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하노버 시절
샤른호르스트의 유년기와 하노버에서의 초기 군사 경력을 다루며,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이론가로서의 기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본다.
1.1. 출생과 교육
게르하르트 요한 다비트 폰 샤른호르스트는 1755년 11월 12일, 하노버 인근 보르데나우(현재 니더작센주 노이슈타트 암 뤼벤베르게의 일부)의 소규모 토지 소유자 가족(또는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직 기병대 하사관이었는데, 이러한 환경은 그가 군대에서 성공하겠다는 열망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샤른호르스트는 스스로 공부하여 빌헬름슈타인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으며, 1773년부터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의 지휘 아래 빌헬름슈타인 요새에서 군사 이론과 군제 개혁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1.2. 하노버 군 복무 및 저술 활동
1778년, 샤른호르스트는 하노버군에서 소위로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기병 연대 부속 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783년에는 중위로 승진하고 포병으로 전과하여 하노버의 신설 포병 학교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부터 그는 군사에 관한 다수의 논문, 잡지, 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간하고 편집을 맡은 『군사 저널』은 1805년까지 출판을 이어가며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
1788년에는 『응용 군사 과학 장교 핸드북』(Handbuch für Offiziere in den anwendbaren Teilen der Kriegswissenschaften한트부흐 퓌어 오피치어 인 덴 안벤트바렌 타일렌 데어 크리크스비센샤프텐독일어)을, 1792년에는 『야전 군사 수첩』(Militärisches Taschenbuch für den Gebrauch im Felde밀리테리셰스 타셴부흐 퓌어 덴 게브라우흐 임 펠데독일어)을 저술하여 출판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여러 번 증쇄되며 높은 평판을 얻었고, 샤른호르스트는 군사 이론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의 저술 활동에서 얻는 수입은 당시 그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으며, 그는 베를린 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던 테오도어 슈말츠의 누이인 클라라 슈말츠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1.3. 초기 전역과 명성
1792년, 샤른호르스트는 대위로 승진했다. 이듬해인 1793년, 하노버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했고, 샤른호르스트는 포병 장교로서 요크 공작 프레더릭의 휘하에서 네덜란드 작전에 참여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793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이어진 혼트스코트 전투에서 아군의 후퇴를 지원하며 첫 전공을 세웠다.
1794년에는 메닌이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당시 하마슈타인 장군의 휘하에 있던 샤른호르스트는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직접 구상하고, 일부 부대를 이끌고 구원군에 합류했다.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시내의 아군은 구출되었다. 샤른호르스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 하마슈타인의 추천으로 소령으로 승진하고, 하노버 참모본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투 경험을 통해 샤른호르스트는 단순히 이론가에 그치지 않고, 실전 지휘관으로서도 유능함을 증명했다.
그는 1803년에 메닌 공방전을 고찰한 『메닌 시의 방어』(Vertheidigung der Stadt Menin페어타이디궁 데어 슈타트 메닌독일어)라는 서적을 출판했다. 또한 1795년 바젤 조약 이후 하노버로 돌아온 뒤,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 요인을 분석한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행운의 기원』(Die Ursachen des Glücks der Franzosen im Revolutionskrieg디 우어자흔 데스 글뤽스 데어 프랑초젠 임 레볼루치온스크리그독일어)이라는 논문을 『군사 저널』에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샤른호르스트는 프랑스군의 강점은 뛰어난 조직력에 있으며, 그 배경에는 국민 국가라는 프랑스 고유의 사회 체제가 있다는 점을 간파하여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술 중 하나가 되었다.
2. 프로이센 군 복무
샤른호르스트가 프로이센군으로 이적한 배경과 프로이센 군대에서 수행한 주요 개혁 활동을 상세히 다루며, 그의 개혁이 프로이센 군대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2.1. 프로이센 이적과 초기 역할
1795년 3월 5일 바젤 조약이 체결된 후 샤른호르스트는 하노버로 귀국했다. 이때 그의 군인으로서의 명성은 이미 확고하여 여러 동맹국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1797년에는 프로이센군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으나, 하노버에서 중령으로 승진하고 급여가 인상되는 조건을 제시하자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1801년, 프로이센은 하노버에서 받던 급여의 두 배에 달하는 조건과 함께 그의 선임권을 유지시키고, 좋은 연금 및 귀족 칭호('폰(von)')를 부여하겠다는 제안을 다시 해왔고, 샤른호르스트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노버군에서 귀족 출신이 아닌 샤른호르스트는 많은 차별을 받았고, 그의 군제 개혁 제안 또한 번번이 거부되었던 상황이었다.
프로이센에서 샤른호르스트가 처음 맡은 임무는 베를린 사관 연수소의 교관이었다. 당시 연수소 소장은 병참총감(당시 프로이센에서는 참모본부를 병참총감부라 불렀다)인 레빈 폰 고이자우가 겸임하고 있었으나, 바쁜 그는 샤른호르스트에게 교육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2.2. 교육 및 초기 개혁 노력
샤른호르스트는 베를린 사관 연수소의 강의 내용을 대폭 개편하고, 젊은 장교들의 교육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강의를 들은 장교들 중에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카를 폰 그롤만, 카를 폰 티데만 등 훗날 프로이센군 개혁의 핵심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802년 1월 24일(프리드리히 대왕의 탄생 기념일) 샤른호르스트는 동료들과 함께 군사 협회를 설립하여, 프로이센군의 개혁 방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장을 마련했다. 1804년에는 연수소의 조직을 재편하여 기초 장교 교육을 담당하는 연수소와는 별개로, 고도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베를린 육군사관학교(훗날의 베를린 육군대학)를 설립했다. 1810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육군대학으로 승격시키며 입학 희망자의 폭을 넓혔다.
이처럼 군 내부의 의식 개혁부터 추진해 나갔으나, 샤른호르스트의 핵심 군제 개혁은 쉽게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개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은 7년 전쟁 이래의 공신(功臣)들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대에 프로이센군의 영광을 이끌었던 노련한 장교들은 이미 확립된 기존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다.
1804년, 크리스티안 폰 마센바흐의 제안으로 병참총감부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샤른호르스트는 병참총감부 제3여단장(참모본부 차장에 해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그의 권한과 책임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아, 단순히 장군의 자문 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1806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2.3. 1806년 패배와 개혁의 절실함
1805년, 프랑스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하며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붕괴시켰다.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을 결성하며 독일 중부까지 패권을 확장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은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대패했다.
패주하는 와중에 샤른호르스트는 블뤼허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본토까지 침공하여 전 국토가 프랑스의 지배 아래 놓였다. 11월 5일, 블뤼허와 샤른호르스트의 군대는 뤼베크에서 항복했으며, 다음 날인 6일에는 마그데부르크에서 바이마르 공작과 그나이제나우의 군대마저 항복하며 프로이센 국내의 군대는 사실상 소멸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은 측근들과 함께 쾨니히스베르크로 피신했다.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샤른호르스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향하여 안톤 빌헬름 폰 레스토크 장군의 보좌관이 되어 군 재건에 힘썼다. 1807년 2월 7일부터 8일까지 이어진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샤른호르스트는 뛰어난 작전 지도를 인정받아 프로이센 최고의 무공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수여받았다. 같은 해 7월 7일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강화를 체결했다.
강화 후 샤른호르스트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군비 재편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본격적으로 군제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 헤르만 폰 보옌, 카를 폰 그롤만 등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젊은 장교들이 위원으로 임명되어 개혁을 보좌했다. 1808년부터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도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폰 슈타인 남작 역시 위원회에 합류하여, 샤른호르스트가 국왕에게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좌관(aide-de-camp-general)으로 임명되도록 했다.
샤른호르스트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패인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의 군사력 차이가 본질적으로 조직 및 지휘 통제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탁월한 지휘와 이에 상응하는 프랑스군의 유연한 군사 편성이 승리를 가져왔다고 보았으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군을 근본부터 변화시키는 대대적인 개혁이 절실하다고 인식했다.
2.4. 주요 군사 개혁
이 섹션에서는 샤른호르스트가 프로이센군을 현대화하기 위해 추진한 핵심 개혁들을 상세히 다루며, 이는 군대의 사회적 평등과 민주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2.4.1. 지휘 및 참모 체계 재편
샤른호르스트는 먼저 이전에 존재하던 병참총감부를 현대적인 참모본부의 원형으로 탈바꿈시켰다. 1808년, 군사에 관한 일반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일반 군사부와 경제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군사 경제부가 창설되었고, 샤른호르스트는 일반 군사부의 부장이 되어 개혁을 위한 실권을 확보했다.
같은 해 12월, 일반 군사부와 군사 경제부는 통합되어 군사에 관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군사성이 탄생했다. 초대 군사상으로는 국왕의 측근인 로툼 백작이 취임했다. 군사성은 군사 총무국과 군사 주계국 두 개의 부국으로 나뉘었으며, 샤른호르스트는 군사 총무국장으로서 실무를 담당했다. 군사 총무국은 국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제1사단, 군의 통괄을 맡는 제2사단, 병기 감사를 담당하는 제3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샤른호르스트는 제2사단 감독(국장)을 겸임했다. 이 제2사단이 훗날 참모본부의 원형이 되었으며, 제2사단 감독은 병참총감으로 불렸다.
1809년, 프로이센군의 편성은 제병협동의 사단(여단)을 중심으로 변경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각 사단에 참모장교를 배치하여 중앙에서 내린 지시의 철저한 이행과 작전 행동 시의 독자성을 동시에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다.
2.4.2. 인적 구성 및 훈련 개혁
샤른호르스트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패배를 분석하며, 군대의 근본적인 개혁이 없이는 프랑스군에 대항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의 폐쇄적이고 귀족 중심의 군사 체계를 타파하고 사회적 평등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개혁을 추진했다.
먼저, 용병제를 폐지하고 1808년 8월 의무 병역 제도(징병제)를 도입했다. 비록 실제로 징병이 이루어진 것은 1813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된 이후였지만, 이는 국민군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또한, 군내 체벌을 심각한 하극상 등 극단적인 경우로 제한함으로써 사병들의 사기를 증진하고 인권을 존중하려 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능력 위주의 진급 제도를 확립하고, 평민(주로 부르주아지) 출신 장교를 적극적으로 등용한 것이었다. 이는 참모 장교 배속으로 증가한 장교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평민의 군대 참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평민의 정치 참여가 허락되지 않던 프로이센에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대는 평민에게 매력적인 직업이 되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샤른호르스트는 군사 행정을 조직화하고 간소화하여 효율성을 높였다.
2.5. 개혁의 난관과 일시적 은퇴
샤른호르스트의 이러한 적극적인 개혁은 나폴레옹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불만을 사는 것을 두려워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은 샤른호르스트에게 개혁을 일시 중단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180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은 프로이센 애국자들에게 성급한 희망을 안겨주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1810년 9월 26일, 모든 외국인 병사가 프로이센군에서 즉시 떠나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칙령이 내려졌으나, 샤른호르스트는 직접적인 신청을 통해 이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11년에서 1812년 사이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압박하여 러시아와 동맹을 맺도록 강요하고,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의 명령 아래 보조군을 파견하게 되자, 샤른호르스트는 베를린을 떠나 무기한 휴직에 들어갔다.
1811년,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샤른호르스트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그가 귀국하기 전에 나폴레옹의 협박에 굴복하여 프랑스와의 동맹을 결정했다. 이에 깊이 실망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비롯한 개혁파 장교들은 프로이센군을 떠나 슐레지엔으로 망명하거나, 일부는 러시아군에 투신하기도 했다. 은퇴 기간 동안 그는 화기에 대한 저서인 『화기의 효과에 대하여』(Über die Wirkung des Feuergewehrs위버 디 비어쿵 데스 포이어게베어스독일어)를 1813년에 집필하고 출판했다.
3. 해방 전쟁과 죽음
이 섹션에서는 샤른호르스트가 프로이센 해방 전쟁에 다시 참여하게 된 경위와 그의 최후를 다룬다.
3.1. 복귀와 1813년 전역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프로이센의 새로운 국민군에게는 마침내 무장 봉기의 기회가 찾아왔다. 샤른호르스트는 국왕의 소환을 받아 다시 프로이센군에 복귀했다. 그는 더 높은 직책을 거절하고 블뤼허 원수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블뤼허의 활력, 에너지, 그리고 젊은 병사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전적인 신뢰를 보였다.
러시아의 페테르 비트겐슈타인 공작은 샤른호르스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자신의 참모총장으로 잠시 빌려달라고 요청했고, 블뤼허는 이를 수락했다. 1813년 3월 프로이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같은 해 5월 2일, 첫 전투인 뤼첸 전투(그로스괴르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패배했지만, 이는 이전에 나폴레옹이 안겨주었던 패배와는 매우 달랐다. 프랑스군은 1813년에는 대부분 10대 징집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807년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군사력이 아니었다. 프랑스군은 상당한 사상자를 냈고, 특히 심각한 기병 부족으로 인해 추격에 실패함으로써 불완전한 승리에 그쳤다.
3.2. 죽음
뤼첸 전투에서 샤른호르스트는 정강이에 총상을 입었다. 이 부상은 그 자체로는 심각하지 않았으나, 드레스덴으로의 후퇴 과정에서의 피로로 인해 빠르게 악화되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샤른호르스트는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위해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 및 요제프 라데츠키 폰 라데츠와의 협상을 위해 프라하로 이동했다. 그러나 1813년 6월 28일, 상처가 악화되어 패혈증에 감염된 그는 프라하에서 끝내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에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나이제나우와 클라우제비츠는 공동으로 샤른호르스트의 추모사를 작성했지만, 정부는 그의 업적이 아직 완전히 평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공표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이제나우는 맹렬히 항의하여 결국 추모사가 공개될 수 있도록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은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에게 명하여 베를린에 샤른호르스트의 동상을 건립하게 했다. 샤른호르스트는 베를린의 인발리덴프리트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4. 유산과 평가
샤른호르스트가 남긴 업적과 후대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다룬다.
4.1. 군사 이론 및 실천에 대한 기여
근대 참모본부 제도의 아버지로서 샤른호르스트의 업적은 매우 높이 평가된다. 그는 후임 그나이제나우와 더불어 참모본부 제도를 창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경력을 종합적으로 볼 때, 그는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군인이라는 평가가 흔들림이 없다.
하노버군 시절에는 야전 지휘관으로서 유능함을 입증했으며, 군사 이론 잡지와 서적 출판을 통해 군사 이론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 프로이센에 이적한 후에는 활동 영역을 넓혀 교육자로서 클라우제비츠, 그롤만 등 수많은 뛰어난 제자들을 양성했다. 또한, 조직 개혁자로서 프로이센군의 근본적인 개혁에 성공하며 프로이센 군사력 재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참모총장으로서 전쟁을 직접 지휘한 기간은 짧았지만, 해방 전쟁에서는 대담한 작전을 입안했으며, 후임 참모총장 그나이제나우는 그의 기본 구상을 계승하여 완성시켰다.
4.2. 역사적 평가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샤른호르스트의 풍모는 얼핏 보기에 군인답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단정한 몸가짐을 중시하던 프로이센군 장교들 사이에서 다소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음에도 태연했다. 무례하고 오만한 귀족 장교들이 많던 시기에 그는 지적이고 조용했으며, 항상 우수에 잠긴 듯한 분위기를 풍겼고, 하노버 사투리로 나지막이 말하는 모습은 마치 철학자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관 시절에는 젊은 장교들을 친절하게 지도했고, 참모총장 시절에는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여 모두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를 제2의 아버지로 여기며 경애했고, 샤른호르스트의 업적을 계승하고 완성시킨 그나이제나우는 자신을 그의 베드로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4.3. 기리는 이름과 영향
샤른호르스트의 이름은 후세의 여러 대상에 기려졌다.
분류 | 명칭 | 설명 |
---|---|---|
함선 | SMS 샤른호르스트 | 1906년 건조된 독일의 장갑순양함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했다. |
샤른호르스트 (전함) | 1936년 건조된 독일의 전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했으며 동급함인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선도함이었다. | |
German frigate Scharnhorst (F 213)독일 프리깃함 샤른호르스트 (F 213)영어 | 1943년 건조된 영국 해군 슬루프 HMS 머메이드가 1959년 서독으로 이관되어 사용되었다. | |
육군 사단 | Infantry Division Scharnhorst (Wehrmacht)샤른호르스트 보병 사단영어 | 1945년 창설된 독일 국방군의 보병 사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신설된 부대 중 하나이다. |
훈장 | 샤른호르스트 훈장 | 구 동독의 국민인민군 최고 군사 훈장이었다. |
장소 | 거리 및 지역 |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 등 여러 독일 도시에 샤른호르스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 |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은 샤른호르스트와 비견되곤 한다. 이는 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베르사유 조약으로 심하게 제한받던 독일군의 재무장을 준비하고, 비밀리에 참모본부를 재건하며 새로운 군사 교리를 개발하는 데 그가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제크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독일의 압도적인 전역 성공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치 독일 집권 후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야전원수는 제크트를 샤른호르스트에 비유하며 "옛 불꽃은 여전히 타올랐고, 연합국의 통제는 독일 군사력의 지속적인 요소들을 파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윈스턴 처칠 또한 이러한 이론에 동의하며, 제크트가 독일이 군사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빠르게 되찾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5. 개인 생활
샤른호르스트의 사적인 측면과 대인 관계에 대한 알려진 정보를 다룬다.
5.1. 가족 및 사생활
샤른호르스트는 베를린 대학교 초대 총장인 테오도어 슈말츠의 누이인 클라라 슈말츠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풍모는 전형적인 군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단정치 못한 차림새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거칠고 오만한 귀족 장교들과는 달리 지적이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늘 우수에 잠긴 듯한 분위기를 풍겼고, 하노버 사투리로 조용히 말하는 모습은 그를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철학자와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하지 않아, 젊은 장교들을 친절하게 지도하고 출신과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여 깊은 존경을 받았다.