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다니 료코(본명: 田村 亮子다무라 료코일본어, 1975년 9월 6일~)는 일본의 전설적인 유도 선수이자 정치인이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강력한 기술로 여자 유도 최경량급(-48kg)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 2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포함한 총 5개의 메달을 획득했으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전례 없는 7회 우승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여자 유도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현역 시절 '야와라짱'(ヤワラちゃん야와라짱일본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일본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고, 여성 유도계의 발전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수 은퇴 후에는 참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스포츠 진흥 및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했으나, 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논란과 정치 자금 관련 의혹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니 료코는 스포츠와 정치 양 분야에서 일본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된다.

2. 유아기 및 배경
다니 료코는 1975년 9월 6일 일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히가시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7세 때 4살 위인 오빠의 영향을 받아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다니 료코는 후쿠오카시립 시로하마 초등학교 2학년 때 동후쿠오카 유도 교실에서 유도를 시작했다. 유도 입문 후 불과 몇 달 만에 구시다 신사 봉납 경기에서 5명 연속으로 이기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때 남자아이를 던져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유도 외에도 피아노, 서예, 승마를 배웠으나, 피아노 교사로부터 "피아노에는 올림픽이 없다"는 말을 듣고 유도에 전념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규슈 소년 유도 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하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5학년 때는 전국소년유도대회 단체전에서 3위에 입상했다. 6학년 때는 단체전 전일본소년소녀무도연성대회에서 우승했다. 초등학교 졸업 문집에는 자신을 "유도를 좋아하는 여자 산시로"라고 소개했으며, 레베카와 조지 마이클의 팬이었다.
후쿠오카시립 조코 중학교 2학년 때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 규슈 예선에서 패배한 후, 도장 사범인 이나다 아키라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이후 전일본 여자 대표팀 강화 합숙에 참여하여 자신보다 체격이 큰 선수들을 상대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특히 사이타마 대학 1학년이었던 스즈키 와카바를 시원한 배대뒤치기로 던져 주위의 강화 선수들과 코치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후쿠오카현 시노구리 도장으로 출장 연습을 갔을 때는 남자 중학생들을 연달아 던져 도장 깨기 같은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에게 던져진 한 남자 중학생은 자신보다 30 kg 가까이 가벼운 다니에게 던져진 충격으로 유도를 그만두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에서 3위에 입상했으며, 프랑스 원정 멤버로 선발되어 현지 연습 경기에서 5전 전승을 기록했다. 10월에는 강도관배 강화선수 선발회에서 우승하며 후쿠오카 국제 여자 유도 선수권 대회 대표로 선발되었다. 12월 후쿠오카 국제 대회에서 15세의 나이로 우승하며 국제 대회에 충격적인 데뷔를 했다. 이 대회 직후 열린 무차별급 후쿠오카현 여자 선수권에서도 4체급 위인 66kg급 선수를 꺾고 우승했다. 당시 그녀는 설날을 제외하고는 연중무휴로 유도 훈련에 매진했으며, 평일에는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주말에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훈련했다. 또한, 만화 《야와라!》의 주인공에 빗대어 '야와라짱'으로 불리게 되면서 내성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91년 4월, 다니는 자신을 지도했던 가마타 도모히로가 유도부 감독으로 있는 후쿠오카 공업대학 부속 조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경량급 전 세계 챔피언인 소노다 요시오 유도부장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중량급 금메달리스트인 소노다 이사무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994년에는 여자 유도부를 신설한 테이쿄 대학 문학부 국문학과에 진학했으며, 이나다 아키라가 감독을 맡았다.
2.2. 초기 활동
다니 료코는 1998년 테이쿄 대학을 졸업한 후 도요타 자동차에 입사했다. 또한, 일본체육대학 대학원 박사 전기 과정에도 진학했다. 처음에는 취업하지 않고 테이쿄 대학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자신의 인생에서 사회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다양한 것을 흡수하고 싶다"는 이유로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2010년 3월 31일부로 도요타 자동차와의 스폰서 계약(직원 선수 대우)이 종료되면서, 선수로서의 소속을 개인 사무실인 '오피스 료코'로 변경했다.
3. 유도 선수 경력
다니 료코는 선수 경력 전반에 걸쳐 최경량급인 -48kg급에서 활약했다. 그녀의 키는 1.46 m로 작은 편이었지만, 다른 많은 선수들과 달리 시합 전 체중 감량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1993년에 첫 세계 선수권 우승과 함께 유도 4단을 획득했으며, 2018년 1월에는 여자 선수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4단에서 6단으로 승단했다.
3.1. 유도 입문 및 초기 경력
다니 료코는 1990년 12월 후쿠오카 국제 여자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15세의 나이로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이 대회에서 그녀는 첫 경기에서 중국의 가오 위훙을 상대로 압도적인 리드를 잡았으나, 경기 종료 직전 위기를 맞기도 했다. 준결승에서는 오랜 기간 이 체급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영국의 카렌 브리그스를 단 28초 만에 어깨로메치기와 안다리걸기의 밭다리걸기로 한판승을 거두며 제압했다. 결승에서는 전년도 우승자인 중국의 리 아이웨를 상대로 업어치기로 절반을 따낸 후 안다리걸기 되치기로 한판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는 그녀가 잊을 수 없는 경기 중 하나로 회자된다.
1991년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991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만 15세의 나이로 동메달을 획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오사카에서 열린 1991년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1992년 2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독일 국제 대회에서는 모든 경기를 한판승으로 우승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3.2. 주요 대회 성적
다니 료코는 국제 유도계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5번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총 5개의 메달을 획득했으며, 7번의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 최다 우승 기록을 세웠다.
3.2.1. 올림픽 메달
다니 료코는 5번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총 5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여자 유도 선수로서 전례 없는 기록이다.
대회 | 체급 | 메달 |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 -48kg | 은메달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 -48kg | 은메달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 -48kg | 금메달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 -48kg | 금메달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 -48kg | 동메달 |
3.2.2. 세계 선수권 대회
다니 료코는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총 7번 우승하며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록을 세웠다.
대회 | 체급 | 메달 |
---|---|---|
1991 바르셀로나 | -48kg | 동메달 |
1993 해밀턴 | -48kg | 금메달 |
1995 지바 | -48kg | 금메달 |
1997 파리 | -48kg | 금메달 |
1999 버밍엄 | -48kg | 금메달 |
2001 뮌헨 | -48kg | 금메달 |
2003 오사카 | -48kg | 금메달 |
2007 리우데자네이루 | -48kg | 금메달 |
그녀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6회 연속 세계 선수권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으며, 2005년 첫째 아들 출산으로 대회에 불참한 후 2007년에 다시 우승하며 총 7회 우승을 달성했다。이 기록은 2015년 프랑스의 테디 리네르가 세계 선수권 대회가 매년 개최되는 시대에 8회 우승을 달성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3.3. 올림픽 출전 기록
다니 료코는 5번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매번 메달을 획득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6세의 나이로 출전한 다니는 준결승에서 4회 세계 챔피언인 영국의 카렌 브리그스를 꺾었으나, 결승에서 당시 세계 챔피언인 프랑스의 세실 노바크에게 아쉽게 패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녀는 이 대회에서 16세 331일로 올림픽 유도 역사상 최연소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경기 후 노바크는 다니가 "너무 작고 연약하며 전혀 무섭지 않았다"는 도발적인 발언을 남겼다. 다니는 이 패배를 통해 "1992년에는 16세로 경험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이 패배 이후 그녀는 4년 동안 84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이어갔다.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84연승의 기록을 안고 두 번째 올림픽 결승에 진출한 다니는 당시 무명이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계순희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계순희는 다니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경기 막판 유효를 따내며 승리했다. 다니의 두 번째 올림픽 은메달은 일본 언론에서 '올림픽의 저주'로 불릴 만큼 큰 충격이었다. 이에 대해 다니는 몇 년 후 "저주 같은 건 없었다. 1996년에는 20세였다"고 말했다. 이 패배 이후 그녀는 12년 동안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당시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사용된 다다미는 던져지면 1 m 가까이 미끄러지는 등 품질이 좋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고, 이는 체구가 작은 다니가 과감한 기술을 시도하기 어려웠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했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드니 올림픽에서 다니는 "최고도 금메달, 최저도 금메달"이라는 각오로 임했다. 준결승에서 북한의 차 현향을 상대로 고전했으나, 결승에서는 러시아의 류보프 브룰레토바를 단 36초 만에 안다리걸기 한판으로 꺾고 마침내 염원하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녀는 첫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마침내 첫사랑을 만났다"고 표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금메달은 그녀에게 후쿠오카현 최초의 현민영예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4년 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다니는 연이은 한판승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조시네를 압도하며 경기 초반 유효를 따내고 경기 종료 직전 절반을 추가하며 완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그녀는 여자 유도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이 승리로 일본 언론은 그녀를 "다니도 금메달"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남편인 다니 요시토모 또한 이 대회 야구 종목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여 부부가 함께 메달을 획득하는 영광을 안았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다니는 3회 연속 금메달을 노렸으나, 준결승에서 루마니아의 알리나 두미트루와 맞붙었다. 양 선수 모두 적극적인 공격을 보이지 않아 지도가 주어졌고, 경기 막판 심판이 다니에게만 세 번째 지도를 주면서 지도패를 당했다. 다니는 이 판정에 크게 당황했지만, 남은 몇 초 동안 반격할 시간이 없었다. 이 패배는 그녀의 12년간의 대외 경기 무패 기록을 깬 것이었다. 이후 동메달 결정전에서 러시아의 류드밀라 보그다노바를 꺾고 동메달을 획득하며 5회 연속 올림픽 메달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3.4. 유도 스타일 및 철학
다니 료코는 키 1.46 m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강력한 유도 스타일을 구사했다. 원래 업어치기와 안뒤축걸기, 허리후리기를 주특기로 했으나, 업어치기가 경계 대상이 되자 다른 기술들도 적극적으로 익혀 사용했다. 밭다리걸기, 안다리걸기, 몸통떨어뜨리기, 들어메치기, 바깥다리걸기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했으며, 선수 경력 중반 이후에는 업어치기 외의 기술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굳히기 기술인 누르기와 팔가로누워꺾기 등으로도 자주 승리했다.
전일본 대표팀에서 다니의 코치를 맡았던 히로시마 대학 교수 데구치 다쓰야에 따르면, 다니의 사고방식에는 '기술'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일련의 빠르고 유기적인 움직임 속에 기술이 포함될 뿐, 상대가 반응할 수 있다면 어떤 기술이든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경기 운영에 능하고 뛰어난 심리전을 펼쳤으며, 잡기 싸움에 강했다. 상대에게 유리한 잡기를 허용하면 즉시 기술을 걸면서 벗어나는 등 위기 관리 능력이 탁월했다. 판정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잡기 직후나 상대가 방심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1999년경부터는 기존의 절묘한 타이밍으로 상대를 던지는 스타일에 한계를 느끼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파워와 스피드 향상에 힘썼다. 그 결과, 전신 반응 시간을 더욱 고속화하고 외국 선수들과 겨룰 수 있는 근력을 확보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고가 도시히코는 다니를 "이런 선수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극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아쉽게 패배한 후, 다니는 세계 선수권을 포함한 다른 모든 대회에서 승리하면서도 왜 올림픽에서만 승리하지 못하는지 고민했다. 그 결과, 패배한 경기를 분석하고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승리한 경기를 철저히 분석하여 승리 패턴을 파악하고 이를 확고한 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강인함을 기르기 위해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 대회 2개월 전부터 매일 "오늘이 경기 당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이를 통해 자신을 다스리며 훈련에 임할 수 있었고, 평소와 같은 상태로 시합 당일에 임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시합에서 패배하더라도 그대로 끝내지 않고 즉시 도장으로 돌아가 다음 대결에서는 새로운 전개로 승리할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녀는 이미 이 시기에 "패배에서 배우는 것은 적다. 승리하여 더 높은 목표를 세운다"는 기본 사고방식을 확립했다.
그녀는 선수 경력 동안 약 10번의 패배를 기록했으며, 굳히기로는 주니어 시절 3번의 한판패를 당했으나, 메치기로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995년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녀를 지도했던 소노다 형제는 1993년과 1995년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했을 때가 다니의 전성기였다고 말했다. 아틀란타 올림픽 이후에는 예상되는 모든 선수를 라이벌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으나, 은퇴 후에는 "내 유도 인생에서 라이벌은 만들 수 없었다. 국내외에서 여러 선수들이 부상했다가 사라지는 가운데, 라이벌이라고 생각할 만한 선수는 없었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올림픽 및 세계 선수권에서는 총 9번 우승했지만, 모든 경기를 한판승으로 우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는 한판승이 적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2003년 오사카 세계 선수권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우승했다. 21세기 이후 외국인 유도 선수들이 태클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니는 이에 대한 대처 능력도 뛰어나 상대의 태클을 피할 수 있었으며, 이는 올림픽 2연패를 가능하게 한 능력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일본 국내에서도 10년 가까이 무패를 자랑했지만, 현역 말년에는 출산으로 인한 공백과 나이로 인한 움직임의 쇠퇴 때문인지 2007년 전일본 선발 체중별 선수권에서 후쿠미 도모코에게 패했고, 이듬해 2008년 전일본 선발 체중별 결승에서도 야마기시 에미에게 패했다. 그녀는 십대 시절부터 끊임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기지 못하면 안 된다'는 엄청난 압박감 속에서 오랫동안 동기를 유지하며 정점에 서 있었던 정신력이 뛰어났다. 이노우에 고세이는 "어떤 정신 구조를 가졌는지 궁금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평하기도 했다.
3.5. 선수로서의 기록 및 평가
다니 료코는 2010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약 20년간의 선수 경력 동안 단 5번만 패배했다. 2011년 국제 유도 연맹(IJF)은 파리에서 열린 창립 60주년 기념 갈라에서 그녀를 "역대 최고 여자 유도 선수"로 선정했다. 2013년 8월에는 국제 유도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녀는 후쿠오카 국제 여자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11연패를 포함해 총 12회 우승했으며,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에서 11연패를 포함해 총 14회 우승하는 등 압도적인 전적을 자랑한다. 올림픽에서는 2개의 금메달, 2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획득하며 출전한 5개 대회 모두에서 메달을 따냈다. 이러한 성과를 통해 그녀는 여자 유도와 유도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년월 | 대회 | 성적 |
---|---|---|
1986년 4월 | 전국소년유도대회 단체전 | 3위 |
1987년 8월 | 전일본소년소녀무도연성대회 | 우승 |
1990년 7월 |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 | 3위 |
1990년 10월 | 전일본 여자 유도 강화 선수 선발회 | 우승 |
1990년-2000년, 2002년 12월 | 후쿠오카 국제 여자 유도 선수권 대회 | 11연패 포함, 총 12회 우승 |
1991년-2001년, 2003년-2005년 |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 | 11연패 포함, 총 14회 우승 |
1991년 7월 | 세계 선수권 | 3위 |
1991년 10월 | 국체 소년 여자부 | 우승 |
1991년 11월 | 아시아 선수권 | 3위 |
1992년 2월 | 독일 국제 | 우승 |
1992년 7월 | 바르셀로나 올림픽 | 2위 |
1993년 2월 | 프랑스 국제 | 우승 |
1993년 3월 | 전국 고교 선수권 | 우승 |
1993년 5월 | 동아시아 대회 | 우승 |
1993년 10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
1993년 10월 | 국체 소년 여자부 | 우승 |
1994년 10월 | 아시안 게임 | 우승 |
1994년 11월 | 전일본 여자 유도 강화 선수 선발회 | 우승 |
1995년 8월 | 유니버시아드 | 우승 |
1995년 10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2연패) |
1996년 7월 | 애틀랜타 올림픽 | 2위 |
1997년 1월 | 월드컵 단체전 | 3위 |
1997년 10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3연패) |
1998년 9월 | 월드컵 단체전 | 5위 |
1998년 11월 | 전국 여자 유도 체중별 선수권 | 우승 |
1999년 10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4연패) |
2000년 9월 | 시드니 올림픽 | 우승 |
2001년 7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5연패) |
2003년 9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6연패) |
2004년 8월 | 아테네 올림픽 | 우승 (2연패) |
2007년 4월 |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 | 2위 |
2007년 9월 | 세계 선수권 | 우승 (총 7회 우승) |
2008년 4월 |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 | 2위 |
2008년 8월 | 베이징 올림픽 | 3위 |
3.6. 선수 선발 관련 논란
다니 료코의 선수 경력 중 올림픽 및 세계 선수권 대회 대표 선발 과정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제기되었다.
2007년 4월 8일 후쿠오카 국제 센터에서 열린 리우데자네이루 세계 선수권 대회 대표 선발전을 겸한 선발 체중별 대회 결승에서 그녀는 쓰쿠바 대학의 후쿠미 도모코에게 발뒤축걸기 유효로 패배했다. 그러나 대회 후 강화 위원회에서는 48kg급 대표 선발을 놓고 약 2시간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지난 2년간 국내외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실적을 고려하여 다니 료코를 대표로 선발했다. 당시 세계 선수권에서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을 얻기 위해 5위 안에 들어야 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계산 가능한' 다니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다니 본인은 "아,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뽑혀버렸다. 나는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한편, 그녀는 베이징 올림픽이 목표였기 때문에 2007년에는 몸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 위해 쉬고 싶었다며, 이번 패배도 "최고의 컨디션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침착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다니를 선발한 것에 대해 강화 위원장 요시무라 가즈로는 "단지 세계 선수권에 나가는 것만으로 좋다면 젊은 선수를 내보낼 것이다. 그러나 목표는 어디까지나 금메달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다니가 금메달에 더 가깝다. 우리의 선발을 믿어달라", "세계에서 싸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중압감과 싸우는 것이다. (세계 선수권에서) 져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기는 방법을 아는 베테랑이라면 확실히 메달을 따줄 것이다", "다니의 움직임은 같은 체급의 선수들이 흉내 낼 수 없으며, 이대로 끝날 선수가 아니다"라고 선발 이유를 밝혔다. 또한, 요시무라는 대회 3개월 전 인터뷰에서 "젊은 선수 3명(후쿠미 도모코, 미쓰이 스미토모 해상 화재 보험의 야마기시 에미, 시부야 교육 학원 시부야 중학교·고등학교의 나카무라 미사토)의 힘으로는 아직 다니를 따라잡기 어렵다. 설령 다니를 이겼다고 해도, 그들이 세계에서 싸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역시 대부분의 견해로는 (대표는) 다니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승리하고도 대표로 선발되지 못한 후쿠미는 "억울하지만 코치진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강화 위원 중 한 명이자 쓰쿠바 대학에서 후쿠미를 지도했던 야마구치 가오리는 이 대표 선발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스포츠 중재 재판소에 제소하는 것도 고려했다고 한다. 반면 다니는 훗날 인터뷰에서 "확실히 그녀(후쿠미)는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지만, 나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실적이 있었다. 당시 국내 대회에서는 우승하는 선수가 매년 달랐다. 후쿠미 선수는 이듬해 베이징 올림픽 예선에서도 결국 결승까지 가지 못했다. 세계를 상대로 싸운다는 점에서는 안정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 세계 선수권과 베이징 올림픽 대표로 내가 선발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할 만한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한두 번 졌다고 해서 대표에서 탈락할 리 없다는 생각이 나 자신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외부에서 이 선발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으나, 당시 잡지 '근대 유도'의 편집장이었던 기류 구니오는 이번 대회가 '대표 선수 최종 선발전'으로 TV와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되면서 일반인뿐만 아니라 유도에 익숙하지 않은 언론 관계자들에게도 이번 대회에서 이긴 선수가 대표로 선발될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강화 위원회가 대표 선발 시 이번 대회를 비롯해 강도관배, 동계 유럽 원정 국제 대회 등 선발 대상 대회를 미리 지정하고 있으며, 이번 대회 결과만으로 대표를 결정한다는 합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지정된 대회의 성적 외에 '그동안의 실적'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표를 결정하는 기준을 두고 있는 이상, 이번 대표 선발도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나아가 유도 선발 방식이 외부에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렵지만, 대인 경기인 특성상 육상이나 수영 등과 달리 객관적인 기록을 기준으로 한 선발 방식을 채택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해를 최대한 줄이도록 개선할 여지는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2008년 4월 6일 후쿠오카 국제 센터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한 선발 체중별 결승에서 다니는 미쓰이 스미토모 해상 화재 보험의 야마기시 에미와 대결하여 발기술로 효과를 선취했으나, 배대뒤치기와 밭다리걸기 되치기로 두 개의 유효를 허용하며 역전패했다. 그러나 전년도 세계 선수권 우승 실적 등을 고려하여 다니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여자 대표팀 감독 히카게 노부토시는 "다니는 수비가 좋고, 수비에서 되치기도 노릴 수 있는 경기 운영이 능숙한 선수다. 이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는 판단으로 대표로 선발했다. 결승에서 패했지만, 코치진의 견해는 '이곳은 다니'로 일치했다"고 선발 이유를 설명했다.
다니가 2년 연속 결승에서 패했음에도 대표로 선발되면서 전년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일었고, 대중으로부터는 더 투명한 선발 방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화 위원 야마구치는 대중도 납득할 만한 명확한 선발 방식으로 포인트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각 대회의 부여 포인트를 미리 공표하면 선발 과정이 일반인에게도 명확해져 오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이 국내에서 대표를 뽑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최종 선발전에서 이기지 못한 대표를 올림픽에서 이기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강화 체제의 문제다"라고 야마구치는 말했다. 이주도 웹사이트는 "전일본유도연맹은 선발 체중별 대회를 수많은 선발 대회 중 하나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최종 선발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회에서 패배한 선수를 선발하는 것에 대중은 결코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오해를 살 만한 요소를 크게 선전하는 것은 선수 우선이 아닌 외부 사정이 엿보인다"고 지적했다. 국제 유도 연맹은 2009년부터 세계 랭킹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각 체급 선수들의 서열을 명확히 했다. 이 랭킹을 바탕으로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는 선수나 국제 유도 연맹 주최 국제 대회 시드 선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또한, 여자 유도 강화 선수 폭력 문제를 계기로 2014년부터는 일본 국내에서도 포인트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포인트 제도는 "단지 참고하는 하나의 지표"일 뿐이며, 최종적으로는 강화 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대표 선수가 선발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4. 정치 경력
다니 료코는 유도 선수 은퇴 후 이치로 오자와의 권유로 정치계에 입문했다.
4.1. 정치 입문
2010년 5월 10일, 민주당은 그녀가 2010년 여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니는 처음에는 유도 선수 경력을 계속 이어갈 의향이 있다고 밝혔으나, 선거에서 당선된 후 결국 유도에서 은퇴했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 후보 중 두 번째로 많은 352,594표를 얻어 첫 당선에 성공했다. 그녀는 '오자와 걸즈'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4.2. 의정 활동 및 정당 활동
다니 료코는 2010년 7월 26일부터 2016년 7월 10일까지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당선 당시에는 민주당 소속이었으며, 민주당 스포츠 의원 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2012년 7월, 그녀는 오자와 이치로의 민주당 탈당에 동조하여 탈당계를 제출했고, 다음 날 수리되어 7월 10일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2012년 7월 11일 오자와가 이끄는 신당 국민의 생활이 제일당 창당에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가다 유키코 시가현지사가 대표를 맡은 일본 미래당에 참여했으며, 12월 1일에는 당 간사(유세 담당)에 취임했다. 일본 미래당 해체 후에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생활의 당에 소속되었다.
2013년 6월에는 전일본 유도 연맹의 이사로 다나베 요코, 기타다 노리코와 함께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그녀는 "(여자 선수들의)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도를 통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 싶다", "선수와 소속 (단체), 전일본 유도 연맹 등의 조직이 고립되지 않도록 의사소통을 심화하고 싶다", "일본 발상의 유도에는 훌륭한 전통과 문화가 있다. 그것을 확산시키면서 개혁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2013년 8월 2일에는 생활의 당 부대표 겸 참의원 간사장에 취임했다. 2015년 6월에는 공무 다망을 이유로 전일본 유도 연맹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4.3. 의원직 퇴임
2016년 6월, 다니 료코는 2016년 참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의향을 오자와 이치로 대표에게 전달했다. 오자와는 그녀의 탈당이 당의 최소 의원 수 기준인 5명 미만으로 떨어져 공식 정당 지위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당에 남아줄 것을 요구했다. 2016년 6월, 다니는 선거 전까지 당에 남되, 두 번째 임기를 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의원직 퇴임 후인 2018년 1월 14일, 강도관으로부터 여자 유도 4단에서 6단으로 승단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규슈 유도 협회의 추천으로 강도관으로부터 승단을 인정받았으며, 본인에 따르면 정치 활동을 일단락한 2년 전부터 유도형 훈련 등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2022년 6월부터는 일본 프로 야구 OB 클럽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5. 개인 생활
다니 료코는 2003년 12월 1일 프로 야구 선수였던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의 다니 요시토모와 결혼하여 남편의 성을 따랐다.
5.1. 결혼 및 가족
다니 료코와 다니 요시토모의 결혼식은 2003년 12월 20일에 열렸으며, 니혼TV를 통해 생중계되어 2천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봤다고 한다. 결혼식 비용은 약 300.00 만 USD에 달했다고 알려졌다. 부부의 에피소드 영상에는 두 사람이 직접 출연했으며, 웨딩 케이크는 지구를 형상화한 거대한 푸른색 케이크였다. 유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오빠는 결혼식에 불참했다.
그녀는 2005년에 첫째 아들을, 2009년에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첫째 아들의 출산은 병원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그녀의 퇴원을 기다릴 정도로 주요 언론 행사로 다루어졌다. 그녀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장래에 결혼하면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자신의 자녀에게는 유도를 시키고 싶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결혼 후 두 아들을 두었지만, 두 아들에게는 유도가 아닌 아이스하키를 시키고 있으며, 참의원 의원을 한 차례 역임한 후에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6. 영향력 및 유산
다니 료코는 스포츠계,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녀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6.1. 스포츠계에 미친 영향
다니 료코는 1984년 일본 여성 최초로 세계 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던 야마구치 가오리의 뒤를 이었다. 유도는 오랫동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스포츠였다. 다니는 1990년대 일본 여자 유도 붐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경쟁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선수 경력을 이어갔고, 어린 어머니로서 마지막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고가 도시히코는 그녀를 두고 "이런 선수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고, 이노우에 고세이는 "어떤 정신 구조를 가졌는지 궁금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평하기도 했다.
6.2. 사회 및 문화적 영향
다니 료코는 '야와라짱'이라는 애칭과 함께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야마구치 가오리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인기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 《야와라!》의 주인공 '이노쿠마 야와라'의 모델이 되었는데, 이 캐릭터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다니가 바르셀로나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했을 때, 일본 대중은 그녀를 실제 야와라로 여겼고, 곧 '야와라짱' 또는 '타와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의 성공과 밝은 성격 덕분에 다니는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수많은 TV 광고에 출연했으며, 일본 TV에서 생중계된 그녀의 결혼식은 2천만 명의 시청자가 시청했다. 첫째 아들의 출산 또한 카메라 기자들이 병원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릴 정도로 주요 언론 행사로 다루어졌다. 격투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월드 히어로즈》의 '이즈모 료코'와 《파이터즈 히스토리》의 '가노 료코' 캐릭터는 모두 그녀를 모티브로 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낸시 세키는 1995년 자신의 칼럼에서 "10년 후 야와라짱은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다니는 2010년 참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낸시 세키의 예언이 15년 만에 적중했다.
7. 수상 및 영예
다니 료코는 선수 및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수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93년 JOC 스포츠상 우수선수상
- 1995년 JOC 스포츠상 최우수선수상
- 1995년 후쿠오카현 현민 스포츠 영예상
- 2000년 10월 3일 은배 일조(국화 문양)
- 2000년 11월 6일 내각총리대신 현창
- 2000년 JOC 스포츠상 특별영예상
- 2000년 후쿠오카현 현민 영예상
- 2002년 JOC 스포츠상 특별공헌상
- 2003년 11월 3일 자수포장
- 2004년 11월 3일 자수포장 식판
- 2004년 후쿠오카현 현민 스포츠 영예상
- 2007년 11월 3일 자수포장 식판
- 2011년 국제 유도 연맹 '역대 최고 여자 유도 선수' 선정
- 2013년 8월 국제 유도 연맹 명예의 전당 헌액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일본 선수단 기수
8. 비판 및 논란
다니 료코는 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논란과 정치 활동 중 제기된 정치 자금 관련 의혹으로 비판을 받았다.
선수 선발 관련 논란:
그녀는 2007년과 2008년 전일본선발유도체중별선수권에서 국내 경쟁자들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국제 대회 실적과 '국제 경쟁력'을 이유로 올림픽 및 세계 선수권 대표로 선발되었다. 특히 2007년에는 후쿠미 도모코에게 패했지만 세계 선수권 대표로 선발되었고, 이듬해 2008년에는 야마기시 에미에게 패했지만 베이징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이러한 선발 방식은 당시 대중과 일부 유도계 인사들로부터 '투명성 부족', '선발전의 의미 퇴색', '선수 우선이 아닌 외부 사정 개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승리한 선수가 아닌 다니 료코가 대표로 선발되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고, 강화 위원인 야마구치 가오리는 스포츠 중재 재판소 제소까지 고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일본 유도 연맹은 선발전이 '최종 선발전'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여러 대회의 성적과 '그동안의 실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기준에 따라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치 자금 관련 의혹:
2015년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에 554만 엔의 인건비가 계상되었는데, 이 중 494만 엔이 정치 활동 실체가 없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지급된 것으로 드러나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녀는 의혹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9. 관련 항목
- 유도 선수 목록
- 올림픽 유도 메달리스트 목록
- 일본의 올림픽 기수 목록
- 다니 요시토모
- 이치로 오자와
- 야와라!
- 전일본 유도 연맹
- 국제 유도 연맹
10. 외부 링크
- [https://www.judoinside.com/judoka/2970/Ryoko_Tani/judo-career 다니 료코 (Judoinside)]
- [http://www.olympedia.org/athletes/33327 다니 료코 (Olympedia)]
- [https://web.archive.org/web/20171101000000/http://www.sports-reference.com/olympics/athletes/ta/ryoko-tamura-tani-1.html 다니 료코 (Sports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