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다모가미 도시오는 후쿠시마현의 농촌 지역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이후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다모가미 도시오는 1948년 7월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 다무라정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역 중학교를 졸업한 후 후쿠시마현립 아사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2. 교육
1967년 3월 후쿠시마현립 아사카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모가미는 일본 방위대학교에 입학하여 1971년 3월 제15기로 졸업했으며,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원래 파일럿이 되고 싶었으나 적성 검사에 합격하지 못했다.
2. 일본 항공자위대 경력
다모가미 도시오는 방위대학교 졸업 후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다양한 주요 직책을 거치며 승진했으며, 최종적으로 항공막료장에 올랐다.
2.1. 입대 및 초기 경력
방위대학교 졸업 후 다모가미는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항공자위관이 되었다. 그의 병과는 고사 운용(지대공 미사일 지휘)이었으며, 조종사 면허는 없었으나 항공기 탑승원 경험은 있었다. 1971년 3월 1등 공사로 임관하여 항공자위대 간부후보생 학교에 입교했으며, 1972년 3월 3등 공위로 승진했다. 이후 1974년 7월 2등 공위, 1977년 7월 1등 공위로 진급했다.
2.2. 주요 직책 및 승진
다모가미는 항공자위대 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1982년 7월 3등 공좌, 1986년 1월 2등 공좌, 1990년 1월 1등 공좌로 승진했다. 1991년 8월 1일 항공막료감부 방위부 방위과에 근무했으며, 1992년 3월 16일 항공막료감부 방위부 방위과 업무계획반장을 맡았다. 1993년 12월 1일 제3항공단 기지업무군 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1995년 6월 30일 항공막료감부 인사교육부 후생과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인 1995년부터 1996년경, 항공자위대 잡지 '날개' 편집부가 있던 항공막료 후생과에서 일본문화채널 사쿠라 사장인 미즈시마 사토루를 만났다.
1996년 7월 1일에는 공장보로 승진했으며, 1997년 3월 26일 남서항공혼성단 사령부 막료장을 맡았다. 1998년 7월 1일 제6항공단 사령관 겸 고마쓰 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고마쓰 기지 근무 시절 아파 그룹 대표인 모토야 도시히오를 만났는데, 모토야는 당시 "고마쓰 기지 가나자와 친우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1999년 12월 10일 항공막료감부 장비부장을 역임했다.
2002년 12월 2일 공장으로 승진하여 통합막료학교장에 취임했다. 그는 통합막료학교에 "역사관·국가관" 강좌를 신설하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회원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대동아 전쟁사관" 등의 내용을 가르쳤다. 공장 계급이 되면서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춘계 및 추계 예대제 안내장이 오기 시작했고, 그는 자위대 장군들이 제복을 입고 당당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수 있도록 실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참배를 계속했다. 2004년 8월 30일 제38대 항공총대사령관에 취임했다.
2.3. 항공막료장 재임
2007년 3월 28일, 다모가미는 제29대 항공막료장에 취임했다. 당시 아베 신조 총리가 그를 임명했다. 그는 2008년 10월 31일 논란의 에세이 발표로 인해 항공막료장 직에서 해임될 때까지 재임했다.
2.4. 공로 훈장
다모가미는 군 복무 중 여러 훈장을 받았다. 2008년 8월 19일, 그는 미국 공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같은 날, 미국 공군참모총장 노턴 슈워츠 대장으로부터 미국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외에도 그는 미국 공군 기념비에 헌화하는 등 군사 외교 활동에 참여했다.

3. 논란의 에세이와 파면
다모가미 도시오는 아파 그룹이 주최한 현상 공모전에 출품한 역사관 관련 에세이로 인해 큰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항공막료장 직에서 파면되었다.
3.1. 에세이 발표 및 수상
2008년 10월 31일, 다모가미는 아파 그룹이 주최한 제1회 "진정한 근현대사관" 현상 공모전에 "일본은 침략 국가였는가"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에세이로 300.00 만 JPY의 상금을 받았다. 이 공모전은 모토야 도시히오 아파 그룹 대표가 주최했으며, 모토야는 다모가미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모전을 기획했다고 알려져 있다. 모토야는 2008년에 '보도되지 않는 근현대사'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이 책의 출판 기념 파티에서 다모가미가 축사를 하기도 했다. 다모가미와 모토야는 친밀한 사이였으며, 다모가미는 항공막료장 재임 중이던 2007년에 모토야에게 F-15 (전투기) 체험 비행을 허가해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방위성 내부에서는 이번 공모전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수상작은 이후 모토야가 출판한 수상작품집 '자랑스러운 조국, 일본'에 실렸다.
3.2. 에세이 내용과 역사 수정주의
다모가미의 에세이에는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역사관에 대한 강한 역사 수정주의적 주장이 담겨 있었다. 그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 대동아 전쟁은 일본의 침략 전쟁이 아니며, 일본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과 미국을 조종한 코민테른의 책략에 의해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피해자다.
- 장쭤린 폭살 사건도 일본군이 저질렀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코민테른의 소행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 미일 전쟁은 일본을 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코민테른에 조종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시작된 책략이었다.
- 일본은 조선반도나 중국 대륙에 군대를 진출시켰지만, 상대국의 양해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진출시킨 적은 없다.
- 일본이 침략 국가였다는 것은 누명이다.
- 전쟁은 점령하에 있던 중국, 대만, 조선에 번영을 가져왔다.
-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대동아 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다른 나라의 군대와 비교하면 자위대는 꽁꽁 묶여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다.
- 미국에 의해 보호받으면 일본의 미국화가 가속화되어 일본의 전통문화가 파괴될 것이다.
그는 또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과 난징 대학살 사건을 부정하며, "일본군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군대의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쿄 전범 재판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모가미는 2007년 5월에도 항공자위대 내부 출판물인 '호우유'에 비슷한 내용의 에세이를 게재한 바 있다.
3.3. 정부의 대응 및 파면
에세이가 공개된 직후인 2008년 10월 31일 밤, 하마다 야스카즈 방위대신은 다모가미의 에세이 내용이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무라야마 담화, 고이즈미 담화 등)와 명백히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항공막료장 직에서 해임하고 항공막료감부 부속으로 발령했다. 정부는 해임 이유를 "정부 견해와 명백히 다른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항공막료장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부는 다모가미에 대한 징계 해임을 검토했으나, 그가 자진 사퇴 의사가 없고 징계 절차에 협조할 가능성이 낮아 정년이 될 때까지 징계 절차를 완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방위성은 다모가미가 제복을 입고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펼칠 것을 우려하여, 11월 3일부로 그의 정년 연장을 중단하고 정년 퇴임시켰다.
다모가미는 해임 후 공장 계급은 유지되었으나, 11월 3일 하위 계급의 의무 정년에 도달하여 항공자위대에서 퇴역했다. 그는 퇴직금으로 약 6000.00 만 JPY에서 7000.00 만 JPY를 받았으며, 하마다 방위대신이 자진 반납을 촉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2008년 11월 3일, 다모가미는 에세이 내용이 전쟁과 일본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아소 다로 당시 총리는 다모가미의 에세이 작성 결정이 "극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며, 정부가 다모가미의 견해를 수년간 간과해온 것이 잘못이라고 언급했다.
이 사건은 현직 자위대 최고위 간부가 정부 견해와 다른 역사관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다모가미는 이전에도 정부 견해와 다른 발언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자위대 간부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사고를 칠까 봐 걱정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2008년 11월 11일, 그는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어 문제의 논문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논문 내용을 부정할 의사가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다모가미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통합막료학교장 재임 시절 설치한 커리큘럼도 논의되었는데, 이 강좌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역사"나 "대동아 전쟁 긍정론" 등의 주제를 다루었으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임원 등을 강사로 초빙했다. 이는 육해공 자위대 영관급 장교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 간부 양성 과정이었다. 이 커리큘럼은 다모가미가 통합막료학교장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2010년에 폐지되었다.
4. 자위대 퇴역 후 활동
군 복무 이후 다모가미 도시오는 군사 평론가이자 정치 활동가로서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4.1. 군사 평론 및 사회 활동
항공자위대 퇴역 후 다모가미는 일본 민족주의 단체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2010년 2월 창립된 간바레 닛폰의 회장을 맡았다. 그는 잡지 '아사히 예능'에 칼럼을 기고하며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 체벌의 이점 등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2009년 2월에는 주식회사 다모가미 사무실을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2009년 8월 6일, 그는 히로시마시에서 "히로시마의 평화를 의심하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2010년 10월에는 센카쿠 열도에서 발생한 센카쿠 열도 중국 어선 충돌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를 도쿄에서 조직했다. 이 집회에서 그는 "센카쿠 열도는 일본의 전통적인 영토이며,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중국이 빼앗으려 할 것"이라고 발언하며 일본의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했다. 2011년 8월에는 후지 TV가 편향 보도를 하고 있다며 후지 TV 항의 시위에 간바레 닛폰 회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후지 TV에 항의 서한을 제출했다. 2012년 8월에는 일본 활동가 그룹을 이끌고 센카쿠 열도에 상륙했는데, 이는 며칠 전 중국 활동가들이 같은 섬에 상륙한 것에 대한 대응 조치였다. 2012년 10월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미군 병사의 성폭행 사건 이후, 그는 트위터에 최근의 성폭행 사건들이 모두 새벽 4시경에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언론이 피해자들이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질문하지 않는 이유를 의문시하는 글을 올렸다.
4.2. 정치 경력
다모가미는 군 복무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여러 선거에 출마했다.
4.2.1.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
2014년 1월 7일, 사임한 이노세 나오키 도쿄도지사의 후임을 뽑는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중의원 제1 의원회관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이 자리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가세 히데아키, 스기야마 고이치, 나카야마 나리아키, 니시무라 신고 등이 참석하여 지지를 표명했다. 간바레 닛폰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미즈시마 사토루가 선거 대책 본부장을 맡았다. 거리 연설에서는 이시하라 신타로, 히라누마 다케오, 데비 수카르노, 햐쿠타 나오키, 미쓰하시 다카아키 등이 응원 연설을 했다. 또한 가쓰라기 나미 등 여성 변사들의 응원 연설도 많아 언론에서는 이들을 "다모가미 걸즈"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보수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그는 "넷 우익층"으로부터 막대한 인기를 얻으며 인터넷상에서 "다모가미 선풍"을 일으켰다.
그의 주요 공약은 다음과 같았다.
- 수도권 직하 지진 등 재해 대비를 위한 자위대 중심의 구난 태세 구축.
- 수도대학 도쿄에 인터넷 강의를 제공하는 국제적인 대학 설립.
- 2020년 하계 올림픽 개최를 위한 도쿄도의 강인화.
- 소비세 증세 대책으로 도민세 감세 실시, 중소기업 지원책으로 공공사업을 2.00 조 JPY 규모로 확대.
- 안전성을 충분히 확보한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
- 내진 강화와 즉각적인 재해 대응 체제 구축, 아름다운 경관 조성, 자녀 양육 가구의 임대료 감면 및 육아 시설 정비, 역사 교육 개혁 등.
선거 결과, 다모가미는 610,865표를 얻어 16명의 후보 중 4위를 차지했으며, 마스조에 요이치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4.2.2. 중의원 선거 출마 (2014년)
2014년 12월 14일, 다모가미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차세대당 공천으로 도쿄도 제12구에서 출마했지만 최하위로 낙선했다. 중복 입후보했던 비례 도쿄 블록에서도 차세대당이 의석을 얻지 못해 비례 부활에도 실패했다.
4.2.3.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
2024년 5월, 다모가미는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다시 무소속으로 입후보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세계보건기구가 추진하는 국제 팬데믹 조약과 코로나19 백신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등 기존의 보수적 입장을 유지했다. 선거 결과, 그는 56명의 후보 중 4위를 차지했으며, 약 26만 7천 표를 얻어 2014년 선거(약 61만 표)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득표율이 유효 투표수의 10% 미만이었기 때문에 공탁금 300.00 만 JPY는 몰수되었다.
2014년 선거에서는 보수 진영이 일치단결하여 그를 지지했지만, 2024년 선거에서는 보수 진영의 표가 분산되었다. 햐쿠타 나오키도 다모가미를 응원하지 않았는데, 그는 과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돈 문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내게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지지층은 참정당 지지자들과 팬들에 그쳤다. 선거 운동 기간 중 참정당의 가미야 소헤이 대표가 응원 연설을 했으며, 참정당의 자원봉사자들이 선거 운동을 도왔다. 다모가미는 참정당의 전 고문이자 참정당 DIY 스쿨 강사이기도 하다. 투표 당일 출구 조사에 따르면, 참정당 지지층의 30%가 다모가미에게 투표했다. 그는 데비 수카르노, 다카스 가쓰야, 세키 아키오 등 유명인들의 응원을 받았다. 세키 아키오는 포스터 부착 작업도 도왔다. 그는 또한 현대 의료에 비판적인 우쓰미 사토시 후보와의 공동 전선도 강조했다. 선거 운동 마지막 날인 7월 6일, 우쓰미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레이와의 일향일기"를 내걸고 거리 연설을 했으며, 다모가미도 참여했다. 이 연설에서는 백신 반대 입장이 강조되었다.
4.2.4. 정당 소속
다모가미는 정치 활동 기간 동안 여러 정당에 소속되었다. 2014년 9월 25일, 그는 당시 휴면 상태였던 태양의 당에 참여하여 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11월 26일, 태양의 당은 일본 유신회 이시하라 그룹이 결성한 차세대당에 합류하여 해산되었고, 그는 차세대당의 부대표로 취임했다.
5. 법적 문제
다모가미 도시오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 선거 자금 제공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5.1. 선거 자금법 위반 혐의 체포 및 재판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 당시, 다모가미의 선거 캠프가 선거 운동원들에게 불법적으로 보수를 지급했다는 문제가 2015년에 보도되었다. 이 문제는 다모가미의 자금 관리 단체가 지지자 등으로부터 모금한 1.33 억 JPY 중 약 5000.00 만 JPY 이상이 사용처 불명금으로 기재되면서 불거졌다. 도쿄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가 수사에 착수했으며, 정치 자금의 사적 유용에 따른 업무상 횡령 혐의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2016년 4월 14일, 다모가미는 공직선거법 위반(운동원 매수)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 전(혐의가 공개된 후)에는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관리 소홀의 결과"라고 해명했다. 2016년 6월, 그는 "돈을 배포하는 데 관여한 적이 없으며, 공모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검찰은 다모가미가 선거 운동 종료 후 남은 잉여 현금의 배포를 승인했으며, 특정 개인에 대한 지급액을 늘리라고 재무 책임자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2017년 5월, 도쿄지방재판소는 다모가미에게 징역 1년 10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이는 2014년 2월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운동원들에게 불법적으로 금품을 지급한 혐의에 따른 것이었다. 2018년 3월 13일, 항소심에서 도쿄고등재판소는 1심 판결을 지지하며 그의 항소를 기각했다. 다모가미는 다시 상고했으나, 같은 해 12월 18일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하면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5년간 공민권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이 기간은 2023년 12월에 만료되었다.
다모가미는 재판 과정에서 보수 지급을 승인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무죄를 호소했다. 도쿄도지사 선거의 지지 모체는 일본문화채널 사쿠라의 산하 조직인 '간바레 닛폰 전국행동위원회'였으며, 보수 진영이 총력을 다해 지원했다. 다모가미는 후원회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채널 사쿠라"의 미즈시마 사토루가 자진하여 선거 대책 본부장을 맡았다. 다모가미는 미즈시마에게 정치 자금 관리(간사장)부터 선거 스태프 모집까지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나 선거 후, 미즈시마 등 선거 스태프들은 다모가미를 고발하며 사용처 불명금에 대한 의혹을 추궁했다. 공직선거법 위반이 확정되자 "채널 사쿠라"는 다모가미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6. 사상 및 공적 입장
다모가미 도시오는 역사 수정주의적 견해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일본의 안보,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보수적이고 때로는 논란이 되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6.1. 역사 수정주의 및 부정
다모가미는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역사 인식으로 논란을 빚고 있다. 그는 대일본 제국에 의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과 난징 대학살을 승전국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며 부정한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회의의 입장을 지지하며 청원 서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항공막료장 취임 전인 2003년 7월부터 2004년 9월까지 항공자위대 내부 잡지 '호우유'에 연재한 "항공자위대를 활기차게 만드는 10가지 제언"에서 "도쿄 재판은 잘못되었다", "난징 대학살이 있었다고 믿게 되었다"는 주장을 게재했다.
그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 식전에 대해 "식전에는 참석하지 않고, 추도문도 보내지 않을 것", "식전은 반일을 부추길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자신의 저서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에서 그는 "나는 진심으로 국가 국민의 장래를 생각하여 문제가 되는 논문을 썼다. 지금의 자학사관이 불식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국가와 국민에 대한 뜨거운 마음에 대한 답변은 나의 해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수 정당인 자민당은 또다시 보수 정당과는 거리가 먼 정당이 되어 버렸다. 또 조금 왼쪽으로 기울었다. 자민당은 앞으로 더욱 강력하게 무라야마 담화를 받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 나라의 장래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6.1.1.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견해
다모가미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부정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 해방"론 등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일본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조종한 코민테른에 의해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쟁이 점령하에 있던 중국, 대만, 조선에 번영을 가져왔으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대동아 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주장한다.
6.1.2. 일본군 위안부 및 난징 대학살 부정
다모가미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과 난징 대학살 사건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며, 이러한 사건들이 승전국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6.2. 민족주의 및 우익 활동
다모가미는 "일본 우익의 챔피언"으로 불릴 정도로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과 우익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간바레 닛폰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일본회의의 회원이다. 그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역사"를 강조하고, 일본의 국방 및 역사관에 대한 사회적 발언들을 통해 자신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드러냈다.
6.3. 안보 및 방위 정책
다모가미는 일본의 안보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특히 핵무장론, 헌법 개정, 자위대의 역할 등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6.3.1. 핵무장 옹호
다모가미는 일본의 핵무장 필요성을 주장하며 국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비핵 3원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처음부터 '가지지 않겠다'고 말하면 핵 억지력이 저하된다"고 주장했다. 2004년 9월 15일 아파 그룹의 모임에서 그는 당시 항공총대사령관으로서 "중국에 대항하는 세력을 만들고, 그것을 중국에 인정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이 자립적인 국가가 되어 핵무장을 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일본은 핵무장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발언했다. 2008년 12월 1일, 그는 영국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1945년에 핵 보유국 일본의 장군이었다면, 미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2009년 8월 6일, 히로시마현에서 열린 일본회의 히로시마 강연에서 "세 번째 핵 공격을 막기 위해 (일본은) 핵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 참석자들에 대해 "피폭자나 피폭 2세는 거의 없고, 좌익들뿐"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20년에는 핵무기 금지 조약에 대해 트위터에 "핵 폐기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으로 이어진다고 주요국 지도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핵무장국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일본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게시했다.
6.3.2. 헌법 개정 및 안보관
다모가미는 일본국 헌법 제9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 개정을 주장했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개헌론을 펼쳤다. 그는 "국가를 지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것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위대 내에서 위헌 교육을 주도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2009년 5월 2일 일본 청년회의소 오이타 블록 협의회에서 열린 헌법 타운 미팅에서 그는 현행 헌법에 대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고, 자신의 몸조차 지킬 수 없는 영구 어린애 헌법이다. 지금 그대로는 국익을 지킬 수 없다"고 비판하며, "헌법 9조에 '육해공군은 이를 보유한다'고 쓰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 공약에서는 "일본군을 되찾기 위해 점령 헌법의 무효화를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그는 전수방위에 대해 "전수방위(지금의 법률)로는 억지력(단념시키는 힘)이 되지 않는다", "방어만을 생각해서는 방어 자체가 한 발 늦어질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위대법에 대해서는 "경찰관 직무 집행법 7조를 유용한 자위대법 90조"를 "국제법을 준수하는 내용"으로 개정하고, 교전 수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징병제에 대해서는 "징병제의 군대는 지원제보다 약하다. 지원제로 충분하다면 징병제는 채택해서는 안 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무기 구매 방식에 대해서는 내용(실제 성능)을 알 수 없는 상품(F-35 (전투기))을 판매업자의 말대로 사는 것에 반대하며, 적정 가격으로 구매할 것을 요구했다. 집속탄에 대해서는 항공막료장 시절인 2007년 5월 25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긴 해안선 방어에 유효하며 방어 수단으로서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집속탄은 자탄을 다수 포함하고 있어 사용 후 불발탄으로 남는 것이 문제시되지만, 그는 "집속탄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일본 국민이다. 국민이 폭탄으로 피해를 입을 것인가, 적국에 일본이 점령당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생각했을 때 방어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이후 집속탄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2008년 11월 28일 안전보장회의에서 자위대가 보유한 모든 집속탄의 폐기를 결정했다.
6.4. 사회 및 문화 관련 견해
다모가미는 다양한 사회 및 문화적 이슈에 대해 보수적이고 때로는 논란이 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혐오 발언 규제, 성소수자 인정, 남녀평등을 "일본 약화를 위한 함정이다. 일본은 강해져서 이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단정했다.
6.4.1. 체벌에 대한 견해
다모가미는 체벌을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요소 중 하나로 본다. 그는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한두 대의 주먹" 없이 어떻게 무언가를 배우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체벌에 대한 기준은 문부과학성이 정할 것이 아니라 교사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에는 도쓰카 히로시와 공저로 '그래도 체벌은 필요하다!'는 책을 출판했다. 도쓰카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체벌로 인해 5명의 학원생이 사망한 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으로 상해치사죄, 감금치사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이다. 2013년 2월 15일, 그는 트위터에 학교에서의 체벌 및 집단 괴롭힘 문제를 언론이 다루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며, 체벌이나 집단 괴롭힘으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좌익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2022년 12월, 보육원에서의 학대 사건에 대한 트윗에서는 아이의 발을 잡고 거꾸로 매다는 것을 "아이가 기뻐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보육교사의 체포를 의문시했다.
6.4.2. 전통적 가치관과 반세계화
다모가미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일본의 국내 제도를 변경하는 것을 비판한다. 특히 미국식 내정 개혁에 비판적이며, 1990년대 이후의 규제 완화나 시장 원리주의는 경제의 장기 침체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디플레이션 탈피에는 기존의 규제 완화와 긴축 재정이 아니라 공공사업을 중심으로 한 적극 재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도입에 반대하며, 2020년 여론조사에서 선택적 부부 별성에 찬성하는 의견이 70%라는 뉴스에 대해 "여성은 사랑하는 남성의 성을 따르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게시했다. 그는 남녀 공동 참여 사회에 반대한다.
그는 가 제도의 부활을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전전의 대가족 제도를 되찾는 것이 어떤가 생각한다", "가족을 단위로 과세하여 대가족이 세금이 싸지도록 하면 대가족제를 유도할 수 있다. 노인의 독거를 없애려면 가독 상속 제도를 부활하는 것이 좋다", "옛날의 가 제도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고독사 문제나 연금 문제도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6.4.3. 성소수자(LGBT) 권리 및 성 역할에 대한 견해
다모가미는 동성혼과 성소수자 권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시부야구의 파트너 조례에 대해 언급하며 "이래서는 나라가 망가진다", "인류 사회가 지속되지 못한다"고 말하며 동성혼 제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성소수자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남녀 역할에 대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6.4.4. 이민 및 국가 정체성에 대한 견해
다모가미는 외국인에 대한 생활 보호 폐지, 외국인이 기업을 설립했을 때의 보조금 재검토를 주장한다. 그는 이민 제한에 찬성하며, 외국인 참정권에 반대한다. 그는 자학사관 교육의 수정과 교과서 채택의 적정화를 주장한다. 또한 도덕 교육의 강화, 교육칙어나 수신 교과서의 부활, 국가 및 국기 존중을 강조한다.
6.5.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
다모가미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등 특정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는 견해를 표명했다.
6.5.1. 후쿠시마 원전 사고 관련 견해
2011년 7월 말 도쿄도에서 열린 "후쿠시마 지원 심포지엄"에서 그는 "위험하다고들 하지만, 실제 후쿠시마의 방사선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원전 위를 나는 까마귀가 떨어졌는가? 원전 근처 바다에서 물고기가 계속 떠올랐는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점점 입증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원전 가동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나는 원전 추진파이다. 일류 국가를 목표로 하는 데 원전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세타가야에서 검출된 2.7 마이크로시버트의) 1만 배의 방사선이라도 24시간, 365일 쬐어도 건강상 유익하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발생하는 고농도 오염수는 유럽에서는 커피를 마실 때의 물"이라고 발언했다.
6.5.2. 한국인 학살 사건 부정
다모가미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며, 이는 그의 역사관과 연결된다.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 식전에 대해 "식전에는 참석하지 않고, 추도문도 보내지 않을 것", "식전은 반일을 부추길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7. 유머 및 대중적 이미지
다모가미는 유머 감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발언이나 행동은 종종 "다모가미 절"이라고 불린다. 그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키입니다"와 같은 자학적인 농담을 자주 한다. 그는 자신을 "밝고 유머러스한 좋은 사람. 음식은 가리지 않음. 술은 맥주를 조금 마시고 그 후에는 다이긴죠. 골프를 매우 좋아하고 꽤 잘함. 노래방도 좋아함"이라고 자칭한다.
그의 애칭은 "타모짱"으로, 자위대 동기나 상관들이 그렇게 부르며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소탈한 인간은 자위대 간부 중 나 말고는 없었을 것"이라고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그는 나가시마 시게오를 동경하며, 부하 지도 방법으로 가능한 한 화내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는다. 화만 내면 부하가 상사의 눈치만 보는 인간이 되고, 너무 시끄럽게 지도하면 부하가 낙오된다고 생각한다.
다모가미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해가 깊어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일본이 자랑하는 최강의 콘텐츠", "그러나 뛰어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가가 자금 면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라쿠고를 좋아하며, 방위대학교 시절에는 도쿄 시부야의 도큐 문화 연극장을 자주 찾았다. 노래방도 좋아하며, 이마이 미키의 "PRIDE", 하마다 쇼고의 "또 다른 토요일"이 18번이며, 카이 밴드의 노래도 자주 부른다고 한다.
8. 저서
-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2008년)
- 'DVD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다모가미 도시오 강연' (2009년)
- '다모가미 학원 이것이 자랑스러운 일본의 교과서다' (2009년)
- '진정한 국방론' (2009년)
- '자위대 풍운록' (2009년)
- '앉아서 평화를 지킬 수 없다 다모가미식 리얼 국방론' (2009년)
- '다모가미식 흔들리지 않는 삶의 방식' (2009년)
- '원숭이도 알 수 있는 일본 핵무장론' (2009년)
- '다모가미식 전력화 인재 양성' (2009년)
- '다모가미 대학' (2010년)
- '다모가미 도시오의 인생론: 목표는 일본인' (2010년)
- '다모가미 국군' (2010년)
- '새로운 중일 전쟁!' (2010년)
- '다모가미의 방식' (2011년)
- '사실은 강한 일본' (2011년)
- '그래서 일본은 얕보인다' (2012년)
- '사실은 위험한 일본' (2012년)
- '속지 마라 일본! 영토, 국익, 나라면 이렇게 지킨다' (2012년)
- '자위대의 적' (2013년)
- '다모가미 도시오의 일본 부권' (2013년)
- '아베 신조론' (2013년)
- '일본 핵무장 계획' (2013년)
- '왜 아사히 신문은 그토록 아베 신조를 미워하는가' (2014년)
- '전쟁의 상식·비상식: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 문민, 하고 싶지 않은 군인' (2015년)
- '다모가미 도시오의 "전쟁론": 일본이 영원히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궁극적인 선택' (2016년)
- '일본의 적' (2017년)
- '애국자' (2017년)
- 공저·대담·편저**
9. 선거 결과
다모가미 도시오가 출마했던 주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당락 | 선거 | 시행일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 순위 /후보자 수 | 비례구 | 석패율 |
---|---|---|---|---|---|---|---|---|---|
낙 |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 | 2014년 2월 9일 | - | 무소속 | 610,865 | 12.5% | 4/16 | - | 28.9% |
낙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14년 12월 14일 | 도쿄도 제12구 | 차세대당 | 39,233 | 18.5% | 4/4 | 중복 | 44.3% |
낙 |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 | 2024년 7월 7일 | - | 무소속 | 267,699 | 3.92% | 4/56 | - | 9.17% |
10. 평가 및 비판
다모가미 도시오의 생애와 활동은 다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다. 그는 특히 역사 수정주의적 견해와 우익 활동으로 인해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10.1. 지지 및 추천
아파 그룹의 현상 논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와타나베 쇼이치와 니시오 간지 등은 잡지 'WiLL' 등을 통해 다모가미를 지지했다. 또한 자민당의 국방 의원 모임에서도 다모가미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고 한다. 다모가미는 자신의 역사관과 전쟁관이 와타나베 쇼이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와타나베는 자위대 간부 학교의 강사였으며, 다모가미는 와타나베의 사고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것이 자신의 신념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해임 후 다모가미는 전국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으며, 2009년 2월에는 총 24회의 강연을 진행했다.
10.2. 정치 및 학계 인사들의 비판
다모가미의 논문은 보수 진영의 논객들로부터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논문에 대해서는 "인용만 많고 수준이 낮다"는 비판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장제스와 미국이 모두 코민테른에 의해 움직였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비판받았다.
- 하타 이쿠히코: 현대 사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다모가미 논문에서 자신의 저서 '루거우차오 사건 연구'가 자의적으로 인용된 것에 불쾌감을 표했다. 하타는 "논문이라기보다는 감상문에 가깝고 전체적으로 미숙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논문은 사실 오인투성이다. 일반적인 현상 논문 대회라면 가작에도 들지 못할 내용이다", "사건의 첫 총탄은 중국 측의 제29군 병사가 쏘았다는 견해는 언급하지도 않고, '사건은 중국 공산당의 모략이다'라고 쓰면 오해를 살 수 있다. 매우 불쾌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타는 저서 '음모사관'에서 다모가미의 역사관을 음모론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한 "그들이 이런 종류의 '정론'을 들고 미국으로 가서 논쟁을 시도한 흔적은 없으며, 일본인 일부 유지들에게 호소하는 '국내 소비용'의 자위적 언론에 그쳤다"고 언급했다.
- 이시바 시게루: 전 방위대신 이시바 시게루는 "다모가미 항공막료장은 문민통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문민통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해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문을 쓴 것은 매우 유감이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과학인 이상,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시바는 다모가미가 자신의 발언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나는 자위관이 장비나 권한에 대해 전문가인 자위관의 의견을 문민통제의 주체인 대신에게 진술할 것을 요구한 것이지, 역사관이나 헌법관에 대한 발언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도록 촉구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 오타 노부마사: 방위청 출신 평론가인 오타는 "다모가미 씨의 논문은 출처를 표기하는 방식이나 출처를 선택하는 것만 보더라도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내용적으로도 논리가 일관되지 않은 부분이 산견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대장급 군인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치지 못하는 무능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10.3. 언론 및 여론의 비판
여러 일본 신문들은 다모가미의 전전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장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와테 일보는 "섬뜩함"을 느낀다고 했고, 류큐 신보는 "옛 일본군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착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바라키 신문과 나가사키 신문 등은 개인의 사상 신조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자위대 최고위 간부로서 직책상 정치의 통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 신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며, 다모가미의 주장은 "언론의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니혼케이자이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은 다모가미의 역사관이 자위대 내부에 확산될 가능성을 지적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니시닛폰 신문도 과거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아사히 신문과 홋카이도 신문은 이 문제를 문민통제의 위기로 보고 정치의 책임을 추궁했다. 야마나시 일일 신문도 마찬가지로 정치의 책임을 검증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니가타 일보는 다모가미에 대해 단호한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문민통제라고 말했다.
방위성은 2008년 12월 25일 제출된 자료에서 "자위대원이 가진 경험과 전문 지식에 근거하여 적절한 형태로 의견을 진술하는 것은 일본의 안전 보장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자위대원, 특히 항공막료장과 같은 간부는 그 사회적 지위에 유의하고 절도 있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력 조직인 자위대를 운용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무거운 책임을 가진 자위대원은 스스로를 특별히 엄격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자위관, 특히 막료장이라는 직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외에 가사하라 도쿠시, 고케쓰 아쓰시, 우에스기 사토시, 고바야시 세쓰, 미즈시마 아사오는 도쿄 신문에서 다모가미의 근현대사 사실 인식이 "저급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자유법조단, 전일본민의련 등이 항의 성명이나 의견서를 제출했다.
10.4. 중국의 비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인민일보' 국제판의 환구시보는 2014년 1월 7일 기사에서 다모가미에 대해 "다모가미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국방군 창설과 군비 확장을 주장하여 우리 국가에 극히 불이익하다", "일본의 양심적인 대중 매체와 협력하여 도지사 당선을 저지해야 한다"고 논했다. 또한 "자국의 침략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은 우익 인물", "우리 국가를 적대시하는 다모가미 씨는 공공연히 중국 위협론을 선전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자학사관"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모가미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고 국방군 창설과 군비 확장을 주장하는 인물이라며 도지사 선거 출마에 경계감을 표했다.
11. 관련 항목
- 일본문화채널 사쿠라
- 미즈시마 사토루
- 야스쿠니 신사
- 일본회의
- 간바레 닛폰
- 역사 수정주의
- 일본군 위안부
- 난징 대학살
12. 외부 링크
- [http://www.toshio-tamogami.jp/ 타모가미 도시오 공식 웹사이트]
- [http://ameblo.jp/toshio-tamogami/ 타모가미 도시오 공식 블로그]
- [https://twitter.com/toshio_tamogami 타모가미 도시오 트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