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선수 경력
고든 스트라컨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뮤어하우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히버니언의 팬이었다. 그의 아버지 짐은 비계공으로 일했고, 어머니 캐서린은 위스키 증류소에서 일했다. 스트라컨은 15세 때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주머니에 있던 펜이 오른쪽 눈에 박히는 사고를 당해 시력이 손상될 뻔했다. 펜이 눈에서 "천분의 일 인치" 정도만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히버니언으로부터 계약 제안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축구화 비용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1. 유년기와 초기 경력
고든 스트라컨은 14세에 던디와 계약하며 프로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는 던디에서 1군에 정착할 기회가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재능은 곧바로 드러났으며, 그는 2군 팀에서 뛰어난 선수로 명성을 얻으며 두 차례 스코틀랜드 올해의 리저브 선수상을 수상했다. 18세이던 1975년 8월, 아스널과의 친선 경기에서 앨런 볼 주니어를 압도하는 활약을 펼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더 선데이 포스트'는 그를 어린 빌리 브렘너에 비유하기도 했다.
스트라컨은 1975-76 시즌에 정규 선수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디비전의 첫 시즌이었다. 그는 이 시즌에 36번의 리그 경기 중 17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그의 팀 던디는 시즌 마지막 날 던디 더비 라이벌인 던디 유나이티드가 챔피언 레인저스와 예상치 못한 무승부를 기록하며 골 득실에서 앞서면서 결국 강등되었다.
1.2. 던디
토미 겜멜 신임 감독은 1976-77 시즌에 19세의 스트라컨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고, 그는 여전히 던디 역사상 최연소 주장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스트라컨 자신은 당시 자신의 주장 역할을 매우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나는 한심한 빌리 브렘너였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으르렁거리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축구 선수로서의 본분을 잊었다"고 회고했다.
던디는 하위 리그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고, 스트라컨은 1977-78 시즌 초반 지미 존스턴과의 음주 세션 이후 1군에서 제외되었다. 겜멜 감독은 또한 상대 팀들이 던디의 플레이메이커를 막기 위해 스트라컨을 집중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많은 태클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던디가 최상위 리그로 복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스트라컨은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던디의 회장은 또한 그의 가장 귀중한 자산을 현금화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겜멜 감독에게 "금요일까지 5.00 만 GBP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했다. 던디에서의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77년 10월 26일 팔머스턴 파크에서 퀸 오브 더 사우스에게 6 0으로 패한 리그컵 경기였으며, 스트라컨은 자서전에서 이 경기를 "당혹스러웠다"고 묘사했다.
1.3. 애버딘
1977년 11월, 스트라컨은 애버딘의 빌리 맥닐 감독에 의해 5.00 만 GBP의 이적료와 짐 시라의 추가 이적료로 영입되었다. 하지만 1977-78 시즌은 스트라컨에게 부진과 잔부상으로 힘든 시기였다. 애버딘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디비전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그는 1978년 스코틀랜드 컵 결승전에서 레인저스에게 패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트라컨은 1978년 2군 팀에서 스코틀랜드 2군 팀 컵을 우승했다.
1978년 여름, 맥닐 감독이 셀틱으로 떠나고 알렉스 퍼거슨이 애버딘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트라컨은 햄던 파크에서 열린 1979년 스코틀랜드 리그컵 결승전 (3월)에서 레인저스에게 패했지만, 던컨 데이비드슨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했다. 1978-79 시즌은 실망스러웠지만, 애버딘은 1979-80 시즌에 셀틱 파크에서 두 번의 승리를 포함한 막판 연승으로 셀틱과의 10점 차이를 극복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들은 다시 한번 1979년 스코틀랜드 리그컵 결승전 (12월)에 진출했으나, 던즈 파크에서 던디 유나이티드에게 3 0으로 패했다. 시즌이 끝난 후 스트라컨은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알렉스 맥리쉬가 팀에 잔류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후 스트라컨은 1984년까지 핏토드리에서 뛰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

1980-81 시즌에 애버딘은 리그에서 2위에 그쳤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최종 우승팀 리버풀에게 2라운드에서 패하며 탈락했다. 당시 리버풀 감독 밥 페이즐리는 스트라컨이 "영국 최초의 200.00 만 GBP 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트라컨은 이 시즌 복부 근육 파열로 시즌 절반을 결장했다.
1981-82 시즌에는 부상에서 회복한 스트라컨이 우측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스튜어트 케네디의 지원을 받음) 피터 위어와 함께 좌우 측면을 이끌었고, 애버딘은 강력한 우승 경쟁을 펼쳤으나 셀틱에게 2위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코틀랜드 컵 결승전에서 레인저스를 4 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스트라컨은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1982-83 시즌은 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이었다. 스트라컨은 리그컵에서 옛 소속팀 던디를 상대로 5 1 승리 중 4골을 넣으며 시즌 초반부터 맹활약했다. 비록 리그에서 3위(우승팀 던디 유나이티드에 1점 차이)에 그치고 리그컵 8강에서 탈락했지만, 애버딘은 스코틀랜드 컵과 UEFA 컵위너스컵을 모두 우승했다.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은 스웨덴 예테보리의 울레비에서 열렸으며,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연장 접전 끝에 2 1로 승리했다. 스코틀랜드 컵 결승전에서는 레인저스를 1 0으로 꺾었다.
애버딘은 1983-84 시즌에도 성공을 이어가며 리그 우승과 스코틀랜드 컵 우승을 달성했다. 스트라컨은 컵 결승전에서 셀틱을 상대로 마크 맥기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또한 1983년 UEFA 슈퍼컵에서 함부르크를 꺾고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을 차지하며 독특한 트레블을 완성했다.
1.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4년 8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스트라컨을 올드 트래퍼드로 데려오기 위해 50.00 만 GBP를 지출했다. 하지만 스트라컨이 이미 분데스리가의 1. FC 쾰른과 사전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유나이티드는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7.50 만 GBP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의 팀 동료 마크 맥기도 스트라컨이 독일에서 뛸 것이라는 생각에 함부르크와 계약했었다.
스트라컨은 1984-85 시즌 개막전에서 7경기 만에 4골을 넣으며 활기찬 시작을 보였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부 디비전에서 4위에 그쳤다. 그는 웸블리 스타디움 (1923년)에서 열린 1985년 FA컵 결승전에 출전하여 유나이티드가 에버턴을 1 0으로 꺾는 데 기여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오프더볼 움직임은 노먼 화이트사이드가 연장전 결승골을 넣을 공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5-86 시즌 초반 리그 10연승을 거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스트라컨 없이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시즌 대부분을 부상으로 결장해야 했고, 브라이언 롭슨과 같은 다른 핵심 선수들도 부상으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면서 팀은 또다시 4위에 머물렀다. 1986년 11월 론 앳킨슨 감독이 경질되고 알렉스 퍼거슨이 후임으로 부임하자, 스트라컨은 팀 동료들에게 울먹이는 시늉을 하며 "퍼거슨 감독이 나를 이렇게 남쪽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고 농담했다. 퍼거슨 감독은 스트라컨이 더 이상 스타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 그의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유나이티드는 1986-87 시즌에 실망스러운 11위를 기록했고, 1987-88 시즌에는 2위로 올라섰지만, 1988-89 시즌에는 다시 11위로 미끄러졌다.
1.5. 리즈 유나이티드
1989년 3월, 셰필드 웬즈데이의 론 앳킨슨 감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20.00 만 GBP를 제안하며 스트라컨에게 클럽 역사상 최고액의 계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리즈 유나이티드의 하워드 윌킨슨 감독이 같은 금액을 제시하며 스트라컨을 2부 리그로 이적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곧 엘런드 로드에서 바비 콜린스와 조니 자일스 같은 팬들의 사랑을 받던 선수들과 비교될 정도로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2년 계약을 맺은 그는 주장 완장을 받았다. 그는 비니 존스와 함께 예상 밖의 미드필더 파트너십을 형성하며 1989-90 시즌에 클럽을 2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리즈가 1부 리그로 승격하자, 윌킨슨 감독은 스트라컨, 개리 맥앨리스터, 데이비드 배티, 개리 스피드로 구성된 미드필드 쿼텟을 확보했다. 그들은 1990-91 시즌에 훌륭한 4위를 기록했으며, 리그컵 준결승에도 진출했다. 스트라컨은 이 시즌 활약으로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에서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스트라컨은 새로운 2년 계약을 체결한 후 1991-92 시즌에 리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로써 그는 전 스승 알렉스 퍼거슨과 리즈의 숙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우승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35세에 가까웠던 스트라컨은 좌골신경통의 영향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허리 부상으로 여러 경기에 결장했다. 클럽의 성공에 이어 스트라컨은 스포츠 공로를 인정받아 OBE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리즈는 성공을 이어가지 못했고, 1992-93 시즌에는 새롭게 프리미어리그로 개편된 리그에서 17위로 추락했다. 그럼에도 스트라컨은 인상적인 활약을 계속하며 클럽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3년 4월 10일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는 그의 리즈 유나이티드에서의 두 번째 해트트릭이었으며, 첫 번째는 1989년 9월 2부 리그에서 승격 라이벌 스윈던 타운을 상대로 4 0 승리에서 기록했다.
스트라컨은 1993-94 시즌에 37경기에 선발 출전했고, 리즈는 5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1994-95 시즌에는 거의 선발되지 못했으며, 이 시즌을 끝으로 6년간의 리즈 유나이티드 생활을 마감했다.
1.6. 코번트리 시티 (선수 겸 코치)
1995년 3월, 스트라컨은 코번트리 시티로 이적하여 론 앳킨슨 신임 감독의 수석 코치로 일하게 되었다. 앳킨슨 감독은 11년 전 그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데려온 인물이었다. 또한 1997년 여름에는 스트라컨이 앳킨슨의 후임으로 감독이 될 것이라는 합의도 이루어졌다. 스트라컨은 앳킨슨 감독으로부터 감독의 세밀한 부분들을 배우면서 팀을 코치하고 훈련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하이필드 로드에서 2년 동안 26번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출전하며 40세가 되던 해에 최종적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는 당시 프리미어리그 필드 플레이어 최고령 출전 기록이었다. 앳킨슨 감독은 스트라컨의 추천만으로 1996년 애버딘의 미드필더 오웬 제스를 영입했다. 그러나 이사야스 마르케스 소아레스는 스트라컨과의 불화로 팀을 떠났다. 코번트리는 개리 맥앨리스터를 주급 2.00 만 GBP에 300.00 만 GBP로 영입했는데, 이 거래는 맥앨리스터의 전 동료이자 친구인 스트라컨이 주도했고 앳킨슨은 이 거래에 크게 반대했다.
1996-97 시즌 초반 팀은 부진을 겪었고, 1996년 11월 구단 이사회는 앳킨슨에게 당초 합의했던 것보다 몇 달 일찍 물러나도록 요청했고, 스트라컨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 국가대표 경력

스트라컨은 1980년 5월 16일 윈저 파크에서 열린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스트라컨은 스코틀랜드가 198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으며, 예선전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유일한 골을 넣으며 중요한 득점을 기록했다. 족 스테인 감독이 월드컵을 앞두고 그를 쉬게 하고자 했기 때문에 1982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스페인 말라가의 라 로살레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는 5 2로 완승을 거두었고, 스트라컨은 이 경기에서 맨 오브 더 매치로 선정되었다. 이어서 세비야의 베니토 비야마린 스타디움에서 세계적인 강팀 브라질에게 4 1로 패했다. 세 번째 경기인 소련과의 경기에서는 다시 말라가에서 2 2 무승부를 기록하며 골 득실 차이로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스코틀랜드는 1986년 FIFA 월드컵 본선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1985년 9월 10일 니니언 파크에서 웨일스와의 무승부 직후 족 스테인 감독이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의 수석 코치인 알렉스 퍼거슨이 월드컵 캠페인을 맡게 되었다. 본선 진출을 위해 스코틀랜드는 플레이오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꺾어야 했다. 스트라컨은 햄던 파크에서 열린 1차전에는 출전했지만, 2차전은 결장했다.
멕시코에서 스코틀랜드는 어려운 조에 배정되었고, 네사우알코요틀 외곽의 에스타디오 네사 86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강팀으로 평가받던 덴마크에게 1 0으로 패했다. 스트라컨은 이어서 케레타로의 에스타디오 코레히도라에서 서독에게 2 1로 패한 경기에서 한 골을 넣었다. 그의 골 세리머니는 인상 깊었는데, 그는 광고판을 넘으려 했지만 작은 키 때문에 실패했고, 대신 광고판에 다리를 올린 채 동료들과 합류했다. 네사우알코요틀에서 열린 세 번째이자 마지막 조별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는 우루과이와 0 0으로 비겼는데, 우루과이는 호세 바티스타가 스트라컨을 겨냥한 위험한 태클로 1분도 채 되지 않아 퇴장당하며 10명으로 경기를 치렀다.
스트라컨은 앤디 록스버러 감독 체제에서 1군에서 밀려났고, 1990년 FIFA 월드컵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국가대표팀에 다시 발탁되어 UEFA 유로 1992 예선에서 주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장기간의 허리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선언하며 스웨덴으로 열린 본선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는 총 50번의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다.
3. 감독 경력
3.1. 코번트리 시티
론 앳킨슨이 1996년 11월 코번트리 시티의 단장이 되면서, 스트라컨은 선수 겸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알렉스 밀러를 수석 코치로 임명했다. 이후 경기 결과가 향상되면서 스트라컨은 12월에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새해에 들어 12경기 중 1승밖에 거두지 못하면서 코번트리는 강등권에 놓였다. 하지만 리버풀, 첼시,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막판 승리를 거두며 1점 차이로 강등을 피했다. 스트라컨은 첼시와의 하이필드 로드 경기에서 40세의 나이로 출전했는데, 이는 당시 프리미어리그 필드 플레이어 최고령 기록이었다.
스트라컨은 스웨덴 골키퍼 마그누스 헤드만과 수비수 롤랑 닐손, 네덜란드 미드필더 조지 보아텡, 루마니아 공격수 비오렐 몰도반 등 모두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선수들을 영입했다. 1997-98 시즌에 코번트리는 11위로 올라섰고, 1997-98 FA컵 8강에도 진출했다. 밀러가 팀을 떠난 후, 스트라컨은 개리 펜드레이를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는데, 펜드레이는 여러 클럽에서 스트라컨의 오랜 수석 코치로 일하게 된다. 스트라컨은 1998년 2월에 다시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코번트리는 1998-99 시즌에 15위, 1999-2000 시즌에 14위를 기록했다. 스트라컨은 로비 킨에게 600.00 만 GBP, 무스타파 하지와 유세프 치포에게 500.00 만 GBP를 지출했고, 디온 더블린을 라이벌 애스턴 빌라로 이적시켰다. 코번트리는 2000-01 시즌이 끝날 때 강등되었고, 이로 인해 스트라컨은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떨어졌다. 크레이그 벨라미는 실망스러웠고, 로비 킨은 팔렸으며, 개리 맥앨리스터는 리버풀로 떠났다. 스트라컨은 공격수 리 휴즈를 영입하여 승격을 노렸지만, 팬들의 불만이 커지자 2001-02 시즌 1부 디비전 5경기 만에 해고되었다. 그의 후임인 롤랑 닐손은 팀을 11위로 이끌었다.
3.2. 사우샘프턴
스트라컨은 몇 주 만에 감독직으로 복귀하여 프리미어리그의 사우샘프턴 감독을 맡았다. 사우샘프턴은 새로운 세인트 메리스 스타디움에서의 첫 시즌을 최악으로 시작하여 스튜어트 그레이 감독을 해고한 상태였다. 2001년 10월 스트라컨이 부임할 당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사우샘프턴의 잔류 가능성을 낮게 보았지만, 그는 팀의 운명을 뒤집고 프리미어리그 11위로 시즌을 마쳤다. 사우샘프턴은 2002-03 시즌에 더욱 발전하여 8위를 기록했으며, 2003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스널에게 1 0으로 패했다. 아스널이 이미 2003-04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기 때문에 사우샘프턴은 UEFA컵 진출권을 얻었다.
2004년 2월, 스트라컨은 여름에 팀에 잔류하지 않기로 한 그의 결정이 언론에 유출되자 사우샘프턴 감독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축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유출로 인해 그와 클럽의 미래를 둘러싼 추측이 난무하면서 당초 의도했던 것보다 일찍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3.3. 셀틱
16개월의 휴식 끝에 스트라컨은 2005년 6월 1일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SPL)의 셀틱 감독으로 부임하며 마틴 오닐의 뒤를 이었다. 2005-06 시즌 그의 목표는 라이벌 레인저스로부터 SPL 우승 타이틀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는 감독으로서 당혹스러운 출발을 보였다. 2005년 7월 27일 슬로바키아 챔피언 아트메디아 브라티슬라바에게 5 0으로 패했고, 사흘 후에는 글래스고 클럽으로서 첫 SPL 경기에서 마더웰과 4 4 무승부를 기록했다. 아트메디아에게 패한 것은 셀틱이 4-0으로 승리한 2차전에도 불구하고 유럽 대회에서 조기 탈락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적인 시작 이후 셀틱은 스트라컨 아래에서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가장 낮은 지점은 2006년 1월 8일 1부 리그 팀 클라이드에게 스코틀랜드 컵 3라운드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 그의 팀은 던펌린 애슬레틱을 8 1로 꺾으며 당시 SPL 역대 최다 점수 차 승리 기록을 세웠다. 스트라컨의 첫 시즌은 궁극적으로 성공적이었다. 그는 셀틱을 리그컵 우승으로 이끌었고, 2006년 4월 5일에는 6경기를 남겨두고 사상 최단 시간 SPL 우승을 확정 지었다. 이 성과를 반영하여 스트라컨은 8일 후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로부터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 스트라컨은 팀을 재편하고 여러 선수를 영입했다. 히버니언의 데릭 리오단, 첼시의 이리 야로시크,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의 케니 밀러와 리 네일러, PSV의 얀 베네고어 오브 헤셀링크, 레알 마드리드의 토마스 그라베센, 하츠의 폴 하틀리와 스티븐 프레슬리 등이 영입되었다. 셀틱은 번성했고 2007년 1월 중순까지 SPL에서 17점 차 선두를 달렸다. UEFA 챔피언스리그는 다시 셀틱 파크로 돌아왔고, 팀은 자동으로 조별 예선에 진출하여 벤피카, 코펜하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한 조에 편성되었다. 조별 리그 세 팀 모두에게 홈에서 승리하며 팀은 1993년 대회 방식 개편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했다. 셀틱은 16강전에서 최종 우승팀 밀란에게 연장전 끝에 패하며 8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007년 4월 22일, 스트라컨은 셀틱을 41번째 리그 챔피언십이자 2회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 킬마녹에게 2 1로 승리하며 셀틱은 4경기를 남겨두고 레인저스에 13점 앞서게 되었다. 그날 늦게 스트라컨은 2007년 스코틀랜드 프로 축구 선수 협회 올해의 감독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셀틱은 이어서 던펌린 애슬레틱을 꺾고 2006-07 스코틀랜드 컵을 우승했다.
2007-08 시즌에 스트라컨은 밀란, 벤피카, 샤흐타르 도네츠크를 꺾고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 16강으로 이끌었다. 4월까지 2007-08 스코틀랜드 컵 8강에서 애버딘에게 1 0으로 패하고, 10명이 싸우던 마더웰에게 SPL에서 1 0으로 패하는 등 언론과 팬들의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레인저스를 홈에서 두 차례 꺾은 후, 2008년 5월 22일 스트라컨은 셀틱 역사상 세 번째로 3회 연속 스코틀랜드 리그 우승을 달성한 감독이 되었다.
2008-09 시즌에는 레인저스를 연장전 끝에 꺾고 리그컵을 우승했지만,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다. 2009년 5월 25일 그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셀틱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팀이 미드필더를 생략하는 직선적인 축구를 하고 있어 불만이 많았다. 그는 미드필더를 경유하는 축구를 구현하기 위해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레지나에 소속되어 있던 나카무라 슌스케 선수 영입을 추진했다. 스트라컨은 나카무라에 대해 "그라운드 위와 팀 세대 간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 선수"이며, "그가 셀틱 파크에서 플레이하면 내가 왜 그에게 그토록 집착했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큰 기대를 표했다. 나카무라가 셀틱에 입단하자마자 그를 선발로 기용했으며, 부상이나 질병이 없는 한 꾸준히 출전시켰다.
2005-06 스코틀랜드 리그컵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2골을 기록한 숀 말로니에 대한 질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컨은 "그것보다 나카무라의 플레이를 봤는가"라고 되물으며 나카무라를 극찬했다. 나카무라가 리그 경기에서 아름다운 골을 넣었을 때는 "그는 천재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2007년, 리그 2연패 축하연 이후 스트라컨은 BBC 라디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은 천재다. 동시에 우리의 통계는 그가 우리 팀의 누구보다도 그라운드의 많은 부분을 커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은 나카무라가 태클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 그게 뭐가 중요한가." 같은 시즌에 나카무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두 경기 연속 프리킥 골을 터뜨리는 등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에 기여했고, 개인적으로도 스코틀랜드 프로 축구 선수 협회 올해의 선수상과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하며 유럽 선수 경력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
스트라컨과 나카무라는 2008-09 시즌 종료 후 모두 셀틱을 떠났지만, 라리가의 RCD 에스파뇰에 입단한 나카무라가 팀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출전 기회가 줄어들자, 2010년 1월 스트라컨이 이끌던 미들즈브러는 에스파뇰에게 임대 이적 공식 제안을 했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이를 거절하고 에스파뇰에 잔류했으며, 이후 2월 J리그 1부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다.
3.4. 미들즈브러
스트라컨은 2009년 10월 26일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미들즈브러와 4년 계약을 체결하며 개러스 사우스게이트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15년 전 리즈 유나이티드 선수 시절에도 미들즈브러 감독직과 연결된 적이 있었다. 그의 첫 감독 경기인 10월 31일 플리머스 아가일과의 경기에서는 애덤 존슨이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1 0으로 패했다. 12월 5일, 미들즈브러는 퀸스 파크 레인저스 원정에서 5 1로 승리하며 스트라컨 체제에서 첫 승을 거두었다.
블랙풀에게 홈에서 3 0으로 패하고 카디프 시티에게 홈에서 1 0으로 패하는 등 부진한 경기 결과를 이어가던 미들즈브러는 스컨소프 유나이티드를 3 0으로 꺾으며 스트라컨 체제에서 첫 홈 승리를 기록했다. 2010-11 시즌 초반 부진으로 미들즈브러가 20위에 머물자, 스트라컨은 10월 18일 상호 합의 하에 클럽을 떠났다. 그는 자발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어떠한 보상금도 받지 않았다.
3.5.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스트라컨은 2013년 1월 15일 크레이그 리바인의 후임으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 감독 경기는 2월 6일 핏토드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에스토니아와의 친선 경기였다. 이 경기는 찰리 멀그루의 첫 국가대표 골로 스코틀랜드가 1 0으로 승리했다.
스트라컨 감독 체제에서의 첫 두 번의 공식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는 웨일스와 세르비아에게 패배하며 201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의 희박한 가능성을 마감했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크로아티아를 두 번 꺾고, 마케도니아 원정에서도 승리하는 등 상승세를 보였다. 스코틀랜드는 예선 A조에서 4위로 마무리했다.
UEFA 유로 2016 예선에서는 본선 진출 팀이 16개에서 24개로 확대되면서 스코틀랜드의 본선 진출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독일, 폴란드, 아일랜드 공화국과 같은 강팀들과 한 조에 편성되었다. 독일과의 첫 경기에서 패한 후, 스코틀랜드는 조지아, 아일랜드, 지브롤터를 홈에서 꺾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원정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조지아 원정에서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1 0 패배를 당했다. 독일과의 홈 경기에서 패하면서 스코틀랜드는 3위 아일랜드에 4점 뒤지게 되었고, 2경기가 남았다.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는 폴란드를 꺾거나 아일랜드가 독일에 패하기를 바라야 했다. 스코틀랜드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2 1로 앞서 나갔지만, 아일랜드가 경기에서 유일한 골을 넣으면서 스코틀랜드는 생존을 위해 승리가 필요했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막판 골로 폴란드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스코틀랜드는 탈락이 확정되었다. 스트라컨은 자신이 "운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마지막 예선 경기에서 지브롤터에게 승리한 후, 스트라컨은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와 새로운 계약에 합의했다. 그러나 2018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스트라컨은 2017년 10월 12일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4. 감독 스타일 및 철학
스트라컨은 주로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을 사용했으며, 아주 가끔 4-5-1 포메이션도 활용했다. 그는 엄격한 관리 스타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신의 팀 경기 비디오를 두세 번씩 다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선수들의 건강과 체력을 매우 강조했다. 선수들의 과도하거나 잦은 음주를 금지했으며, 종종 식단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선수 생활이 길었던 이유를 해조류를 포함한 엄격하고 다소 특이한 식단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개리 캘드웰과 같은 선수들은 셀틱에서의 성공을 스트라컨이 강제한 생활 방식의 변화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스트라컨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의 무뚝뚝한 유머로 유명하며, 그에게서 비롯된 인용구들은 대중적인 축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4.1. 알렉스 퍼거슨과의 관계
알렉스 퍼거슨 감독 밑에서 두 클럽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스트라컨의 감독 경력 동안 공개적인 불화를 겪었다. 퍼거슨은 1999년 자서전에서 "나는 이 남자를 단 한 치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에게 내 등을 맡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스트라컨은 2006년 자신의 자서전에서 퍼거슨의 발언에 대해 "놀랍고 실망스러웠다"고 응수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스트라컨이 애버딘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퍼거슨 밑에서 뛰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2006년 8월, 그의 셀틱 팀이 챔피언스리그에서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맞붙게 되자, 스트라컨은 두 감독 사이에 더 이상 적대감이 없다고 말했다.
5. 기타 활동 및 역할
스트라컨은 미디어를 위해 축구 경기를 분석하기도 했다. BBC 스포츠의 '매치 오브 더 데이 2'에서 에이드리언 차일스와 함께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ITV의 FA컵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중계에서 정기적인 전문가로 일했다. 2014년 FIFA 월드컵 기간 동안에는 ITV의 전문가로 활동했다.
2019년 4월, 스트라컨은 스카이 스포츠의 '더 디베이트'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한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성범죄자 애덤 존슨이 출소한 후, 스트라컨은 존슨에 대한 비난을 인종차별적 비난과 비슷하다고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는 이 발언으로 인해 광범위한 비판에 직면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았다.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스트라컨은 스코틀랜드의 공식 FIFA 대사로 임명되어, 대회 공식 자선 단체인 SOS 어린이 마을을 위한 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2009년 8월, 스트라컨은 두 아들과 함께 코번트리 지역에 자신의 축구 학교를 설립했다. 2019년 7월, 스트라컨은 던디의 기술 이사직에 임명되었다.
6. 수상 및 영예
고든 스트라컨은 선수 및 감독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개인 및 팀 단위의 수상 내역과 영예를 받았다.
6.1. 선수
애버딘
-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디비전: 1979-80, 1983-84
- 스코틀랜드 컵: 1981-82, 1982-83, 1983-84
- 드라이브로 컵: 1980-81
- UEFA 컵위너스컵: 1982-83
- UEFA 슈퍼컵: 198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FA컵: 1984-85
리즈 유나이티드
-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1991-92
- 풋볼 리그 2부 디비전: 1989-90
- FA 채리티 실드: 1992
스코틀랜드
- 러스 컵: 1985
개인
-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상: 1979-80
- 발롱도르: 1983년 (4위)
- PFA 올해의 팀 (풋볼 리그 2부 디비전): 1989-90
- PFA 올해의 팀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1990-91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상: 1990-91
-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 명예의 전당 (국가대표): 1992년
- 리즈 유나이티드 올해의 선수: 1993
- PFA 공로상: 1995년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16년 헌액
6.2. 감독
셀틱
-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2005-06, 2006-07, 2007-08
- 스코틀랜드 컵: 2006-07
- 스코틀랜드 리그컵: 2005-06, 2008-09
개인
-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상: 1996년 12월, 1998년 2월, 2002년 1월, 2002년 12월
- 스코틀랜드 프로 축구 선수 협회 올해의 감독상: 2005-06
-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감독상: 2005-06, 2006-07
- 스코틀랜드 프로 축구 선수 협회 올해의 감독상: 2006-07, 2008-09
훈장
- 대영 제국 훈장 4등급 (OBE): 1993년 새해 서훈
7. 유산 및 평가
고든 스트라컨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기술,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그 단점을 극복한 선수였다. 특히 15세에 겪은 심각한 눈 부상에도 불구하고 시력 장애를 극복하고 잉글랜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 수준의 선수로 활약한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는 그의 회복력과 강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감독으로서는 셀틱에서 세 번의 리그 우승과 여러 국내 컵 대회 우승을 이끌며 성공적인 시대를 보냈다. 특히 나카무라 슌스케와 같은 재능 있는 선수를 영입하고 그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지도하여 팀의 경기 스타일을 변화시키고 유럽 무대에서도 성과를 낸 것은 그의 전술적 역량과 선수 보는 눈을 증명한다. 그의 엄격한 훈련 방식과 선수 건강 관리에 대한 집착은 선수들의 기량 향상과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 또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여준 특유의 재치 있고 솔직한 유머는 그를 대중에게 친숙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경력에는 논란과 비판도 존재했다.
7.1. 비판 및 논란
2019년 4월, 스카이 스포츠 '더 디베이트' 프로그램에서 애덤 존슨에 대한 언급은 스트라컨 경력의 주요 비판점 중 하나이다. 아동 성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출소한 존슨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트라컨은 존슨에 대한 비난이 인종차별적 학대와 유사하다고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 발언은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스트라컨은 결국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사회적 발언과 관련하여 신중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피해자에 대한 민감성 부족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8. 경력 통계
8.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국내 컵 | 리그 컵 | 대륙 대회 | 총합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던디 | 1973-74 | 1부 디비전 | 0 | 0 | 0 | 0 | 1 | 0 | 0 | 0 | 1 | 0 |
1974-75 | 1 | 0 | 0 | 0 | 1 | 0 | 0 | 0 | 2 | 0 | ||
1975-76 | 프리미어 디비전 | 23 | 6 | 1 | 0 | 6 | 0 | 0 | 0 | 30 | 6 | |
1976-77 | 1부 디비전 | 36 | 7 | 6 | 1 | 0 | 0 | 0 | 0 | 42 | 8 | |
1977-78 | 9 | 0 | 0 | 0 | 5 | 1 | 0 | 0 | 14 | 1 | ||
총합 | 69 | 13 | 7 | 1 | 13 | 1 | 0 | 0 | 89 | 15 | ||
애버딘 | 1977-78 | 프리미어 디비전 | 12 | 1 | 4 | 0 | 0 | 0 | 0 | 0 | 16 | 1 |
1978-79 | 31 | 5 | 4 | 0 | 8 | 0 | 3 | 1 | 46 | 6 | ||
1979-80 | 33 | 10 | 5 | 1 | 11 | 4 | 2 | 0 | 51 | 15 | ||
1980-81 | 20 | 6 | 0 | 0 | 6 | 3 | 4 | 0 | 30 | 9 | ||
1981-82 | 30 | 7 | 6 | 4 | 8 | 6 | 6 | 3 | 50 | 20 | ||
1982-83 | 32 | 12 | 3 | 0 | 7 | 7 | 10 | 1 | 52 | 20 | ||
1983-84 | 25 | 13 | 7 | 2 | 6 | 0 | 9 | 3 | 47 | 18 | ||
총합 | 183 | 54 | 29 | 7 | 46 | 20 | 34 | 8 | 292 | 89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1984-85 | 1부 디비전 | 41 | 15 | 7 | 2 | 2 | 0 | 6 | 2 | 56 | 19 |
1985-86 | 28 | 5 | 5 | 0 | 1 | 0 | 0 | 0 | 34 | 5 | ||
1986-87 | 34 | 4 | 2 | 0 | 2 | 0 | 0 | 0 | 38 | 4 | ||
1987-88 | 36 | 8 | 3 | 0 | 5 | 1 | 0 | 0 | 44 | 9 | ||
1988-89 | 21 | 1 | 6 | 0 | 3 | 0 | 0 | 0 | 30 | 1 | ||
총합 | 160 | 33 | 23 | 2 | 13 | 1 | 6 | 2 | 202 | 38 | ||
리즈 유나이티드 | 1988-89 | 2부 디비전 | 11 | 3 | 0 | 0 | 0 | 0 | 0 | 0 | 11 | 3 |
1989-90 | 46 | 16 | 1 | 0 | 2 | 1 | 0 | 0 | 49 | 17 | ||
1990-91 | 1부 디비전 | 34 | 7 | 6 | 1 | 7 | 1 | 0 | 0 | 47 | 9 | |
1991-92 | 36 | 4 | 0 | 0 | 4 | 1 | 0 | 0 | 40 | 5 | ||
1992-93 | 프리미어리그 | 31 | 4 | 4 | 0 | 3 | 1 | 5 | 1 | 43 | 6 | |
1993-94 | 33 | 3 | 3 | 1 | 2 | 0 | 0 | 0 | 38 | 4 | ||
1994-95 | 6 | 0 | 0 | 0 | 1 | 0 | 0 | 0 | 7 | 0 | ||
총합 | 197 | 37 | 14 | 2 | 19 | 4 | 5 | 1 | 235 | 44 | ||
코번트리 시티 | 1994-95 | 프리미어리그 | 5 | 0 | - | - | - | 5 | 0 | |||
1995-96 | 12 | 0 | 2 | 0 | 3 | 0 | - | 17 | 0 | |||
1996-97 | 9 | 0 | 1 | 0 | 1 | 0 | - | 11 | 0 | |||
총합 | 26 | 0 | 3 | 0 | 4 | 0 | - | 33 | 0 | |||
커리어 총합 | 635 | 137 | 76 | 12 | 95 | 26 | 45 | 11 | 851 | 186 |
8.2.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스코틀랜드 | 1980 | 7 | 1 |
1981 | 2 | 0 | |
1982 | 8 | 0 | |
1983 | 9 | 1 | |
1984 | 2 | 0 | |
1985 | 5 | 0 | |
1986 | 6 | 2 | |
1987 | 2 | 0 | |
1989 | 2 | 0 | |
1991 | 5 | 1 | |
1992 | 2 | 0 | |
총합 | 50 | 5 |
8.2.1. 국가대표팀 득점
스코틀랜드의 득점은 항상 먼저 표기되며, 점수 열은 스트라컨의 각 득점 후 점수를 나타냄.
번호 | 날짜 | 경기장 | 출전 | 상대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80년 9월 10일 | 로순다 스타디움, 스톡홀름, 스웨덴 | 6 | 스웨덴 | 1-0 | 1-0 | 1982 FIFA 월드컵 예선 |
2 | 1983년 6월 12일 | 엠파이어 스타디움, 밴쿠버, 캐나다 | 22 | 캐나다 | 1-0 | 2-0 | 친선 경기 |
3 | 1986년 3월 26일 | 햄던 파크,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34 | 루마니아 | 1-0 | 3-0 | 친선 경기 |
4 | 1986년 6월 8일 | 에스타디오 라 코레히도라, 케레타로, 멕시코 | 36 | 서독 | 1-0 | 1-2 | 1986 FIFA 월드컵 |
5 | 1991년 5월 1일 | 스타디오 올림피코, 세라발레, 산마리노 | 46 | 산마리노 | 1-0 | 2-0 | UEFA 유로 1992 예선 |
8.3. 감독 기록
팀 | 시작일 | 종료일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코번트리 시티 | 1996년 11월 5일 | 2001년 9월 10일 | 215 | 70 | 56 | 89 | 32.6% |
사우샘프턴 | 2001년 10월 22일 | 2004년 2월 13일 | 110 | 39 | 32 | 39 | 35.5% |
셀틱 | 2005년 6월 1일 | 2009년 5월 25일 | 182 | 122 | 28 | 32 | 67.0% |
미들즈브러 | 2009년 10월 26일 | 2010년 10월 18일 | 46 | 13 | 13 | 20 | 28.3% |
스코틀랜드 | 2013년 1월 15일 | 2017년 10월 12일 | 40 | 19 | 9 | 12 | 47.5% |
총합 | 593 | 263 | 138 | 192 | 4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