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윌리엄 프리츠 아필스 주니어(William Fritz Afflis Jr.영어, 1929년 6월 27일 ~ 1991년 11월 10일)는 미국의 프로레슬러, 프로모터, 그리고 NFL 선수로, 딕 더 블루저(Dick the Bruiser영어)라는 링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그린베이 패커스에서 4시즌 동안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이후 프로레슬링계에서 16차례의 월드 챔피언을 포함하여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A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1회, W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인디애나폴리스 버전) 13회,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오마하 버전) 1회, W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로스앤젤레스 버전) 1회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태그팀 레슬링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쳐 20개의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으며, 이 중 11개는 오랜 태그팀 파트너인 크러셔 리소프스키와 함께 달성했습니다.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가장 잘 알려진 악역 중 한 명이었으며, 루 테즈, 보보 브라질, 안젤로 포포, 프레디 블래시와 같은 선수들과의 대립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딕 더 블루저는 2021년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5년 국제 레슬링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일본에서는 그의 거친 파이트 스타일 때문에 '생상남'(生傷男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및 교육
아필스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쇼트리지 고등학교에서 신입생과 2학년 때 미식축구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직업을 잃자 가족은 다시 델파이로 돌아갔지만, 그곳 고등학교에는 미식축구팀이 없었습니다. 아필스는 인근 라파예트의 YMCA에 거주하며 라파예트 제퍼슨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그곳에서 미식축구와 레슬링을 병행했습니다. 그는 퍼듀 대학교와 네바다 대학교 리노 캠퍼스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두 학교 모두에서 대표팀 선수로 뛰었습니다. 또한 리노의 나이트클럽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소스에 따르면, 그는 학생 시절 싸움으로 인해 7개 대학에서 퇴학당하며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장 오래 재학한 곳은 퍼듀 대학교로 7개월이었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는 이틀 만에 퇴학당했다고 전해집니다.
2.2. 미식축구 경력
아필스는 1951년 프로 미식축구 드래프트에서 전체 186번째로 16라운드에 지명되었습니다. 그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그린베이 패커스에서 라인맨으로 4시즌 동안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패커스가 치른 48번의 정규 시즌 경기 모두에 출전했지만, 팀은 4위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한 적이 없었습니다. 패커스에서 뛰던 중 후두부에 부상을 입었는데, 이 부상으로 인해 평생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거친 목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2.3. 프로레슬링 데뷔 및 초기
딕 더 블루저는 1954년에 프로레슬링에 데뷔했으며, 번 가니에에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1955년 시카고에서 '블루저'라는 링네임으로 레슬링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가니에와 루 테즈를 상대했습니다. 가니에는 그가 프로레슬러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딕 더 블루저는 매주 목요일 디트로이트 지역 TV에서 라이브 경기를 가졌습니다. 그의 전형적인 상대는 그에게 '박살나는' 신인 레슬러들이었으며, 그의 경기와 인터뷰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라이브 TV에서의 유일한 패배는 "카우보이" 밥 엘리스에게 당했지만, 디트로이트 올림피아에서 열린 두 번의 재경기에서는 블루저가 승리했습니다.
1963년, 딕 더 블루저는 NFL 스타 알렉스 카라스와 경기를 주선했습니다. 이 경기는 카라스가 공동 소유한 술집 '린델스 바'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각본된 싸움'이었으나, 카라스의 동업자 부티시카리스 형제의 삼촌 중 한 명이 이 행사가 연출된 것임을 모른 채 딕 더 블루저를 공격하면서 실제 싸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블루저는 술집을 파괴하고 난동을 진압하러 온 경찰관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3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결국 8명의 경찰관이 그를 제압했고, 블루저는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가중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고, 부상당한 두 명의 경찰관에 대한 손해배상금 5.00 만 USD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1957년 11월 19일, 딕 더 블루저와 닥터 제리 그레이엄은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안토니노 로카와 에두아르 카르펜티에를 상대로 태그팀 경기를 가졌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레슬러들 간의 싸움이 계속되자, 수많은 팬들이 난입하여 폭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경찰관 두 명이 부상당하고 팬 두 명이 체포되었으며, 60명 이상의 경찰관이 흥분한 군중을 해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경기장 바닥에는 수백 개의 부서진 의자가 널려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레이엄이 로카에게 출혈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결과로 아필스는 뉴욕주 체육 위원회로부터 영구 제명되었고, 이후 WWWF 링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제명에 대해 사과할 의사가 없으며, 오히려 "손님들이 던진 의자에 머리를 다친 피해자"이며 "객에게 의자를 던져 되갚은 것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제명 당시 "가든에 출전하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기뻤다고 밝혔습니다.

3. 프로레슬링 경력
3.1. 주요 활동 지역 및 단체
아필스는 동료 레슬러이자 사업 파트너인 윌버 스나이더와 함께 1964년 오랜 소유주 짐 바넷으로부터 인디애나폴리스의 NWA 프로모션을 인수했습니다. 아필스는 이 지역의 이름을 월드 레슬링 어소시에이션(WWA)으로 변경하고 자신을 챔피언으로 내세웠습니다. WWA는 자체적인 타이틀과 챔피언을 가진 독립적인 프로모션으로 운영되었지만, 번 가니에가 소유한 더 큰 단체인 AWA와 업무 협약을 맺어 선수들을 공유하고 챔피언십을 인정했습니다. 이 협약은 두 프로모션 모두에 이득이 되었고, 블루저가 그의 "사촌"으로 불리던 태그팀 파트너 더 크러셔와 함께 A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5차례나 획득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필스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매니저 바비 히난에게 "더 위즐"이라는 별명을 처음 붙여주었습니다. 아필스의 WWA는 1964년부터 1989년까지 운영되었는데, WWF에 인재, TV 방송, 팬 관중을 잃으면서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1971년에는 더 시크와 팀을 이루어 크레이지 루크 그레이엄과 타잔 타일러를 상대로 새로 만들어진 WWWF 태그팀 챔피언십에 도전했으나 패배했습니다.
중서부 지역에서 딕 더 블루저는 1957년 12월 13일 위스콘신주밀워키에서 윌버 스나이더를 꺾고 디트로이트 버전 US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스나이더, 번 가니에, 카우보이 밥 엘리스, 보보 브라질, 프리츠 폰 에릭 등과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습니다. 1963년 7월 15일에는 하와이에서 킹 이야우케아를 꺾고 하와이 버전 US 헤비웨이트 챔피언십도 차지했습니다. 이후 AWA에서 동료인 크러셔 리소프스키와 태그팀을 결성했으며, 1963년 8월 20일 크러셔와 함께 A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습니다.
1964년 4월 22일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월드와이드 레슬링 어소시에이츠에서 프레드 블래시로부터 W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빼앗았습니다. 같은 날, 그는 인디애나폴리스에 자신의 단체인 월드 레슬링 어소시에이션을 설립하고 자신을 인디애나폴리스 버전 WWA의 초대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으로 인정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버전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은 같은 해 7월 22일 더 디스트로이어에게 패하여 잃었지만,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선역의 단체 에이스 겸 오너로서 활약하며 1965년에는 조니 발렌타인과 진 키니스키와 인디애나폴리스 버전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경쟁했습니다.
AWA에서도 선역으로 전환하여 1966년 11월 12일 네브래스카주오마하에서 매드 독 바숑을 꺾고 A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했습니다. 크러셔 리소프스키와의 태그팀으로는 래리 헤닝 & 할리 레이스, 크리스 마르코프 & 안젤로 포포, 매드 독 바숑 & 부처 바숑, 미츠 아라카와 & 킬러 토아 카마타 등의 팀과 대립을 벌였으며, 1968년 12월 28일 일리노이주시카고에서 당시 AWA와 WWA 양 세계 태그 챔피언 팀이었던 아라카와 & 모토를 꺾고 두 타이틀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이후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인디애나폴리스의 WWA 및 제휴 단체 AWA에서 활약했습니다. WWA에서는 플래그십 타이틀인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더 시크, 블랙잭 랜자, 블랙잭 멀리건, 바론 폰 라시크, 옥스 베이커, 어니 래드, 가이 미첼, 이반 콜로프 등과 대립을 펼쳤습니다. NWA의 본거지였던 미주리주세인트루이스의 킬 오디토리움에도 여러 차례 출전하여 도리 펑크 주니어, 할리 레이스, 잭 브리스코, 테리 펑크 등 역대 N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WWWF에서 온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브루노 산마르티노와도 태그팀을 맺었으며, 1973년 7월 21일 산마르티노를 파트너로 삼아 바론 폰 라시크 & 어니 래드로부터 WWA 세계 태그 챔피언십을 획득했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발리언트 브라더스와 타이틀을 놓고 다퉜습니다. 동료 크러셔 리소프스키와의 콤비로는 더 블랙잭스나 텍사스 아웃로스 같은 강팀과의 대립을 거쳐, 1975년 8월 16일 시카고에서 닉 복윙클 & 레이 스티븐스를 꺾고 AWA 세계 태그 챔피언십을 되찾았습니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르네 그레이 & 피에르 라플뢰르의 더 리저네어스로부터 WWA 세계 태그 챔피언십도 획득하여 다시 두 타이틀을 모두 보유하게 되었으며, WWA 타이틀은 이듬해 1976년 3월 13일 옥스 베이커 & 척 오코너에게, AWA 타이틀은 같은 해 7월 23일 블랙잭 랜자 & 바비 던컨에게 패하기 전까지 유지했습니다.
이후 싱글 활동에 주력하여 NWA 세인트루이스 지역에서는 1978년 7월 14일 딕 머독으로부터 NWA 미주리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했습니다. AWA에서는 닉 복윙클의 A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며, 본거지 WWA에서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역시 '블루저'를 링네임으로 사용했던 브루저 브로디와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대립을 펼쳤습니다. 1982년 1월 1일에는 세인트루이스 지역 프로모터였던 샘 머치닉의 은퇴 흥행에서 켄 파테라를 꺾고 NWA 미주리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통산 3번째로 획득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18일 시카고에서는 당시 AWA에서 큰 인기를 얻던 헐크 호건과도 태그팀을 맺었습니다.
1983년부터는 세미 리타이어 상태가 되었지만, 전설적인 선수로서 AWA의 빅 매치에 등장했습니다. 1984년에는 크러셔 리소프스키와 오랜만에 콤비를 이뤄 3월 4일 시카고에서 닉 복윙클 & 스탠 핸슨과, 8월 19일 밀워키에서 로드 워리어스와 대결했습니다. 이듬해인 1985년에는 패뷸러스 프리버즈와도 여러 차례 대결했으며, 9월 28일 시카고의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AWA 슈퍼클래시"에서는 크러셔 & 바론 폰 라시크와 팀을 이뤄 이반 콜로프, 니키타 콜로프, 크러셔 크루시체프의 더 러시안즈와 6인 태그팀 매치에 출전했습니다.
3.2. 일본에서의 활동
딕 더 블루저는 1965년 11월 일본 프로레슬링에 처음으로 내한했습니다. 11월 24일 오사카 부립 체육회관에서 역도산 사망 후 공석이 된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자이언트 바바와 대결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선역으로 전환했지만, 일본에서는 악역 스타일을 고수하며 이 왕좌 결정전에서도 3전 2선승제 중 두 번이나 반칙패를 당해 바바가 스트레이트 승리로 제3대 챔피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바를 처참하게 유린하며 맹렬히 날뛰었습니다. 3일 후인 11월 27일에는 구라마에 고쿠기칸에서 바바의 첫 방어전 상대를 맡았습니다(결과는 1-1 동점 후 양자 링아웃으로 바바가 방어). 이후 바바의 이 타이틀에는 1968년 2월 28일 도쿄 체육관, 1969년 8월 12일 삿포로 나카지마 스포츠 센터에서 도전했습니다.
태그팀으로는 1968년 2월 26일 오사카에서 미국에서의 숙적 할리 레이스와 팀을 이루어 바바 & 안토니오 이노키의 BI포가 보유하고 있던 인터내셔널 태그 챔피언십에 도전했습니다. 1969년 8월 11일 삿포로에서는 동료 크러셔 리소프스키와의 콤비로 BI포를 꺾고 이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이틀 후인 13일에 타이틀을 다시 빼앗겼지만, 이 시기가 크러셔와 함께한 '블루크러 콤비'의 일본 첫 참전이었으며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다음 날인 14일에는 히로시마 현립 종합 체육관에서 마리오 밀라노와 팀을 이루어 이노키 & 요시무라 미치아키가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 태그 챔피언십에도 도전했습니다.
1972년 11월에는 AWA와의 제휴를 통해 크러셔와 함께 국제 프로레슬링에 내한하여, 11월 24일 오카야마 무도관에서 스트롱 고바야시 & 그레이트 쿠사츠의 IWA 세계 태그 챔피언십에 도전했습니다. 11월 27일 아이치 현 체육관에서는 고바야시 & 쿠사츠를 상대로 일본 최초의 철망 태그 데스매치를 치렀는데, 경기 방식을 '철망에서 먼저 탈출한 쪽이 승리'라는 미국식 이스케이프 룰로 오인하여, 쓰러진 고바야시와 쿠사츠를 남겨두고 장외로 탈출한 뒤 그대로 대기실로 돌아가 무효 경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분노한 관객들이 폭동을 일으켜 기동대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블루저와 크러셔는 'WWA 세계 태그 챔피언 팀'으로 홍보되었으나, 이 시점의 실제 WWA 세계 태그 챔피언 팀은 더 블랙잭스였습니다.
1975년 4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처음 등장하여, 4월 10일 미야기 현 스포츠 센터에서 바바의 PWF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도전하며 두 선수의 일본에서의 오랜만의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이 내한 전인 2월 6일 미국 캔자스시티에서도 바바의 PWF 타이틀에 도전했습니다). AWA와 WWA 양 세계 태그 챔피언십을 보유하고 있던 이듬해 1976년 1월에는 크러셔와의 콤비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재내한하여, 1월 26일 아이치 현 체육관, 29일 도쿄 체육관에서 바바 & 점보 츠루타의 인터내셔널 태그 챔피언십에 연속 도전했습니다.
1980년 3월, 국제 프로레슬링에 오랜만에 내한했습니다. 일본 프로레슬링 이후 처음으로 오키 긴타로와의 대결이 주목받았으며, 동시 참전했던 몽골리안 스톰퍼와 팀을 이뤄 러셔 기무라 & 오키와의 태그매치와 '일본판 블루저'로 불리던 아니마루 하마구치와의 싱글 매치도 치러졌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일본 방문이었으며, 일본 무대에는 일본 프로레슬링에 3회,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국제 프로레슬링에 각각 2회씩 총 7회 참전했지만, 모두 1주일 정도의 특별 참가라는 거물 대우를 받았습니다.
3.3. 주요 라이벌 및 경기
딕 더 블루저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유명 선수들과 격렬한 대립을 펼쳤습니다. 초기에는 루 테즈와 대결하며 1956년 1월 14일 위스콘신주밀워키에서 그의 NWA 세계 헤비급 왕좌에 처음으로 도전했습니다. 또한 보보 브라질, 안젤로 포포, 프레디 블래시 등과도 유명한 대립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자이언트 바바와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여러 차례 격돌하며 바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크러셔 리소프스키와는 오랜 기간 태그팀 파트너로서 활약하며 래리 헤닝 & 할리 레이스, 크리스 마르코프 & 안젤로 포포, 매드 독 바숑 & 부처 바숑, 미츠 아라카와 & 닥터 모토 등과 대립했습니다. 싱글 경기에서는 더 시크, 블랙잭 랜자, 블랙잭 멀리건, 바론 폰 라시크, 옥스 베이커, 어니 래드, 가이 미첼, 이반 콜로프 등과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놓고 싸웠습니다. NWA의 본거지인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도리 펑크 주니어, 할리 레이스, 잭 브리스코, 테리 펑크 등 역대 N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3.4. 프로모터 활동
아필스는 1964년 윌버 스나이더와 함께 인디애나폴리스의 NWA 프로모션을 인수하여 월드 레슬링 어소시에이션(WWA)으로 이름을 바꾸고 프로모터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WWA의 챔피언으로 내세웠으며, WWA를 자체 타이틀과 챔피언을 가진 독립 프로모션으로 운영했습니다. 동시에 AWA와 협력 관계를 맺어 선수들을 공유하고 챔피언십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그렉 워조코프스키와 스코트 스타이너와 같은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WWA는 1964년부터 1989년까지 운영되었으나, 빈스 맥마흔 주니어 체제 하의 WWF가 전국적으로 확장하면서 관객 동원이 감소하여 결국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3.5. 은퇴 후 활동
프로레슬링에서 은퇴한 후, 아필스는 고저스 레이디스 오브 레슬링(GLOW)의 컬러 해설자로 활동했습니다. GLOW는 이전에 딕 더 블루저의 WWA에서 십대 시절부터 매니저로 성장했던 데이비드 맥레인이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는 또한 WCW에서 인재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1990년 스타케이드 메인 이벤트인 스팅과 블랙 스콜피온 간의 철망 데스매치에서 스페셜 게스트 레프리를 맡기도 했습니다.
4. 주요 기술
딕 더 블루저는 그의 '싸움꾼' 캐릭터를 극대화하는 거칠고 강력한 기술들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 펀치 및 킥: 블루저의 기본적인 공격 방식이자 그의 싸움꾼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술이었습니다. 레슬러들 사이에서도 '터프가이', '괴물'로 불리며 두려워했던 그의 강인한 내구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반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호쾌한 싸움꾼 파이트가 블루저의 가장 큰 볼거리였습니다.
- 스톰핑: 상대의 복부 등을 과장되게 들어 올린 발로 체중을 실어 밟아 누르고, 동시에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상대를 짓밟는 기술입니다.
- 다이빙 니 드롭: 당시 프로레슬링계에서 탑 로프에서의 공격으로 흔히 사용되던 기술입니다. 아래의 아토믹 밤즈 어웨이의 전초전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 아토믹 밤즈 어웨이 (다이빙 풋 스탬프): 탑 로프에서 뛰어올라 쓰러진 상대의 복부 등을 밟는 블루저의 최대 필살기입니다. 양발로 밟는 방식과 한 발로 밟는 방식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원폭 떨어뜨리기'(原爆落とし일본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이 호칭이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 스탬프 홀드: 변형된 베어 허그입니다. 양팔로 상대의 허리를 감싸 조이는 것은 일반적인 베어 허그와 동일하지만, 상대의 몸을 위아래로 뒤집어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만드는 것이 다릅니다. 머리로 혈액이 역류하는 효과를 노리는 기술로, 블루저에게는 비장의 수단이었습니다.
- 흉기 공격: 공이나 로프, 중계석에 있는 전화기 등 경기장 내의 모든 것을 흉기로 활용했습니다. 특히 1965년 첫 일본 방문 당시 11월 27일 구라마에 고쿠기칸에서 자이언트 바바와의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재경기에서 링 사이드의 마루판을 발로 부수고 그 파편으로 바바를 공격했다는 일화는 특히 유명합니다. 또한 크러셔 리소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너클 더스터를 숨겨 가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5. 수상 경력
딕 더 블루저는 그의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수많은 챔피언십 타이틀과 영예를 얻었습니다.
단체 | 챔피언십 | 횟수 | 파트너 (태그팀 챔피언십) |
---|---|---|---|
50th 스테이트 빅 타임 레슬링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하와이 버전) | 1 | |
아메리칸 레슬링 얼라이언스 | A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2 | 윌버 스나이더 |
아메리칸 레슬링 어소시에이션 | A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A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5 | 더 크러셔 | |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오마하 버전) | 1 | ||
A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 | ||
빅 타임 레슬링 (디트로이트)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디트로이트 버전) | 4 | |
프레드 콜러 엔터프라이즈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시카고 버전) | 1 | |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시카고 버전) | 1 | 진 키니스키 (영어 소스), 한스 슈미트 (일본어 소스) | |
일본 프로레슬링 | NWA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십 | 1 | 더 크러셔 |
세인트루이스 레슬링 클럽 | NWA 미주리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3 | |
월드 레슬링 어소시에이션 (인디애나폴리스) | W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13 | |
W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15 | 더 크러셔 (6), 윌버 스나이더 (3), 브루노 산마르티노 (1), 빌 밀러 (1), 스파이크 휴버 (1), 제프 반 캠프 (1), 바비 콜트 (1), 칼립소 짐 (1) | |
월드와이드 레슬링 어소시에이츠 | W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로스앤젤레스 버전) | 1 | |
기타 타이틀 |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조지아 버전) | 1 |
주요 수상 및 명예의 전당 헌액
- 프로레슬링 일러스트레이티드: PWI 올해의 태그팀 (1972, 더 크러셔와 함께), PWI 선정 'PWI 올해의 싱글 레슬러 500인' 중 300위 (2003)
-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2005년 헌액 (태그팀 부문, 크러셔와 함께), 2011년 헌액 (텔레비전 시대 부문)
- 세인트루이스 레슬링 명예의 전당: 2007년 헌액
-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WCW 명예의 전당 (1994년 헌액)
-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명예의 전당 (1996년 헌액)
- WWE: WWE 명예의 전당 (2021년 헌액)
6. 개인적인 삶
딕 더 블루저의 사위인 딕 더 블루저 주니어는 인디펜던트 서킷에서 레슬링을 했습니다. 일본 소스에 따르면, 그는 다섯 차례의 이혼 경력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1965년 첫 일본 방문 직전, 그는 도쿄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아내? 5번 결혼했지만 지금은 없다. 취미는 맥주와 여자다"라고 자신의 사생활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인종차별을 싫어했으며, 그린베이 패커스 최초의 흑인 선수인 밥 맨이 택시 기사에게 인종차별로 승차 거부를 당했을 때, 블루저가 기사에게 화를 내어 승차 거부를 철회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주최했던 WWA에서도 보보 브라질과 어니 래드와 같은 흑인 레슬러들에게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부여하는 등, 흑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지원했습니다. 이는 당시 프로레슬링계에서 드문 행보였습니다.
7. 사망
아필스는 1991년 11월 10일, 플로리다주 라르고에 위치한 선코스트 병원에서 내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미망인 루이즈에 따르면, 남편은 입양한 아들 존 카니와 함께 집에서 역기를 들다가 식도의 혈관이 파열되었다고 합니다.
8. 평가 및 영향
8.1. 긍정적 평가
아필스는 그의 카리스마, NFL에서의 명성, 거친 목소리, 그리고 터프가이 페르소나 덕분에 합법적인 크로스 미디어 스타였으며, 인디애나폴리스 지역에서는 일종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자신이 운영하던 WWA에서 보보 브라질과 어니 래드와 같은 흑인 레슬러들에게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부여하는 등, 흑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지원했습니다. 이는 당시 프로레슬링계에서 드문 행보였습니다.
8.2. 비판 및 논란
딕 더 블루저는 그의 거친 경기 스타일과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1957년 11월 19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태그팀 경기 중 관중들이 난입하여 폭동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뉴욕주 체육 위원회로부터 영구 제명되었습니다. 그는 이 제명에 대해 사과할 의사가 없으며, 오히려 "손님들이 던진 의자에 머리를 다친 피해자"이며 "객에게 의자를 던져 되갚은 것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제명 당시 "가든에 출전하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기뻤다고 밝혔습니다.
1972년 11월 27일 국제 프로레슬링과의 철망 태그 데스매치에서는 경기 규칙을 오인하여 무효 경기를 만들고 관중 폭동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소스에 따르면, 그는 학창 시절 싸움으로 인해 7개 대학에서 퇴학당하며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프로모터가 된 후에도 브루저 브로디와 백스테이지에서 큰 싸움을 벌이는 등 혈기 왕성한 모습은 변치 않았습니다.
8.3. 대중문화적 영향
인디애나폴리스 출신의 유명 방송인 데이비드 레터맨은 딕 더 블루저의 별명인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레슬러"(The World's Most Dangerous Wrestler영어)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텔레비전 쇼 밴드 이름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밴드"(The World's Most Dangerous Band영어)로 지었습니다. 레터맨의 경력은 블루저에 의해 시작되었다고도 전해집니다. '딕 더 블루저'라는 별명은 1980년대 디트로이트 록 라디오 방송국 WRIF의 아침 프로그램 공동 진행자 조지 바이어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바이어의 '리처드 T. 블루저'는 아필스의 효과적이고 재미있는 성대모사였고, 아필스 본인이 WRIF의 인기 TV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가를 물고 맥주를 병째 마시며 거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퍼포먼스가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그의 거친 목소리는 NFL 선수 시절 목 부상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6년 안토니오 이노키 대 무하마드 알리 이종격투기전이 열렸을 때, 당초 무하마드 알리는 블루저를 스파링 파트너로 지목했으나 블루저는 이를 거절하고 5월 시카고에서 열린 이노키의 기자회견에 동석했습니다. 6월 10일 시카고에서 알리가 버디 울프 등과 믹스드 매치를 가졌을 때도, 알리의 매니저 역할을 맡은 프레드 블래시에 대항하여 레슬러 측의 세컨드를 맡았습니다.
1980년 3월 국제 프로레슬링 참전 당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항공기에 탑승할 때 공항 직원이 "미스터 블루저, 원정이십니까. 잘 다녀오세요"라며 별다른 확인 없이 통과시켜, 탑승자 명부에는 본명인 윌리엄 아필스(애플리스) 대신 'W. 블루저'로 기재된 채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현지에서 유명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또한 그는 그래플러 바키에 등장하는 '리처드 필스'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자이언트 바바는 1980년대 미국에서 블루저와 재회했을 때, 당시 NWA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프로모터가 된 바바에게도 "헤이, 키드!"(Hey, Kid!영어)라고 말을 걸어 바바를 쓴웃음 짓게 만들었지만, 이는 업계 후배에 대한 친근함이 담긴 표현이었습니다. 브루저 브로디 등도 그에게 항상 '키드'라고 불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