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Δημήτριος Πολιορκητής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도시를 포위하는 자'라는 뜻, 기원전 337년 ~ 기원전 283년)는 마케도니아의 귀족이자 군사 지도자로, 기원전 306년부터 301년까지 아시아의 왕, 기원전 294년부터 288년까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군림했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창시자인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와 그의 아내 스트라토니케의 아들이며, 이 가문에서 마케도니아를 통치한 첫 인물이다.
그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격동기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특히 공성전에서의 뛰어난 능력으로 '폴리오르케테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아테네를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후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테르'(구원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승리, 로도스 공성전에서의 혁신적인 공성 무기 개발, 그리고 입소스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 등 극적인 부침으로 점철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군사 공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여를 했으며, 대규모 공성 무기와 효율적인 보급 절차, 수륙 양용 작전, 그리고 빠른 공성 속도를 통해 전 세계 공성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아테네, 시키온, 코린토스와 같은 도시들을 요새화하는 데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개인적인 방탕함과 사치, 그리고 아테네의 전통적인 민주주의 형태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마케도니아 왕위에서 쫓겨나 셀레우코스 1세에게 항복하여 갇힌 몸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에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지배를 공고히 하며 그의 유산을 이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교육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기원전 337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고위 장군이었던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였고, 어머니는 스트라토니케였다. 그는 프리기아, 리키아, 팜필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버지의 거주지인 켈라이나이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전기 작가인 플루타르코스는 데메트리오스가 안티고노스의 친아들이 아니라 그의 형제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임명되자,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 및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데메트리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딸 필라와 결혼하여 두 가문 간의 유대를 강화했다.
2.2. 초기 군사 활동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와 함께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전했다. 기원전 317년 파라이타케네 전투에서 그는 우익 기병대를 지휘하여 안티고노스군의 좌익이 궤멸되고 중앙이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어 전면적인 패배를 막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결정적인 가비에네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전투 직후 안티고노스가 붙잡은 에우메네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21세가 되던 해, 그는 아버지로부터 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했지만, 곧 뮈우스 인근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 킬레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패배를 일부 만회했다. 기원전 310년 봄, 그는 바빌론에서 셀레우코스 1세를 몰아내려다가 크게 패했고, 같은 해 가을에는 그의 아버지도 패배했다. 이 바빌로니아 전쟁의 결과로 안티고노스는 제국의 영토 중 거의 3분의 2를 잃었으며, 모든 동부 사트라피가 셀레우코스의 손에 넘어갔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3.1. 그리스 해방과 아테네에서의 역할
킬리키아와 키프로스 해안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인 후, 데메트리오스는 군함 2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항해했다. 그는 기원전 307년에 아테네를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당시 주둔하던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 휘하의 수비대를 몰아냈으며, 무니키아를 포위하여 함락했다. 이러한 승리 이후,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테르'(Σωτήρ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구원자")라는 칭호로 수호신처럼 숭배되었다. 이 시기에 데메트리오스는 밀티아데스의 후손으로 알려진 아테네 귀족 여성 에우뤼디케와 결혼했다.
기원전 304년, 그는 해방자로서 두 번째로 그리스를 방문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재건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함과 사치스러운 생활은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카산드로스의 통치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의 악행 중에는 미남 데모클레스에게 구애한 사건이 있었다. 데모클레스는 그의 관심을 계속 거부하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궁지에 몰리자, 뜨거운 물 솥의 뚜껑을 열고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자신과 조국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 다른 사례로, 데메트리오스는 한 시민에게 부과된 50 탈란톤의 벌금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그 아들 클레아이네토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는 또한 유명한 그리스 고급 창부 라미아의 관심을 얻으려 했고, 그녀에게 비누와 화장품을 사주기 위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250 탈란톤을 요구하기도 했다.
기원전 301년 프리기아의 입소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다른 디아도코이들인 셀레우코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데메트리오스와 그의 아버지를 멸망시키기 위해 연합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심각한 손실을 입은 채 에페소스로 후퇴했다. 이러한 역전된 상황은 그에게 많은 적을 만들었으며, 아테네 시민들은 심지어 그가 자신들의 도시로 들어오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곧 리시마코스의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셀레우코스와 화해하여 자신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셀레우코스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아테네는 기원전 296년에 아테네에서 최고 권력을 장악한 민중 지도자 라카레스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오랜 포위 끝에 기원전 294년 아테네를 점령하고, 기원전 301년 자신을 거부했던 아테네 시민들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했다.
아테네를 함락한 후, 데메트리오스는 전통적인 민주주의 형태를 크게 변형시킨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평의회 서기들의 순환 선출과 아르콘의 추첨 선출을 모두 폐지했다. 기원전 294/3년에서 293/2년 사이, 아테네에서 가장 저명한 두 인물인 올림피오도로스와 필리피데스가 마케도니아 왕에 의해 임명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데모스에게 가장 받아들여질 만한 아르콘들을 세웠다"고 언급하며 왕의 임명을 시사했다.
3.2. 주요 해전과 공성전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6년 봄 아테네를 떠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먼저 카리아로 가서 로도스인들에게 해상 작전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306년의 전역에서 그는 키프로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형제 메넬라오스를 격파하여 이집트의 해군력을 완전히 파괴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6년에 키프로스를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중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 이후, 안티고노스는 '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도 같은 칭호를 부여했다.
기원전 305년, 그는 자신을 저버린 로도스인들을 응징하려 했다. 로도스 수도를 함락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새로운 공성 무기를 고안해내는 그의 독창성은 그에게 '폴리오르케테스'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 그가 만든 공성 무기 중에는 55 m (180 ft) 길이에 1,000명이 조작해야 하는 공성 망치와, 높이 38 m (125 ft), 폭 18 m (60 ft), 무게 16 만 kg (36.00 만 lb)에 달하는 바퀴 달린 공성 탑 "헬레폴리스"("도시 함락자")가 있었다. 로도스를 정복하는 데 실패한 후 이 무기들은 버려졌고, 로도스인들은 이 무기들의 청동을 사용하여 로도스의 콜로소스를 건설했다. 이듬해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양측은 전쟁의 장기화를 원치 않아 타협하여, 로도스가 양측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안티고노스 측에 유리한 것이었다.
3.3. 마케도니아의 왕으로서의 통치

기원전 294년, 데메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5세를 살해하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보이오티아인들의 반란에 직면했지만, 기원전 291년 테베를 함락시킨 후 이 지역을 확보했다. 같은 해, 그는 피로스의 전 부인이었던 라낫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통치자로서 그의 새로운 지위는 피로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피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의 왕국에서 무방비 상태인 지역들을 약탈했다. 마침내 피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이 데메트리오스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288년 그를 마케도니아에서 쫓아냈다.
아테네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데메트리오스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리시마코스의 일부 속주를 공격하여 다양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해 그의 군대 대부분이 소멸되었고, 그는 셀레우코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시리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대 행위가 발생했고, 사위인 셀레우코스에게 몇 가지 이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전장에서 그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버려져 셀레우코스에게 항복했다.
4. 군사 혁신 및 공학
데메트리오스는 군사 공학 및 공성술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입한 혁신들을 더욱 발전시켜 대규모로 적용했다. 그의 기여는 다음과 같다.
- 공성 무기**: 그는 거대한 공성 무기들을 개발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헬레니즘 시대의 전쟁에서 그 사용을 표준화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55 m (180 ft) 길이의 공성 망치와, 높이 38 m (125 ft), 폭 18 m (60 ft), 무게 16 만 kg (36.00 만 lb)에 달하는 바퀴 달린 공성 탑인 '헬레폴리스'(도시 함락자)가 있다.
- 병참**: 그는 탁월한 병참 전문가로, 전례 없는 규모의 공성전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대규모 병력에 대한 보급과 지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 수륙 양용 작전**: 그는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성전을 수행하는 수륙 양용 작전을 자주 펼쳐, 이 분야에서의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 전격전 전략**: 그는 때때로 '전격전'으로 묘사되는 빠른 공성전 전략을 사용했다. 기원전 304-303년과 294-291년 그리스 전역에서 그는 몇 달 만에 도시들을 연이어 점령했다. 예를 들어, 그는 파낙툼, 필레, 케크리에스, 에피다우로스, 시키온, 코린토스, 부라, 스키루스 (아르카디아), 아르고스, 오르코메노스를 차례로 점령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기원전 288년 데메트리오스 휘하에 110,000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과장된 수치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가 당대 최대 규모의 군대를 조직할 능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데메트리오스는 또한 중요한 군사 공학자이자 도시 요새화 전문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특정 공성전의 도전에 대처하거나 새로운 공성전 방법을 실험하기 위해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새로운 공성 무기를 개발했다. 군사 공학에 대한 그의 관심 외에도, 데메트리오스는 수많은 요새를 건설하고 세워 이 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그리스 세계 역사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기원전 307-306년에 아테네를 처음 점령한 후, 그는 도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요새화 프로젝트 중 하나를 수행했다. 기원전 303년, 시키온을 점령한 후 방어 시설의 약점을 발견하고 도시 전체를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으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직접 새로운 도시 건설에 참여했다. 코린토스 또한 그가 도시를 정복한 후 시작한 상당한 요새화 작업을 거쳤는데, 이는 당시 도시의 도시화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방어 공성전 역사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그를 '건설자 왕'으로 묘사한다.
5. 개인 생활 및 가족
5.1. 성격과 평가

플루타르코스는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를 재능 있고 용감하며 준수한 외모를 지녔고 친구에게 충실한 장군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방탕하고 사치스러우며 오만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비교하며, 둘 다 강렬한 정욕, 술과 전쟁을 즐기는 성향, 관대함과 사치스러운 습관, 그리고 번영의 정점에서 순식간에 몰락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금세 세력을 회복하는 극적인 운명의 부침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지적했다.
그의 개인적인 과도함, 예를 들어 미남 데모클레스와 클레아이네토스에게 구애한 사건, 그리고 고급 창부 라미아에게 사치스러운 선물을 주기 위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는 일화는 아테네인들이 그의 통치에 환멸을 느끼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초기 해방자로서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가 민중의 지지를 잃고 결국 몰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5.2. 가족
데메트리오스는 다섯 번 결혼했다.
- 첫 번째 아내는 섭정 안티파트로스의 딸 필라였다. 이들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다: 스트라토니케와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 두 번째 아내는 아테네 귀족 여성 에우뤼디케로, 그녀에게서 코라보스(Corrhabus)라는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 세 번째 아내는 피로스의 누이인 데이다메이아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Alexander)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이집트에서 명예로운 감금 상태로 평생을 보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 네 번째 아내는 그의 처남인 피로스의 전 부인이었던 라낫사였다.
- 다섯 번째 아내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에우뤼디케의 딸인 프톨레마이스였다. 이들 사이에는 데메트리오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또한 유명한 고급 창부 라미아와 관계를 맺었으며, 그녀에게서 필라라는 딸을 두었다.
6. 사망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난 후,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리시마코스의 일부 속주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해 그의 군대 대부분이 소멸되었고, 그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시리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대 행위가 발생했다. 사위인 셀레우코스에게 몇 가지 이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전장에서 그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버려져 셀레우코스에게 항복했다.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는 아버지의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과 심지어 자신까지 바치려 했지만,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데메트리오스는 킬리키아에서 3년 동안 감금된 끝에 기원전 283년에 53세 또는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안티고노스에게 인계되었고, 코린토스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데메트리오스의 후손들은 페르세우스 시대에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기원전 168년까지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승했다.
7. 유산 및 평가
7.1. 군사적 유산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특히 공성전 분야에서 중요한 군사적 유산을 남겼다. 기원전 317년 파라이타케네 전투부터 최종 패배에 이르기까지 30년간의 군사 경력 동안, 그는 공성전에서 매우 효과적인 지휘관임을 입증했다. 그는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입한 혁신들을 더욱 발전시켜 대규모로 적용했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전쟁에서 거대한 공성 무기의 광범위한 사용을 표준화했다.
그의 공학적 기량 외에도, 데메트리오스는 전례 없는 규모의 공성전을 유지할 수 있는 탁월한 병참 전문가였다. 그는 또한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성전을 수행하는 수륙 양용 작전에 능숙했다. 일부 실패한 공성전(특히 로도스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때때로 '전격전'으로 묘사되는 빠른 공성전 전략을 사용했다. 기원전 304-303년과 294-291년 그리스 전역에서 그는 파낙툼, 필레, 케크리에스, 에피다우로스, 시키온, 코린토스, 부라, 스키루스 (아르카디아), 아르고스, 오르코메노스 등 여러 도시를 몇 달 만에 연이어 점령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기원전 288년 데메트리오스 휘하에 110,000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헬레니즘 시대 전체에서 가장 큰 병력 집중을 의미하며, 알렉산드로스가 초기 정복에서 이끌었던 병력의 두 배 이상이다. 이 수치가 과장되었을지라도, 데메트리오스가 당대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소집할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메트리오스는 또한 중요한 군사 공학자이자 도시 요새화 전문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특정 공성전의 도전에 대처하거나 새로운 공성전 방법을 실험하기 위해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새로운 공성 무기를 개발했다. 군사 공학에 대한 그의 관심 외에도, 데메트리오스는 수많은 요새를 건설하고 세워 이 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그리스 세계 역사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기원전 307-306년에 아테네를 처음 점령한 후, 그는 도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요새화 프로젝트 중 하나를 수행했다. 기원전 303년, 시키온을 점령한 후 방어 시설의 약점을 발견하고 도시 전체를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으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직접 새로운 도시 건설에 참여했다. 코린토스 또한 그가 도시를 정복한 후 시작한 상당한 요새화 작업을 거쳤는데, 이는 당시 도시의 도시화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방어 공성전 역사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그를 '건설자 왕'으로 묘사한다.
7.2. 문학 및 예술에서의 언급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데메트리오스의 전기를 집필하며 그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비교하여 서술했다.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가 아테네에서 신으로 숭배되었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플루타르코스의 『데메트리오스 열전』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는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아테네에서 디오뉘소스 신에게 바쳐지는 영예를 받았다고 묘사했다.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는 데메트리오스가 기원전 288년에 마케도니아를 떠나는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1906년에 역사적 주제를 다룬 그의 초기 시 중 하나인 "데메트리오스 왕(ὁ βασιλεὺς Δημήτριος)"을 썼다.
- 그는 가에타노 푸냐니가 작곡한 오페라 『로도스의 데메트리오(Demetrio a Rodi)』(토리노, 1789년)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 L. 스프라그 드 캠프의 역사 소설 『로도스의 청동 신(The Bronze God of Rhodes)』에서 그리스어 이름인 데메트리오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 소설은 주로 그의 로도스 공성전을 다룬다.
- 앨프리드 더건의 소설 『코끼리와 성채(Elephants and Castles)』는 그의 생애를 생생하게 소설화한 작품이다.
8. 관련 항목
- 안티고노스 왕조
- 사모트라케의 니케
-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공성전 목록
- 케르소네소스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