 운영하는 임무를 맡았다.
떤비엔의 CIDG 캠프에 대한 맹렬한 공격 중, 그는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퍼플 하트(2회)와 동성 훈장을 받았다.
손의 두 번째 베트남 파견은 1965년 2월 제5특전단(5th Special Forces Group영어)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 연구관찰단(MACV-SOG)으로 전출되었다. MACV-SOG는 베트남에서 비정규전에 초점을 맞춘 미국의 기밀 특수 작전 부대로, 손은 이곳에서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5년 10월 18일, '놋쇠 광택 작전'(Operation Shining Brass영어)의 일환으로 손은 호찌민 루트를 따라 베트콩의 전환 지점을 찾아내 공습으로 파괴하는 첫 번째 비밀 작전을 감독하고 있었다. 베트남 공화국 공군의 시코르스키 H-34 헬리콥터 두 대가 캄득 특수부대 캠프에서 이륙하여 다낭에서 40234 m (25 mile) 떨어진 꽝남성 프억선현(Phước Sơn District베트남어)의 산악 지대에서 미국 공군 세스나 O-1 버드 독 전방 항공 통제관과 악천후 속에서 합류했다. 한 대의 CH-34가 구름 사이로 내려가 6인 팀을 내려놓는 동안, 손이 탑승한 지휘 CH-34와 O-1은 근처에서 대기했다. 병력을 내려놓은 헬리콥터가 구름 위로 돌아왔을 때, CH-34와 O-1 모두 사라져 있었다. 구조팀은 추락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실종 직후, 손은 소령으로 진급되었고 훈공장과 수훈 비행 십자장을 사후에 수여받았다.
3.5. 계급 변동
라우리 퇴르니의 군 복무 기간 동안의 계급 변동은 다음과 같다.
소속 | 날짜 | 계급 |
---|---|---|
핀란드 육군 | 1938년 9월 3일 | 징집병 (예비역) |
1939년 3월 1일 | 하사 (예비역) | |
1940년 5월 9일 | 소위 (예비역) | |
1942년 3월 5일 | 중위 (예비역) | |
1944년 8월 27일 | 대위 (예비역) | |
독일 무장친위대 | 1941년 5월 18일 | 운터슈투름퓌러 (북동부) |
1945년 4월 15일 | 하우프트슈투름퓌러 (존더코만도 노르트) | |
미국 육군 | 1954년 1월 28일 | 이등병 |
1954년 12월 20일 | 일등병 | |
1955년 4월 28일 | 상등병 | |
1955년 11월 17일 | 병장 | |
1957년 1월 9일 | 육군 예비역 소위 | |
1960년 11월 30일 | 육군 예비역 대위 | |
1965년 12월 16일 | 육군 예비역 소령 (사후 추서) |
4. 훈장 및 표창
라우리 퇴르니는 핀란드, 독일, 미국 세 국가에서 복무하며 다양한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핀란드 훈장
- 자유 훈장 2급 (1940년 7월 26일)
- 자유 훈장 1급 (1940년 8월 24일)
- 자유 십자 훈장 3급 (1941년 10월 9일)
- 자유 십자 훈장 4급 (1942년 5월 23일)
- 만네르헤임 십자장 2급 (1944년 7월 9일)
- 제1사단 기념 십자장
- 국경 엽병 부대 십자장
- 국방군 동메달
독일 훈장
- 철십자장 2급 (1943년 12월 11일)
미국 육군
- 전투 보병 휘장
- 공수 마스터 휘장
- 독일 공수 휘장
- 특수부대 탭
- 전투 근무 인식 휘장
훈장 및 메달
- 훈공장 (사후 추서)
- 수훈 비행 십자장 (사후 추서)
- 동성 훈장 (V 장치 포함)
- 퍼플 하트 (참나무 잎 클러스터 포함, 2회 수훈)
- 항공 메달
- 육군 표창 메달
- 육군 선행 메달
- 국방 근무 메달 (별 포함)
- 베트남 근무 메달 (두 개의 캠페인 별 포함)
- 베트남 공화국 전역 메달
- 대통령 부대 표창 (2001년 사후 추서)
5. 개인 생활
라우리 퇴르니는 스웨덴으로 이주한 후 핀란드계 스웨덴인인 마리아 콥스(Marja Kops스웨덴어)와 약혼했다.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약혼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퇴르니는 1965년 사망 당시 그녀를 유일한 생존 가족으로 두었다.
6. 사망 및 유해 수습
1965년 10월 18일, 래리 손은 베트남 전쟁 중 라오스에서 진행된 '놋쇠 광택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호찌민 루트를 따라 베트콩의 전환 지점을 찾아 공습으로 파괴하는 비밀 임무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가 탑승한 베트남 공화국 공군의 시코르스키 H-34 헬리콥터는 꽝남성 프억선현의 산악 지대에서 악천후 속에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손은 베트남 공화국 공군 소속 부이 반 란 병장(Bùi Văn Lành베트남어), 응우옌 바오 뚱 중위(Nguyễn Bảo Tùng베트남어), 판 테 롱 중위(Phan Thế Long베트남어)와 함께 사망했다.
추락 직후 구조팀이 파견되었으나, 험준한 지형과 악천후로 인해 추락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실종 직후, 손은 소령으로 진급되었고 사후에 훈공장과 수훈 비행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손의 유해는 사고 발생 30여 년 후인 1999년에 핀란드와 미국 합동 포로/실종자 확인 사령부(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영어) 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유해는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피트 피터슨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003년에 공식적으로 신원이 확인된 그의 유해는 2003년 6월 26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추락 현장에서 수습된 베트남 공화국 공군 희생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베트남 참전 용사 기념관의 02E 패널, 126번 줄에 새겨져 있다.
7. 평가 및 영향

라우리 퇴르니의 군사적 업적은 핀란드, 독일, 미국 세 국가에서 모두 인정받았으나,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무장친위대에 복무한 행적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13년 출간된 주하 포흐요넨(Juha Pohjonen핀란드어)과 오울라 실벤노이넨(Oula Silvennoinen핀란드어)의 저서 '알려지지 않은 라우리 퇴르니'(Tuntematon Lauri Törni핀란드어)는 퇴르니의 반역죄 유죄 판결이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퇴르니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받은 무장친위대 훈련이 핀란드에서 국가사회주의 쿠데타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이 책은 퇴르니가 나치즘에 연루되었음을 시사하며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퇴르니 유산 길드(Lauri Törni Tradition Guild핀란드어) 회원인 마르쿠 모베르그(Markku Moberg핀란드어)와 파시 니티매키(Pasi Niittymäki핀란드어)에 의해 반박되었다. 이들은 퇴르니가 전쟁과 알코올 섭취로 인한 압박에 직면했지만, 독일을 지지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핀란드 역사가이자 훗날 국방부 장관(2015년~2019년)을 지낸 유시 니니스퇴(Jussi Niinistö핀란드어)는 퇴르니의 훈련이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핀란드가 러시아에 점령될 것이라는 진정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책 판매를 위해 증오를 조장한다고 포흐요넨과 실벤노이넨을 비난했다.
그의 무장친위대 복무에도 불구하고, 래리 손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무장친위대 출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의 복잡하고 논쟁적인 유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묘비는 공동묘지 형태로 되어 있다.
7.1. 기념 및 추모
1965년 로빈 무어(Robin Moore영어)의 소설 '그린 베레'에서 첫 장의 주인공인 "스벤 코르니"(Sven Kornie영어)는 래리 손을 모델로 했다. 이 책은 훗날 존 웨인 주연의 동명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퇴르니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에 대한 수많은 책이 쓰였다. 그는 2004년 '위대한 핀란드인'(Suuret Suomalaiset핀란드어) 목록에서 52위에 올랐으며, 2006년 '핀란드 병사'(Suomen Sotilas핀란드어) 잡지에서는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 중 가장 용감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핀란드에서는 퇴르니 부대의 생존자, 친구, 가족들이 라우리 퇴르니 전통 길드(Lauri Törni Tradition Guild핀란드어)를 결성했다. 핀란드 미켈리(Mikkeli핀란드어)에 있는 보병 박물관(Jalkaväkimuseo핀란드어)과 헬싱키의 핀란드 군사 박물관(Military Museum of Finland핀란드어)에는 퇴르니를 기리는 전시물이 있다.
그의 사망 전부터 손의 이름은 미국 특수부대 내에서 전설적이었다. 그의 미국 기념물은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Fort Carson영어)에 있는 제10특전단(공수)의 래리 손 본부 건물이다. 제10특전단은 매년 래리 손 상을 수여하여 최고의 작전 분견대-알파(Operational Detachment-Alpha영어)를 기리고 있다. 클리블랜드, 테네시주에 있는 특수부대 협회 33지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10년, 그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 연대의 초대 명예 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미국 특수작전사령부(USSOCOM) 코만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Sabaton영어)은 그를 주제로 한 "세 개의 군대의 병사"(Soldier of 3 Armies영어)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