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블뤼허의 유년기와 초기 군 경력, 그리고 프로이센군에 입대하여 겪은 사건들을 다룬다.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는 1742년 12월 21일 독일 북부의 발트해 항구 도시인 로스토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스토크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에 속해 있었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폰 블뤼허(1696~1761)는 은퇴한 육군 대위였으며, 그의 가족은 늦어도 13세기부터 독일 북부에서 토지를 소유해 온 귀족 가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도로테아 마리아 폰 쥘로(1702~1769) 또한 메클렌부르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1.1. 스웨덴 군 복무 및 프로이센 군 입대
블뤼허는 16세에 스웨덴군에 경기병으로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스웨덴은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전쟁 중이었다. 블뤼허는 1760년 포메라니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 경기병에게 사로잡혔다. 프로이센 연대의 대령이었던 빌헬름 제바스티안 폰 벨링 (블뤼허의 먼 친척)은 젊은 경기병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자신의 연대에 합류시켰다.
1.2. 7년 전쟁 및 프로이센 군 경력
블뤼허는 7년 전쟁의 후기 전투에 참여하며 경기병 장교로서 많은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평화 시기에는 그의 열정적인 성격이 온갖 무모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1772년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 봉기를 지지한 것으로 의심되는 한 사제를 모의 처형한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소령으로의 진급에서 누락되었다. 블뤼허는 1773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무례한 사직서를 제출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에 "블뤼허 기병대위는 지옥에나 가라"는 말로 답했다.
블뤼허는 농업에 정착하여 15년 만에 경제적 자립을 이루었고 프리메이슨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살아있는 동안 블뤼허는 군대로 복귀할 수 없었다. 그러나 1786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망하자, 이듬해 블뤼허는 그의 옛 연대인 붉은 경기병대에 소령으로 복직되었다. 그는 1787년 네덜란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이듬해 중령으로 진급했다. 1789년에는 프로이센 최고의 군사 훈장인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을 받았고, 1794년에는 붉은 경기병대의 대령이 되었다. 1793년과 1794년에는 프랑스군과의 기병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794년 5월 28일 키르와이라 전투에서의 승리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1801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2.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활약
블뤼허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보여준 주요 활약, 특히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백일천하 시기의 결정적인 전투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블뤼허는 1805년 프로이센의 주전파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1806년의 재앙적인 전역에서 기병 총사령관으로 복무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블뤼허는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기병대의 돌격을 반복적으로 이끌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패배한 군대가 후퇴하는 동안, 그는 호엔로헤 후작 군단으로 구성된 후방 부대를 지휘했다. 10월 28일 프렌츨라우 전투 이후 주력 부대가 항복하면서, 그의 북동쪽 진격은 막혔다. 그는 남은 병력을 북서쪽으로 이끌었다. 작센바이마르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가 이전에 지휘했던 사단으로 병력을 보강한 블뤼허와 그의 새로운 참모장 샤른호르스트는 그의 병력을 총 21,000명의 병력과 44문의 대포로 구성된 두 개의 소규모 군단으로 재편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1월 6일 뤼베크 전투에서 두 프랑스 군단에게 패배했다. 다음 날, 40,000명의 프랑스군에게 덴마크 국경에 갇힌 그는 라테카우에서 10,000명 미만의 병사들과 함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블뤼허는 항복 문서에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항복해야 했으며, 그의 병사들이 프랑스군 대형에 따라 거리를 행진하며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하도록 주장했다. 그는 그의 사브르를 소유하고 가석방 상태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는 곧 미래의 원수 클로드 빅토르-페랭과 교환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메라니아, 베를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전쟁 후, 블뤼허는 나폴레옹 지배 시대에 긴밀히 접촉했던 애국당의 자연스러운 지도자로 여겨졌지만, 1809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에 대한 그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이 해에 그는 기병 대장이 되었다. 1812년,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에 대해 너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하여 포메라니아 군사 총독직에서 소환되었고 사실상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2.1. 제6차 대프랑스 동맹 (1813년)
1813년 봄 독일 해방 전쟁이 시작되자, 블뤼허는 다시 고위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뤼첸과 바우첸에 참전했다. 여름 휴전 기간 동안 그는 프로이센군의 조직화에 힘썼으며, 전쟁이 재개되자 슐레지엔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나이제나우와 카를 폰 뮈플링이 그의 주요 참모 장교였으며, 가을 전역 동안 40,000명의 프로이센군과 50,000명의 러시아군을 지휘했다. 블뤼허가 보여준 가장 눈에 띄는 군사적 특성은 그의 끊임없는 에너지였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유부단함과 이해관계의 차이는 그에게 끊임없는 반대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다른 이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는 종종 다른 장군들이 그의 지휘를 따르도록 만들었다. 그는 마크도날 원수를 카츠바흐 전투에서 격파했고, 마르몽 원수를 뫼케른 전투에서 물리쳐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의 제국민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는 길을 열었다. 블뤼허의 군대는 전투 마지막 날 저녁 라이프치히를 점령했다. 이것은 나폴레옹과 블뤼허 간의 네 번째 전투였으며, 블뤼허가 승리한 첫 번째 전투였다.
뫼케른 전투 (1813년 10월 16일) 당일, 블뤼허는 육군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때문에 "전진 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승리 후 그는 늘 그랬듯이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1813년에서 1814년 겨울 동안, 블뤼허는 그의 주요 참모 장교들과 함께 연합군 통치자들이 프랑스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도록 설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2. 1814년 프랑스 침공

브리엥 전투와 라로시에르 전투는 유명한 1814년 프랑스 북동부 전역의 첫 단계의 주요 사건이었으며, 이어서 샹포베르 전투, 보샹 전투, 몽미라일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블뤼허에게 승리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지도자의 용기는 꺾이지 않았고, 압도적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 맞서 라온 전투 (3월 9일과 10일)에서 거둔 그의 승리는 사실상 전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두 달간의 긴장으로 인해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시력을 잃고 프랑스인이 자신을 코끼리로 임신시켰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등 정신적인 쇠약을 겪었다. 도미니크 리벤은 이러한 쇠약이 "연합군 지휘 구조의 취약성과 슐레지엔군이 블뤼허의 추진력, 용기, 카리스마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드러냈다.... 그 결과 라온 전투 이후 일주일 이상 동안 슐레지엔군은 전쟁에서 아무런 유용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블뤼허는 슈바르첸베르크 후작의 보헤미아군 작전에 그의 에너지 일부를 불어넣었고, 마침내 이 군대와 슐레지엔군은 한 몸이 되어 곧바로 파리로 진격했다. 몽마르트르 전투의 승리, 연합군의 프랑스 수도 입성, 그리고 프랑스 제1제국의 전복은 직접적인 결과였다.
블뤼허는 프랑스군에 의해 프로이센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파리 시를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합군 사령관들은 개입했다. 웰링턴 공작에 따르면, 블뤼허의 계획 중 하나는 샹 드 마르스 근처의 예나 교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예나 다리 폭파에 대해 프로이센군 내에는 두 파벌이 있었습니다. 그나이제나우와 뮈플링은 반대했지만, 블뤼허는 격렬하게 찬성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심지어 제 보초병이 다리 한쪽 끝에 서 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다리 폭파 경험이 없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수많은 다리를 폭파했던 우리는 5분 만에 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군은 기둥 중 하나에 구멍을 냈지만, 그들의 화약은 위로 터지지 않고 밖으로 터져서 그들의 병사 몇 명을 다치게 한 것 같습니다."
1814년의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블뤼허에게 발슈타트의 후작 작위를 수여했다. 이 작위는 카츠바흐 전투 전장인 슐레지엔에 위치한 발슈타트 수도원의 이름을 딴 것이며, "전장의 후작"이라는 의미를 지닌 종신 작위였다. 왕은 또한 그에게 하슐레지엔의 크리블로비츠 (현재 크로비엘로비체) 근처 영지와 베를린 파리저 플라츠 2번지에 있는 대저택을 하사했다.

얼마 후, 블뤼허는 영국을 방문하여 왕실의 예우를 받으며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을 때, 그는 농담 삼아 자신이 의사가 된다면 그나이제나우는 약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처방전을 썼다면, 그가 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2.3. 백일천하와 워털루 전역 (1815년)

전쟁 후 블뤼허는 슐레지엔으로 은퇴했다. 블뤼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프루드니크 근처의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1812년부터 1817년까지 쿤첸도르프에 위치한 성을 소유했다.

그러나 엘바 섬에서 나폴레옹이 돌아오고 백일천하가 시작되자, 그는 다시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그는 라인강 하류군의 지휘를 맡았고, 그나이제나우가 다시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815년 워털루 전역 초기에 프로이센군은 리그니 전투 (6월 16일)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이 전투 중에 노년의 육군원수는 몇 시간 동안 죽은 말 아래에 갇혀 있었고, 기병들에게 여러 번 짓밟혔다. 그의 생명은 그의 부관 노스티츠 백작의 헌신 덕분에 구원받았다. 노스티츠는 블뤼허의 계급과 신분을 지나가는 프랑스군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그의 지휘관에게 큰 외투를 던져주었다. 블뤼허가 몇 시간 동안 지휘를 재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이제나우가 지휘를 맡아 패배한 군대를 철수시키고 재집결시켰다. 그나이제나우는 웰링턴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과 웰링턴의 영국-연합군이 합류할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의 후퇴를 리에주가 아닌 바브르로 지시하라는 블뤼허의 마지막 명령에 복종했다.
대황과 마늘로 만든 약으로 상처를 씻고, 슈냅스를 넉넉히 마시며 기력을 회복한 블뤼허는 군대에 다시 합류했다. 그나이제나우는 영국군이 이전 합의를 파기했다고 우려하며 철수를 선호했지만, 블뤼허는 그를 설득하여 두 개 군단을 워털루에서 웰링턴과 합류하도록 보냈다. 그는 진흙탕 길을 따라 고된 행군을 이끌었고, 늦은 오후에 워털루 전장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상처의 고통, 그리고 말을 타고 있어야 하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버나드 콘웰은 여러 병사들이 블뤼허의 높은 사기와 나폴레옹을 물리치려는 그의 결의를 증언했다고 언급했다.
"전진하라!" 그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해내야 한다! 웰링턴에게 약속했으니, 너희는 내가 약속을 깨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힘내라, 내 아이들아,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블뤼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72세였고, 리그니에서의 모험으로 여전히 고통과 불편함을 느꼈으며, 여전히 슈냅스와 대황 약 냄새를 풍겼지만, 그는 온통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날 나폴레옹의 태도가 자신이 과소평가한 적에 대한 퉁명스러운 경멸이었다면, 웰링턴의 태도는 걱정을 숨긴 차갑고 계산적인 침착함이었다면, 블뤼허는 온통 열정 그 자체였다.
전투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블뤼허의 군대는 결정적이고 압도적인 효과로 개입했다. 그의 선봉대는 나폴레옹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예비 병력을 끌어냈고, 그의 주력 부대는 프랑스군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승리는 프로이센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두 연합군 군대는 7월 7일 파리에 입성했다.
블뤼허는 몇 달 동안 프랑스 수도에 머물렀지만, 나이와 병약함으로 인해 슐레지엔의 크리블로비츠 저택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정부의 초청으로 그는 워털루 전역에서 그의 군대와 역할에 대한 공식적인 감사를 받기 위해 영국에 또 다른 국빈 방문을 했다. 그의 마차가 런던이 내려다보이는 블랙히스 힐에 멈췄을 때, 그는 "약탈하기에 얼마나 좋은 도시인가!"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1819년 9월 12일 크리블로비츠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군사적 평가 및 전술
나폴레옹은 블뤼허를 장군으로서의 재능은 없지만 매우 용감한 군인으로 평가했다. 그는 블뤼허의 태도를 존경했는데, 이는 마치 눈을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위험을 감지하면 돌진하는 황소와 같다고 묘사했다. 나폴레옹은 그를 고집스럽고 지칠 줄 모르며 두려움을 모르는 인물로 여겼다. 그는 블뤼허를 "패배 후에도 거의 즉시 다시 일어나 격렬하게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늙은 악당"이라고 불렀다.
훗날 프로이센군 사이에서는 블뤼허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프로이센식 전쟁 방식"을 확립했다고 평가되었다.
"이 전쟁 방식의 핵심은 블뤼허의 승리 개념이었다. 나폴레옹처럼 그는 결정적인 전투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결정적인 승리를 달성하는 것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했다. 또한 나폴레옹처럼 그는 승패를 오직 전장 결과로만 측정했다. 코르시카인의 전쟁 기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블뤼허의 프로이센식 전쟁 방식의 목표는 적과 가능한 한 빨리 접촉하고, 모든 병력을 집중시키며,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여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블뤼허는 용감하고 인기 있는 장군이었으며, "에너지, 통제된 공격성, 그리고 적군을 물리치려는 헌신 등 자랑할 것이 많았다."
블뤼허는 거칠고 무모하며 교양이 부족했지만, 아버지 같은 인물로 도량이 넓고 인망을 갖추고 있었다. 작전 수립 시에도 유능한 참모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또한 블뤼허가 총사령관이었기에 그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용맹함에 있어서는 견줄 자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그 때문에 전장에서 냉정한 판단을 잃고 저돌적인 행동을 벌일 때도 많아, 이러한 돌진이 패배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기에 군사 지휘관으로서 최고로 우수한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나폴레옹과의 정면 대결에서는 결코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체념이라는 것을 모르는 불굴의 사나이였다. 또한 열렬한 애국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패배에 좌절한 프로이센 장병들을 질책하고 고무시켜 마침내 나폴레옹 타도까지 이끈 것은 바로 블뤼허였다. "전진 원수"라는 칭호는 좋든 나쁘든 그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개인사 및 가족
블뤼허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1773년 카롤리네 아말리에 폰 멜링(1756~1791)과 결혼했고, 그녀가 사망한 후 1795년 페터 폰 콜롬 장군의 여동생인 카타리네 아말리에 폰 콜롬(1772~1850)과 재혼했다. 두 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지만, 첫 번째 결혼을 통해 블뤼허는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두 아들과 한 딸이 유아기를 넘겨 생존했다.
- 프란츠 페르디난트 요아힘 (1778~1829): 프로이센군 소장으로, 1813년 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정신 질환을 앓았다. 베른하르디네 폰 자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프리드리히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1780~1834): 엘리자베트 폰 콘링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베른하르디네 프리데리케 (1786~1870): 첫 번째로 아돌프 에른스트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과 결혼했고, 두 번째로 막시밀리안 아셰 폰 데어 아세부르크 백작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육군원수의 손자인 게프하르트 베른하르트 폰 블뤼허 백작(1799~1875)은 1861년 10월 18일 프로이센 왕국에서 장자 상속에 따른 세습 작위인 발슈타트의 블뤼허 후작 (세레네 하이니스)으로 책봉되었으며, 그의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은 백작 또는 백작 부인의 칭호를 사용했다. 1832년 그는 오파바구의 라두니 성을 매입했고, 1847년에는 발슈타트 레그니츠키에 폴레의 토지를 매입했다.
이 모든 재산은 1945년 독일인 추방으로 인해 가족이 건지섬의 해빌랜드 홀 저택으로 망명할 때까지 가족 소유로 남아 있었다. 이 저택은 4대 후작과 그의 영국인 아내 에블린 블뤼허 후작 부인이 매입했다. 이후 가족은 오이라스부르크, 바이에른으로 이주했다. 현재 블뤼허 폰 발슈타트 가문의 수장은 니콜라우스 8세 블뤼허 폰 발슈타트 후작(1932년생)이며, 후계자는 그의 아들 루카스 세습 백작(1956년생)이다.
5. 훈장 및 표창
블뤼허는 다음과 같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국가 | 훈장 및 표창 | 수여 일자 |
---|---|---|
프로이센 왕국 | 푸어 르 메리테 훈장 | 1789년 6월 4일 |
흑수리 훈장 기사 | 1807년 4월 | |
적수리 훈장 기사 | ||
철십자 훈장 1급 | ||
대철십자 훈장 | 1813년 | |
대철십자성장 | 1815년 | |
오스트리아 제국 |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대십자 | 1813년 |
덴마크 | 코끼리 훈장 기사 | 1815년 7월 4일 |
하노버 왕국 | 로열 겔프 훈장 대십자 | 1816년 |
헤센 선제후국 | 황금 사자 가문 훈장 대십자 | 1815년 12월 11일 |
네덜란드 | 빌럼 군사 훈장 대십자 | 1815년 7월 8일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훈장 대십자 | 1811년 7월 3일 |
스웨덴 | 세라핌 훈장 기사 | 1814년 4월 28일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바스 훈장 명예 대십자 (군사) | 1815년 8월 18일 |
뷔르템베르크 왕국 | 군사 공로 훈장 대십자 | 1814년 |
러시아 제국 | 성 게오르기 훈장 1급 기사 | 1813년 10월 8일 |
성 안드레이 훈장 기사 | 1813년 10월 11일 | |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기사 | 1813년 10월 11일 | |
성 안나 훈장 1급 기사 | ||
용맹을 위한 황금 무기 명예 검 |
블뤼허는 또한 베를린, 함부르크, 로스토크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6. 저술
블뤼허의 1793년에서 1794년까지의 전역 일지는 1796년에 출판되었다.
- Kampagne-Journal der Jahre 1793 und 1794 (베를린: 데커, 1796)
이 일기의 두 번째 판과 블뤼허의 일부 서신은 1914년에 출판되었다.
- Vorwärts! Ein Husaren-Tagebuch und Feldzugsbriefe von Gebhardt Leberecht von Blücher, 콜마르 폰 데어 골츠 육군원수 서문, 하인리히 콘라트 편집 (뮌헨: G. 뮐러, [1914])
그의 수집된 저작과 서신 (요르크와 그나이제나우의 것과 함께)은 1932년에 출판되었다.
- Gesammelte Schriften und Briefe / Blücher, Yorck, Gneisenau, 에드문트 테. 카우어 편찬 및 편집 (베를린-쇠네베르크: 외스터가르트, [1932])
7. 사망

블뤼허는 1819년 9월 12일 크리블로비츠 (현재 크로비엘로비체)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웅장한 영묘가 건설되었다.
1945년 붉은 군대가 크리블로비츠를 점령했을 때, 소련 병사들은 블뤼허 영묘에 침입하여 유해를 흩뿌렸다. 소련군은 그의 두개골을 축구공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1989년 이후, 그의 유해 일부는 폴란드 신부에 의해 수습되어 현재 폴란드 크로비엘로비체에서 3 km 떨어진 소시니차 (독일어: Schosnitz) 교회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8. 유산과 영향
블뤼허의 사후 그를 기리는 다양한 기념물, 그의 이름을 딴 함선과 기관차, 그리고 문화적 영향에 대해 서술한다.

8.1. 기념물 및 추모
라인란트의 도시 카우프에는 블뤼허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는데, 특히 1813년에서 1814년 새해 전야에 그가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추격하며 라인강을 건넌 것을 기념한다.
블뤼허의 사망 후, 그의 기념 동상들이 베를린, 브레슬라우 (현재 브로츠와프), 로스토크, 그리고 카우프 (1813년 그의 군대가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하며 라인강을 건넌 곳)에 세워졌다. 블뤼허는 레겐스부르크 근처 발할라 기념관에 흉상으로 기려지고 있다.
8.2. 이름으로 명명된 것들
블뤼허의 공로에 감사하여 영국의 선구적인 기관차 엔지니어 조지 스티븐슨은 그의 이름을 따서 기관차의 이름을 지었다. 스티븐슨의 고향인 와일럼에서 몇 마일 떨어진 작은 광산 마을도 그를 기리기 위해 블뤼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1814년 영국군이 원래 배를 나포한 후 새로운 소유주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블뤼허라는 배를 명명했다.
세 척의 독일 해군 함선이 블뤼허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처음으로 명명된 것은 키엘의 노르트도이체 시프바우 AG (이후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르프트로 개명)에서 건조되어 1877년 3월 20일 진수된 코르벳함 SMS 블뤼허였다. 1907년 보일러 폭발 후 퇴역한 이 배는 스페인 비고에서 석탄 운반선으로 생애를 마쳤다.
1908년 4월 11일, 장갑순양함 SMS 블뤼허가 키엘의 제국 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이 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5년 1월 24일 도거 뱅크 해전에서 침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의 중순양함 블뤼허는 1939년 9월에 완성되었고, 일련의 해상 시험과 훈련을 마친 후 1940년 4월 5일 취역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선언되었다. 이 함선은 4일 후 노르웨이 침공 중 오슬로 근처에서 침몰했다.
버크셔에 기반을 둔 웰링턴 칼리지에는 블뤼허의 이름을 딴 기숙사가 있다. '더 블뤼허'로 알려진 이 기숙사는 스포츠 및 학업 성취도가 뛰어난 남학생 기숙사로 유명하다.
바실리 블류헤르의 성은 그의 지주가 게프하르트를 기리기 위해 그의 가족에게 부여한 것이다.
트위크넘 스타디움 근처에는 '프린스 블뤼허 펍'이 있다.
8.3. 문화적 영향
인기 있는 독일어 속담인 ran wie Blücher gehen("블뤼허처럼 돌격하다")은 전쟁이나 다른 상황에서 매우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블뤼허를 지칭한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독일어 속담의 전체 문장은 1813년 카츠바흐 전투와 관련이 있다. "ran wie Blücher an der Katzbach gehen"("카츠바흐에서 블뤼허처럼 진격하다")은 활기차고 강압적인 행동을 묘사한다.
블뤼허는 1929년 영화 워털루에서 독일 배우 오토 게뷔어가 연기했다. 1932년에는 그를 다룬 전기 영화 전진 원수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 영화에서는 파울 베게너가 그를 연기했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된 프로이센 영화 그룹의 일부였다. 그는 1970년 소련-이탈리아 합작 영화 워털루에서 소련 배우 세르고 자카리아제가 연기했다.
블뤼허가 고안한 착용이 쉽고 모든 사람의 발에 잘 맞는 신발은 '블뤼허 슈즈'라고 불리며, 이 형태의 신발은 유럽 전역의 군대에서 채택되었다.
9. 관련 항목
- 에블린 블뤼허 공주
- 블뤼허 훈장
- 블뤼허 슈즈
- 블뤼허른
- 블뤼허 형제
- 바실리 블류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