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 忠道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일본어)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외교관, 문학가로,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오지마 전투의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91년 나가노현에서 사무라이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업 성적과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특히 미국 유학 경험을 통해 미국의 막대한 산업력과 국력을 직접 목격하며,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몇 안 되는 '지미파(知米派)' 장군 중 한 명이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그는 홍콩 전투에 참전했으며, 1944년에는 이오지마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상대로 승리가 불가능함을 직감하고, 기존의 일본군 전술인 '수제 격멸주의'와 '반자이 돌격'을 금지하며 지하 요새를 활용한 장기 지구전 및 소모전 전략을 수립했다. 구리바야시의 지휘 아래 이오지마 수비대는 36일간 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저항했고, 이는 미군 지휘관들로부터 "가장 강력한 적수"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전투의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들과 고난을 함께하며 지휘했던 그는 최후의 총공격을 감행하다 전사했으며,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전후 그의 전술적 능력과 인간적인 면모는 연합군과 일본 내에서 모두 높이 평가되었고, 특히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1891년 7월 7일 나가노현 마쓰시로정의 유서 깊은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센고쿠 시대부터 사나다 가문 휘하의 영주 귀족이었고, 에도 시대에는 마쓰시로 번의 향사(鄕士) 가문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비단 및 은행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귀족 신분으로 인해 두 사업 모두 실패했다. 1868년과 1881년의 화재로 재산을 잃은 후, 그의 가족은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아버지 쓰루지로(Tsurujiro)는 목재 및 토목 공사 관련 직업을 가졌고, 어머니 모토(Moto)는 농장을 운영하며 가계를 꾸렸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마쓰시로 고등 초등학교와 나가노현 나가노 중학교(현 나가노 고등학교)에서 구리바야시는 학업적으로 매우 뛰어났으며, 특히 영어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처음에는 외신 기자를 지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오지마에 주둔할 당시에도 기자에게 언론인이 될 가능성을 탐구했었다고 말했다. 나가노 중학교 동창이었던 가네코 시게지(金子繁治) 해군 중장은 그가 "한때 학교 당국에 대항하여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간신히 퇴학을 면했다. 그 시절에도 그는 시 쓰기, 작문, 연설에 능했다. 그는 젊은 문학 애호가였다"고 회상했다.
학생 시절, 구리바야시는 상하이에 있는 명문 일본 대학인 동아동문서원과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모두 합격했으나, 최종적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26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 742명 중 125등의 성적으로 1914년 졸업했다.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17년 10월부터 1918년 7월까지 육군 기병학교 을종 학생으로 마술을 전공했다. 그는 기성이 거칠어 육군 기병학교의 누구도 꺼리던 말을 여러 번 낙마하면서도 계속 타서 결국 길들였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1920년 12월 7일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고등 지휘 훈련을 받았으며, 1923년 35기생으로 졸업생 중 차석을 차지하며 은사의 군도(恩賜の軍刀)를 하사받았다. 육군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은 천황으로부터 군도를 하사받고 해외 유학의 특권을 얻었다. 구리바야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독일이나 프랑스를 선택했던 것과 달리, 미국으로 홀로 유학을 선택하여 미국 제1기병사단에 파견된 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28년 3월 36세의 기병 대위로 일본을 떠나 뉴욕주 버펄로의 한 일반 가정에 머물렀다.
2.2. 군 경력 및 외교 활동

미국에서의 경험은 구리바야바시를 다른 일본 제국 육군 장군들과 차별화시켰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 등록하여 영어, 미국 역사, 미국 정치 과정을 수강하고 이수하며 적극적인 학생 생활을 했다. 또한 미시간 대학교에서도 유사한 과목들을 청강했다.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워싱턴 D.C.,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 등지를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도 방문했다. 그는 쉐보레 자동차를 구입하여 미국 전역을 여행했으며, 한 미국 장교로부터 운전을 배웠다. 포트 라일리에서 미군과 훈련하는 동안 구리바야시는 조지 밴 혼 모즐리 준장과 친분을 쌓았다.
구리바야시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제가 대위였을 때 미국에 3년간 있었습니다. 미국 장교들에게 운전을 배웠고, 차를 한 대 샀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군대와 산업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공장 지역도 보았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산업이 군사 사업을 위해 동원될 것입니다."
그의 아들 구리바야시 타로(栗林太郎)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아버지는 교환 장교로 미국에 머물렀습니다. 그 시절, 그는 종종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게 인쇄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항상 제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쉬운 편지를 쓰셨습니다. 편지에는 항상 스케치를 동봉하셨습니다. 저는 이 그림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편지에는 많은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보스턴을 방문했을 때는 하버드 대학교 정원에 엎드려 시계탑을 바라보았고, 다른 편지에서는 버펄로를 산책하거나, 미국 아이들과 놀거나, 의사 후루코치(Furukohchi)의 집에 초대받는 등의 모습이 있습니다. 편지들을 통해 아버지가 미국 여러 곳을 운전하며 다니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며, 신사가 되려 노력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는 외국에 많은 친구를 두셨습니다."
도쿄로 돌아온 후, 구리바야시는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캐나다 주재 일본군 초대 무관으로 임명되었다. 1933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도쿄의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여러 군가(軍歌)의 가사를 작사했다. 1940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진주만 공격이 임박했을 때, 구리바야시는 가족들에게 "미국은 일본이 싸워야 할 세상의 마지막 나라"라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3. 태평양 전쟁 참전

1941년 12월, 구리바야시는 사카이 다카시가 지휘하는 일본 제23군의 참모장으로 홍콩 전투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3군의 홍콩 점령은 끔찍한 학살을 초래했다. 전쟁 후,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는 중국 전범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9월 30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구리바야시 개인의 행동은 달랐다. 한 전직 부하에 따르면, 구리바야시 장군은 참모본부 장교로서는 거의 전례 없이 정기적으로 병원의 부상병들을 방문했다고 한다.
1943년,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주로 예비 및 훈련 사단이었던 일본 제2근위사단의 사령관으로 재배치되었다. 1944년 5월 27일, 그는 일본 제109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불과 2주 후인 1944년 6월 8일, 그는 도조 히데키 총리가 서명한 명령을 받아 오가사와라 제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오지마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 구리바야시 요시이(栗林義井)에 따르면, 남편은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이오지마에서 자신의 유골조차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가케하시 구미코에 따르면, 구리바야시는 일본의 대미 전쟁이 '승산 없는 상황'이며 협상에 의한 평화로 종결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살 임무에 선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참모본부와 도조 내각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눈에 그는 '패배주의자'로 비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오지마로 떠나기 전 히로히토 천황을 개인적으로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요시이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천황과의 만남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대신 그는 집 부엌의 통풍 문제를 고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표현하며, 아들 타로가 수리를 완료하여 가족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상세한 도면까지 그려 보냈다.
3.1. 이오지마 방어 사령관 임명
1944년 6월 19일, 구리바야시 장군은 이오지마의 치도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당시 섬의 수비대는 해변에 참호를 파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구리바야시는 섬을 면밀히 조사한 후, 병사들에게 방어 시설을 내륙에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예상되는 해변 상륙에 대해 심각하게 저항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오지마 방어를 거의 전적으로 지하에서 수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병사들은 섬 전체를 18 km가 넘는 터널, 5,000개의 동굴, 그리고 토치카로 벌집처럼 만들었다. 그의 전 참모장에 따르면, 구리바야시는 종종 그에게 "미국의 생산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은 무시무시한 적과 전쟁을 시작했고, 우리는 그에 맞춰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리바야시는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이오지마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이오지마의 상실이 일본 전역을 미국의 전략 폭격기 사정권 안에 두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일본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지연시키고, 미국 정부가 일본 본토 침공 가능성을 재고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소모전을 계획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브래들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항상 사상자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상자 수가 너무 많으면,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더라도 여론은 작전을 실패로 규탄할 것이다. 구리바야시는 미국에서 살았다. 그는 우리의 국민성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사상자 수를 끊임없이 늘리는 방식으로 싸우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가 미국 여론이 일본과의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생각한다."
미군이 상륙하기 훨씬 전부터 구리바야시 장군은 이오지마에서 죽을 것을 완전히 예상하고 있었다。1944년 9월 5일, 그는 아내에게 "우리 가족이 이것에 직면해야 하는 것은 운명임이 틀림없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아이들과 함께 당당히 서 있어라. 나는 항상 당신들과 함께할 것이다"라고 편지를 썼다.
일본 수비대 중에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남은 생애를 전우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데 보낸 아베 다케오(阿部武雄) 일병도 있었다. 아베 일병은 훗날 "1944년 말까지 우리는 전투를 위해 식량을 아껴야 했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찾아다녔다. 만성 설사와 굶주림, 물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는 무자비한 태양 아래 모래 속에 벙커를 파고, 찜통 같은 지하 대피소를 건설했다. 우리는 해변의 우물에서 미지근한 해수를 요리에 사용했고, 마실 수 있는 적은 빗물을 아껴 마셨다. 하지만 하루에 물통 하나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최대량이었다"고 회상했다.
1944년 6월 25일, 구리바야시는 가족에게 "이곳에는 샘물이 없어 빗물로 버텨야 한다. 차가운 물 한 잔이 간절하지만 어쩔 수 없다. 파리와 모기의 수는 엄청나다. 신문도, 라디오도, 상점도 없다. 몇몇 지역 농장이 있지만 가축 외에는 적합한 대피소가 없다. 우리 병사들은 텐트를 치거나 동굴로 기어들어 간다. 동굴은 답답하고 열기와 습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나 역시 물론 비슷한 생활 환경을 견디고 있다... 이곳은 살아있는 지옥이며, 내 평생 이와 비슷한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편지를 썼다.
구리바야시는 병사들을 비전통적인 전투 방식에 대비시키기 위해 여섯 가지 "감투의 맹세(敢闘ノ誓)"를 작성하여 널리 배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이 섬을 끝까지 온 힘을 다해 방어할 것이다.
- 우리는 폭발물을 쥐고 적 전차에 몸을 던져 파괴할 것이다.
- 우리는 적들 사이로 돌진하여 그들을 도륙할 것이다.
- 우리의 모든 사격은 목표에 명중하여 적을 죽일 것이다.
- 우리는 적 열 명을 죽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 우리 중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게릴라 전술로 적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구리바야시는 또한 "담병의 전투 심득(膽兵ノ戦闘心得)"이라는 일련의 지침을 '용감한 사단' 병사들에게 작성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투 준비.
1. 공습 중이든 전투 중이든 모든 순간을 활용하여 적을 10대 1의 비율로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라.
2. 동료들이 쓰러지더라도 쉬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든 사격하고 공격할 수 있는 요새를 구축하라.
3. 단호하게 행동하고, 격렬한 포격 속에서도 보급품이 지속될 수 있도록 식량과 물을 진지에 비축할 준비를 신속히 하라.
방어 전투.
1. 강력한 화력으로 미국 악마들을 섬멸하라. 조준을 개선하고 첫 발에 목표를 맞추도록 노력하라.
2. 우리가 연습했듯이 무모한 돌격을 삼가고, 적을 격파했을 때의 순간을 활용하라. 다른 적들의 총알에 주의하라.
3. 한 사람이 죽으면 방어에 구멍이 생긴다. 인공 구조물과 자연 지형을 자신의 보호를 위해 활용하라. 위장과 엄폐에 주의하라.
4. 적 전차를 폭발물로 파괴하고, 전차와 함께 여러 적 병사들을 처치하라. 이것이 공을 세울 최고의 기회이다.
5. 전차들이 굉음을 내며 다가오더라도 놀라지 마라. 대전차 포화로 그들을 쏘고 전차를 사용하라.
6. 적이 진지 안으로 침투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완강히 저항하고 그들을 사살하라.
7. 넓은 지역에 드물게 분산되어 있다면 통제가 어렵다. 전진할 때는 항상 담당 장교에게 알려라.
8. 지휘관이 쓰러지더라도, 필요하다면 혼자서라도 진지를 계속 방어하라.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용감한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9.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적을 섬멸하는 데 집중하라. 용감하라, 전사들이여, 휴식과 수면이 불가능하더라도.
10. 각자의 힘이 우리 승리의 원인이다. 용감한 사단의 병사들이여, 전투의 가혹함에 무너지지 말고 죽음을 서두르지 마라.
11. 단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열 명을 죽인 후에 죽으면 전장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
12. 전투에서 부상을 입더라도 계속 싸워라. 포로가 되지 마라. 마지막에는 적이 너를 찌르듯이 너도 적을 찔러라.
4. 이오지마 전투


1945년 2월 19일, 미국 해병대는 섬 남쪽 해안에 첫 병력을 상륙시켰다. 기존의 일본군 방어 방식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접근 방식으로, 미군 장교와 병사들은 처음에는 방해받지 않고 상륙이 허용되었고, 그 후에 지하 벙커에서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밤이 되자, 홀랜드 스미스 해병대 장군은 지휘함 USS 엘도라도에서 보고서를 검토했다. 그는 특히 구리바야시의 병사들이 반자이 돌격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종군 기자들에게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작전을 지휘하는 일본 장군은 정말 영리한 놈(smart bastard)이다"라고 말했다.
군사 역사학자 호소키 시게토키(細木茂時)에 따르면, "이오지마 생존자들의 회고록 모음집인 '이오지마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발견하고 이 작가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본 병사들은 30 kg도 나가지 않았고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성에서 온 것 같았던 이 야윈 병사들은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적에 맞섰다. 나는 높은 사기를 느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일본군이 건설한 지하 대피소는 한동안 유리했다. 적의 박격포와 폭격은 지하 10 m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그때 미국인들은 구멍을 파고 노란 인 가스를 땅속으로 쏟아부었다. 그들의 보병도 시간당 10 m의 속도로 통로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불태우며 나아갔다. '이것은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전보가 보존되어 있다. 미군은 매일 북쪽으로 진격했다. 3월 16일 저녁, 그들은 이오지마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구리바야시 장군은 이오지마 수비대의 잔존 병력을 해병대가 "협곡(The Gorge)"이라고 불렀던 강력하게 요새화된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지치지마 무선국을 지휘했던 호리 요시타카(堀芳孝) 소령은 훗날 "구리바야시 장군은 며칠 밤낮으로 촛불 아래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잠들지 않고 전투를 지휘했다. 일본의 라디오 방송, 신문, 잡지는 그를 철저히 격려했으며, 특히 그의 고향의 노인과 젊은이, 소년 소녀들이 그의 승리를 위해 신께 기도했다"고 회상했다.
그레이브스 어스킨 해병대 장군은 일본계 미국인 해병대원과 포로로 잡힌 일본군 병사들을 보내 구리바야시와 그의 병사들에게 항복을 설득하려 했다. 한편, 구리바야시는 호리 소령에게 무전으로 "내 지휘하에 400명의 병력이 있다. 적은 전차의 포격과 화염으로 우리를 포위했다. 특히, 그들은 폭발물을 가지고 우리 동굴 입구에 접근하려 하고 있다. 내 병사들과 장교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적의 전선은 우리로부터 300 m 떨어져 있으며, 전차 포격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확성기로 항복을 권유했지만, 우리는 이 유치한 속임수에 비웃었을 뿐, 그들에게 맞서지 않았다"고 전했다.
1945년 3월 23일 저녁, 구리바야시는 호리 소령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무전으로 보냈다. "지치지마의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여 - 이오지마에서 안녕을 고한다." 호리 소령은 훗날 "그 후 3일 동안 그들과 통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3월 17일, 장군은 황군 본부에 세 편의 전통적인 와카 형태의 사세(辭世)의 시를 동봉한 작별 메시지를 보냈다. 역사학자 가케하시 구미코에 따르면, 이 모든 시는 "너무나 무심하게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군 지휘부에 대한 미묘한 항의"였다.
구리바야시 장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전황은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적의 상륙 이래, 제 지휘하의 장병들의 감투는 진정 귀신이 울 정도였습니다. 특히 상상을 초월하는 양적 우세로 육해공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마치 맨손으로나 다름없이 훌륭하게 분투를 계속한 것은 소관 스스로가 조금이나마 기쁨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끝없는 적의 맹공에 잇달아 쓰러져, 결국 기대에 반하여 이 요충지를 적의 손에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은 소관이 진정으로 황송하여 견딜 수 없는 바이며, 거듭 사죄드립니다. 이제 탄약은 바닥나고 물은 말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최후의 반격을 감행하고 용감하게 싸워야 할 때입니다. 황은을 깊이 생각하며,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져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이 섬을 탈환하지 않는 한, 황토는 영원히 불안할 것이라 생각하며, 설령 혼백이 될지라도 맹세코 황군이 다시 일어설 선봉이 될 것을 기약합니다. 여기에 최후의 관두에 서서, 거듭 속마음을 토로함과 동시에, 오직 황국의 필승과 안녕을 기원하며 영원히 이별을 고합니다."
그는 메시지를 세 편의 와카 시로 마무리했다.
- 나라를 위해 무거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화살과 총알 모두 소진되어, 슬프게 쓰러지는구나.
- 그러나 적을 치지 못한다면
내 몸은 들판에서 썩지 않으리.
정녕, 나는 일곱 번 다시 태어나
손에 창을 잡으리라.
- 추한 풀들이 이 섬을 뒤덮을 그때,
오직 황국의 앞날만을 한결같이 생각하리.
4.1. 최후의 항전과 죽음

구리바야시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1945년 3월 26일 새벽, 그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잠든 해병대와 공군 지상 요원들을 향한 삼면 공격을 감행하던 중 전사했다는 것이다. 구리바야시와 그의 병사들은 조용히 텐트를 베고, 잠든 병사들을 총검으로 찌르며, 수류탄을 던졌다. 미국 해병대 공식 역사에 따르면, "3월 26일 새벽 일본군의 공격은 반자이 돌격이 아니라, 최대한의 혼란과 파괴를 일으키기 위한 훌륭한 계획이었다." 이 공격은 양측 군인들 간의 백병전으로 절정에 달했다. 장군의 시신은 나중에 식별할 수 없었는데, 그는 일반 병사로 싸우기 위해 모든 장교 휘장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덜 신뢰할 수 있는 이론에 따르면, 구리바야시는 협곡의 본부에서 할복했다고도 전해진다. 장군의 아들 구리바야시 타로는 전쟁 후 일본 수비대 생존자 여러 명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 그는 아버지가 최후의 공격 중에 포격으로 전사했다고 믿고 있다.
구리바야시 타로에 따르면, "아버지는 죽은 후에도 자신의 시신이 적에게 발견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이전에 두 병사에게 삽을 들고 앞뒤로 함께 가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만일 자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시신을 묻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병사들과 함께 포탄에 맞아 전사하셨고, 치도리 마을의 나무 아래, 오사카 산 근처 해변에 묻히신 것 같습니다. 그 후 스미스 장군은 경의를 표하고 매장하기 위해 하루 종일 그의 시신을 찾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5. 사후 평가 및 유산
미국은 1945년 3월 26일 이오지마를 확보했다고 선언했으며, 미군 사상자는 26,039명에 달했다. 일본 수비대 22,786명 중 1,083명만이 생존하여 포로가 되었다. 소수의 일본군 잔류병은 계속해서 숨어 지내며 밤에는 미군 주둔지에서 식량을 훔쳤다. 마지막 두 명의 잔류병인 야마카게 쿠후쿠(Yamakage Kufuku)와 마쓰도 린소키(Matsudo Linsoki) 해군 기관총 사수는 1949년 1월 6일에 항복했다.
구리바야시 요시이(栗林義井)는 남편이 이오지마에서 전사했을 때 겨우 40세였으며, 그 후 홀로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들의 딸 다카코(Takako)에 따르면, "어머니는 숙녀로 자랐고, 결혼 후에도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았다. 평생 일해본 적이 없었지만, 전쟁 후 끔찍한 세월 동안 길거리에서 오징어를 파는 등의 일을 하며 우리를 키웠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오빠뿐만 아니라 저, 딸인 저까지 대학에 보냈다"고 한다.
1970년 이오지마에서 열린 일본과 미국 참전용사들의 재회 모임에 앞서, 구리바야시 요시이는 도쿄에서 열린 미국 참전용사들과의 오찬에 일본 전사자 가족들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그녀는 연설에서 그들의 우정 표현에 감사하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녀는 1985년과 1995년에 섬에서 개최된 '명예 재회(Reunions of Honor)'에도 참석했다.
데릭 라이트에 따르면, "구리바야시 장군의 이름은 전후 일본 역사에서 다른 뛰어난 지휘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함께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홀랜드 스미스 중장은 그의 자서전 《산호와 황동(Coral and Brass)》에서 그에게 최고의 찬사 중 하나를 보냈다. '태평양에서 우리의 모든 적수들 중에서 구리바야시는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5.1. 연합군의 평가


전투는 패배로 끝났지만, 불과 22 km2에 불과한 이오지마를 해병대에 더해 지상 임무를 맡은 육군 등 총 병력 111,308명, 그리고 해군 등 지원 인력을 포함한 작전 참가 병력 250,000명과, 단순 병력으로는 5배에서 10배 이상, 게다가 절대적인 제해권과 제공권을 가지고 예비 병력, 물량, 병참, 장비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미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고 미군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한 달 반 동안 이오지마를 방어한 그의 지휘력은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구리바야시에게 고전했던 미 해군과 해병대의 군 공식 보고서 및 사령관급 고위 장성들의 평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해병대 공식 전사(戰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은 미국인들이 전쟁에서 직면한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한 명이었다. 쉰 살이 넘은 이 '사무라이'는 천황에 의해 지명되었고, 찬사를 받았으며, 풍부한 전투 경험과 혁신적인 사고,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미군에 대한 구리바야시의 유일한 전투였지만, 구리바야시는 미국에서의 군 복무 경험을 통해 미래의 적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이오지마에 대한 미군의 침공을 격퇴하려는 이전 일본군의 시도 결과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평가할 수 있었다. 영웅적인 과장을 배제하고, 구리바야시는 타라와 전투에서 사이판 전투에 이르는 일본군의 실패의 특징이었던 '수제 방어' 전술과 '일か팔か(이치카바치카)의 반자이 돌격'을 거의 평가하지 않았다. 현실주의자 구리바야시는 일본군의 고갈된 함대나 공군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은 최근의 비아크 전투와 펠렐리우 전투의 방어 전술 패턴에 따라, 종심 방어로 이오지마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구리바야시는 '수제 배치·수제 격멸주의'와 '반자이 돌격' 전술을 피하고, 대신 미군에게 사기 상실을 유발하고 작전을 포기시키기 위해 소모전, 신경전, 장기 지구전을 펼쳤다."
또한 미국 해병대 공식 전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구리바야시는 현실주의자였다. 구리바야시는 이오지마의 임시 활주로가 일본군의 귀중한 자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오지마는 B-29 폭격기에 대한 공격 거점이었고, 미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을 것이 확실했다. 이오지마가 미국의 손에 떨어지면 그 비행장이 일본에 큰 위협이 될 것임도 인식하고 있었다. 구리바야시에게는 섬 전체를 폭파하거나, 죽을 때까지 싸우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구리바야시는 후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과거 섬 방어전에서 행해진 수제 격멸 전술과 반자이 돌격을 금지하고, 진보된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구리바야시는 해군과의 사이에서는 몇 가지 타협을 했지만, 육군에서는 참모장을 포함한 18명의 고위 장교를 교체했으며, 남은 장교들은 구리바야시의 방침에 따랐다. 구리바야시는 해군이나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고 유능한 야전 지휘관임을 증명했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오지마 방어의 총지휘관인 탁월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육군 중장은 이오지마를 태평양에서 가장 난공불락의 20719905 m2 (8 mile2) 섬 요새로 만드는 데 착수했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형의 전폭적인 이용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역전의 용맹함으로 이름난 해병대 지휘관들조차 정찰 사진에 나타난 구리바야시의 주도면밀한 준비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평가했다.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이오지마의 방어 배치는 구식인 수제 격멸 전법과, 펠렐리우 전투나 레이테만 전투, 루손 전투에서 시도된 새로운 종심 방어 전술의 이점을 모두 공유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이오지마에서 지상전을 지휘하며 구리바야시와 대결했던 제56임무부대 사령관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자신의 저서 등을 통해 구리바야시에 대한 많은 평가를 남겼다.
"구리바야시의 지상 배치는 나(스미스)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프랑스에서 보았던 어떤 배치보다 훨씬 우수했다. 또한 참관자들의 말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독일 국방군의 배치마저 능가했다."
"태평양에서 대결했던 일본군 지휘관들 중에서 구리바야시는 가장 용맹했다. 섬 지휘관들 중에는 명목뿐인 자들도 있었고, 적 전사자들 속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사라지는 자들도 있었다. 구리바야시의 성격은 이오지마에 그가 남긴 지하 방비에 깊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오지마는 처음 며칠 동안 조직적 저항이 무너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구리바야시의 강력함은 이러한 군 조직이나 군 사령관뿐만 아니라, 말단의 해병대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다음과 같은 발언도 해병대 공식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 중에 구리바야시 같은 사람이 또 없기를 바란다."
영국의 역사 작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저작이 많은 앤터니 비버도 구리바야시를 높이 평가했다.
"이오지마의 수비를 총괄하는 육해군 부대 지휘관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이었다. 구리바야시는 뛰어난 교양인이자, 음영이 풍부한 성격을 가진 기병 장교였다. 그는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휘하 각 진지를 유지시키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갖추었다."
5.2. 일본 내 평가 및 재조명
구리바야시는 사후 일본과 미국의 전사 연구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오지마 전투를 제외하고는 군 참모장이나 기병 여단장 등 군인으로서 눈에 띄는 에피소드가 적고, 국지전에서 전사한 지휘관이라는 점 때문에 일본에서도 일반적인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 출간된 가케하시 구미코의 《사라져야 할 슬픔: 이오지마 총지휘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와 이듬해인 2006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타 이쿠히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라져야 할 슬픔》(가케하시 구미코 저)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도 흥행하면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이름은 일본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태평양 전쟁 최고의 명장'이라는 지위를 거의 확립한 것이 아닐까요."
구리바야시는 어린 시절 한때 양자로 입양된 적이 있었는데, 양자로 지냈던 당시의 기록은 오랫동안 불분명했다. 그러나 최근 생가에서 소년 시절의 일기장과 성적표 등이 발견되면서, 출생 직후 지역 사족인 구라타(倉田) 가문으로 입양되었던 시기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소년기의 상세한 내용이 밝혀졌다.
그의 묘소는 나가노시 마쓰시로정 도요사카(豊栄)의 메이토쿠지에 위치하지만, 그의 유골은 안치되어 있지 않다. 구리바야시의 큰형이 계승한 나가노시 마쓰시로의 생가에는 불단에 이오지마의 돌과 함께, 구리바바야시가 진두지휘하며 전사한 3월 26일 새벽의 마지막 총공격에 참가하여 살아 돌아온 육군 하사관이 복귀 직후인 1946년에 구리바야시의 아내 요시이에게 보낸 편지(마지막 총공격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가 놓여 있었다.
1967년, 그는 훈1등에 서훈되어 욱일대수장을 사후에 수여받았다.
6. 개인적인 삶
구리바야시는 1923년 12월 8일 구리바야시 요시이(栗林義井, 1904년~2003년)와 결혼했다. 그들은 아들 타로(太郎)와 두 딸 요코(洋子), 다카코(たか子)를 두었다.
6.1. 가족 관계와 서신

그는 육군대학 차석의 수재이자 "태평양 전쟁 굴지의 명장"으로 칭송받는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동시에 좋은 가장이기도 했다. 북미 주재 시절과 이오지마 부임 이후에는 꾸준히 가족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미국에서 쓴 편지들은 첫째 아들 타로가 어렸기 때문에 구리바야시가 직접 그린 삽화가 들어간 그림 편지였다. 이오지마에서 둘째 딸 다카코(그는 다카코를 "타코짱"이라고 불렀다)에게 보낸 편지에는 군인으로서의 모습보다는 한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오지마 부임 직후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실제 편지는 일본 방위성에 보관되어 있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타코짱을 데리고 시내를 걷는 꿈을 꾸지만, 그건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다. 타코짱. 아버지는 타코짱이 커서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몸을 튼튼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머니 말씀을 잘 지켜서 아버지에게 안심시켜 주렴. 전지의 아버지로부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집 걱정이나 생활에 대한 주의 사항 등이 세세하게 적혀 있어, 그의 꼼꼼하고 인정 많은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들은 훗날 엮여 미국 시절의 편지는 《「옥쇄 총지휘관」의 그림 편지》(쇼가쿠칸 문고, 2002년)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분게이슌주, 2006년)로 간행되었다. 그의 집은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되었지만, 가족들은 나가노현으로 소개하여 화를 면했다.
그의 동생 구리바야시 쿠마오(栗林熊尾)가 형을 따라 나가노 중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구리바야시는 육군에서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이 우대받고 중학교 출신은 육군대학을 나와도 주류가 될 수 없으니, 유년학교가 없는 해군병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쿠마오는 해군병학교 시험에 실패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지만(30기), 졸업 후 폐결핵으로 요절했고, 구리바야시는 동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6.2. 문학적 재능
원래 신문 기자 지망생이었던 만큼, 문학적 재능이 있는 군인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육군성 병무국 마정과장(馬政課長)으로서 군가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의 선정에 관여했을 때는, 가사의 한 구절을 수정했다고 한다.
7. 대중문화 속 모습
구리바야시는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배우 와타나베 켄이 연기하면서 국제적인 관객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 아이리스 야마시타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많은 뉘앙스들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능숙한 연출과 배우 와타나베 켄의 능숙한 연기 아래 스크린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고 느꼈습니다. 가장의 온화함과 따뜻함, 그리고 지휘관으로서의 강인함, 실용성, 위엄의 완벽한 균형을 표현했습니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바람 앞의 등불(Lamps Before the Wind)》이었는데, 이는 구리바야시가 이오지마 전투 전에 아들 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빠의 삶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고 쓴 구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8. 계급 및 훈장
8.1. 승진 기록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승진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계급 | 날짜 |
---|---|
육군 대장 | 1945년 3월 17일 |
육군 중장 | 1943년 6월 |
육군 소장 | 1940년 3월 |
![]() 육군 대좌 | 1937년 8월 |
![]() 육군 중좌 | 1933년 8월 |
![]() 육군 소좌 | 1930년 3월 |
![]() 육군 대위 | 1923년 8월 |
![]() 육군 중위 | 1918년 7월 |
![]() 육군 소위 | 1911년 12월 |
그는 1945년 3월 17일 전사로 인정되어 특별히 육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당시 일본 육군에서는 중장으로 전사한 자 중 친보직(親補職)으로 2년 반 이상 복무하고 무공이 특히 현저한 자를 육해군 협의를 거쳐 대장으로 추서하는 내규가 있었으나, 1944년 5월 27일 제109사단장으로 임명된 구리바야시는 이 내규의 기간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특례로 대장에 추서되었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은 다음과 같다.
- 1934년 4월 29일: 훈4등 욱일소수장(旭日小綬章), 쇼와 6년 내지 9년 사변 종군기장
- 1940년 11월 10일: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
- 1967년 12월 23일: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 (사후 추서)
9. 관련 자료
- 신도 요시타카 - 구리바야시 장군의 외손자이자 일본의 정치인이다. 2015년 4월 30일, 아베 신조 총리의 미국 의회 합동 연설 자리에서 이오지마 전투에 미 해병대 대위로 참전했던 로렌스 스노든 해병대 중장과 악수했다.
- 2012년 4월, 구리바야시의 묘소가 있는 나가노시 마쓰시로정 도요사카의 메이토쿠지에는 나가노 중학교 출신인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육군 대장과 이마이 다케오 육군 소장의 현창비(顯彰碑)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