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일(金一, 1910년 3월 20일 ~ 1984년 3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본명은 박덕산(朴德山)이며, 김덕산이라는 별칭도 사용했다. 그는 1972년 12월부터 1976년 4월까지 정무원 총리를 지냈고, 1976년 4월부터 1984년 사망할 때까지 국가 부주석을 역임했다.
김일은 1910년 함경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2년 지하 조선공산당 활동에 참여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항일 운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로동당과 정부의 핵심 직책을 두루 거치며 북한 정권 수립과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했다. 1970년대에는 김일성과 최용건 다음으로 높은 당내 서열을 차지했으며, 사망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김정일보다도 상위 서열이었다. 그는 중소 분쟁 시기 북한의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옹호하고,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는 등 주요 정치 활동을 펼쳤다. 1984년 3월 9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김일성 집권 이전부터 함께했던 '구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2. 생애 및 배경
이 절에서는 김일의 출생과 어린 시절, 그리고 일제 강점기 동안의 항일 운동 및 소련 복무 경험을 다룬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김일은 1910년 3월 20일 함경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박덕산(朴德山)이며, 김덕산이라는 별칭도 사용했다. 그의 가명 '김일'은 그가 김일성에게 오직 김일성밖에 모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원래 소련에 거주하다가 1930년대 중반 만주로 건너왔거나, 소련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인근의 조선인 집단 농장(콜호스)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2.2. 항일 운동 및 소련 복무
1932년부터 김일은 조선공산당의 지하 활동과 대중 단체 선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연길현 위원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5년 10월 만주의 항일 빨치산에 가담하여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싸웠다.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6사 제8단 정치위원을 역임했으며, 소련 영토로 들어간 후에는 제88독립저격여단 제1대대 당 서기로 복무했다. 1945년 9월에는 적성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김일성과 함께 동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
3. 해방 이후 경력
이 절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한반도 해방 이후 김일의 활동과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과정, 그리고 그가 역임한 주요 정부 및 당 직책에 대해 설명한다.
3.1. 북조선 정권 수립 기여
1945년 8월 조선이 해방된 후, 김일은 9월 19일 소련군 함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제88여단 대원들과 함께 원산항에 입항하며 귀국했다. 1945년 11월에는 북조선공산당 평안북도 당 비서로 활동했다. 1946년부터 여러 중요한 군사 직책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9월에는 제1사단 문화부사단장을 겸임하며 조선인민군의 강화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1946년에는 보안 간부 훈련 대대 부사령관 겸 문화 부사령관을 지냈다.
1946년 11월 24일, 김일은 북조선로동당 제1기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이래 사망할 때까지 대의원직을 수행했다. 1948년에는 조선로동당 제2기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2일 정부 수립 직후 민족보위성 부상 겸 문화훈련국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문화훈련국 부국장이었던 동명이인 김일(金日)과 구별하기 위해 그는 '큰 김일'로 불리고 부국장은 '작은 김일'로 불렸다고 한다.

1949년에는 조선인민군 정치보위국장을 맡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비밀 특사로 파견되어 마오쩌둥 등에게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을 역임했다. 1950년 12월 21일 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비행기가 없으면 싸울 수 없다"며 투항주의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아 무정, 림춘추, 최광, 김한중 등과 함께 해임되었다. 그러나 후에 복귀하여 내무성 정치국장, 평안남도 당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조선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체신성 정치국장, 민족보위성 부상, 전선사령부 군사위원 등을 겸하며 주로 후방의 전시 업무를 관장했다.
3.2. 주요 정부 및 당 직책
1953년 6월, 김일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제2기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신설된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제2기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후에 '정치국 상무위원회'로 개칭)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54년 3월에는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박문규의 후임으로 농업상을 겸임했다. 부수상 겸 농업상으로서 그는 전후 복구 시설과 사회주의 기초 건설에 관한 정책을 추진하고 당의 노선을 정비하는 데 기여했다.
1956년 4월 제3차 당 대회에서 당 상무위원회 위원(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당내 서열 4위에 올랐다. 1959년 3월에는 내각 제1부수상으로 승진했다. 1961년 9월 18일부터 1966년 10월 12일까지 제4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박금철, 최용건, 김창만, 이효순 등과 함께 김일성의 지도 아래 활동했다. 1966년 10월 제2차 당 대표자회에서는 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가 되었다. 1970년에는 김일성과 최용건 다음으로 조선로동당 내 최고위급 인사가 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고 내각이 정무원으로 개편되면서, 김일은 12월 28일 초대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도 겸했다. 1976년 4월 19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했으며, 4월 29일 건강 악화로 인해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곧바로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1977년 12월 15일 국가 부주석 임명이 재확인되었고, 그는 1984년 사망할 때까지 박성철과 함께 부주석직을 유지했다.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는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재선되었다.
4. 주요 정치 활동
이 절에서는 김일의 정치적 신념, 대외 정책, 남북 관계 등 주요 정치적 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4.1. 대외 관계 및 정책
1960년대, 김일은 중소 분쟁 시기에 소련과 중국 양측으로부터의 독립적인 입장을 강화하며 북한의 독자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하지 않은 북한처럼 루마니아도 코메콘에 참여하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다. 또한 소련과의 무역 및 국방 협정 협상에 참여했으며, 1967년 3월에는 모스크바와의 경제 및 군사 협정 체결을 선언했다.
1965년 7월 13일, 그는 경제 사절단을 이끌고 북베트남을 방문했다. 당시 관극회 자리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맞서 북한 역시 파병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하며,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이처럼 그는 북한의 대외 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4.2. 남북통일 관련 활동
1979년, 김일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대남 관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0년 제6차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이 축출될 경우에만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하의 남북통일을 제안했다. 1981년 전두환이 신년사에서 김일성의 남한 방문을 요청하자, 김일은 즉각 남한 행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며 어떠한 대화도 김일성의 요구가 모두 충족된 후에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명에서 "이것은 [전두환의] 더러운 민족 분열적 본성을 미화하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중의 호의를 얻기 위한 어리석은 익살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미 명백히 발표했듯이, 전두환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함께 할 만한 가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 제안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악당의 어리석은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주한 미군이 철수하고 남한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반공 대결 정책이 종식되지 않는 한,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군사 파쇼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총선거가 가능한 시기는 요원하며, 민족 자결과 민주적 절차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일은 "민족 통일의 길을 가로막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행동으로 새로운 출발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내일이라도 현 남한 통치자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조직될 통일 협의체가 '민족통일추진회의'든 '민족통일협의회'든 어떤 형태든 상관없으며, 북한은 그 명칭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남 당국과 각 정당, 단체, 그리고 국내외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여해야 하며,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수립 제안을 포함한 모든 통일 제안과 민족 통일의 이익을 위한 남북 관계 발전의 당면 문제들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발언 3주 후, 그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북측 대표 50명과 남측 대표 50명으로 구성된 회의를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이 제안에는 1980년 남한에서 금지된 정당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남측 대표로 포함되었으나, 당시 집권당 인사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논란을 빚었다.
5. 개인사 및 평가
이 절에서는 김일의 사생활, 가족 관계, 성격 및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평가를 다룬다.
5.1. 가족 관계
김일의 배우자는 중국인 여성으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 아들: 박용석 (朴容錫박용석한국어, 1928년 ~ 2007년 3월) - 정무원 철도부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아들: 박기서 (朴基瑞박기서한국어, 1929년 ~ 2010년 1월 5일)
5.2. 인물 평가 및 관계
유성철 (兪成哲유성철한국어)은 김일을 "상당한 인물로, 인간적인 따뜻함과 폭넓은 이해력을 지녔으며, 사물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정확했다. 다만 아쉽게도 권력욕이 적어 권력 투쟁을 통해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책략을 부리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소련파 출신인 김봉률 (金奉律김봉률한국어)이 김일성 체제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김일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
허진 (許真허진한국어)은 저서 『북조선왕조성립비사』에서 김일을 "원칙적이지만 성격이 온화하고, 김책, 강건 등과 함께 항일 빨치산 출신자 중 가장 신망이 높은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또한 "한마디로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인간미가 풍부하며, 실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소련, 연안, 국내 및 빨치산 출신 간부들로부터 한결같이 존경과 신임을 받아온 인물이다"라고 덧붙였다. 주영복 (朱栄福주영복한국어)은 저서 『조선전쟁의 진실』에서 김일을 "키가 크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수많은 장군들 중에서 현대전에서 비행기의 역할을 절실히 인정한 이는 그(김일) 혼자일 것"이라고 묘사했다. 김일은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 아버지의 재산을 몰수당했던 이활 (李闊이활한국어)을 보호하고 그의 재산을 되찾아주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이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강력히 추천했다고 주장한다. 1974년 2월 제5기 당 중앙위원회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김정일(당 서기)의 당 정치국원 선출에 대해 김정일의 젊음을 이유로 주저했을 때, 김일이 솔선수범하여 김정일의 당 정치국원 선출과 후계자 옹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다른 간부들도 이에 동조하여 김정일이 후계자로 대우받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일은 김정일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는 보도도 존재한다. 그가 사망할 당시, 김일은 김일성 다음으로 높은 서열이었으며, 공식적으로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보다도 상위 서열이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을 김일성의 "가장 가깝고 훌륭한 혁명적 동지"라고 칭했으며, 그의 죽음을 "우리 당과 인민에게 고통스럽고 큰 손실"이라고 보도했다.
6. 건강 및 사망
1966년, 김일성은 통상적인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일이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에 김일성이 그의 치료를 위한 조치를 마련하느라 신년사를 건너뛰었다고 한다.
1976년 4월 29일, 김일은 건강 악화로 인해 정무원 총리직에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1982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루마니아에서 치료를 받았다. 1983년 다시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례적인 모임에 불참하는 등 그의 건강은 계속 좋지 않았다.
김일은 1984년 3월 9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69명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가 주관하는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죽음은 김일성이 권력을 잡기 전부터 함께했던 "구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지배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그의 묘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
7. 저술 및 수상
이 절에서는 김일의 저술, 연설문, 수상 경력 및 받은 훈장 등에 대한 정보를 포함한다.
- 주요 저술:**
- 《당면한 정세에 대처하여 경제건설과 국방력 강화를 더욱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1968년 인민경제발전계획에 대하여》(1964년, 《코리아 투데이》 부록)
- 《아시아 인민은 단결하여 미제 침략자들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라!》(1970년, 베이징 외국어출판사) - 1970년 6월 25일 '미제 반대 투쟁의 날' 평양 집회 연설문 포함.
- 《존경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제시하신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 문제에 관한 테제"의 이행 총화와 앞으로의 과업에 대하여: 보고》(1974년, 평양 외국어출판사)
- 《붉은 태양 아래 20년간의 항일혁명》(총 5권, 1981년~1988년, 평양 외국어출판사) - 최현, 박성철, 오진우, 서철, 림춘추, 오백룡, 전문섭, 한익수, 박용순 등과 공동 저술.
- 수상 경력:**
- 최고 훈장인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 그 외에 국기훈장 제1급, 자유독립훈장 제1급, 공화국 창건 기념 훈장을 비롯한 다수의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 학위:**
- 타슈켄트종합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8. 유산 및 영향력
김일의 사망은 김일성이 권력을 잡기 전부터 함께했던 "구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지배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는 1960년대 중소 분쟁 시기, 소련과 중국 양측으로부터의 독립적인 노선을 옹호하며 북한의 독자적인 입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내각 부수상과 농업상으로서 전후 복구 사업과 사회주의 기초 건설 정책을 추진하며 북한의 경제 재건과 당 노선 정비에 기여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남북 관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전두환 정부의 제안을 비판하고 북한의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며 통일 관련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을 지지했다는 북한 내부의 공식적인 주장과, 동시에 그가 김정일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었다는 외부 보도는 그의 복합적인 정치적 유산과 후대 권력 구도에 미친 미묘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의 높은 서열과 김정일과의 관계는 북한 권력 승계 과정의 복잡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