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수 경력
1.1. 유소년 및 초기 경력
안티치는 1948년 11월 22일 지티슈테에서 세르비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보 안티치는 시포보 근처의 얀 지역 출신이며, 어머니 밀카 브르키치는 그르메치 지역 출신이다. 그는 가족의 둘째 아들로, 두 살 위인 형 드라고미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게릴라 전사였으며 인민영웅훈장을 받은 외삼촌 라도미르 "라데" 브르키치에서 따왔다. 여섯 살 때 가족은 티토보 우지체로 이주했고, 안티치는 그곳에서 성장하며 그 도시를 고향으로 여겼다. 티토보 우지체에 도착한 후 여동생 미라도 태어났다.
안티치는 스로보다 티토보 우지체에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자신의 경력 대부분을 보낼 클럽인 파르티잔으로 이적하여 1970년부터 1977년까지 활약했다. 파르티잔에서 그는 1976년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2. 주요 클럽 활동
1977년 여름, 안티치는 튀르키예의 페네르바흐체에 입단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스페인 라리가로 이적하여 레알 사라고사에서 뛰었다.
1980년, 안티치는 잉글랜드 2부 리그(당시 2부 리그) 팀인 루턴 타운으로 이적했다. 잉글랜드에서 "래디"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그는 1982년 루턴 타운이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1984년 팀을 떠나기 전까지 두 시즌 동안 1부 리그에서 활약했다。1982-83 풋볼 리그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시즌 마지막 리그 원정 경기에서 경기 종료 4분 전 결승골을 넣어 루턴 타운이 강등을 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골로 인해 홈팀인 맨체스터 시티는 강등되었다. 경기 종료 후, 루턴 타운의 감독 데이비드 플리트는 경기장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며 격렬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루턴 타운에 도착했을 때 이미 30대였던 안티치는 선수 생활이 끝난 후 감독 경력을 고려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현역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베오그라드의 비샤 트레네르스카 스콜라(Viša trenerska škola)에서 코칭 교육을 이수했다. 그는 종종 플리트 감독을 자신의 이후 감독 스타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언급했다. 루턴 타운의 1부 리그 잔류를 도운 후, 안티치는 1983-84 잉글랜드 축구 시즌 동안 케닐워스 로드에서 한 시즌 더 보낸 뒤 36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1.3. 국가대표 경력
안티치는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한 경기에 출전했다. 1973년 9월 26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에서 부상당한 프라뇨 블라디치의 교체 선수로 80분에 투입되었다.
2. 지도자 경력
2.1. 초기 지도자 경력
36세의 나이로 선수 경력을 마친 안티치는 파르티잔에서 네나드 비예코비치 감독 아래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파르티잔은 1985-86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와 1986-87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87년 7월 초, 파흐루딘 유수피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고 안티치는 초기에는 코치 역할을 계속했다. 그러나 1987-88 시즌을 앞둔 프리시즌 훈련 중 유수피와 안티치는 선수 인력 문제로 다툼을 벌였고, 이로 인해 안티치는 사실상 파르티잔 16세 이하 유소년팀(카데트 스쿼드) 코치로 강등되었다.
2.2. 스페인 클럽 지도
2.2.1. 레알 사라고사
안티치는 선수 시절에도 뛰었던 레알 사라고사에서 첫 감독직을 맡았다. 그의 임명은 당시 삼프도리아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사라고사 및 다른 라리가 클럽들을 지휘하며 스페인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동포 부야딘 보슈코프의 추천 덕분이었다.
당시 사라고사 선수단은 후안 세뇨르, 미겔 파르데사와 같은 유명 선수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범한 팀이었다. 가장 큰 여름 영입은 안티치 부임 직전에 합류한 레프스키 소피아의 26세 공격수 나스코 시라코프였다. 또한 프란시스코 비야로야와 후안 비스카이노 같은 22세의 유망주들과 안티치와 같은 해에 산 로렌소에서 이적한 파라과이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도 있었다. 안티치는 1988년 9월 4일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라리가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초기에는 팀이 강등권 근처를 맴돌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시즌 마지막 8경기에서 연승을 거두며 순위를 급격히 끌어올려 1988-89 라리가 시즌을 5위로 마감하며 UEFA컵 진출권을 획득했다. 그는 선수로도 뛰었던 이 클럽에서 두 시즌(1988-1990)을 보냈다.
2.2.2. 레알 마드리드
1991년 3월 말, 레알 마드리드가 안티치를 불렀다. 안티치는 올레그 로만체프가 이끄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 의해 1990-91 유러피언컵 8강에서 탈락한 후, 구단 레전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뒤를 이어 감독직을 맡았다. 디 스테파노는 3월 중순 로그로녜스에게 1-0으로 패배하며 위기에 처해 있었고, 3월 20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의 유러피언컵 8강 2차전에서 1-3으로 패배한 것이 결국 해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라리가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26경기 후 7위에 머물고 있었다.
- 1990-91: 위기 수습*
주요 트로피를 획득하는 데 익숙했던 레알 마드리드는 안티치가 1990-91 레알 마드리드 CF 시즌의 세 번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디 스테파노 해임 후 라몬 그로소가 며칠 동안 임시 감독을 맡았고, 그로소는 1991년 3월 24일 레알 오비에도와의 홈 리그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미첼, 페르난도 이에로, 마놀로 산치스, 게오르게 하지, 그리고 노쇠한 우고 산체스가 팀의 주축 선수들이었다. 안티치의 데뷔전은 1991년 3월 31일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레알 부르고스와의 경기였고, 0-1 홈 패배로 실망스러운 시작이었다. 다음 주에는 루이스 아라고네스가 이끄는 강등권 팀 에스파뇰에게 3-1로 패배하며 라리가 10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1991년 4월 14일 발렌시아와의 홈 경기에서 4-0으로 승리하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고, 이는 5연승의 시작이었다. 오사수나와의 원정 경기에서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연승 행진은 멈췄지만, 팀은 시즌을 3연승으로 마무리했다. 1991년 6월 8일, 우승을 확정 지은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 홈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안티치는 1990-91 라리가 시즌의 마지막 11경기(8승 1무 2패)를 지휘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순위를 3위로 끌어올리고 UEFA컵 진출권을 획득했다。
- 1991-92: 성공과 해임*
1991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안티치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의 1991년 유러피언컵 우승팀의 주역이었던 로베르트 프로시네치키와 스포르팅 히혼의 유망주 21세 루이스 엔리케를 영입했다.
안티치가 이끄는 팀은 1991-92 라리가 시즌을 5연승으로 시작하며 1991년 10월 19일 엘 클라시코를 앞두고 라리가 선두를 차지했다. 요한 크라위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베르나베우에서 상대한 레알 마드리드는 전반에 프로시네치키의 프리킥으로 앞서갔으나, 후반에 로날트 쿠만의 페널티킥으로 동점을 허용했다. 리그 연승 행진은 멈췄지만, 다음 경기인 로그로녜스와의 홈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하며 다시 7연승을 기록, 라리가 선두에서 추격자들과의 격차를 벌렸다.
특히 안티치 감독 아래에서 23세의 이에로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원래 수비수였던 그는 미드필더로 전진 배치되어 많은 골을 기록했고, 결국 시즌 21골로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리그 2연승 행진은 1991년 12월 중순 사라고사 원정에서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오비에도와의 홈 경기에서 또 다른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어서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시즌 첫 리그 패배를 당했지만 여전히 편안한 격차로 선두를 유지했다. 이 3경기 무승 기간 동안 라몬 멘도사 구단주는 레오 베인하커를 스포츠 디렉터라는 모호한 역할로 영입했으나, 안티치는 여전히 팀의 감독으로 남아 있었다. 3경기 무승 행진은 오사수나와의 홈 경기에서 5-2 대승으로 끝났지만, 시즌 두 번째 리그 패배가 뒤따랐다.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발렌시아가 레알 마드리드의 0-1 리드를 후반 막판 두 골로 뒤집고 리그 선두를 상대로 유명한 홈 승리를 기록했다. 안티치 감독의 팀은 1992년 1월 26일 테네리페와의 홈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빠르게 승리 궤도로 돌아왔지만, 43세의 감독은 해임되었다. 안티치 해임 당시, 시즌 19경기 만에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에서 7점 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1991-92 UEFA컵에서도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위트레흐트, 뇌샤텔 크사막스를 꺾고 8강에 순조롭게 진출해 있었다. 구단과 가까운 언론에 유출된 정보에 따르면, 안티치 감독의 팀 플레이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 해임의 이유였다.
베인하커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는 7점 차 선두를 잃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또한 UEFA컵 준결승에서 토리노에게 탈락했다. 20년 후 인터뷰에서 안티치는 멘도사 구단주가 나중에 "추한 축구를 한다"는 비난과 언론 캠페인으로 자신을 구단에서 내쫓은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했다고 밝혔다.
2.2.3. 레알 오비에도
안티치는 1992-93 라리가 시즌 19라운드 후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이 해고된 후 레알 오비에도의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당시 팀은 16위로 강등권에 위험하게 근접해 있었고, 임시 감독 훌리오 마리힐 마린이 한 경기를 지휘한 상태였다. 안티치는 21라운드부터 팀을 맡아 시즌을 마쳤고, 강등권보다 두 계단 높은 순위로 시즌을 마쳐 강등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오비에도에서 두 시즌을 더 보냈다.
1993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안티치는 파르티잔의 슬라비샤 요카노비치를 영입했고, 그의 미드필드 존재감은 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오비에도에서의 기대치는 레알 마드리드에 비해 훨씬 낮았으며, 단순히 1부 리그 잔류가 주 목표였다. 따라서 매우 낮은 예산으로 운영되는 안티치 감독의 오비에도 팀이 1993-94 라리가 시즌을 9위로 마친 것은 적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안티치의 오비에도에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영입은 1994-95 라리가 시즌 시작 전에 이루어졌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자주 부상당하던 로베르트 프로시네치키를 영입하며, 1991년 레알 마드리드로 처음 영입했던 선수와 재회했다. 오비에도는 다시 한번 라리가 시즌을 9위라는 괜찮은 순위로 마쳤고,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불과 몇 점 차이로 놓쳤다.
2.2.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안티치의 가장 큰 감독 성공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관련이 있으며, 그는 이 클럽을 세 번에 걸쳐 지휘했다.
오비에도의 운명을 바꾼 그의 업적은 더 큰 스페인 클럽들의 제안으로 이어졌다. 발렌시아와는 사전 계약까지 체결하며 협상 마지막 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치는 아틀레티코의 헤수스 길 회장의 제안을 수락하며 이 클럽과의 첫 인연을 맺었고, 이는 세 시즌(1995-98) 동안 지속되었다. 1995년 여름 그가 맡은 스쿼드는 호세 루이스 카미네로, 키코 나르바에스, 디에고 시메오네와 같은 재능 있는 핵심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는 팀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1994-95 라리가 시즌에는 세비야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강등권보다 1점 높은 순위로 시즌을 마쳤다.
- 1995-96: 더블 우승*
안티치는 자신이 물려받은 35명의 선수 중 1995-9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즌을 위해 20명의 선수를 빠르게 파악한 후, 이적 시장에서 5~6명의 선수를 추가로 영입했다. 이는 노쇠한 골키퍼 아벨 레시노,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콜롬비아 공격수 아돌포 발렌시아, 브라질 선수 이반 로차, 폴란드 공격수 로만 코세츠키, 러시아 윙어 이고르 도브로볼스키 등 많은 선수들이 아틀레티코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안티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이 관심을 가진 선수들을 아틀레티코로 영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영입 1순위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수비수 빅토르 오놉코였다. 아틀레티코와 선수는 합의에 도달했지만, 26세 러시아 선수의 영입을 노리던 오비에도 구단이 항의했고, 사건은 FIFA 중재 위원회로 넘어갔으며, 오비에도의 손을 들어주었다. 안티치는 이어서 알바세테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를 영입하려 했으나, 재능 있는 19세 공격수는 대신 사라고사로 이적했다. 안티치는 또한 4년 전인 1991년 레알 마드리드로 데려왔고, 오비에도에서 레알로부터 임대하여 지도했던 재능 있는 26세 미드필더 로베르트 프로시네치키를 영입하려 했고, 선수는 아틀레티코에 합류하는 데 긍정적이었으며 아틀레티코는 프로시네치키가 여전히 계약되어 있던 레알과 합의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 크라위프의 FC 바르셀로나가 개입하여 프로시네치키의 에이전트 조란 베키치에게 3년 계약에 2년 연장 옵션이 있는 300.00 만 EUR의 제안을 했고, 프로시네치키는 이를 수락하며 아틀레티코의 제안을 거절했다.
안티치가 영입에 성공한 선수 중 가장 큰 발견은 파니오니오스에서 매우 적은 돈으로 영입한 무명 윙어 밀린코 판티치였다. 이 영입은 처음에는 29세가 다 되어가는 완전 무명 선수의 유용성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했지만, 다음 시즌 동안 판티치는 중요한 골과 어시스트로 팀에 필요한 마지막 조각임을 증명했다. 또 다른 핵심 영입은 최근 고환암 투병으로 인한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에서 영입된 29세의 불가리아 장신 중앙 공격수 루보슬라프 페네프였다. 그 외 영입된 선수로는 알바세테의 골키퍼 호세 프란시스코 몰리나와 중앙 수비수 산티 데니아, 에스파뇰의 미드필더 로베르토 프레스네도소, 그리고 1995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활약했던 뉴얼스 올드 보이스의 젊은 아르헨티나 공격수 레오 비아히니 등이 있었다.
1995-96 라리가는 20개 팀에서 22개 팀으로 확장되었고, 승리 시 3점이 주어지는 새로운 승점 제도가 도입되었다. 안티치 감독의 지휘 아래, 몰리나가 골문을 지키고, 델피 헬리와 산티 데니아가 중앙 수비, 로베르토 솔로사발과 토니가 각각 오른쪽과 왼쪽 수비수, 후안 비스카이노(안티치가 사라고사에서 지도했던 선수)와 카미네로가 중앙 미드필드, 시메오네와 판티치가 각각 오른쪽과 왼쪽 윙, 그리고 페네프와 키코가 최전방에 포진한 아틀레티코 선수단은 1995-9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즌에 역사적인 라리가/코파 델 레이 더블을 달성하며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자주 선발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시즌 내내 상당한 기여를 한 다른 선수들로는 로베르토 프레스네도소, 후안 마누엘 로페스, 비아히니, 피리 모리 등이 있었다.
안티치의 아틀레티코는 4연승으로 리그 캠페인을 맹렬하게 시작했다. 2주차에 선두를 차지한 후, 세비야와의 5주차 무득점 무승부 이후 단 한 번만 선두를 내주었을 뿐, 다음 주에 다시 선두를 되찾아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인상적으로 선두를 유지했다. 페네프는 리그 16골, 시메오네 12골, 키코 11골, 판티치 10골, 카미네로 9골을 기록했다. 아틀레티코는 또한 32골만을 허용하며 리그에서 가장 적은 실점을 기록한 견고한 수비를 자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은 시즌 마지막 주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루이스 아라고네스가 이끄는 발렌시아는 유고슬라비아 공격수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의 활약으로 끝까지 맹렬히 추격했다. 1996년 5월 25일 토요일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아틀레티코는 84점으로 알바세테와의 홈 경기를 앞두고 있었고, 발렌시아는 82점으로 셀타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비센테 칼데론 스타디움에서 시메오네와 키코가 전반에 골을 넣으며 승리는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환희에 찬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한 달 반 전, 안티치는 이미 시즌 첫 트로피를 차지했다. 사라고사에서 열린 1996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요한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를 연장전 끝에 판티치의 골로 꺾었다.
더블 우승은 안티치를 아틀레티코 팬들에게,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구단주 헤수스 길에게 사랑받게 했다. 감독을 빠르고 충동적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던 길은 안티치를 두 시즌 더(총 세 시즌 연속) 팀의 지휘봉을 잡게 했다. 이는 길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일종의 기록이었다.
- 1996-97: 챔피언스리그 참가*
1996년 여름 이적 시장 동안, 1996-97 UEFA 챔피언스리그와 1996-97 라리가 타이틀 방어를 위해 선수단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더블 우승 시즌에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회복 중이던 노쇠한 루보슬라프 페네프의 대체자이자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의지의 표현으로, 아틀레티코는 특급 공격수를 찾고 있었다. 안티치는 PSV의 유망한 19세 브라질 공격수 호나우두를 영입하기 위해 구단 내에서 강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상위 기관에 의해 거부되었고, 호나우두는 약 한 달 후 바르셀로나와 계약했다. 대신 아틀레티코는 레알 마드리드의 23세 아르헨티나 공격수 후안 에스나이데르를 영입했다. 또 다른 큰 영입은 UEFA 유로 1996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인 슬라비아 프라하의 24세 체코 수비형 미드필더 라데크 베이불이었다. 베이불의 영입은 30세의 비스카이노가 수비형 미드필드에서 주전 자리를 잃는 것을 의미했다.
두 개의 어려운 전선에서 동시에 뛰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팀은 라리가에서 레알과 바르셀로나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반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비제프 우치,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가 속한 조에서 1위를 차지하며 8강에 진출했다. 리그 후반기에는 아틀레티코가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초반의 부진을 만회하지 못했다.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단계에서 아약스와의 8강전은 종종 경기장 밖으로까지 긴장이 번지는 치열한 싸움으로 변했다. 헤수스 길은 아약스 팀에 흑인 선수들이 많다는 이유로 아약스를 공개적으로 "FC 콩고"라고 불렀다. 아틀레티코는 원정에서 1-1이라는 훌륭한 결과를 얻었고, 에스나이데르가 델피 헬리의 좋은 크로스를 헤딩골로 연결했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2차전은 긴장감 넘치는 경기였고, 아틀레티코는 전반에 키코의 골로 앞서갔으나, 후반 직후 로날트 더 부르가 동점골을 넣었다. 1-1 동점인 상황에서 경기가 연장전으로 향하자, 안티치 감독은 교체에 불만을 품고 격렬하게 소리치며 경기장을 떠난 에스나이데르 대신 비아히니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연장전 10분 만에 아약스의 포르투갈 공격수 다니가 아름다운 골로 1-2를 만들었다. 이는 원정골 규칙으로 인해 아틀레티코가 통과하려면 두 골을 더 넣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5분 안에 페널티킥을 얻었고, 판티치가 성공시켰지만, 남은 15분 동안 파상 공세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한 골을 더 넣지 못했다. 아틀레티코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인해 아약스는 티자니 바방기다의 빠른 역습으로 세 번째 골을 넣었다.
- 1997-98: 대규모 투자*
1997-98 라리가 시즌을 앞두고 길 회장은 팀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세리에 A 우승과 1996-97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끈 유벤투스의 24세 이탈리아 슈퍼스타 공격수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영입했다. 또한 미들즈브러의 25세 브라질 선수 주니뉴를 1200.00 만 GBP에 영입했다. 비용을 상쇄하기 위해 핵심 미드필더 디에고 시메오네는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했다. 당연히 기대는 높았고, 특히 비싼 새 영입 선수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두 선수 모두 부상으로 시즌 상당 부분을 결장했지만, 비에리는 출전할 때마다 24경기에서 24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주니뉴는 23경기에서 6골만을 기록하며 비슷한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틀레티코가 라리가에서 흔들리기 시작하자 안티치 감독의 해임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처음으로 들렸다. 아틀레티코가 라치오에게 1997-98 UEFA컵 준결승에서 탈락하자, 길 회장은 안티치 감독을 대체할 이탈리아 감독을 물색 중이라고 보도한 스페인 텔레비전에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아리고 사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1998년 여름 시즌이 끝날 때 그는 해고되었다.
- 아틀레티코 복귀 (두 번째)*
그러나 안티치는 오래도록 아틀레티코를 떠나지 않았다. 사키 감독이 1998-99 시즌 22라운드 도중 해고되고, 임시 감독 카를로스 산체스 아기아르가 5경기를 지휘한 후, 안티치는 28라운드부터 시즌 종료까지(리그 11경기) 두 번째로 팀을 맡았다. 안티치 복귀 당시 아틀레티코는 리그 13위에 머물고 있었고, 리그 우승 재현은 요원했다. 그의 지휘 아래 팀은 3승 4패 4무를 기록하며 시즌을 13위로 마쳤다. 그러나 안티치는 팀을 세비야의 새로 개장한 라 카르투하 스타디움에서 열린 1999 코파 델 레이 결승전까지 이끌었으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이끄는 발렌시아에게 0-3으로 크게 패했다.
안티치는 시즌 종료 후 다시 해고되었고, 결국 라니에리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 아틀레티코 복귀 (세 번째)*
안티치의 세 번째 아틀레티코 부임은 1999-2000 라리가 시즌 후반기인 2000년 2월에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라니에리 감독이 리그 26라운드 후 해임되고, 구단이 누적된 부채로 인해 행정 관리에 들어간 상황에서 안티치는 이미 추락하고 있던 팀을 맡았다. 당시 팀은 리그 17위로 강등권에 겨우 머물고 있었다.
27라운드를 앞두고 안티치가 세 번째로 팀에 합류했지만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틀레티코는 그의 복귀전에서 패배하며 다시 강등권으로 떨어졌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의 득점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1999-2000 UEFA컵 8강에서 랑스에게 탈락했지만, 몇 달 후 라리가 강등은 가장 고통스러운 타격이었다. 안티치는 아틀레티코가 이미 강등이 확정된 상태에서 시즌 마지막 리그 한 경기를 남겨두고 37라운드 후 해고되었다. 마지막 경기는 페르난도 잠브라노 감독이 지휘했다.
두 시즌 연속 코파 델 레이 결승에 진출한 것은 그나마 밝은 부분이었지만, 이마저도 에스파뇰에게 패하며 트로피를 놓쳤다.
2.2.5. FC 바르셀로나
1년 반 동안 감독직을 쉬었던 안티치는 2003년 1월 말 루이 판 할 감독 해임 후 주안 가스파르트 구단주의 주도로 바르셀로나의 시즌 중반 감독직을 맡았다. 안티치는 20경기에서 23점(6승 5무 9패)으로 라리가 15위에 머물러 있던 팀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챔피언스리그 2차 조별 리그에서는 2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좋은 위치에 있었다. 구단의 리그 순위가 너무 낮아 단순히 1부 리그 잔류가 안티치의 당면 목표로 제시되었다. 반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상당한 기대가 있었다. 일부 언론은 그의 6개월 60.00 만 EUR 계약이 인센티브 기반이며, 국내 리그에서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4위 이내)을 획득하면 시즌 종료 시 자동으로 1년 연장된다고 보도했다.
안티치는 즉시 라치오에서 후안 파블로 소린을 영입했다. 그는 또한 젊은 골키퍼 빅토르 발데스에게 정기적으로 1군 출전 기회를 주었고, 또 다른 젊은 선수인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도 1군에 투입했다. 또한 안티치는 사비를 공격수 라인 바로 뒤로 더 전진 배치하여 판 할 감독 아래에서 맡았던 수비 부담을 덜어주었고, 이는 이 작은 미드필더가 자신의 창의성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안티치는 선수단을 안정시키고 리그 6위로 이끌어 UEFA컵 진출권을 확보했다. 그가 부임한 이후 팀의 기록은 9승 6무 3패였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안티치 감독 아래에서 바르셀로나가 2월과 3월 내내 2차 조별 리그를 지배했고, 이는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모든 전선에서 팀에 필요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실제로 그가 바르셀로나를 맡은 지 세 번째 경기 만에 인터 밀란과의 중요한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에서 카탈루냐 팀이 3-0으로 승리했고, 이는 감독이 6년 만에 챔피언스리그로 복귀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팀의 챔피언스리그 연승 기록을 11경기로 늘려 AC 밀란의 이전 기록을 깼다. 그러나 안티치의 바르셀로나는 마르첼로 리피가 이끄는 유벤투스에게 8강전 연장전에서 패했다.
2003년 6월 23일, 새로운 구단주 주안 라포르타는 안티치 계약의 선택적 2년 연장 조항이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며,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2.6. 셀타 비고
2004년 1월 29일, 안티치는 강등권 바로 위인 1점 차이의 셀타 비고에서 미겔 앙헬 로티나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데뷔전에서 레알 베티스에게 1-0으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 셀타가 더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자격이 있었다고 느낀 안티치는 구단의 약한 리그 순위로 인해 일부 선수들 사이에서 상실된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도전이라고 밝혔다.
부임 두 달 만에 안티치는 셀타를 떠났고, 당시 셀타는 리그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순위였다. 그는 9번의 리그 경기에서 7점을 얻었고,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아스널에게 탈락했다.
2.3. 세르비아 국가대표팀 감독
2008년 8월 19일, 세르비아 축구 협회(FSS)와의 이틀간의 계약 협상 끝에 안티치는 세르비아의 새 감독으로 발표되었다. 8월 25일 FSS 본부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기 6일 전이었다. 이 임명은 59세의 안티치가 4년 만에 감독직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안티치와 FSS 회장 토미슬라프 카라지치에 따르면, 안티치의 오랜 조수 레샤드 쿠노바츠가 이끄는 자신만의 코칭 스태프를 데려오겠다는 주된 요청이 받아들여진 후 협상이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과 연계된 50.00 만 EUR의 보너스 인센티브와 함께, 안티치의 연봉은 30.50 만 EUR에서 32.50 만 EUR 범위로 보고되었다. 이는 팀이 유로 2008 본선 진출에 실패했던 2006-2007년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의 연봉 36.00 만 EUR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또한, 안티치의 임명은 FSS 내부의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전 7개월간의 감독이었던 미로슬라프 주키치는 2008년 올림픽에서의 재앙적인 성적과 주키치와 FSS 회장 카라지치 간의 공개적인 불화 끝에 해임되었다.
2.3.1. 2010년 월드컵 예선
2010년 월드컵 예선 시작 불과 2주 전에 고용된 안티치 감독의 벤치 데뷔는 2008년 9월 6일 레드 스타 스타디움에서 페로 제도와의 홈 예선 경기에서 1만 명 미만의 관중 앞에서 이루어졌다. 안티치는 미드필더 네나드 밀리야시와 조란 토시치, 수비수 이반 오브라도비치와 같은 국내 리그의 신선한 재능들을 소개했으며, 주키치 감독에게 외면받았던 CSKA 모스크바의 공격형 미드필더 밀로시 크라시치를 다시 불러들였다. 2-0의 설득력 없는 승리 이후, 초점은 나흘 뒤 생드니에서 열릴 조 1위 후보 프랑스와의 원정 경기로 옮겨졌다. 안티치는 기존의 검증된 선수들을 기용하면서도, 19세의 미랄렘 술레이마니를 왼쪽 윙에 선발로 내세우고, 장신 타겟 공격수 니콜라 지기치를 제외하고 마르코 판텔리치 한 명만을 4-5-1 포메이션의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세르비아는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에게 2-1로 패했지만, 세르비아 언론은 윙에서 많은 움직임을 보인 용감한 공격적 접근 방식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보도했다.
2008년 10월, 세르비아는 루마니아와 오스트리아를 무실점으로 꺾고 상승세를 타고 있던 리투아니아를 상대했다. 예상과 달리 안티치 감독의 팀은 2만 명의 홈 팬들 앞에서 리투아니아를 쉽게 제압했다. 전반에 두 골을 넣고 후반에 한 골을 추가하여 3-0 승리를 거두었다. 나흘 뒤, 팀은 빈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했고, 다시 한 번 확신에 찬 경기력을 선보였다. 전반 10분 만에 세 골을 넣었고, 충격에 빠진 오스트리아는 회복하지 못했다.
예선 겨울 휴식기 동안 세르비아는 리투아니아와 승점이 같았지만 골득실에서 앞서 조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선수 인력 면에서 안티치는 해외에서 성장한 두 명의 젊고 유망한 선수, 20세 수비수 네벤 수보티치와 18세 공격수 보얀 크르키치의 국가대표팀 충성도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에 참여했다. 수보티치는 2008년 12월 미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신 세르비아를 선택했지만, 보얀은 안티치의 수많은 접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을 대표하기로 결정했다.
예선이 재개되면서, 2009년 3월 말 안티치 감독의 세르비아는 콘스탄차에서 추운 날씨와 거친 그라운드에서 루마니아를 상대했다. 전체 예선 캠페인 중 가장 힘든 시험에서 세르비아는 다시 3-2로 승리했다. 안티치 감독의 공격 축구(두 명의 스트라이커 지기치와 판텔리치, 그리고 두 명의 공격 지향적인 윙어 크라시치와 밀란 요바노비치를 기용)를 계속하겠다는 결심은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두었고, 세르비아는 루마니아를 상위 두 자리 경쟁에서 사실상 탈락시켰다.
세르비아를 지휘한 첫 예선 캠페인에서 안티치는 팀을 조 1위로 이끌며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직행했다.
성공적인 본선 진출 이후, 안티치와 FSS 회장 카라지치 간의 냉랭한 관계에 대한 세르비아 언론 보도 속에서 안티치와 FSS가 새 계약에 합의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몇 주 동안 안티치의 새로운 기본 연봉은 52.80 만 EUR에서 120.00 만 EUR에 이르는 다양한 언론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12월 중순까지 계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고 발표되지 않자, 안티치의 에이전트 미슈코 라즈나토비치의 반대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안티치-카라지치 불화설이 다시 불거졌고, 안티치는 새 계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짜증스럽게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2009년 12월 18일, 안티치의 새 계약이 발표되며 그의 임기는 2012년까지 연장되었다.
2010년 초, 안티치는 정규 코치 외에 경험 많은 세르비아 출신 감독 보라 밀루티노비치를 고문 역할로 추가했다. 밀루티노비치는 다시 오랜 조수였던 칠레인 훌리오 세사르 모레노를 데려왔다. 안티치는 주로 이들에게 상대팀 스카우트를 의존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안티치가 예선과 이후 친선 경기에서 기용한 선수 중에서는 노쇠한 수비수 이비차 드라구티노비치와 미드필더 보슈코 얀코비치만이 부상으로 제외되었다. 안티치는 2010년 5월 중순에 24인 스쿼드를 발표했으며, 큰 놀라움은 없었고 6월 1일에 한 명의 선수를 제외할 예정이었다.
2.3.2. 훈련 캠프 및 친선 경기
월드컵 훈련 캠프는 2010년 5월 24일 코빌로보에서 시작되었으며, 한 명의 선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합류했다. 주장 데얀 스탄코비치는 이틀 전 2010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인터 밀란 소속으로 출전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팀에 직접 합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임 당일 가벼운 훈련 세션 후, 팀은 다음 날 아침 레오강으로 떠났다. 니콜라 지기치는 2010년 5월 26일 버밍엄 시티와 계약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출국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다. 캠프 시작 시 안티치에게는 두 명의 주전 선수가 없는 것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알렉산다르 루코비치는 고열로 오스트리아에서의 첫 훈련 세션에 불참했고, 크라시치는 근육통으로 인해 개별 훈련을 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훈련 중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는 세르비아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서기 위해 잠시 팀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클라겐푸르트에서 열린 약체 뉴질랜드와의 첫 친선 경기에서 두 명의 주전 선수(이바노비치와 주장 스탄코비치)가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0-1 패배는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무기력한 세르비아는 4-4-2 포메이션으로 뛰면서 공격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고, 안티치 감독은 가용한 18명의 필드 플레이어 모두에게 출전 기회를 주었다. 쿠프슈타인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침수된 경기장에서 열린 다음 친선 경기인 폴란드와의 경기에서도 0-0 무승부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세르비아는 많은 득점 기회를 놓쳤다(특히 공격수 판텔리치). 월드컵 전 마지막 친선 경기인 소위 '드레스 리허설'은 베오그라드에서 카메룬을 상대로 열렸고, 4-3 승리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의 느슨한 수비로 인해 아프리카 팀이 두 번이나 리드를 잡는 등 불안한 경기였다. 세 번의 친선 경기 내내 안티치 감독은 선수단을 자주 로테이션하며 모든 선수에게 출전 시간을 주었다.
2.3.3. 2010년 월드컵 본선
가나와의 2010년 FIFA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안티치는 예선에서 자주 사용했던 4-4-2 포메이션으로 나섰다. 평범했던 전반전에는 양 팀 모두 이렇다 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미드필드의 핵심인 크라시치와 요바노비치는 가나의 압박 전술과 세르비아 윙어들을 두 명씩 막아 측면에서의 볼 공급을 차단하는 전술에 완전히 막혔다. 밀리야시와 스탄코비치도 중앙에서 거의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빠르게 후방에서 긴 패스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전환했고, 이는 밀로반 라예바치 감독이 3-6-1 포메이션으로 구성한 빠르고 피지컬이 좋은 가나 선수들에게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후반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안티치는 눈에 띄지 않던 밀리야시를 빼고 즈드라브코 쿠즈마노비치를 투입했다. 마침내 몇몇 기회가 만들어졌지만(59분 지기치가 판텔리치의 크로스를 받아 골문 밖으로 빗나간 슈팅), 경기는 여전히 대부분 지루하고 혼란스러운 양상이었다. 공격수를 교체하며 안티치는 부진하던 지기치를 빼고 단코 라조비치를 투입했다. 경기가 지루한 무득점 무승부로 향하는 듯 보였을 때, 중앙 수비수 루코비치가 74분 가나 선수를 넘어뜨려 두 번째 경고를 받고 퇴장당했다. 10명으로 줄어든 세르비아는 안티치 감독이 비효율적이던 요바노비치 대신 수보티치를 투입하여 중앙 수비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 놀랍게도 세르비아는 훨씬 더 나은 플레이를 펼치며 연속으로 두 번의 좋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85분, 평범해 보이던 가나의 크로스 상황에서 쿠즈마노비치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핸드볼 반칙을 범했고, 가나는 페널티킥을 얻어 1-0으로 앞서갔다. 남은 5분여 동안 결과를 뒤집기 위해 10명의 세르비아는 필사적으로 동점골을 넣기 위해 전진했고, 이로 인해 빠른 가나의 역습에 취약해졌으며, 골키퍼 블라디미르 스토이코비치와의 1대1 상황에서 가나가 골대를 맞추는 등 0-2로 뒤지지 않은 것은 극히 운이 좋았던 일이었다.
개막전에서 승점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다음 상대인 강팀 독일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독일은 첫 경기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완파한 상태였다. 안티치 감독은 전술 포메이션을 4-3-3으로 변경했고, 필요할 경우 더 수비적인 4-5-1로 전환했다. 젊은 수보티치가 징계로 결장한 루코비치 대신 중앙 수비에 투입되었고, 3인 미드필드에는 닌코비치, 쿠즈마노비치, 스탄코비치가, 최전방에는 장신 타겟맨 지기치와 윙어 크라시치, 요바노비치가 배치되었다. 조심스러운 시작 후, 독일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37분에 두 번째 옐로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불과 1분 후, 크라시치가 오른쪽 측면을 돌파하며 홀거 바트슈투버를 제치고 높은 크로스를 중앙으로 올렸고, 장신 지기치가 이를 헤딩으로 떨궈주자 요바노비치가 근거리에서 마누엘 노이어를 뚫고 골을 터뜨렸다. 한 명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반전 남은 시간 동안 사미 케디라가 크로스바를 맞추는 등 몇 차례 기회를 만들었다. 후반전 첫 15분 동안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맹공이 이어졌다. 기회가 연이어 찾아오면서 혼란스럽고 disorganized된 세르비아는 한 명 더 많은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완전히 밀렸다. 독일의 공격은 60분에 절정에 달했다. 네마냐 비디치가 세르비아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불필요하게 핸드볼 반칙을 범하여 독일에 페널티킥이 주어졌지만, 루카스 포돌스키의 낮은 슈팅은 스토이코비치에 의해 막혔고, 수보티치는 리바운드에서 메수트 외질이 슈팅할 기회를 막아내는 중요한 클리어링을 제공했다. 페널티킥 선방은 안티치 감독의 팀에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마침내 후반전에 제대로 된 플레이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명의 독일은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세르비아도 지기치의 헤딩이 크로스바를 맞추는 등 몇 차례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세르비아는 결국 1-0으로 승리하며 조별리그 통과 희망을 되살렸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에서 세르비아는 토너먼트 단계에 진출하기 위해 단 1점만 필요했고, 독일전 1-0 승리 때와 동일한 선발 라인업을 내세웠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전반전과 후반전 일부 구간에서 경기를 지배하며 승리할 것 같았던 흥미로운 경기에서 2-1로 패배했다. 많은 기회를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이 다시 한번 큰 대가를 치르게 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후반전에 팀 케이힐과 브렛 홀맨의 골로 2골을 넣었다. 막판 마르코 판텔리치의 골은 위안에 불과했다. 그들은 1점 차이로 조 최하위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2.3.4. 유로 2012 예선 및 해임
월드컵 캠페인 실패 후, 세르비아는 그리스와의 홈 친선 경기에서 1-0으로 패하며 라도미르 안티치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는 페로 제도와의 원정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하며 강하게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홈에서 슬로베니아와 1-1로 실망스러운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는 라도미르 안티치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그는 실망감을 안고 감독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비아 축구 협회를 고소했다.
2.4. 중국 클럽 지도
2012년 12월 25일, 안티치가 중국 슈퍼리그 팀인 산둥 루넝 타이산과 2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되었다. 알렉산다르 로기치가 그의 조수로 합류했다. 2012 시즌 12위를 기록했던 산둥 루넝을 리그 2위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2013년 12월 21일 산둥에 의해 해임되었다.
2015년 1월 27일, 그는 중국 갑급리그 팀인 허베이 중지와 3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팀을 승격권으로 이끌지 못하자 8월 18일 해고되었다.
3. 주요 업적 및 수상
3.1. 선수로서의 업적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1975-76 (파르티잔)
- 1. 리그: 1977-78 (페네르바흐체)
- 세컨드 디비전: 1981-82 (루턴 타운)
3.2. 감독으로서의 업적
- 라리가: 1995-9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코파 델 레이: 1995-9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3.3. 개인 수상
- 돈 발롱 어워드: 올해의 감독 1995-96
- 세르비아 올해의 감독: 2009
4. 지도자 통계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수 | 승 | 무 | 패 | 승률 (%) | |||
레알 사라고사 | 1988년 7월 1일 | 1990년 6월 30일 | 86 | 35 | 24 | 27 | 40.70 |
레알 마드리드 | 1991년 3월 21일 | 1992년 1월 27일 | 39 | 27 | 6 | 6 | 69.23 |
레알 오비에도 | 1993년 2월 5일 | 1995년 6월 30일 | 112 | 41 | 31 | 40 | 36.61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157 | 81 | 41 | 35 | 51.59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99년 3월 24일 | 1999년 6월 30일 | 14 | 4 | 5 | 5 | 28.57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2000년 3월 4일 | 2000년 5월 15일 | 15 | 2 | 5 | 8 | 13.33 |
레알 오비에도 | 2000년 7월 1일 | 2001년 6월 30일 | 39 | 11 | 8 | 20 | 28.21 |
바르셀로나 | 2003년 2월 7일 | 2003년 6월 30일 | 24 | 12 | 8 | 4 | 50.00 |
셀타 비고 | 2004년 1월 29일 | 2004년 3월 29일 | 10 | 1 | 1 | 8 | 10.00 |
세르비아 | 2008년 8월 20일 | 2010년 9월 15일 | 28 | 17 | 3 | 8 | 60.71 |
산둥 루넝 | 2012년 12월 24일 | 2013년 12월 21일 | 32 | 19 | 5 | 8 | 59.38 |
허베이 화샤 싱푸 | 2015년 1월 27일 | 2015년 8월 18일 | 23 | 11 | 5 | 7 | 47.83 |
전체 | 579 | 261 | 142 | 176 | 45.08 |
5. 개인사

5.1. 가족 및 사생활
안티치는 베라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딸 아나는 농구 선수 니콜라 론차르와 결혼했으며, 아들 두샨은 미랴나와 결혼했다. 안티치는 네 명의 손주를 두었는데, 손자 마르코와 라도미르, 손녀 이반과 페트라가 있다.
안티치는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마르베야에 거주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주로 스페인에서 해설자로 활동했다.
5.2. 명예훼손 소송
1995-96 더블 우승 시즌 동안, 안티치는 엘 파이스 일간지의 스페인 정치 칼럼니스트 헤르만 테르치와 주목할 만한 공개적인 언쟁을 벌였다. 1995년 9월 10일 엘 문도에 실린 언론인 카르멘 리갈트와의 인터뷰에서 안티치는 테르치가 표명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안티치는 테르치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한 견해와 보도를 반세르비아적으로 보고 그 칼럼니스트를 "나치"라고 불렀다. 테르치는 이에 대해 안티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소송에서 200.00 만 ESP의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항소 끝에 이 사건은 스페인 대법원에까지 갔고, 대법원은 2003년 11월 중순 테르치에게 유리한 원심 판결을 확정하며 안티치에게 원래 판결 금액의 유로화 등가액인 약 1.20 만 EUR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6. 사망 및 유산
6.1. 사망
안티치는 2020년 4월 6일 마드리드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췌장염으로 투병해 왔으며, 코로나19와 함께 사망했다.
6.2. 기념 및 유산
2021년 8월 12일, FK 스로보다 우지체 경기장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라도미르 안티치 스타디움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