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역도산(力道山, 力道山리키도잔일본어)은 본명이 김신락(金信洛, 김신락김신락한국어)이며, 일본으로 귀화한 후에는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 百田光浩모모타 미쓰히로일본어)로 알려진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이다. 1924년 11월 14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1963년 12월 15일 사망했다. 그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기초를 다지고 전후 일본 사회의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며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생애는 스모 선수로서의 경력과 인종 차별 경험, 프로레슬러로서의 성공과 비즈니스 확장, 그리고 파란만장한 사생활과 의문의 죽음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외국인 레슬러들을 물리치는 모습으로 전후 일본 국민에게 깊은 좌절감 속에서 큰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며 텔레비전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거친 성격과 야쿠자 조직과의 연루, 그리고 자신의 한국인 혈통을 숨기려 했던 논란 등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초기 생애와 스모 경력
역도산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초기 배경과 스모 선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씨름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에 입문했으나, 차별과 금전 문제로 인해 은퇴를 결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2.1. 출생과 배경
역도산은 본명 김신락으로, 1924년 11월 14일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의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김석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교적 전통을 지닌 농장주였으며, 어머니는 전지(全吉)였다. 어린 시절 그는 병약한 아버지를 돌보았고, 어머니와 형들은 농장일을 했다. 어릴 때부터 씨름에 참여했으며, 지역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후 나가사키현 오무라 출신의 일본인 경찰관의 장인이자 니쇼노세키 방(部屋)의 후원자였던 미노스케 모모타의 눈에 띄게 된다. 미노스케는 여러 한국인 소년들을 스모계로 스카우트했으며, 김신락에게도 스모 입문을 권유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돌봐야 할 책임 때문에 가족들은 그의 일본행을 반대했다. 하지만 1939년 김석태가 사망하자, 김신락은 이듬해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부에서는 실제 출생 시기가 1~2년 더 빨랐을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된다.
2.2. 일본으로의 이주와 입양

일본으로 건너간 김신락은 니쇼노세키 방에 입문하여 1940년 5월에 스모 선수로 데뷔했다. 초기에는 스모 순위표에 그의 한국인 출신이 명시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괴롭힘과 인종 차별을 겪었다. 이후 그는 미노스케 모모타에게 입양되어 '모모타 미쓰히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나가사키현 오무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꾸며졌다. 그러나 그는 1951년에야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2.3. 스모 경력과 은퇴
그는 '역도산 미쓰히로(力道山 光浩)'라는 시키나를 부여받았다. 1946년에 최고 등급인 마쿠우치에 진입했으며, 1947년 6월 대회에서는 요코즈나 하구로야마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우승 결정전에서 패했다. 그는 총 23개 대회에 출전하여 135승 82패 15휴(휴장)의 기록을 남겼다. 그의 최고 등급은 세키와케였으며, 은퇴 직전에는 오제키 승급에 근접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역도산의 은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그의 겸손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이룬 성공은 니쇼노세키 방의 선배들 사이에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인종 차별 또한 한 가지 요인이었을 수 있지만, 은퇴의 결정적인 계기는 스승인 다마노우미 다이타로와의 금전적 분쟁이었다. 역도산은 방에 대한 자신의 상당한 기여가 재정적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으나, 다마노우미는 그를 이기적이라고 여겨 격렬한 논쟁 끝에 지원을 거부했다. 대중에게는 폐흡충증으로 인한 은퇴라고 설명되었지만, 1950년 9월 10일, 다마노우미와의 논쟁 직후 역도산이 충동적으로 자신의 촌마게를 잘랐던 것이 실제 은퇴 사유였다.
은퇴 후, 역도산은 처음에는 미국인들과 함께 암거래상으로 일했다. 그는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해 떠나는 미군들의 물품을 구매하여 일본인들에게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결국 이 직업을 그만두고 스모 복귀를 청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그의 전 후원자였던 닛타 신사쿠의 건설 회사에서 건설 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 닛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도쿄의 포로 수용소에서 일했으며, 미국인 포로들에게 몰래 식량과 담배를 제공했다. 그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전직 포로들이 GHQ에서 일하게 되면서 닛타의 건설 회사는 재건축 계약에서 특혜를 받았다. 닛타는 또한 야쿠자 지하 세계와의 유대 관계도 있었으며, 스모계에도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2.3.1. 스모 기록과 통계
역도산의 스모 경력 동안의 상세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통산 성적:** 135승 82패 15휴(휴장), 승률 0.622 (23개 바쇼)
- 마쿠우치 성적:** 75승 54패 15휴(휴장), 승률 0.581 (11개 바쇼)
- 현역 재위:** 23개 바쇼
- 마쿠우치 재위:** 11개 바쇼
- 산야쿠 재위:** 6개 바쇼 (세키와케 3회, 고무스비 3회)
- 산쇼:** 1회
- 슈쿤쇼(殊勲賞): 1회 (1948년 5월 바쇼)
- 긴보시:** 2개 (아즈마후지 1개, 데루쿠니 1개)
- 각단 우승:**
- 마쿠시타 우승: 1회 (1944년 5월 바쇼)
- 산단메 우승: 1회 (1942년 1월 바쇼)
- 바쇼별 성적**
연도 1월 5월 9월 11월 1940 - 초스모 - - 1941 조노구치 20위 서 조니단 45위 동 - - 1942 산단메 51위 동 마에즈모 34위 동 - - 1943 마쿠시타 21위 서 마쿠시타 12위 서 - - 1944 마쿠시타 13위 동 마쿠시타 13위 동 주료 10위 동 - 1945 - 주료 4위 동 주료 7위 동 - 1946 - 국기관 개수
로 인해 중지마에가시라 17위 서 - 1947 - 마에가시라 8위 동 마에가시라 3위 동 - 1948 - 고무스비 2위 동 고무스비 - 1949 고무스비 세키와케 마에가시라 2위 서 - 1950 고무스비 세키와케 은퇴 - - 마쿠우치 대전 성적**
역도산 승수 패수 역도산 승수 패수 역도산 승수 패수 역도산 승수 패수 아즈마후지 2 5 이쓰우미 2 1 인슈야마 2 0 오우치야마 1 0 오오쿠마 2 0 오오키 3 1 가가미자토 2 1 기요미가와 1 0 구가니시키 1 0 구니노토 1 1 다카쓰야마 2 2 사가미가와 1 0 사쿠라니시키 4 3 시오노우미 4 2 시미즈가와 1 1 신슈야마 2 0 지요노야마 3 5 쓰네노야마 1 0 데루쿠니 1 4 데루쇼 2 (1) 0 데와니시키 3 1 도치니시키 2 2 하구로야마 1 2* 하시마야마 4 2 비슈야마 3 2 히로세가와 4 0 후도이와 0 1 마에다야마 3 (3) 2 마스이즈미 2 5 미네야마 3 3 무쓰노사토 1 0 핫포야마 0 2 요시바야마 3 4 와카세가와 5 1 - - - - - - - 괄호 안은 승수, 패수 중 부전승의 수.
- 이 외에 우승 결정전에서 하구로야마에게 1패가 있다.
3. 프로레슬링 경력
스모 은퇴 후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여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의 활약은 전후 일본인에게 큰 희망을 주었으며, 텔레비전 보급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프로레슬링으로의 전향
스모 은퇴 후, 역도산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혼모쿠에 본사를 둔 닛타 건설에서 자재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닛타 건설의 사장은 과거 역도산의 후원자였던 닛타 신사쿠였다. 닛타는 후에 메이지자 극장의 회장이 된다. 역도산은 나이트클럽에서의 싸움을 계기로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프로레슬러 해럴드 사카타(토시 토고)를 알게 되어 의기투합했다. 1951년 9월 30일부터 미국의 프리메이슨 자선 단체인 슈라이너스가 연합군 최고사령부 위문 및 장애인 자선 사업을 위해 보비 브룬스 등 6명의 레슬러를 일본으로 초청해 프로레슬링 경기를 개최하고 있었다. 사카타도 이 일원이었다. 역도산은 사카타의 권유로 연습을 참관하게 되었고, 프로레슬링 전향을 결심한 뒤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에 있던 슈라이너스 클럽에서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1952년 2월, 역도산은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일본계 레슬러 오키 시키나 밑에서 맹훈련을 받았다. 당시 하와이 지역은 프로모터 알 카라시크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슈라이너스 클럽의 원정이나 역도산의 하와이 입국 등 일본과 미국의 교류는 카라시크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 카라시크는 당시 NWA의 일원이었고, 후에 역도산이 일본에서 루 테즈의 NWA 월드 헤비급 챔피언십에 도전할 때도 일본 프로레슬링이 NWA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카라시크의 인맥을 통해 테즈를 초청하고 타이틀 매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역도산은 1953년 하와이 수련 중 루 테즈에게 도전했으나 백드롭에 패배한 적이 있다.
3.2. 스타덤에 오르고 국민 영웅이 되다

역도산은 이듬해 귀국하여 닛타 신사쿠와 흥행사 나가타 사다오의 도움을 받아 일본 프로레슬링을 설립했다. 일본 프로레슬링은 샤프 형제를 초청하여 1954년 2월 19일부터 14연전의 첫 흥행을 시작했다. 이는 1953년부터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것과 맞물려 전국적인 대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이 흥행에서 샤프 형제와 팀을 이룬 역도산의 파트너는 전전(戰前) 및 전중(戰中) 일본 유도 역사상 최강으로 불리던 기무라 마사히코였다. 그러나 기무라는 상대방의 기술을 받아주는 등 프로레슬링 특유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고, 샤프 형제와의 경기에서 항상 패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역도산이 가라테 촙으로 기무라를 구하고 상대 레슬러를 쓰러뜨리는 일련의 전개에 기무라는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역도산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후에 기무라는 역도산과 결별하고 자신의 단체로 흥행을 시도했으나, 관객 동원은 저조했고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기무라는 아사히 신문 기자에게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은 제스처가 많은 쇼다. 진검승부라면 지지 않는다"고 도전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쇼와 간류지마'라고 불리는 의문의 경기로 이어졌다. 1954년 12월 22일, 역도산은 도전을 수락하고 '스모가 이길 것인가 유도가 이길 것인가'라는 논란 속에 프로레슬링 일본 헤비급 챔피언십 결정전이 열렸다. 이 경기는 역도산 측에 유리하게 레퍼리 '해럴드 도키'의 선정, 기무라 측에게는 아테미 금지라는 규칙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무라 측의 증언에 따르면, 이 경기는 원래 승패가 정해진 프로레슬링 경기였으며, 도쿄를 시작으로 대규모 경기장에서 두 선수가 승패를 번갈아 가며 전국 순회 경기를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첫 경기에서 기무라의 급소 차기에 격분한 역도산이 갑자기 달려들어 하리테와 집요한 발차기를 난타하며 당황한 기무라 마사히코를 그대로 KO시켰다. 쓰러진 기무라는 많은 피를 토했고, 매트에는 거대한 핏자국이 생겼다. 이처럼 일반적인 프로레슬링과는 다른 결말에 관객들도 놀라 경기장은 정적에 휩싸였다고 한다. 역도산이 격분했다고 알려진 급소 차기에 대해 일부 스포츠 신문에서는 역도산이 기무라의 몸통에 오른발로 날아 차기를 했다는 보도도 있어, 선명한 영상이 없는 당시 기록으로는 사건의 상세는 불분명하다. 훗날 역도산은 기무라가 경기 전에 건넸다고 하는 '1차전은 무승부'라고 적힌 각서를 언론에 공개하며, 이 경기가 이른바 팔백장이 무너진 경기였다고 증언했다. 역도산과 기무라는 훗날 중개인을 통해 화해했지만, 21세기가 된 오늘날까지도 당시 경기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고, 다양한 추측과 의견이 제기되며 이 경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나 에세이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논픽션을 표방하는 마스다 도시아의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역도산을 죽이지 않았는가』가 주로 기무라의 시점에서 면밀한 취재를 진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역도산의 획기적인 활약은 1954년 파트너이자 유명한 유도 선수 마사히코 기무라와 함께 캐나다의 샤프 형제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빛을 발했으며, 이는 일본 내 텔레비전 시청률 증가와 맞물렸다. 그는 외국인 레슬러들을 물리치며 일본 최고의 레슬링 스타로 자리매김했고, 이 과정에서 주요 텔레비전 스타가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인들이 미국에 맞설 영웅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역도산은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미국인 상대들은 경기에서 악역을 연기하며 그를 도왔다. 역도산 자신도 초기에 미국에서 경기를 할 때는 악역으로 등장했지만, 전후 미국에서 선역으로서 응원을 받은 최초의 일본인 레슬러 중 한 명이 되었다.
3.3. 주요 경기와 챔피언십
역도산은 1955년 킹콩을 꺾고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같은 해 요코즈나 아즈마후지가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했다. 이 시기에는 후원자였던 닛타의 일본 프로레슬링 장악 시도 등 역도산에게 몇 가지 위기가 있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1차 프로레슬링 붐이 사그라든 것이었다. 1957년경에는 관객 동원이 저조했고, 지방 순회 경기에서는 미지급금 문제도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8년 8월 2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루 테즈를 꺾고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이로써 침체되었던 프로레슬링 붐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제1회 월드 빅 리그를 개최하여 우승했으며, 이후 1963년까지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역도산은 일본과 해외 경기에서 여러 NWA 타이틀을 획득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루 테즈와의 1958년 경기에서 테즈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역도산을 푸트 오버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고, 이는 두 레슬러 간의 상호 존중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역도산은 이 일을 잊지 않았다. 주요 대결로는 기무라 마사히코 외에도 1957~1958년 루 테즈, 1962년 프레디 블레시, 1963년 딕 더 디스트로이어와의 경기가 있었다. 1962년에는 프레드 블레시의 NAWA 세계 챔피언십에 도전하여 타이틀을 획득한 것으로 보였으나, 클레임이 제기되어 보류되었다. 이후 초대 WWA 월드 헤비급 챔피언으로 '추인'되었다 (WWA는 NWA에서 분리된 단체이다). 역도산은 테즈나 팻 오코너, 빌 밀러와 같은 강자 타입 레슬러뿐만 아니라 블레시나 제스 오르테가와 같은 악역 또는 괴물 타입 레슬러와도 명승부를 펼쳤는데, 후자와 더 잘 맞는 편이었다.
레슬링 저널리스트 존 M. 몰리나로의 2002년 저서 『Top 100 Pro Wrestlers of All Time』에 따르면, 그의 두 경기가 일본 역사상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청률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7년 10월 6일 루 테즈와의 1시간 NWA 월드 헤비급 챔피언십 무승부 경기는 시청률 87.0%를 기록했고, 1963년 5월 24일 딕 더 디스트로이어와의 1시간 투 아웃 오브 스리 폴스 매치 무승부 경기는 67.0%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당시 더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전 경기보다 더 많은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일본 역사상 최다 시청자).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1963년 12월 7일 하마마쓰에서 열린 역도산 & 그레이트 토고 & 요시무라 미치아키 대 디스트로이어 & 버디 오스틴, 이리오 데 파울로 경기가 그의 생전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3.4. 제자 훈련
역도산은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김일(킨타로 오키) 등 유명 레슬러들을 훈련시켰다. 이들 중 바바, 이노키, 김일에 맘모스 스즈키를 더해 일본 프로레슬링의 젊은 '사천왕'으로 불렸다. 역도산은 프로 야구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고 신체적으로도 뛰어났던 바바를 즉시 전력감 스타 후보로 데뷔 초부터 우대했다. 반면 이노키에 대한 대우는 '구둣주걱으로 얼굴을 때리거나', '키우던 개를 번견으로 훈련시키는 실험 대상으로 삼거나', '어린 이노키에게 한 되들이 일본 술을 단번에 마시게 하거나', '이유 없이 골프채를 휘둘러 관자놀이를 때리거나', '재떨이를 던지는' 등 매우 가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노키 본인도 일부 증언했으며, 옛 스포츠 신문 기자들도 이를 보도했다. 이노키는 최근까지도 당시에는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역도산이 제자들 중에서 가장 진심으로 아꼈던 것은 바바도 이노키도 아닌, 같은 한국인 출신의 김일이었다. 또한 프로레슬러로서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맘모스 스즈키였다. 아끼던 바바에게도 훈련 중 나약한 발언을 하면 참을 것을 강요하는 등, '혹독함'이 상당했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의 난폭한 일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제자 교육에는 합리적인 면모도 있었다. 첫 번째 미국 무사수행에서 성공을 거둔 바바가 미국 측으로부터 재촉을 받자, "너만 바로 미국으로 보내면 주변에서 질투할 것이다"라며 시간을 두고 출발시켰다는 바바 본인의 증언이 있다. 아직 수행원이었던 이노키에게는 "체중이 100 kg을 넘으면 무사수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결국 역도산 생전에는 이노키의 미국 수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다나카 게이코는 "이노키 씨는 바로 남편에게 불려가는 타입이었다. 제자라기보다는 자기 아들처럼 귀여워했다"고 말했으며, "남편이 집에 불렀던 젊은 선수는 이노키 씨뿐이었다", "방에 이노키 씨를 불러 어깨를 주무르게 하면서, 그 때 프로레슬링 외의 사업이나 업무 회의를 하거나 서류를 읽었고, 인터뷰도 이노키 씨가 있는 앞에서 여러 번 받았다"고 증언하며 이노키에게만 일부러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음을 밝혔다. 이노키가 부당하게 맞았던 점에 대해서도 "자기 아들 교육도 스파르타식이었다", "(이노키도) 아들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지도가 엄격해진 측면도 있을 것"이라며 일종의 애정의 반대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노키는 "선생님(역도산)에게는 여러 생각이 있었고, 자신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지만 사업 수완은 뛰어났다"며 사업가로서의 역도산을 완전히 인정했다.
역도산은 훈련에 있어서 벤치프레스와 복근 운동, 그리고 다리 운동(현대의 힌두 스쿼트) 세 가지를 기본으로 여겼다. 또한 제자들이 특정 부위의 근육을 키우고 싶다고 하면 일정 기간 동안 해당 부위만 집중적으로 단련하도록 지시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보디빌딩 연습생으로 훈련을 시작한 신마 히사시는 가슴과 팔 근육을 키우고 싶어 했고, 역도산으로부터 "3개월 동안 벤치프레스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결과 처음에는 40 kg도 들지 못했던 무게를 55 kg까지 들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벤치프레스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한편 몸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로 스모 훈련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 자상 사건 당일에는 이노키를 당시 다카사고 방에 일시적으로 입문시킬 이야기까지 진행되었으나, 역도산의 사망으로 그 이야기는 무산되었다.
3.5. 시그니처 무브
역도산은 스모와 프로레슬링 기술을 혼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으며, 특히 '가라테 촙'은 그의 상징적인 기술이 되었다.
- 가라테 촙 (가라테 우치): 역도산이 사용하는 촙 기술의 총칭으로, 그의 절대적인 피니시 홀드이자 상징적인 기술이다. 상대의 경동맥이나 쇄골 부위를 노려 날리는 '가사베기 촙'과 수평 궤도로 팔을 옆으로 휘둘러 상대의 가슴을 때리는 '수평 촙', '역수평 촙'을 번갈아 사용했다. 초기에는 주로 수평 타격을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가사베기 촙을 주력 기술로 삼았다. 이 기술은 실제 가라테보다는 스모의 하리테를 기반으로 했으며, 한국 출신 가라테 선수 나카무라 히데오와의 친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최영의에게 지도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 헤드 시저스 휩: 점프하여 양 발로 상대의 머리를 잡고 몸을 회전시켜 그 기세로 상대를 던지거나 그대로 헤드 시저스로 연결한다. 역도산은 뭉툭한 체형에도 불구하고 몸이 민첩하고 도약력이 뛰어나 이러한 기술도 능숙하게 구사했다.
- 하리테: 스모 시절부터의 주특기로, 프로레슬링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경기에서 하리테를 난타하여 전의를 상실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 백드롭: 루 테즈의 절대적인 피니시 홀드였으며, 역도산은 직접 이 기술을 당하고 테즈로부터 전수받아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다. 선수 경력 후기에는 가라테 촙과 함께 피니시 홀드로 사용되었다.
- 역 에비 굳히기: 젊은 선수나 하급 레슬러와의 경기에서 피니시 기술로 자주 사용되었다.
- 스키나게: 스모 기술로, 프로레슬링에서도 연결 기술로 자주 사용되었다.
- 헤드락: 스모 시절 단련된 완력(팔뚝 힘)을 활용한 헤드락의 위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 보디 슬램
- 보디 프레스
4. 사업 활동
역도산은 레슬링 외에도 다양한 사업 활동에 참여하며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사업은 부동산, 엔터테인먼트, 레저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4.1. 부동산 및 엔터테인먼트 사업
프로레슬링에서의 성공과 함께 역도산은 기업가로서 부업을 시작하여 나이트클럽, 호텔, 콘도미니엄 및 복싱 프로모션과 같은 부동산을 인수했다. 역도산의 호화로운 아파트인 '리키 맨션'은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위치하며 건물 측면에 크게 인쇄된 'R'자 로고로 알아볼 수 있다. 1973년에 사망한 배우 오쓰지 시로도 말년에 이 리키 맨션에 거주했다. 역도산은 또한 시부야에 9층짜리 '리키 스포츠 팰리스'를 소유했는데, 여기에는 볼링장, 당구장, '클럽 리키'라는 바, 그리고 '리키 레스토랑'이라는 레스토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복싱 체육관 경영에도 진출했다.
4.2. 기타 사업 계획
사망 직전, 역도산은 가나가와현 사가미호 인근에 토지를 매입하여 '레이크사이드 컨트리 클럽'이라는 대규모 골프장 건설을 시작했다. 이 골프장은 사격장, 실내 스케이트 링크, 모텔 등 레저 시설을 포함할 예정이었다.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고 회원권을 판매하며 일부 공사도 착수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 부지는 매각되어 현재 사가미호 MORI MORI (옛 사가미호 피크닉 랜드 → 사가미호 리조트 플레저 포레스트)가 되었다. 또한 미우라반도 아부라쓰보에도 토지를 매입하여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해양 리조트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제자들의 세컨드 커리어를 고려하여 재취업처를 마련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역도산의 사업은 그의 독선적인 경영 방식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관련 기업들의 경영은 큰 혼란에 빠졌다. 리키 팰리스 내에 있던 복싱 체육관은 역도산 사후 자연 소멸되었고, 볼링장은 '볼링 붐'의 도래로 경쟁 볼링장이 잇따라 개업하면서 낙후된 시설로 인해 변화에 뒤처졌다. 리키 레스토랑 또한 역도산 사망으로 고급 레스토랑으로서의 부가가치를 잃게 되어, 리키 팰리스 자체가 손님이 줄어들어 경영 부진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리키 팰리스는 대출 기관인 니시야마 흥업에 담보로 잡힌 끝에 1967년 긴키 관광에 5.00 억 JPY에 매각되었다. 리키 팰리스 매각 문제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리키 팰리스 인수 주장을 둘러싸고 요시하라 이사오와 엔도 고키치 등 일본 프로레슬링 경영진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엔도 등이 "요시하라는 자금을 모아 일본 프로레슬링 자체를 장악하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려 요시하라의 행보를 방해했다. 이에 격분한 요시하라는 단신으로 일본 프로레슬링을 퇴사하고 국제 프로레슬링의 창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5. 사생활과 인격
역도산의 사생활은 그의 대중적인 영웅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거친 성격과 복잡한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그의 한국인 혈통과 관련된 가족 관계 역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5.1. 결혼과 가족
역도산은 생애 동안 다나카 게이코를 포함해 네 명의 여성과 결혼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첫 번째 부인, 교토의 게이샤(백타 형제의 어머니)가 두 번째, 니혼바시의 게이샤(백타 형제의 양육자), 그리고 다나카 게이코(전 일본항공 객실 승무원으로, 역도산 사망 후 백타 성을 버렸다) 순이었다. 역도산은 마지막 아내인 다나카 게이코에게는 매우 반했던 것 같으며, 당시 수많은 여성 관계를 모두 정리한 후에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게이코는 역도산 사망 후 '일본 프로레슬링 흥업 주식회사'(통칭: 아카사카 니치프로)의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도요노보리, 요시노사토, 엔도 고키치, 요시무라 미치아키 네 명이 '일본 프로레슬링 흥업 주식회사'(통칭: 시부야 니치프로)라는 동명의 별도 회사를 설립하여 흥행 부문을 분리했기 때문에, 게이코의 '아카사카 니치프로'는 역도산 시절의 부채를 청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역도산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와 차남 모모타 미쓰오는 게이샤 아야의 아들이었으며, 둘 다 프로레슬러가 되었고(요시히로는 링 아나운서에서 전향),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임원이 되는 등 후대 프로레슬링계의 거목이 되었다. 두 아들은 아버지 사망 후 그가 한국인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모모타 미쓰오의 아들(역도산의 손자) 모모타 치카라도 프로레슬러가 되었다.
역도산의 출신에 대해, 스모 선수 시절에는 순위표에 '조선 출신'이라고 명기된 시기와 양자로 입양된 모모타 가문의 출신지인 나가사키현의 옛 지명인 '히젠 출신'이라고 기재된 시기가 있는 등, 때에 따라 취급이 달랐다. 스모 은퇴 후에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주위에 숨기고 살았으며, 역도산 주연 영화 '역도산 이야기'에서도 '나가사키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설정이 창작되었지만, 다나카 게이코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84년 주간 플레이보이는 당시 금기시되던 역도산의 민족 출신 문제를 '또 다른 역도산 이야기'로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역도산은 15세에 일본에 왔을 때 이미 결혼하여 아이가 있었다. 이후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역도산의 손녀 박혜정이 북한 역도 감독으로 참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잡지 『스모』 1940년 7월호에는 '본명 김신제 출신지 조선'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며, 스모계에서는 그의 출신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처음부터 민족 차별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롭힘이나 혹독한 훈련을 피하기 위해 새벽 1시에 선배들이 없는 훈련장에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결혼한 박신봉과의 사이에 낳은 딸 박영숙의 남편인 박명철은 2010년에 북한의 체육상이 되었다. 또한 역도산 사망 직후 다나카 게이코가 딸을 출산했는데, 그 딸의 아들이 게이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고교 야구에서 활약한 다무라 게이이다.
5.2. 성격과 논란
역도산은 거칠고 감정 기복이 심한 인물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바 보이에게 1.00 만 JPY (당시 대졸 공무원 한 달 월급에 해당)를 팁으로 줄 때도 있었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음식점에서의 폭력 사태가 다반사였으며, 그 때마다 돈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1957년 10월 18일 『요미우리 신문』 조간과 같은 해 12월 5일 『아사히 신문』 석간에는 "역도산 또 폭력"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장훈은 역도산이 술에 취하면 난폭해져서 큰 손으로 나무나 유리 테이블을 부수고, 얇은 유리컵을 맛있다고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난폭한 행위는 그의 타고난 격정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년에는 육체적 쇠약을 감추기 위해 경기 전에 흥분제를 복용했고, 경기 후 곧장 술집으로 가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링 위에서 치고받는 상대와 몇 시간 뒤 술자리에서 친하게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프로레슬링이 팔백장이 아니냐는 의심을 더욱 증폭시키기도 했다.
한큐 브레이브스 소속이었던 로베르토 발본은 텔레비전으로 역도산의 경기를 보고 팀 동료에게 "이런 훌륭한 경기를 일본에서는 팔백장이라고 한다"는 거짓 정보를 들었고, 발본은 기자들 앞에서 "리키, 팔백장"이라고 말했다. 훗날 이 소식을 들은 역도산 본인이 찾아와 호통을 치자 발본은 사과했고, 사정을 들은 역도산은 발본과 화해했다.
가네다 마사이치와는 친구 관계였다. 프로 야구 선수 모리 도오루와는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모리의 어머니가 전쟁 중 만주에서 요정을 운영했는데, 역도산이 스모 선수 시절 위문단으로 만주 순회 공연을 왔을 때 만나 친분을 쌓았다. 전후 모리의 어머니와 재회하여 교류를 이어갔고, 옛 은혜를 느꼈던 역도산은 모리를 친동생처럼 아꼈다고 한다. 후에 역도산의 아내가 될 다나카 게이코를 소개해준 사람도 모리의 어머니였다고 알려져 있다. 역도산이 입원했을 때도 거의 매일 병문안을 왔다. 역도산이 사망한 당일, 모리 도오루는 이즈의 이토에 사냥을 왔다가 어머니에게 역도산의 위독 소식을 듣고 자가용을 몰아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도중에 라디오에서 부고를 듣고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역도산은 술에 취해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이 신문과 주간지에 자주 보도되었지만, 안도 노보루의 자서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주당이 아니었으며, 신문과 주간지에 실린 그러한 기사들은 "역도산은 술에 강하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오노 반보쿠(자유민주당 부총재이자 일본 프로레슬링 커미셔너, 역도산의 상담역이기도 했다)로부터 금주를 명령받았지만, 자상 사건 당일에는 다카사고 친방(前山)이 로스앤젤레스 순회 공연 협조를 요청하며 아침부터 역도산의 집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던 날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 특별히 술을 마셨다.
교양 수준이 높았다고 평가된다. 이노우에 히사시는 『사사판 일본어 문법』에서 1952년 그가 쓴 자필 엽서를 예로 들며, 한자 사용이 풍부하고 정확하며 문법도 정확하고, 구두점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문맥이 매우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역도산의 장례식이 열린 이케가미 혼몬지는 일본 프로레슬링을 지탱했던 고다마 요시오와 다이에이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가 총대였고, 오노 반보쿠도 단가였던 인연으로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5.3. 취미와 관심사
역도산의 취미는 수렵 등이었으며, 한때 쇼기에 관심을 보여 프로 기사 쓰루모치 쇼지 등과 친분을 맺었다. 쓰루모치로부터 아마추어 3단 면허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거의 두지 않았다"고 하여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
5.4. 금전 관련
차남 모모타 미쓰오에 따르면, "돌아가셨을 때 부동산 자산이 많았지만, 한편으로 막대한 채무도 있었다"고 한다. 역도산 사후의 상속세에 대해 모모타 미쓰오는 " (당시 화폐 가치로) 20.00 억 JPY가 넘는 세금이었다"고 말하며, 역도산의 개인 유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고 밝혔다.
대학 초임 봉급이 1.50 만 JPY이던 1950년대 중반, 당시 역도산의 재정은 파탄 상태였으며, 4.50 억 JPY의 빚을 지고 있었다. 역도산의 세 번째 아내는 기자에게 "역도산은 여기저기 외상이 많아서 집에 하루에 1000 JPY밖에 안 가져왔다"고 폭로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역도산이 항상 돈에 쪼들렸던 것은 초엔저 시대였던 당시 미국에서 일류 외국인 선수들을 잇따라 초청했기 때문이었으며, 당시 경기장이 만원이어도 수익은 적었다. 또한 허세를 부려 고급 외제차나 기부에 아낌없이 돈을 썼고, 간사이나 규슈 지역 야쿠자로부터 흥행 수입을 삥땅당한 것도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또한 자이언트 바바와의 사이에도 바바가 미국에서 벌어들인 파이트 머니를 둘러싼 금전적 문제가 있었고, 역도산은 바바가 활약할수록 그의 재능을 질투하여 언론을 통해 바바를 비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바바는 훗날 역도산을 "인간으로서 조금도 좋은 점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질려버렸던 속내를 드러냈다.
사업에 너무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말년에는 지갑에 1.00 만 JPY짜리 지폐가 한 장밖에 없는 날도 있었고, 지갑을 본 기자는 놀랐다고 한다.
6. 사망


역도산의 죽음은 나이트클럽에서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시작되어 의료적 합병증으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과 원인을 둘러싼 여러 의혹과 논란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추모객과 함께 성대하게 치러졌다.
6.1. 자상 사건
1963년 12월 8일 오후 10시 30분, 역도산은 아카사카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서 술을 마시던 중 스미요시 일가 소속 야쿠자 조직원 무라타 가쓰시와 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었다. 역도산은 무라타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무라타가 이를 거부하면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무라타가 "당신 같은 덩치 큰 남자가 그런 곳에 서 있으면 부딪히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역도산은 칼을 꺼낼 것이라고 생각하여 "알았어.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무라타는 "이런 일을 당했으니 내 입장이 없어진다"며 화해를 거부했다. 화해를 포기한 역도산은 주먹으로 무라타의 턱을 때려 벽에 부딪히게 했고, 무라타는 턱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역도산은 다시 무라타 위에 올라타 격렬하게 구타했고, 무라타는 "죽임을 당하겠다"고 생각하여 나이프를 뽑아 왼쪽 아랫배를 찔렀다. 칼날은 뿌리까지 박혔지만, 피는 옷 위로 스며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직후 두 사람 모두 현장을 떠났고, 역도산은 산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의사는 상처가 심각하지 않다고 진단했으나 수술을 권유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역도산은 의사의 지시를 어기고 당일 바로 식사와 음주를 시작하며 비서에게 초밥과 사케를 사오라고 시켰다. 과도한 음주로 인해 역도산의 상태는 악화되었고, 일주일 후 두 번째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복막염이 발생하여 1963년 12월 15일 오후 9시 50분경 사망했다. 향년 39세였다.
6.2. 의료 합병증과 사망
역도산은 자상 당일(12월 8일) 아카사카의 산노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귀가했다. 이후 무라타가 속한 조직의 보스인 고바야시 구스오가 리키 아파트 내 역도산 자택을 찾아 사과했고, 역도산도 "응, 알았어"라고 힘겹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증상이 악화되어 다음 날(12월 9일) 새벽 산노 병원 501호실에 입원했다. 성 루카 국제 병원에서 외과 과장을 초빙하여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소장이 4군데 절단된 것으로 확인되어 같은 날 새벽 수십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이때 전치 2주 진단을 받았다. 산노 병원은 산부인과 중심의 병원이었지만, 역도산이 이곳을 택한 것은 산노 병원 원장이 다니마치(후원자)였기 때문이었으며, 이 폭력 사태의 전말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측근들은 같은 아카사카에 있는 유명 외과 병원인 마에다 외과 입원을 권했지만, 역도산은 꺼렸다고 한다.
사망에 이른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가지와라 잇키 원작의 '프로레슬링 슈퍼스타 열전(안토니오 이노키 담화)'에 따르면, 역도산의 복막염은 거의 완치 단계까지 회복되었지만, 복막염을 앓는 기간 동안에는 식사는 물론 물 섭취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식욕이 매우 왕성했던 역도산은 공복감을 참지 못하고, 심부름꾼에게 단골 초밥집에 초밥을 주문하고 술도 사오라고 지시했다. 초밥과 술을 마시고 공복감을 해소했지만, 날것인 초밥과 알코올이 완전히 아물지 않은 환부에 영향을 미쳐 병세가 급변하여 급사했다는 것이다. 역도산이 첫 수술 후 사이다나 콜라 등을 마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많아 위와 같은 일이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내 다나카 게이코는 "자신과 간호원이 밤낮으로 교대로 간호했으므로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부정했다. 반면 수하인이었던 다나카 요네타로는 입원 중인 역도산이 위스키를 사 오라고 시킨 적이 있다고 훗날 이야기했으며, 부인이나 간호원의 눈을 피해 알코올을 섭취하거나 음식을 먹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역도산은 평소에도 다른 사람보다 상처가 빨리 낫는 체질이었고, 칼에 찔린 직후에도 병원에 가지 않고 응급처치만으로 해결하려 하는 등 자신의 몸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나카 게이코에 따르면, 역도산은 퇴원 후에는 설날에 이즈의 가와나 호텔에서 요양할 계획이었고, 병실에서 호텔 예약을 지시했다고 한다.
수술 후 경과는 순조로웠으나, 자상 후 7일째인 12월 15일, 복막염으로 인한 장폐색증이 발생하여 오후 2시 30분에 재수술을 시행했다. 역도산은 수술실로 향하는 들것에 실려 가면서 아내 게이코에게 "돈이 얼마나 들든 좋다. 어떤 약을 쓰든 좋다. 최고의 치료를 부탁한다고 선생님께 전해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수술도 성공했다고 보고되었으며, 게이코는 의사의 권유로 일단 귀가했으나, 역도산은 그 후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오후 9시경 의사의 연락을 받고 게이코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고 한다. 수술 약 6시간 후인 오후 9시 50분경, 역도산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 게이코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또한, 임종 직전 역도산이 "세 손가락을 내밀었다"는 속설이 당시부터 전해져 왔지만, 요시무라 요시오나 미츠 히라이 등 후대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허구임이 밝혀졌다.
역도산의 시신은 다음 날인 16일 오후 게이오 대학병원 법의학 교실로 옮겨져 부검이 이루어졌다. 게이오 병원에는 심부름꾼 다나카와 야마모토 코테쓰가 동행하여 시신을 지켰다. 공식적인 사인은 천공성 복막염으로 알려져 있다. 집도의에 따르면 "(첫 수술 시) 복강 내로 200~300 ml의 혈액이 흘러들어갔고, 장 내용물이 넘쳤으며, 녹슨 나이프로 찔릴 때 들어간 세균을 완전히 살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역도산 사망 당시 발표했다. 부검 종료 후 같은 날 저녁 시신이 자택으로 돌아와 관계자들의 밤샘 조문이 이루어졌으며, 다음 날인 18일 기리가야 다비장에서 다비되었다. 장례식은 같은 달 20일 이케가미 혼몬지에서 열렸으며, 고다마 요시오, 쇼리키 마쓰타로, 반 준자부로, 미소라 히바리 등 각계 유명 인사들을 포함하여 1만 명 이상이 참석했다.
사인에 대해서는 이견도 존재한다. 수술 시 마취를 담당한 외과의가 근육이완제를 주사한 후 기관튜브의 기관 삽관에 실패하여 질식했다는 의료 과오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2019년 의료 과오설을 부정하는 보고가 나왔다. 기관 삽관 실패설은 역도산 사망 30년 후 출간된 서적에 "현장에 있던 의대생의 전언"으로 기술되었지만, 당시에는 일반 병원에서 의대생이 마취에 관여할 가능성이 없었고, 수술과 마취 모두 숙련된 의사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또한 사망 당시 증언이나 기록에도 기관 삽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의료 과오 가능성은 낮으며, 사인은 최초 발표대로 천공성 화농성 복막염으로 인한 패혈증 쇼크가 타당하다고 본다. 또한 심부름꾼이었던 미츠 히라이에 따르면, 칼에 찔리기 직전 골프장에서 플레이하던 역도산이 가슴을 움켜쥐고 웅크리는 모습을 목격했으며, 역도산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입단속을 받았다고 훗날 회상했다. 앞서 진행된 부검에서도 내장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6.3. 장례식과 그 이후

역도산의 장례식은 1963년 12월 20일 오타구 이케가미 혼몬지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역도산의 제자들인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김일 외에도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상대들이 참석했다.
무라타 가쓰시는 1964년 10월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8년을 복역한 후 1972년에 석방되었다. 무라타는 석방 후 매년 12월 15일 역도산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그는 또한 역도산의 아들들에게 매년 전화로 사과했다. 석방 후 무라타는 야쿠자 조직에서 고위 간부가 되었다. 무라타는 2013년 4월 9일 도쿄에서 자연사했다.
7. 유산과 평가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이자 전후 일본 사회의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후대에까지 이어지며 다양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과 성격, 그리고 야쿠자 조직과의 연루 의혹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7.1. 일본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
역도산은 전후 일본 사회의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국민적 사기를 진작시키고 텔레비전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프로레슬링 경기는 패전 후 일본인들에게 깊은 상실감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백인 레슬러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그의 모습은 일본인들의 일종의 애국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총리대신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텔레비전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9년 5월 24일 당시 총리 기시 노부스케가 기후역에 도착했을 때, 유세 중이던 기시 총리를 뒤로하고 역에 내리는 역도산을 보러 수많은 청중들이 모두 그쪽으로 몰려갔다는 일화가 전해져 역도산의 압도적인 인기를 엿볼 수 있다. 국민적인 인지도와 정계와의 연결 고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도산이 정계 진출을 희망했다는 것을 명확히 들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의 배후에 있던 도세이카이는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흥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역도산이 사망한 날 공교롭게도 스즈스케 바후 4대 째가 사망했지만, 스포츠 신문 1면이 역도산의 죽음으로 뒤덮이면서 스즈스케 바후의 죽음은 작은 기사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마쿠라(만담 도입부 소재)로 삼은 라쿠고카는 없었다고 한다.
프로레슬링 활동 당시에는 '일본에서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7.2. 프로레슬링에 대한 기여
역도산은 품행 면에서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프로레슬러로서는 비할 데 없는 스타성과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었으며,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초석을 다진 최대 공로자임은 분명하다. 그의 생전에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상대 레슬러를 가라테 촙으로 때릴 때 "이 조선인 녀석"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점도 백인 레슬러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그의 모습이 패전 후 일본인의 일종의 애국적인 감정을 자극했던 요인 중 하나였다.
7.3. 수상 및 영예
역도산은 사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명예의 전당 (1996년)에 헌액된 최초의 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2006년에는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에, 2017년에는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부문'에 헌액되었다. 2024년, 메이플 리프 프로 레슬링은 역도산과 도요노보리의 1962년 도요나카 트로피를 레슬링 보복 프로젝트 트로피(2011년 케니 오메가가 할리우드에서 획득)와 통합한 PWA 챔피언스 그레일(PWA Champion's Grail)을 설립했다. 2002년, 존 몰리나로의 잡지 기사 '역대 100대 레슬러'에서 릭 플레어와 라이벌 루 테즈에 이어 역대 3번째로 위대한 프로레슬러로 선정되기도 했다.
7.4. 비판과 논란
역도산은 스모 선수 시절이던 1949년, 250.00 만 JPY의 보험에 가입했던 원양 가다랑어 어선 '역도산마루' (40 t)가 화재로 인해 침몰하면서 보험 사기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1950년 6월, 역도산은 고치현 고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보험 계약은 다른 선주에게 이용된 것이라고 변명했다. 체포 영장까지 발부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선박을 매각한 상대방의 자작극으로 밝혀져 무혐의로 인정되었다. 체포 영장 소동 후 역도산은 GHQ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아로하 셔츠를 입고 오토바이로 훈련장에 나타나는 등 미국 문화를 과시하는 행동을 하여 스모계 관계자들의 눈총을 받았다. 보험 사기 혐의가 벗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으며, 결국 체포 영장 소동으로 인한 주변의 편견도 스모 은퇴를 결정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후에도 그의 거친 성격 때문에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야마구치구미와 마찰을 빚어 감금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안도구미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미행당하며 집에 돌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필리핀 마피아의 보스를 다리에서 강물에 던져 넣어 문제가 되는 등, 당시 프로레슬링 흥행이 폭력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려심 없는 행동을 반복하여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상대가 폭력단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 중에는 역도산이 좀 더 사려 깊게 행동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것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자이언트 바바와의 사이에도 바바가 미국에서 벌어들인 파이트 머니를 둘러싼 금전적 문제가 있었고, 역도산은 바바가 활약할수록 그의 재능을 질투하여 언론을 통해 바바를 비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바바는 훗날 역도산을 "인간으로서 조금도 좋은 점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질려버렸던 속내를 드러냈다. 그의 상징인 검은 타이즈는 니쇼노세키 방 소속 시절 제자였던 와카노하나 간지가 역도산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역도산의 허벅지를 물어뜯었을 때 생긴 옛 상처를 가리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다. 와카노하나도 훗날 역도산의 도움과 가르침이 몸에 배었다고 회상했다.
1955년 프로레슬링 흥행으로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를 방문했을 때, 나노카마치의 정육점에서 생 말고기를 주문하여 직접 가져온 고추장 된장을 찍어 그 자리에서 먹었다. 후쿠시마현 아이즈 지방에서는 생 말고기를 먹는 습관이 없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마사시를 고추장 된장에 찍어 먹는 풍습이 확산되었다.
8. 가족
- 역도산의 아들들인 모모타 요시히로와 모모타 미쓰오는 둘 다 프로레슬러로 활동했으며, 모모타 미쓰오는 2021년 73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그는 1989년 월드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을 획득했으나, 아버지와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모모타 미쓰오의 아들 모모타 치카라는 2013년 12월 16일 할아버지 사망 50주년 기념일에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 역도산의 또 다른 아들 모모타 요시히로도 프로레슬러였다.
- 역도산의 딸인 박영숙(박영숙한국어)과 결혼한 사위 박명철(박명철한국어)은 2009년 초부터 북한 국방위원회 참사가 되었으며, 박명철의 여동생 박명선은 조선로동당 경공업부 부부장을 맡고 있다.
- 역도산의 아내 다나카 게이코와의 딸이 낳은 아들인 다무라 게이(田村圭다무라 게이일본어)는 게이오 고등학교에서 고교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9. 대중문화
인기 절정기의 역도산은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56년에 개봉한 『화내라! 역도산』(怒れ! 力道山오코레! 리키도잔일본어)에서는 국회의원의 지시를 받은 총과 일본도로 무장한 야쿠자와 카바레에서 격투를 벌이다 부상을 입는 장면이 역도산의 죽음과 흡사하여 화제가 되었다.
9.1. 영화
- 『장미와 권총』(1953, 신생 프로) 감독: 시무라 도시오, 주연: 쓰루타 고지 ※영화 데뷔작
- 『역도산 대노』(1954, 이세 프로)
- 『역도산의 역습』(1954, 이세 프로)
- 『역도산의 철완 거인』(1954, 신토호) 감독: 나미키 교타로, 공동 주연: 마쓰시마 도모코
- 『달님에게 미안하지만』(1954, 닛카츠)
- 『역도산에게 도전하는 기무라』(1954, 이세 프로)
- 『대학은 나왔지만』(1955, 쇼치쿠 오오후나) 감독: 노무라 요시타로
- 『역도산 대 야마구치 6단 때리고 차고 던진다!』(1955, 이세 프로)
- 『역도산 승리의 기록』(1955, 이세 프로)
- 『이윽고 푸른 하늘』(1955, 도쿄 영화)
- 『역도산 대 킹콩』(1955, 이세 프로)
- 『속 역도산 대 킹콩』(1955, 이세 프로)
- 『역도산 대 킹콩 결승전』(1955, 이세 프로)
- 『역도산 이야기 노도의 남자』(1955, 닛카츠) 감독: 모리나가 겐지로, 공동 주연: 가와즈 세이자부로, 미소라 히바리
- 『역도산, 아즈마후지 대난투』(1955, 이세 프로)
- 『속 역도산, 아즈마후지 대난투』(1955, 이세 프로)
- 『역도산, 오르테가 최후의 결전』(1955, 이세 프로)
- 『역도산의 세계 정복』(1956, 닛카츠)
- 『역도산 가라테 촙의 폭풍 도쿄 대회』(1956, 닛카츠)
- 『다시 휘몰아치는 가라테 선풍 오사카 대회』(1956, 닛카츠)
- 『역도산, 샤프 최후의 결전』(1956, 닛카츠)
- 『역도산, 철완의 승리』(1956, 닛카츠)
- 『프로레슬링 세계 선수권 도전 자격 결정전 역도산, 탐라이스 "61분 3본 승부"』(1956, 닛카츠)
- 『역도산 남자의 혼』(1956, 협동 프로) 감독: 우치카와 세이치로, 공동 주연: 미야기 마리코, 모리시게 히사야
- 『리키, 탐라이스 최후의 격투』(1956, 닛카츠)
- 『화내라! 역도산』(1956, 도에이 도쿄) 감독: 오자와 시게히로, 공동 주연: 하야카와 셋슈, 스기 쿄지, 마스다 키톤
- 『순정 부대』(1957, 도에이 도쿄) 감독: 마키노 마사히로, 공동 주연: 호시 미치코, 아즈마 지요노스케
- 『박치기와 가라테 촙』(1957, 다이에이)
- 『루 테즈 대 역도산 세계 선수권 쟁탈전』(1957, 사가미 영화)
- 『프로레슬링 월드 빅 리그전 세기의 혈투』(1959,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
- 『격투』(1959, 쇼치쿠 오오후나) 감독: 이와키 소미오, 공동 주연: 미나미하라 신지, 미카미 신이치로 ※생전 마지막 작품
9.2. 텔레비전 드라마
- 『역도산의 꿈』(1955년 10월 16일, 니혼TV) 각본: 아오에 슌지로, 공동 주연: 이토 아키토시, 이토 기누코 ※단편 드라마
- 『챔피언 후토』(1962, NAC・후지테레비) 원작: 가지와라 잇키 ※연속 드라마
9.3. 역도산을 소재로 한 작품
- 영화**:
- 『프로레슬링 W 리그 피로 물든 왕자』(1968, 도에이) 감독: 노다 유키오 ※다큐멘터리 영화
- 『더 역도산』(1983) 감독: 다카하시 반메이, 음악: 야마시타 요스케 ※다큐멘터리 영화
- 『역도산』(2004) 한일 공동 제작. 배우: 설경구
- 북한에서도 역도산에 관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 텔레비전 기록 영화**:
- 『어나더 스토리즈 운명의 분기점 · 역도산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NHK 종합 텔레비전...2022년 6월 17일)
- MC: 마쓰시마 나나코
- 증언자: 다하라 소이치로, 장훈, 도쿠미쓰 가즈오, 모모타 미쓰오 외
- 『어나더 스토리즈 운명의 분기점 · 역도산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NHK 종합 텔레비전...2022년 6월 17일)
- 음악**:
- '유케!! 역도산' - 서던 올 스타즈의 34번째 싱글 (1993년 11월 20일 발매), '크리스마스 러브 (눈물 뒤에는 흰 눈이 내린다)'의 커플링 곡. 역도산을 테마로 한 곡이다.
- CM**:
- 오노 약품 공업 1962년경 자양제 '리키 호르모'의 이미지 캐릭터를 맡았다.
- 로토 제약 1990년경 '판시론' CM에 역도산이 싸우는 VTR이 삽입되었다.
10. 챔피언십과 업적
단체 | 타이틀 | 횟수 | 비고 |
---|---|---|---|
일본 레슬링 협회 | 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십 | 4회 | 도요노보리와 함께 | |
JWA 올 재팬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도요노보리와 함께 | |
NWA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일본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월드 빅 리그 | 5회 | ||
미드 퍼시픽 프로모션스 | NWA 하와이 태그팀 챔피언십 | 3회 | 보비 브룬스(1회), 아즈마후지(1회), 고키치 엔도(1회)와 함께 |
내셔널 레슬링 얼라이언스 | NWA 명예의 전당 | 2011년 헌액 | |
NWA 샌프란시스코 | NWA 퍼시픽 코스트 태그팀 챔피언십 (샌프란시스코 버전) | 1회 | 데니스 클레리(Dennis Clary)와 함께 |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샌프란시스코 버전) | 1회 | 고키치 엔도와 함께 | |
북미 레슬링 얼라이언스 | WWA 월드 헤비급 챔피언십 (로스앤젤레스 버전) | 1회 | |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 | 2006년 헌액 | ||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명예의 전당 | 1996년 헌액 | |
WWE | WWE 명예의 전당 | 2017년 헌액 | 레거시 부문 |
인터내셔널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 2021년 헌액 | ||
메이플 리프 프로 레슬링 | PWA 챔피언스 그레일 | 1회 | 도요노보리와 함께 (1962년, 2024년 부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